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리베란시아 내전

제1차 리베란시아 내전
La Primera Guerra Civil de Liberancia
First Liberancia Civil War
기간
1918년 5월 7일 ~ 1921년 12월 7일
장소
리베란시아 전역
원인
왕권 부패 및 혁명군의 정권 찬탈 기도
교전 국가 및 세력
리베란시아 정부
루미에르(1920.01.~1920.10.)
스페란차(1920.03.~1921.01.)
리베란시아 혁명군
지원 국가 및 세력
양국
모명 제국
벨레시아
로련
지휘관
병력
피해 규모
결과
리베란시아 혁명군의 승리
리베란시아 공산화
영향
제2차 리베란시아 내전의 원인

개요

1918년부터 1921년까지 리베란시아 제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내전.

전쟁 이전

1916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종전된 직후 리베란시아 내부는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다.

식민지 확장이라는 국가적 야망은 좌절되었고, 패전의 대가로 리베란시아는 승전국들에게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이러한 정치·경제적 위기는 민심의 이반을 초래했으며, 국민들은 전쟁 책임을 국왕인 페르난도 데 알마라스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이에 알마라스 국왕은 자신을 비난하는 시민들을 강경 진압하며 권위 회복을 꾀했으나, 오히려 왕권에 대한 반감은 더욱 고조되었다. 결국 왕립군 내 일부 장교단이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었고,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한 시민 계층에서는 알마라스 국왕의 퇴위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내전 발발

결국 알마라스 국왕은 자신의 근위대까지 동원하여 유혈사태를 일으켰고, 이는 왕립군 내부의 반정부 파벌과 시민 계층의 분노를 더욱 자극했다. 이들은 곧 연합하여 혁명군을 조직하게 되었으며, 이는 리베란시아 전역에 혁명의 불씨를 점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918년 5월, 제2의 도시 몬테시에라에서 혁명군에 대한 정부군의 대규모 토벌 작전이 개시되었고, 이를 기점으로 제1차 리베란시아 내전이 본격적으로 막을 올렸다.

그러나 몬테시에라 전투에서 정부군은 혁명군뿐 아니라 민간인들까지 반란세력으로 간주하며 무차별적인 학살을 자행했고, 이는 오히려 인접 도시들에서의 반정부 운동을 급속도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정부가 계획한 ‘단기간 내 진압’은 민심의 역풍과 반발에 의해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했고, 내전은 걷잡을 수 없는 전면전으로 번져갔다.

몬테시에라 전투 이후 반란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혁명군 역시 점차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전국 각지에서는 자발적으로 지역 방위군과 노동자 민병대가 결성되어 혁명군의 전열에 가담했고, 정부군이 방어에 실패한 일부 도시에서는 혁명군 세력이 주도하는 혁명위원회가 수립되었다. 이들 도시는 곧 ‘해방구’로 선언되었으며, 이는 리베란시아 전역에서 본격적인 혁명 체제의 태동을 의미하는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외세의 개입

혁명군의 세력이 빠르게 확대되며 점령 구역이 정부군 통제 지역과 대등한 수준에 이르렀을 무렵인 1919년 8월, 로련은 이들의 혁명 가능성을 주목하고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접촉을 시작했다. 이어 로련은 혁명군 측에 군수물자와 군사 고문단을 은밀히 파견하여 지원에 나섰고, 이는 내전의 양상을 단순한 국내 분쟁에서 이념적 대리전으로 바꾸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로련의 고문단 주도 아래 게릴라 전술에서 정규전 양상으로 전환한 혁명군은 북부와 동부 전선에서 정부군의 수비선을 돌파했고, 벨모라와 코르비에나를 차례대로 무너뜨리며 해방구를 확장했다.

해상 교역 주축의 벨모라와 석유 생산 지대였던 코르비에나를 상실하고 패퇴한 정부는 1919년 11월에 이르러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며 국외 지원을 호소했고, 그에 응한 루미에르의 1만 명의 지상 병력을 시작으로 스페란차가 5천 명의 병력을 파견 함과 동시에 양국과 연합하여 혁명군을 지원하는 로련의 군수물자와 군사 고문단 파견을 저지하기 위한 해상전력을 파견해 견제에 들어갔고, 1차 대전 전후 혼란과 대전 당시 적국이었던 리베란시아에 대한 전국민적 반감에도 불구하고 모명 제국이 나서서 제한적인 군수물자 및 구호물자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루미에르스페란차의 병력 증강을 통해 이전 정부군이 상실한 북부 전선과 동부 전선의 일부 도시를 빠르게 탈환하였으며, 특히 루미에르군의 기계화 부대와 항공 전력이 혁명군의 급조 병력에 비해 압도적인 성능을 발휘하면서 잠시나마 혁명군의 진격이 일시적으로 저지되었다. 이 시기 정부는 "왕정의 재건"을 선포하며 재정비된 국민 동원령과 선전 선동을 통해 일시적으로 지지세를 회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루미에르 국내에서는 전쟁의 장기화와 전사자 수 증가, 그리고 대륙 내 외교적 입지 악화에 따른 국민 여론이 급속히 악화되었다. 결국 루미에르 정부는 내부 반발을 수습하고자 1920년 10월 철군을 결정하고, 혁명군의 주력 공세가 재개되기 직전인 1921년 1월, 완전 철수를 단행하였다. 루미에르의 철군은 정부군 사기에 큰 타격을 주었고, 혁명군은 이를 계기로 다시금 공세의 고삐를 당기게 된다.

내전의 종결

루미에르의 철군 결정은 전쟁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대한 분기점이 되었다. 정부군은 치명적인 전력 손실과 사기 저하로 인해 결정적인 반격 기회를 놓쳤고, 혁명군은 전열을 정비한 뒤 재빠르게 공격을 강화했다. 1921년 2월, 혁명군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들을 잇따라 탈환하며 정부군을 몰아붙였다.

이에 맞서 루미에르스페란차을 비롯한 정부군 지원 국가들은 전쟁의 장기화와 국제적 비난 여론, 내부 불안정으로 인해 직접적인 군사 개입을 점차 축소하는 한편, 외교적 중재와 협상 시도를 병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혁명군은 종전이나 타협이 아닌 정권 붕괴와 체제 전환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에 협상안을 전면 거부하고 군사 작전에 집중하였다. 그 결과, 1921년 7월, 혁명군은 수도 알마리온 외곽에 도달하며 본격적인 시가전에 돌입하였다.

수도 방어를 최우선 과제로 삼은 정부군은 잔존 병력을 총동원하여 결사 항전을 벌였고, 전투는 장기전 양상으로 흐르게 되었다. 약 4개월에 걸친 치열한 시가전 끝에 혁명군은 도시 중심부를 점령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알마라스 정권은 공식 항복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왕정은 붕괴하였고, 제1차 내전은 혁명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결과

내전 이후, 혁명군의 주도로 리베란시아 제1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왕정의 붕괴에 환호하던 민중은 자유와 해방의 시대를 기대했으나, 새롭게 등장한 체제는 그러한 이상과는 점차 멀어져 갔다.

본래 혁명군은 왕정의 폭정에 저항한 다양한 계층의 연합체로, 정치적 성향이 뚜렷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내전 기간 중 로련의 지원을 받으면서 사회주의 사상이 조직 전반에 스며들었고, 이는 종국적으로 왕정과 다를 바 없는 일당 독재 체제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제1공화국의 집권 초기, 혁명군 내부의 사회주의 성향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며 리베란시아 노동당이 유일 합법 정당으로 자리 잡았다. 왕정의 잔존 세력뿐 아니라, 같은 혁명군 내부의 온건 공화파와 자유주의 세력도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혀 숙청당하거나 망명길에 올랐다.

혁명 정부는 각지에 인민위원회를 설치하고 토지 개혁, 국유화 정책을 추진했으나, 빠르게 진행된 체제 개편은 행정 혼란과 식량 배급 실패, 산업 마비 등으로 이어졌다. 민중의 삶은 왕정 시기와 다를 바 없이 피폐해졌고, 일부 지역에서는 무장한 자치 조직이 중앙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며 반란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1933년, 북서부 산악지대의 자치 세력이 중앙 정부군과 충돌하면서 전국 각지로 반정부 투쟁이 확산되었고, 이는 곧 제2차 리베란시아 내전을 촉발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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