개요

이 문서는 제1차 대전쟁의 원인을 다루는 문서이다.

오스트마르크 제국의 외교정책 변화

파일:폰 클로드비히.png
레오폴트 폰 클로드비히
당시 오스트마르크 제국 수상

1845년 오스트마르크-벨포르 전쟁 때까지만 해도 통일된 게르만 민족은 관념상의 허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오스트마르크 제국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통일을 달성하면서 기존 국제사회 역학 관계에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기존의 열강들은 새로운 도전자인 오스트마르크 제국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는 당시 오스트마르크 제국의 수상인 레오폴트 폰 클로드비히(Leopold von Chlodwig) 역시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그의 외교 정책은 정치적인 목적을 모두 달성한 오스트마르크로서는 더 이상의 모험을 감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천명하고, 보복을 다짐하던 벨포르 공화국을 다른 열강과 동맹을 맻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고립시켜 전 유로파 대륙의 평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폰 클로드비히 공은 오스트마르크를 중심으로 하는 복잡한 외교동맹 관계를 구축하는 데 진력을 다하였다. 에쉬르와 오스트마르크 간의 상호방위조약이 그 기본 축이었다.

하지만 폰 클로드비히 공의 이런 노력은 곧 현실적 어려움에 부딫히게 되는데, 에쉬르-셀주크 전쟁의 뒷처리를 위해 열린 빈 회의에서 에쉬르 공화국과 오스트마르크 제국 사이의 상반된 이해관계 때문에 이익 실현이 좌절된 에쉬르 공화국이 오스트마르크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폰 클로드비히 공은 황제의 반대를 무릅쓰고 에쉬르의 이권을 보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황제와 폰 클로드비히 공 사이의 관계에 균열이 생기고 말았지만, 일단 오스트마르크 제국은 에쉬르 공화국과의 상호방위조약을 갱신할 수 있었고, 벨포르 공화국과 에쉬르 간의 동맹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연합왕국과 벨포르 공화국 사이의 식민지 분쟁은 오스트마르크의 외교 위험을 낮추는 데 도움을 주었다.

헌데 클로드비히 체제는 오스트마르크 뿐만이 아닌, 연합왕국의 고립주의 외교 정책과 상호 보완되고, 또 그로 인한 암묵적 지원을 통해 유로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바로 그 평화가 폰 클로드비히 공의 권위를 약화시켰고 결국 정치적 도전을 받게 된다. 폰 클로드비히 공은 갖은 노력을 다해 구축한 체제의 붕괴를 막기 위해 국내의 해외 진출을 억제하고 있었는데, 지속적인 경제 성장으로 빚어진 국내 기업들의 해외진출 욕구는 폰 클로드비히 공이 아무리 애를 써도 막을 수 없는 요소의 것이었고, 해외로 팽창해나가는 오스트마르크의 경제는 활발한 수출입으로 유지될 수가 있었다. 그 안정적인 수출입의 보장은 군사력, 즉 해군력을 필요로 하는데, 이는 베른하르트 폰 린징겐(Bernhard von Linsingen) 대제독을 필두로 하는 군부와 구스타브 폰 뤼트비츠(Gustav von Lüttwitz)를 필두로 하는 융커 계급의 정치적 도전으로 이어졌다.

특히 폰 린징겐 대제독은 강력한 오스트마르크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연합왕국과 자웅을 겨루는 대함대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고, 이를 기반으로 연합왕국과 대등한 지위에 오를 수 있을 거라 믿은 징고이스트(Jingoist)였다.

그리고 폰 클로드비히 공이 당시 제국 전체에 걸쳐 나타난 생산의 과잉, 실업, 저소비 등의 사회적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하자, 폰 뤼트비츠 교수를 비롯한 자본가들이 해외시장 확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중앙당이라는 정당을 통해 세력을 결집하자, 결국 폰 클로드비히 공은 식민지 정책을 실시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폰 클로드비히 공은 식민지 정책에 전반적으로 미온적이었고, 이는 정적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정치적 후원자였던 황제마저 등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결국 모든 정파의 지지를 잃은 폰 클로드비히 공은 실각했고, 그의 정치적 지위를 채우려는 사회세력은 경합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1862년에 열린 총선에서 폰 뤼트비츠의 자유당은 53%의 제국의회 의석을 차지했고, 이는 곧 기존 열강들과의 도박을 통한 팽창정책의 시행을 의미했다.

이러한 기류를 타고 황제의 직접 통치 이후 새로 탄생한 이 정책은 세계정책(Weltpolitik)이라는 미명 하에 선전되었으며, 이에 고무된 폰 뤼트비츠와 황제는 해군법을 제정, 건함 계획을 통해 해군력을 급속도로 증강하기 시작했고, 각종 외교 안건에서 오스트마르크의 이익을 보다 강력히 주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아프리카의 움베네네 지역의 소유권을 두고 자국의 힘을 과시하는 오스트마르크 제국의 태도는, 이미 자국이 쥐고있던 해상 주도권에 도전을 받은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연합왕국으로 하여금 오스트마르크를 가상적국으로 분류하게 했으며, 연합왕국의 아서 린리스고(Arthur Linrisgo) 총리는 기존의 오스트마르크 제국에 묵시적 지원과 고립주의 외교 정책을 철회하기로 방침을 정하기에 이른다.

움베네네 위기, 그리고 연합왕국과 벨포르 공화국 간의 방호조약 체결

그러던 와중, 식민지 문제를 둘러싸고 벨포르 공화국과 오스트마르크 제국 간의 충돌이 빚어졌는데 이것이 바로 움베네네 위기(Crise de Umbénéné)이다.

서아프리카 지역의 움베네네 지역은 예로부터 유명했던 금 산지이자 석유 산지로, 그 특성상 많은 유로파 국가들의 이목을 끌게 된다. 1880년에 체결한 세르당 조약에 의거하여 움베네네의 독립은 유럽 열강들에게 인정받았으나, 조약에는 다만 특정 국가의 국적을 지닌 거류민이 위협을 받으면 그 국가가 움베네네에 개입할 수 있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고, 그 단서를 근거로 벨포르 공화국이 적극적으로 움베네네 내정에 개입한다. 이러한 벨포르 공화국의 세력 확장에 오스트마르크 제국의 황제는 1905년 3월 31일 전격적으로 움베네네를 방문하여 움베네네의 왕과 회담을 갖고 움베네네의 자주와 문호개방을 요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한다.

황제의 지원에 고무된 움베네네의 왕은 벨포르가 요구한 내정간섭을 거부했고, 이에 따라 벨포르와 오스트마르크 사이에는 극도의 긴장감이 흐르게 된다. 황제와 당시 제국 수상인 폰 뤼트비츠는 빈 회의 때와 마찬가지로 유로파 열강들 사이의 회담을 조성하여 최대한 오스트마르크의 이권을 챙겨보려는 심산이었지만 벨포르는 세르당 조약의 단서를 근거로 들어 완강히 거부했고, 오스트마르크도 선언문을 내세워 물러서지 않았던 데다가 움베네네에 자국의 순양함인 베르트하임을 파견함에 따라 양국 사이에는 전쟁의 가능성까지 감지되게 된다.

결국 로마냐 왕국의 중재로 로마냐의 마르타에서 유로파 열강들 사이에 회담이 성사된다. 하지만 이미 오스트마르크의 도전으로 인해 위기감을 느끼던 연합왕국은 세르당 조약을 근거로 벨포르의 편을 들어주었고, 에쉬르 공화국 역시 상호방위조약을 연장하길 거부한 오스트마르크의 편을 들어주질 않았다. 이는 벨포르의 외무장관이었던 제라르 드 브리앙(Gérard de Briand)의 의도이기도 했다. 이미 에쉬르 공화국과의 물밑 협상으로 저금리 차관의 제공을 댓가로 어느 정도의 군사동맹 합의를 이끌어낸 브리앙으로서는 연합왕국과의 기나긴 적대 관계를 종식시키는 것을 소망했다. 물론 이는 위대한 국가(La Grande Nation)의 재건을 위해서였다.

여기에 연합왕국과도 우호관계였던 미합중국과 에스페란토 왕국까지 개입하자, 구스타브 폰 뤼트비츠 수상은 자국이 외교적 고립 상태에 빠져들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벨포르의 움베네네 지배권을 수용했다. 그리고 황제에게 팽창 정책의 중단을 건의하자 분노한 황제는 폰 뤼트비츠 수상을 황제의 직권으로 해임했고 더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시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