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당 인민의 사회민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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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당 제2공화국/조르당 제2제국
Sisar Patrian Ropond se Zordan Edar
파일:조르당 제2공화국.png 파일:조르당 제2공화국 국장.png
국기 국장
표어 "Milene Edar'qa gesiosso!"
"위대한 인민에게 축복을!"
국가 Sivero se Zordan edar
조르당 인민의 노래
파일:조르당 지도.png
6시대 346년 시절 영토.
수도 베른(Bern)
베로네(Berione) 북위 51° 42' 동경 13° 24'
→북위 50° 39' 동경 12° 21'
정치
공용어 밀리어쉬, 조르당어
국민어 조르당어
지역어 페른식 밀리어쉬
총통 1대 알 베른 (6시대 334년 3월 ~ 348년 11월)
내각총리 1대 아드리아노 벨 (6시대 348년 11월 ~ 349년 1월)
역사
제2공화국 건국 6시대 334년 5월 4일
 • 제2공화국 인민안보평의회 수립 6시대 334년 5월 11일
인구
6시대 341년 어림 70,246,240명
인구 밀도 127.14명/km²
경제
통화 로폰드베로드 (RB)


조르당 제2공화국은 인민안보평의회와 알 베른, 아드리아노 벨 치하의 6시대 334년 3월 부터 349년 1월 까지의 조르당을 가리킨다. 오세르트, 쥬야, 대운과 함꼐 파시스트 연합을 맺고 제3차 대전쟁을 일으킨다. 조르당 제2공화국은 베른 함락과 알 베른의 자살을 동시에 겪고 항복하면서 멸망하게 된다.

국명

조르당 제2공화국의 공식 국명은 조르당 인민의 사회민주공화국 (조르당 사회공화국, Sisar Patrian Ropond se Zordan Edar) 또는 대조르당 공화국이다. 하지만, 국외에선 조르당 제2제국 (Dinem Hallaca ju Zordan)으로 유명하다. 조르당 제2공화국은 단순히 헌법 개정을 통해 붙어진 이름으로 논문 등 공식 석상 에서만 거론 된다.

전쟁 전 까지

리만발 경제 대공황 발생

파일:직장 잃은 흑인남성.jpg
직장을 잃은 리만 흑인남성

6시대 327년. 리만에서 불어온 경제 대공황은 전 세계로 퍼졌다. 본국 리만은 3천만 인구 중 10%가 실업자가 되면서 블록 경제로도 커버가 안돼어 채무국으로 격하되었다. 밀리엄과 오세르트는 역대 최고 실업률 (각각 8.5%, 9.6%)을 기록하면서 경제 침체를 겪었다. 오로지 공산주의 국가인 르판만이 비약적인 성장률을 보였다.

조르당 제1공화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공황 이후, 식민지도 없어 블록 경제를 운영할 수 없었던 조르당은 콘스티탄노플 강화조약에 발목 잡혔다. 조약 내용에 기록된 전쟁 빚 5백억 베로드[1]를 갚아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그만큼 세금을 많이 거두어 가야 했다. 하지만, 높은 실업률 때문에 적정 수준 만큼의 세금을 못 끌어들었으며 그만큼 소비률도 하락했다. 그 결과로 국내기업들이 대거 몰락했고 경제 기반이 무너지면서 조르당은 디폴트 선언을 했다. 세계 최대 공업국이었던 조르당은 메르덴 최빈국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때, 정부는 화폐 대거 유통을 통해 경제 분위기 전환을 시도했지만 실패. 도리어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불러 일으켰고 화폐는 무용지물이 되버렸다. 이 때문에 물가가 하루에 55%씩 상승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국민들의 삶은 더욱 궁핍해졌다.

파일:파르테 폭동 1.png
조르당의 제1무역 도시였던 파르테에서 상인 폭동이 벌어졌다.

급기야 무역 제재도 당하면서 상인들은 대거 몰락해 국가 재정이 매우 궁핍해졌다. 결국 분노한 상인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나라는 극도로 혼란에 빠졌다. 결국 국민의 신임을 잃어버린 제1공화국 정부는 엄청난 속도로 부패했으며 자신과 뜻을 따르지 않는 국민들과 군인들을 잡아들어 고문 하는 등 국가를 파탄나게하고 말았다. 국민들은 제1공화국 정부가 사라지길 간절히 바랬다.

334년 2월 쿠데타

파일:진짜 알 베른.jpg
알 베른 (6시대 285년 ~ 348년)

6시대 334년 2월 1일 오전 3시 경. 당시 제4군단장 알 베른의 쿠데타로 조르당은 역변하게 되었다. 언론과 정부, 의회를 장악한 알 베른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했고 의회를 강제 해산 시켰다. 군평화민주 임시의회를 설치 한 후 2월 24일, 대통령 게하르트 작센[2]을 축출하고 정치군인인 메수트 리게[3]를 불법선거를 통하여 대통령으로 취임시켰다. 4월 29일에 메수트 마저 축출한 알 베른은 5월 4일, 군평화민주 임시의회에서 5월 개헌을 반포. 조르당 제2공화국의 시작을 알렸다. 기존 조르당 헌법 내용을 개정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개헌 前) 1조 1항. 조르당 민주공화국은 곧 국민이며, 국민의 권리는 자기 자신에게 있다. → (개헌 後) 1조 1항. 조르당 민주공화국은 곧 국민이며, 국민의 권리는 정부로 부터 보호받는다.


  • (개헌 前) 4조. 국내 사건사고 발생 시, 피의자가 체포 되어도 당국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따라 수사에 임해야 한다. → (개헌 後) 4조. 국내 사건사고 발생 시, 피의자가 체포 되어도 당국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따라야 하지만 중범죄일 경우 예외로 둔다.


  • (개헌 前) 7조. 정부는 집회·결사·출판·언론의 자유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 → (개헌 後) 7조. 정부는 국가안보와 질서유지에 피해가 가지 않는 이상 집회·결사·출판·언론의 자유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 (이하 생략략)

이 헌법 개정은 명확히 독재국가의 면모를 보여주는 사건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조르당 국민들은 그들의 달콤한 연설에 넘어갔고 열렬히 찬양하고 있었던 터라 별 탈 없이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인민안보평의회 건립과 파시스트 연합 결성, 그리고 성장

334년 5월 11일. 간선제 총선을 치른 뒤, 내각을 구성한 알 베른은 대통령과 총리직을 합친 총통에 취임했다. 당시 지지율은 94%에 이르렀고, 장차 조르당을 이끌어 줄 위인이라 찬양받았다. 그로부터 2달 뒤인 7월 2일. 오세르트 민주공화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제정복고 사태가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 쿠데타의 주도자였던 로제트 바숌은 입헌군주제를 통하여 총리대신으로 취임했다. 이 때문에 알 베른 총통은 대조르당 공화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오세르트와 손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오세르트 제국 초대 총리대신 로제트도 이와 같은 생각을 했다. 의견은 잘 맞았고, 7월 15일에 파시스트 연합을 성공적으로 체결했다. 이에 밀리엄 민주공화국, 샤볼 자유국, 르판 인민공화국은 反파시스트 동맹을 맺어 그들을 견제했다. 파시스트 연합은 날로 갈 수록 거세졌다. 335년 2월 말에 가입한 슈레드 왕국을 시작으로 339년 8월 중순에 가입한 키르다 왕조 쥬야 제국 까지 총 8개국이 가입한 어마무시한 연합체가 된 것이었다. 反파시스트 동맹 중 샤볼 자유국이 특히 조르당을 견제하면서 파시스트 연합을 집중적으로 견제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여러 회의를 통해 反파시스트 동맹국의 파시스트 정당을 지원함으로써 세력을 넓히려 했다. 때문에 341년 4월 밀리엄에서 쿠데타 미수 사건이 벌어지는 등의 큰 사건들이 일어났었다. 하지만 밀리엄 인민위원회[4]가 끝내 쿠데타에 실패하게 되고 다시 일어설 것이라 평가받은 리만 파시스트 전선[5]마저 몰락하면서 사태는 다시 원상복구 되었다.

통화 개혁

342년 8월이 되자 알 베른 총통은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통화 개혁을 할 것 임을 공연히 알렸다. 당시 고기 10kg에 120억 베로드[6]가 드는 살인적인 가격인상을 없애기 위해 과감한 통화 정책을 실시하려 한 것이었다. 바로 10억 베로드[7]를 1 新베로드로 교환하는 것이다. 하지만 짧은 기간 안에 교환해야 했고, 더불어 너무 지나치게 화폐 교환에만 힘을 쓰고 공급량은 늘리지 않아 인플레이션 퇴치는 완벽하게 이루지 못했다. 가격도 다시 급상승했고 몇 달도 안되어 빵 한 개에 56 新베로드[8]가 되는 등 다시 인플레이션이 발동하게 되었다. 이때 민심은 희망에서 실망으로 바뀌어 정부 존속에 큰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콘스티탄노플 강화조약 일방적 파기

한 달이 지나고 국민의 반발을 돌리기 위해서 총통은 제1차 대전쟁 이후 맺어진 콘스티탄노플 강화조약을 이용했다. 알 베른은 국민 연설에서 일방적으로 콘스티탄노플 강화조약 파기를 선언함으로써 관심을 국외로 돌린 것이다. 이 알 베른의 연설의 내용 중 하나를 보도록 하자.

"."...(중략) 우리는 지금까지 수많은 역경을 보내왔습니다. 지난 정부의 타락과 무능함은 우리의 목을 비틀었고 그 결과로 외세의 힘에 밟혀 살아오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겨야 할 차례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옛날의 조르당인이 아닙니다. 이제는 우리가 외세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줄 차례입니다...(후략)"
-조르당 제2공화국 초대 총통 '알 베른-

反파시스트 동맹국과 리만의 심기를 건드렸다. 연설 이후, 밀리엄과 샤볼 자유국은 즉각 발언을 철회할 것임을 강조하며 압박을 가했다. 특히 샤볼 자유국은 "즉각 입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피바람이 몰아닥칠 것"이라는 협박을 가했다. 허나 알 베른 총통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임했다. 이 때문에 더 이상 빚을 갚지 않아도 되며, 외세로부터 자유로워 졌다는 국민들의 판단착오로 정부는 다시 안정감을 되찾게 되었다. 한편, 알 베른 총통은 예상과 같이 반응이 거셌다는 것에 중점을 두어 강국만이 발언권이 있다라는 생각과 함꼐 군사력 증강을 계획하고 있었다.

제2차 대전쟁 직전 상황

343년 2월. 알 베른은 위대한 부국강병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군사력 증강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당시 동방전쟁에서 효과를 봤던 대운을 모티브로 삼아 군국주의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어린아이들은 군인이 되기 위한 기초 학습은 의무적으로 배워야 했으며, 군인들 중 누구 한명이라도 탈영하면 즉각 총살했다. 일상생활에서도 군기를 집어넣었고 군사비를 증강하여 강화시켰다. 특히 동부에 위치한 제3군단을 집중적으로 강화시켰다. 그렇게 국력이 성장해나갔지만 주변국 반응은 냉소했으며 비웃음의 대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결국 알 베른은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라고 생각했는지, 제3군단장 아드리아노 벨과의 회의를 통해서 샤볼 침공을 계획했다. 이 정책으로 기존에 5만 명으로 제한되었던 보병 수는 엄청나게 늘어났으며 민간 기업이 군수 기업으로 바뀌게 되어 실업자가 줄게 되었다. 통화 개혁 실패의 최후를 단숨에 걷어낸 일이었다. 덕에 국민들은 정부를 대단히 신임했고 조르당을 위해서 죽을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한편, 르판은 조르당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즉각 샤볼 자유국에게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샤볼 자유국 주석 바드네오 드슈네 바레오는 조르당군은 늑대 탈을 쓴 양이라면서 안일하게 대체했다. 결국 343년 8월 11일, 동부전선의 포탄이 터지면서 진정한 제2차 대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전쟁 부터 멸망 까지

샤볼 침공

파일:샤볼 입성.jpg
샤볼에 입성하고 있는 조르당군이다.

343년 3월 11일 새벽 2시 경. 알 베른의 명령 하에 샤볼 국경 근처에 조르당 공군이 포격을 가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급작스러운 침공에 샤볼 자유군은 서부 방어선을 구축해 제3보병군단을 파병 보냈다. 하지만, 명장 아드리아노의 제2군단의 맹공을 막기에는 정말 힘들었다. 개인 화기가 비교적 덜 발달한 제3보병군단이 이길 일은 없었다. 신식 전차를 갖춘 동부전선의 포격으로 제3보병사단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에 사단장 리모르다는 주석 바드네오에게 추가 파병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파병 온 것은 백마를 탄 기마부대만 이었다. 때문에 그야말로 포탄 공격을 못 이겨 24만 명 중 4만 명의 사상자를 입은 체 후퇴했다. 첫판 부터 유리한 고지를 잡아낸 아드리아노는 진군을 통해 샤볼 서부 일부분을 점령했다. 그디오드 전투 승전 이후, 그디오드로 향햐는 군수를 빼앗긴 샤볼 제3보병군단은 어느 덧 오블릿 일대 지역까지 후퇴했다. 주석 바드네오는 르판의 참전을 바래왔으나, 조르당과의 직접적인 교전을 피하고 싶었던 르판은 거절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7월 2일. 조르당과 르판 이 두 국가의 밀약으로 불가침조약이 체결되었다. 체결 사유는 두 국가 다 똑같았다. 직접적인 교전을 피함으로써 이득을 취한다는 개념 하에 체결 된 것이다. 밀리엄에 참전 요청을 했으나 승낙은 받았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 때문에 주석 바드네오는 르판과 밀리엄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면서 反파시스트 동맹에서 탈퇴했다. 결국 홀로 싸우게 된 샤볼은 국내 혼란까지 겪으면서 몰락이 급속도화 되었고 결국 343년 12월 14일에 항복 선언을 하게되었다.

밀리엄 침공

파일:단속하는 조르당군.jpg
밀리엄리플 점거 후, 시민들을 단속하고 있다.

샤볼 침공이 성공리에 마치기 직전, 알 베른은 다음 목표를 밀리엄으로 정했다. 콘스티탄노플 조약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 였다. 그는 군사 회의를 열어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당시 총 3개의 작전이 유력 후보로 거론되었다.

  1. 제4군단장 '오슈리히 폰 베렌'- 작전명 낫질- 밀리엄 이웃국가들 중 하나인 소국 베로티를 점령한 후, 국경을 넘어서 침공한다.
  2. 제6함대사령관 '파르테네 드 요레네'- 작전명 오리- 밀리엄의 해상을 장악한 후, 북부에 위치한 해안도시 '요덴'에 상륙작전을 시행한다.
  3. 제3군단장 '아드리아노 벨'- 작전명 양갈래 머리- 오세르트의 참전을 통해 밀리엄을 침공한다. 단, 북부는 조르당이 남부는 오세르트가 장악한다.

결정적으로 3번 작전이 현실적인 방법이었기에 확정. 오세르트의 도움을 통해 침공을 개시하기로 했다. 로제트 총리대신은 밀리엄 침공 참전을 처음에는 그다지 달갑지 않게 보았다. 당시 공군 중에서 최강을 자랑했던 제5전투비행단을 보유한 밀리엄을 침공한다는 것은 무모하기 그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샤볼 자유국이 밀리엄에 도움을 청해도 듣지 않은 것을 목격하고는 공격할 생각이 없음을 알아차린다. 그렇게 샤볼 침공이 끝나자 마자 알 베른에게 참전을 알렸다. 이 후, 두 국가는 밀리엄 국경 앞에 군단을 배치했고 3일이 지난 후에 침공을 개시했다. 갑작스럽게 전선이 두개가 되어버린 밀리엄은 즉각 조치를 취했다. 다행히도 남부전선[9]의 상태를 완화시켰고, 국내에 주둔한 오세르트군을 소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차 서부전선[10]은 조르당군의 맹공격으로 악화되고 있었다. 결국 정부는 밀리엄리플에서 남부에 위치한 콘스티탄노플로 떠나게 되었다. 이에 조르당군은 밀리엄리플 점령 후, 북부 밀리엄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제5전투비행단의 포격 때문에 진입이 힘들었기에 밀리엄 정부와 협상을 통해 조르당 측이 더 유리한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휴전협정의 중요 내용은 이렇다.

  • 이 휴전협정으로 조르당과 밀리엄은 전투를 중단할 것.
  • 밀리엄 측으로 유리하게 작성된 콘스티탄노플 강화조약을 파기함으로써 조르당이 일반국과 같은 권리를 가질 수 있도록 할 것.
  • 북부 밀리엄은 조르당이 관활 통치 하되 남부 밀리엄은 밀리엄 정부가 독자적으로 통치해야 할 것.

이 때문에 밀리엄에서는 휴전협정이 체결된 344년 5월 21일을 '치욕의 날'이라 지정해 지금까지도 지켜오고 있다고 한다.
이렇듯, 절반의 성공을 이룬 조르당은 이듬해에 라피트 공화국과 치레브 왕국 합병을 통해 메르덴의 또다른 강자가 되었다.

리만 토벌

파일:리베리움.jpg
리만 수도 리베리움이 폭격당하고 있다.

북부 밀리엄과 샤볼 등을 점거하고 새로운 강국이 된 조르당은 점차 메르덴에 세력을 넓혀갔다. 전부터 파시즘 때문에 홍역을 앓았던 리만에겐 최악의 일이었다. 곧 리만 까지 진군할 기세였던 조르당은 그들에겐 큰 두려움이었다. 때문에 세간은 평화협정을 통해 국가를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로쉬 베렌 총리대신 만큼은 강경 정책 만이 살길이라며 주장했다. 결국 443년 8월 4일. 아로쉬 베렌은 연설을 통해 反파시스트 동맹에 가입하겠다 선언했다.

인민 여러분, 만약 강도가 우리 집에 쳐들어 온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기 있는 대다수의 인민들은 폭력을 써서라도 쫒아내려 할 것 입니다. 이렇듯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도 이 상황과 같습니다. 강도가 쳐들어와도 온순하게 재산을 뺏길 것 입니까? 이제 우리는 우리의 것을 스스로 지켜야 할 때입니다. (후략)
-리만 제12대 총리대신 아로쉬 베렌-

때문에 자극을 받은 알 베른 총통은 아로쉬에게 발언을 철회하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때문에 그는 리만을 공격함으로써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새로운 작전인 '범고래 작전'을 세웠다. 8월 7일, 리만의 수도 리베리움을 폭격함으로써 작전을 시행했다. 갑작스런 폭격에 리만도 역시 맞서면서 공중전을 벌였지만 무참히 실패하고 말았다. 이틀 뒤에는 첫 해전을 치르는 료스 1호 전함이 완벽한 승리를 거머쥐면서 해상권마저 조르당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일 주일 뒤, 제11보병사단을 리만의 남부 항구도시 아만테에 상륙시키면서 육상전을 벌였다. 결국 리만군은 대패하고 말았으며, 아만테를 내주고 후퇴하게 되었다. 계속해서 밀리자, 결국 리만 54대 국왕 알헤보른 5세가 아로쉬대신 항복을 선언했다. 역시 조르당에 유리한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

  • 1항. 조르당과 리만은 즉각 적대행위를 중단하고 우호적 외교를 취할 것.
  • 2항. 평화 협정 체결과 동시에 10년 동안 불가침조약이 발휘될 것.
  • 3항. 리만의 영토를 얻지 않는 대신, 리만 식민지에서 생산되는 원료와 노동력의 30%를 조르당이 가져갈 것.
  • 4항. 리만 국왕이 서거하시거나 은퇴했을 경우, 차기 국왕은 반드시 조르당을 방문해야 할 것.

이 평화 협정으로 아로쉬 베렌 총리대신은 책임을 물고 사퇴했으며, 알헤보른 5세 또한 아들인 그리우드 2세에 왕위를 내주고 은퇴했다. 이 때문에 리만은 큰 충격에 휩쌓였고, 지난 몇 십년 간 이룩해 놓았던 제국 이미지 마저 무너지게 되면서 국제 위상은 더욱더 떨어졌다. 이렇게 조르당은 르판을 제외한 온 메르덴 땅에 모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게 되면서 사실상 메르덴을 통일한 제국(帝國)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각주

  1. 이 당시, 한화 약 49조 원이었다.
  2. 조르당 제1공화국 3대 대통령. (6시대 267년 2월 ~ 337년 7월까지 생존)
  3. 조르당 제1공화국 마지막 대통령. (6시대 255년 6월 ~ 341년 11월까지 생존)
  4. 밀리엄의 파시스트 정당. (6시대 329년 4월 ~ 341년 5월)
  5. 리만의 유일한 파시스트 정당. 335년에 5개월 동안 정부군과 내전을 벌인 경력이 있었다. (6시대 330년 2월 ~ 341년 9월)
  6. 이 당시 한화 약 37,945.86원이었다.
  7. 이 당시 한화 약 3,162.15원이었다.
  8. 이 당시 한화 약 2,321.42원이었다
  9. 오세르트와 밀리엄 간의 교전이었다.
  10. 조르당과 동맹국 간의 교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