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대 대통령 선거 (단일화)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
1981년 2월 25일
12대 대선
1987년 12월 16일
13대 대선
1992년 12월 18일
14대 대선
투표율 89.15%감소10.74%p
선거 결과
후보
통일민주당
김영삼

민주정의당
노태우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득표율
50.99% 39.87% 8.94%
득표수 11,760,644 9,196,058 2,063,067
대통령 당선인
통일민주당
김영삼

개요

환호하는 김영삼 대통령 당선인
대통령 당선 확정을 알리는 조선일보 기사
친근한 대통령 정직한 정부 군정종식
김영삼 대통령 당선인의 대선 슬로건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1987년 12월 16일에 실시된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이다. 6월 항쟁으로 전두환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가 이뤄진 뒤 처음으로 치르는 대선이자, 군부독재 25년 만에 첫 평화적·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뤄낸 대선이기도 하다.

당시 신문사들은 이 선거를 '1노 2김의 대결'로 칭했다. 여당 민주정의당에서는 당내 이인자자 12.12사태의 주범 중 하나인 '1노' 노태우 총재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야권에서는 각각 '2김'인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총재, 신민주공화당김종필 총재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하지만 1노 2김이라는 말에 맞지 않게 선거는 사실상 김영삼과 노태우 양자 간 대결로 비추어졌으며, 김영삼 후보가 약 50%의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성공했다.

야권 후보인 김영삼이 압도적 득표율을 얻은 데에는 같은 당 유력 후보였던 김대중과의 단일화, 군부독재 정권에 대한 환멸이 작용했다고 평가된다. 한편, 노태우 후보는 KAL기 폭파사건을 통한 반공 몰이와 '보통 사람의 위대한 시대'라는 참신한 캐치프레이즈로 선전했음에도 30%대의 저조한 득표율을 얻었다.

배경

개헌

당초 간선제 혹은 내각제 개헌 등을 통해 영구히 군부정권을 집권시키려는 전두환의 계획은 6월 항쟁을 비롯한 국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다. 전두환은 미국과 측근들의 압력에 굴복했고,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총재는 6.29 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시행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약 93.1%의 국민이 개헌안에 찬성하며 제6공화국이 선포되었고,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에 의하여 선출한다'는 대통령 직접선출의 조항이 헌법에 추가되었다. 이리하여,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질 발판이 마련되었다.

여권의 상황

6.29 선언이 이뤄지기 이전, 여당 민주정의당은 이미 당내 이인자자 전두환이 내정한 후계자 노태우 총재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한 바가 있었다. 노태우는 12.12사태의 주범이자 신군부, 하나회의 중책이었고 또 전두환 대통령과는 절친한 동지 사이였다. 이 때문에 그의 인기는 일반 대중 사이에서 그리 좋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태우는 6.29 선언으로 대중들에게 이미지를 각인시키고 당내에서 나름대로 개혁의 목소리를 내면서 독재자로서의 인식을 씻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야권의 상황

당초 제1야당이었던 신한민주당은 총재 이민우의 내각제 지지 선언(이민우 구상)과 야권 원로 이철승과 김영삼, 김대중 간의 분쟁으로 인해 분리되었다. 새로이 설립된 통일민주당은 김영삼의 상도동계와 김대중의 동교동계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양김으로 통칭하였고, 모두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선이 치러지기 전부터 단결을 촉구받고 있었다. 이 기대에 부응해 당내 좌파 세력을 이끄는 김대중은 불출마를 선언하였고, 김영삼 총재 역시 김대중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서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하지만 6월 항쟁이 벌어지고 직선제 개헌이 이뤄지자, 당내에서는 점차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동교동계 당원들은 김대중에게 대선에 출마해야 한다고 조언하였고, 본인 역시 대권에 대한 야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추대 움직임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결국 7월 11일, 전날의 불출마 약속을 깨고 경선에 출마할 거라는 기자회견을 발표하게 된다.

작년의 불출마 선언은 전두환 대통령이 자발적으로 대통령직선제를 하면 불출마한다고 한 것이지, 이번처럼 국민의 압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김대중, 7월 11일 기자회견에서

또 다른 야권이자 옛 박정희계의 기치를 잇는 신민주공화당은 주로 여권 성향의 강성 보수 지지층을 분열시키며 성장해나가고 있었다.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소위 삼김으로 불리는 박정희 정권의 이인자 김종필 총재는 이 신민주공화당의 유력 후보로 꼽혔다. 이후 10월 30일에 치러진 당대회에서 만장일치로 대통령 후보에 추대되며 대선에 뛰어들게 된다.

전개

양김 단일화

선거 초기 대두된 문제는 바로 김영삼과 김대중, 두 거두의 단일화 논의였다. 두 후보는 지난 제7대 대선에서도 김대중 측으로 단일화한 바가 있었다. 또한 군부독재를 몰아내자는 의견에서 양측 모두 동의한 부분이었고, 야권 지지층 역시 양김의 단일화를 촉구하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당권 문제는 양김이 분열 되도록 만들었다. 지난 군부독재 치하에서 김대중의 동교동계는 수많은 탄압을 받았고, 이 때문에 김영삼의 상도동계가 지도부와 지구당 등 당의 주요 요직을 모두 장악한 상태였다. 김대중은 선거에 대비해 지구당을 정비하고 자신의 지분 역시 인정해달라 제안했지만, 김영삼은 핑계를 대며 이 제안을 모두 무시하였다. 그렇게 양김간 분위기는 냉랭하게 흘러갔다.

단일화를 어떻게 행할 것인지도 논쟁거리가 되었다. 당내 단일화 지지 세력의 주요 거두 홍사덕은 국민경선을 제안했지만, 상도동계가 요직을 점하고 있어 김영삼에게 유리하단 이유로 폐기되었다. 당사자들인 김영삼과 김대중 역시 나름대로 단일화 논의를 진행하였지만, 단일화 시기를 언제로 하느냐 문제로 결렬되었다. 결국 남은 건 어느 한쪽이 양보하는 수뿐이었다.

한편, 단일화 논의가 질질 끌리자 재야운동권의 단일화 지지 세력은 통일민주당 내 중립 인사들과 손을 잡아 '후보단일화추진위원회'를 수립한다. 위원회는 마지막으로 양측간의 단일화 협의를 끌어내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한다. 김대중은 이러한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응했지만, 김영삼은 그 어느 양보도 없이 모든 권력을 혼자 쥐려 했다. 그렇게 단일화 논의는 평행선을 달리며 다시 고착상태에 빠졌다.

이 고착상태를 깬 건 한국갤럽의 대선 예측결과였다. 이 결과에 따르면, 양김이 분열할 시 보수의 표심이 노태우 측으로 향해 민주정의당이 정권을 연장하게 될 것이었다. 여러 사건으로 선거 예측결과의 신뢰성은 줄어든 상황이었지만, 이는 야당 측에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단일화의 필요성을 인식한 상도동계와 동교동계 중진들은 적극적으로 논의에 임했고 김영삼 역시 김대중과 타협해 표를 확보할 필요를 느꼈다.

그리하여 이뤄진 물밑협상 끝에 김영삼이 대권을, 김대중이 당권 중 7할을 차지하는 조건으로 단일화를 협의하였다. 김대중은 10월 25일 열린 고려대학교 시국토론회에서 김영삼과 오랜만에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등장하며 공식적으로 대선에 불출마하고 김영삼을 적극적으로 대통령 후보로 지지할 것을 선언하였다.

재야도 두 사람을 놓고 선호가 갈렸고, 김대중 씨 쪽이 더 목숨 걸고 민주화 투쟁을 했다는 평가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문제는 당선가능성이었으며, 그런 점에서 김대중 씨는 사상적으로 의심스럽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일반 국민 중에도 상당히 많다는 점이 지적됐다. 그래서 이번만은 김대중 씨가 양보를 하라는 쪽으로 계속 설득했고, 마침내 김대중 씨도 받아들였다. 그래서 김영삼 씨가 대선 후보를, 김대중 씨가 당권을 맡는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시국토론회때 두 사람이 손을 맞잡은채 입성하는데 그 광경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렇게 이뤄지지않을줄 알았던 단일화는 기적적으로 성사되었다.
장을병 후보단일화추진위원회 대표의 회고 中

운동권의 상황

양김 단일화가 이루어지기 이전, 재야운동권은 세 가지 계파로 나뉘어 있었다. 국민들에게 거부감이 적은 김영삼을 지지하는 후보단일화, 더욱 좌파적인 성향을 지닌 김대중을 지지하는 비판적지지, 마지막으로 진보적인 독자 후보를 차출하자는 독자후보추대까지, 이 세 세력은 통일민주당 후보 선출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김영삼과 김대중 간 단일화가 성사되자, 운동권은 다시금 김영삼을 지지하는 측과 독자 후보 차출을 지지하는 양 갈래 파벌로 분열되었다.

노회찬, 주대환 등이 이끄는 인천지역 민주노동자연맹과 학생운동내 좌파 계열인 제헌의회 그룹은 독자후보추대론에 추를 기울이며 백기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부의장을 '민중후보'로 선출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김영삼을 지지하던 기존의 온건 측과 김대중 지지파들에게 부정적으로 비쳤다. 이들은 분열이 필패이며, 야권 단일화를 위해 백기완의 사퇴를 종용하였다. 물밑에서의 알력다툼 끝에, 백기완 측 역시 야권 통합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대통령 후보직에서 중도 사퇴하게 된다.

야권의 정립과 본선

이리하여 야권은 재야운동권과 호남, 부울경의 지지를 받는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그리고 충청권의 지지를 받는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로 정립되었다. 인기가 떨어져 가던 여당은 당초에 기대하던 야권 분열의 가능성마저 사라지자 김종필에 단일화의 손길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 시도는 처참히 무산되었다. 11월 9일, 통일민주당이 최종적으로 김영삼 총재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면서 '1노 2김의 대결'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초반의 선거는 많은 사람의 예측대로 야당의 우세로 진행되었다. 김영삼은 '군정종식'이라는 슬로건 아래 노태우를 군부 정권의 꼭두각시라고 강력하게 비판했으며 '국민이 이뤄낸' 3저 호황을 5년 더 이어나가겠다고 자신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한편, 김대중은 총선에 대비해 지구당을 정비하는 한편 호남 전국을 돌며 김영삼 지지 유세를 행한다. 여기에 김종필이 충청도의 여당 지지를 갉아먹자, 노태우는 별 비전도 보여주지 못한 채 고전을 면치 못한다.

이제는 안정입니다 보통 사람의 위대한 시대
노태우 민주정의당 후보의 대선 슬로건

이런 때에, KAL기 폭파 사건이 발생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노태우는 김영삼을 직접 공격하지는 못하면서도 통일민주당 내 김대중 계파를 '극좌·종북 간첩'이라고 주장하며 이들이 이끄는 통일민주당이 집권하면 대한민국은 적화통일이 될 것이라 주장한다. 또한 박태준 등 당내의 유능한 선거 전문가들의 조언에 따라 경제와 안보관에 치중된 선거운동을 펼치며 민심을 휩쓸기 시작한다. 특히나 김영삼의 군정종식 슬로건이 진부해진 데 반해 노태우의 '보통 사람의 위대한 시대'는 많은 사람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심지어 몇몇 예측결과에서는 김종필이 10%를 차지하고 노태우가 약 45%로 김영삼으로부터 승리를 거둔다는 결과도 나왔다.

이에 김영삼은 자신의 모친이 간첩에 살해되었음을 강조하며 지난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라는 도발을 받아놓고도 북진하지 않은 전두환·노태우야말로 진정한 용공 종북이라는 역공을 퍼붓는다. 한편, 신군부 쿠데타로 쫓겨났던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을 영입하고 김종필, 신한민주당 등과의 연대 논의를 전개하는 등 물밑에서 노태우를 견제하기 위한 모든 수를 사용한다. 이러한 노력으로 김영삼은 다시금 우세를 점하는 데 성공한다.

결과

제13대 대통령 선거
기호 후보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노태우(盧泰愚) 9,196,058 2위
39.87% 낙선
2 김영삼(金泳三) 11,760,644 1위
50.99 당선
3 김종필(金鍾泌) 2,063,067 3위
8.94% 낙선
4 홍숙자(洪淑子) 등록 무효
사회민주당
5 김선적(金善積) 사퇴
일체민주당
6 신정일(申正一) 46,650 4위
한주의통일한국당 0.20% 낙선
7 백기완(白基琓) 사퇴
무소속
선거인 수 25,873,624 투표율

89.15%

투표 수 23,066,419
무효표 수 463,008

결국 김영삼 후보가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KAL기 폭파 사건을 통한 종북몰이와 경제성장 강조에도 불구하고, 민주정의당 측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호남과 부울경이라는 고정 지지층을 획득한 김영삼을 꺾기에 노태우의 능력은 너무 부족했다. 이러한 민주정의당의 부진한 성적은 후일 당내 소장파와 노태우계간의 갈등을 불러오게 된다. 한편, 신민주공화당은 원래 계획대로 충남과 충북 양쪽에서 모두 우세를 점하며 제2야당치고 괜찮은 성적을 내는 데 성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