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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칼루 섬에서의 원인들 발견

쿠브레아 원인

칼루에 인류가 살기 시작한 건 화석을 통해 조사한 결과 최대 7만년전 쯤으로 추산된다.

1989년, 베아체로 주노이건 시 일대의 거대한 동굴인 쿠브레아 동굴을 탐사하고 있던 버뮤 대학교의 고인류학 교수인 '우위경'(1940 ~ 2010)과 그의 학생들이 그 안에서 화석인류의 흔적 제보를 듣게 되었고 곧 이어 4일 후 그 동굴로 간 우위경 교수와 학생들은 인류 화석의 흔적을 진짜로 발견하게 되었고, 이후 전문적인 발굴을 통하여, 515여구의 화석이 발견되었었는데. 칼루에서는 이들이 7만여년에서 5만여년 정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들을 부르는 명칭이 바로 '쿠브레아 원인'이다.

이 동굴에서 발견된 부장품으로 다양한 뼈조각, 석기 조각, 벽화, 도구 등이 발견되었는데, 벽화인 '쿠브레아 동굴 벽화'는 5만여년 정도쯤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구석기 예술인데 꽤 후대의 '알타미라 동굴 벽화' '라스코 동굴 벽화'와는 달리, 그림에 그려진 대상의 크기가 비교적 작고, 배경 중심의 거대화라는 느낌을 주었다. 주먹도끼인 '쿠브레아 주먹도끼' 또한 여기서 발견 되었다.

현재 이 쿠브레아 동굴은 '쿠브레아 동굴 탐사전시관'으로 재구성되었고, '쿠브레아 원인'의 집단 화석과 동굴에서 발견된 유물들에 대한 전시또한 이루어지고 있다.

'쿠브레아 원인'은 오늘날 인류와 10cm 정도는 작은 체구를 가지고 있으며 매서운 눈매를 가진 형태로 서식했다고 보는데, 사냥에 적합했던 신체를 가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채집으로 얻은 음식은 오직 과일밖에 없고 대부분 육류로 가득찼다는걸 보면, 수렵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이 활발히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이 여기서 때죽음으로 발견된 이유는 명확히 발견되지는 않았고, 단지 동굴 안에 약간의 화산재 흔적이 남아있다는 걸 보아 화산재의 습격이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게 아닐까 추정될 뿐이다.

고티노아 원인

쿠브레아 원인이 칼루일대에서 살게 된지 1만년이 흐른 뒤인 6만년전 쯤 또다른 원인인 '고티노아 원인'도 나타났다. 이들이 발견된 곳은 데이모스 주 서부의 루콘스 카운티 일대 평원의 고티노아 동굴 일대였는데, 1976년, 메스트로 대학교의 고고학 교수 '나이젤 버프럼'(1929 ~ 1994)가 이끄는 발굴단이 발굴한 가운데, 120여구의 인류 화석이 무더기로 발견되었고, 동시에 나무 열매, 과일 흔적과, 꽤 소수의 뼈조각 그리고 공예품, 도구 등이 발견되었다.

발굴단은 추가 지원을 통해 좀 더 세밀한 작업으로 발굴되며 위에 말했던 다양한 유물들을 차레차레 발견하게 되었다. '고티노아 원인'은 후대에 발견 된 '쿠브레아 원인' 보다도 더 왜소한 크기가 특징이였는데, 사냥에 자질이 있던 원인은 아니였는지 동물 관련 뼈는 소수만 발견되었고, 대부분 과일과 나무열매, 곤충 물고기 등의 흔적이 발견되었을 뿐이다.

이 들의 돋보이는 또다른 특징은 원시 형태의 공예품이다. 도구를 통해 다양한 재질의 바위를 깍아내어 접시, 조각상 같은 다양한 공예품들을 만들어냈다. 낚시를 위한 작살 또한 다양하게 나왔던걸 보면, 손재주에는 자신이 꽤 있었던 모양이다. 그 외에도 이들은 4만여 정도쯤에 칼루 제도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화석들은 홍수로 인해 죽은 원인들로 추정된다.

그 외의 원인들

그 밖에도 칼루에선 다양한 원인이 발견되었었다.

모스보그 주의 '네이팜 원인' 미조레 주의 '뮤레블로 원인' 자림 주의 '니치노 원인' 윈스버그 주의 '홀로이드 원인' 비티니 주의 '스퀘어팬츠 원인' 등등이다. 이들은 칼루 각지에서 각자만의 문화와 생존방식을 고집하였다가, 3만년전 아래 언급될 사건을 기점으로 모두 사라진 것으로 보고있다.

플라이스토세 칼루 지각대변동

앞서말한 원인들이 이 칼루 제도에서 멸종한 원인으로 유력한 사건이 바로 플라이스토세 칼루 지각대변동이다.

과학자들을 통해 밝혀진 그 내막은 참으로 참담하였는데, 3만년 전, 칼루의 거의 모든 곳에 존재했던 화산이 폭발함과 동시에 수많은 마그마와 화산재, 등이 수도없이 칼루의 모든 곳에 떨어졌다.

그와 더불어 지진또한 전개되며 수많은 땅이 무너짐과 동시에 동굴이 무너져 내리기도 하였고, 앞서 말한 화산으로 인해 대기에 연기와 재가 섞여 그야말로 헬게이트가 펼쳐졌고, 칼루의 원인들은 이 헬게이트에서 선택할 수 있었던건 영원한 안식인 죽음 뿐이었다.

1961년, 미조레 주 니콜로 시 한 농가에서 농부 1명이 화산재로 침식된 흔적이 있는 '네네사 원인' 화석 23구를 발견하면서, 그에 대한 연구도 시작되었다. 한편 이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칼루에 살았던 원인들의 시대를 '구 구석기 시대'라고 부른다.

새로운 도래인들과 신 구석기 시대

그로부터 1만년 후인 2만년 전 지각대변동으로 인한 영향이 꽤 사라졌을때 쯤 중국 동남부를 통해 새로운 도래인들이 대거 이주하였는데, 이들이 살아있는 현 칼루인들의 계통 중 가장 오래된 계통이다.

연구에 따르면 5만명의 도래인들이 도래했다고 추정되며, 이곳에서 새로운 구석기 시대란 뜻의 '신 구석기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들은 이전의 원인과는 달리 현 인류 평균크기와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똑같았었으며, 도구와 공예품은 더욱 정교해졌다. '헤치만 주먹도끼' '칠드리우 씀베찌르개' '케이만 긁개' 등의 도구 '뮬렌포의 비너스상' '켄투키의 들소상' 등의 공예품이 바로 그것이다. 애니미즘과 토테미즘 사상도 싹이 트기 시작하였다.

해수면의 상승과 신석기 시대

시간이 흘러 1만년 전, 빙하가 녹으며 해수면은 서서히 상승하였다. 섬이 된 칼루에서는 계속해서 도래인들의 삶이 계속되었다.

시간이 흘러 기원전 9000년경에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칼루의 자연환경을 고려한 움집이 만들어진 마을 '웅케르'가 나타났고, 농업이 전래되기도 하였다. 쌀, 보리, 조, 콩, 기장 같은 다섯 곡식을 포함하여, 칼루 내의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면서 잉여생산물이 쌓여가기 시작했고 결국 계급제가 다른 나라들과 같이 시작되게 되었다.

반달칼과 낫 토기를 통해 곡식과 음식을 수확하는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애니미즘과 토테미즘 사상을 통해 여러 의식 또한 시작 되었다, 농사를 통한 작물을 포함한 식량을 저장하는 창고 '쿠발리야' 또한 생기게 되었다. 기초적인 옷까지 입게되면서 점점 복식의 변화도 일구어냈다.

가축과의 동거또한 시작되었는지, 돼지, 닭, 소를 포함한 기본 가축들과, 칼루 영토 내에서 볼 수 있는 악어, 원숭이, 작은화식조 등의 동물 또한 사육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마을이나 짐승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고유 해자 시스템인 '우마르'가 발달하기도 하였으며, 이때 발명된 것이 칼루 특유의 돌팔매인 '에가시'와 원시적인 보검 '세모이드'다.

실제로 마을간의 전쟁이 있었다는 흔적이 칼루 제도 곳곳에서 발견되기도 했다는 흔적이 있다. 다만 교류의 흔적 또한 발견되면서, 이 때 부터 국가간의 교류라는 개념이 칼루에 꽃이 피었다.

모피와 식량, 뼈, 자원 등의 교류 흔적이 발견된 걸 보면, 교역품으로 다양한 것이 시도되었음을 알 수도 있다. 장례풍습 또한 이때 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우분투 주 로미야 구에서 발견된 '톨텍 무덤'은 그 장례풍습을 잘 보여준다. 흙을 물로 씻어 진흙으로 만들고 구덩이에 안치된 시신에 생전 좋아했던 것들이 넣어지고 진흙으로 시신이 덮여진 후 거기에 꽃을 뿌린다.

칼루의 세 청동기 시대 '무타이' '구즈랴와' '체모시코'

시간은 흘러 기원전 4000년경 칼루에는 드디어 청동기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칼루학계에서는 청동기 시대를 세 시대로 분류한다. '무타이 시대'(BC.4000 ~ 2700) '구즈랴와 시대'(BC. 2700 ~ 1300) '치모시코 시대'(BC. 1300 ~ 300) 시대를 구분 짓는건 종교 양식과, 문화 양식에 따라 차이를 준다.

무타이 시대(BC.4000 ~ 2700)

무타이 시대는 토테미즘의 최전성기 시대였다. 풍요의 신 '사냥의 신 그리고 건강의 신 등의 다양한 신을 토템 모습으로 형상화하여 제사를 지낸 것이 특징으로 순장 풍습 또한 같이 나타나게 되었다.

초기 형태의 시장이 나타나며 유통 제도가 시작되었고 청동이 새로운 장식품과 공예품의 재료로 쓰이게 되었다. 좀 더 비대해지고, 방의 추가와 공간이 넓어진 움집이 주택환경의 특징이였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보검인 '곤잘레스 보검'은 둥그란 형태의 석재 검이란게 특징이다. 노예제도가 생겨난 것도 이 시대였다.

구즈라와 시대(BC. 2700 ~ 1300)

구즈라와 시대는 애니미즘의 최전성기 시대였다. 토테미즘이 몰락한 후 대체자로 쓰이게 된 사상으로 신석기 시대까지만 해도 가축 취급을 받았던 악어, 원숭이, 작은화식조들은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사냥의 신 역할을 대체해준 악어, 풍요의 신을 대체해준 작은 화식조, 건강의 신을 대체해준 원숭이는 그렇게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그와 더불어 복식은 삼베같이 바람이 더욱 잘 통하는 옷으로 개량되었고, 청동을 더욱 정교하게 개량되기 위해 제련술은 더욱 발전되어 거푸집 및 집게가 발달되었다 상업의 발전은 더욱 더 활발히 이루어졌다.

마을 간 상업 교류 비율은 더욱 높아졌고, 그 만큼 교역물품도 많아졌다. 순장 제도는 부정적인 면으로 굳어지게 되어 폐지된 후 가축들을 집어넣는 형식의 순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둥그란 형태의 무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특징이였다.

또한 요새 모습의 마을이 생겨났다. 사각형 형태의 목재 오두막이 주택 환경으로 만들어졌으며, 이 시대를 대표하는 보검인 '메치토 보검'은 길게 뻗어있는 중심부가 특징인 석재검 이라는 점이다.

치모시코 시대(BC. 1300 ~ 300)

마지막으로 치모시코 시대는 그동안 비주류였던 샤마니즘이 대두되어 샤머니즘 중심의 사회로 발전하였다.

무당과 제사장들의 권력이 이때부터 강화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은 신들의 대변인이 되었기에 늘 인기있고 멋진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필연적으로 더욱 화려한 장식물이 등장했는데 청동 뿐만 아닌 다른 재료또한 장식물로 쓰이게 되었다,

신분제의 본격적인 구분 또한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제사관, 평민, 노예였다. 철기의 도입이 시작된 시대로서 철제 무기와 보호구, 도구 등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상업적으로는 화폐의 초기모습이 나타나였으며, 철의 거래가 생겨나기 시작하였으며, 권위있는 제사장 계급들의 거대무덤인 '칼루 피라미드'가 돋보이기도 하였다.

구즈랴와 시대에 나타난 요새 형태의 마을은 더욱 튼튼하고 견고하게 발전되었다. 진흙과 석재를 굳혀 만든 집이 주택 환경으로 조성되었으며, 이 시대를 대표하는 보검인 '묘세이라 보검'은 중간 정도의 길쭉함과 검 옆의 뾰족한 부분이 특징인 철제검이였다.

이 시대에 들어서는 제사장 계급의 으뜸인 군장이 지도자로 성장하였고, 이들은 각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전쟁과 외교를 좌우좌지 하였다.

고대

유라비오 대왕의 스찬카 건국

브룬타이키야 대왕의 시대

변방민족 뱅케티느의 문명

스찬카의 번영과 문화

미모르야그의 반역과 스찬카의 멸망

뱅케티느의 번영

미미르그와 오로비차스의 대격전 '파이스토우 전쟁'

스찬카 왕국의 건국

중세

근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조계지 구역

영국령 구역

프랑스령 구역

네덜란드령 구역

1차 세계대전 이후와 영국령 칼루

브리트카 파시즘 내전

브리트카 파시즘 내전은 1936년 4월 26일부터 1936년 5월 9일까지 일어난 사이먼 반야드(1896 ~ 1936)의 쿠데타 내전 사태로, 브리트카 일대에서의 군사적 충돌또한 일어났다.

사이먼 반야드는 본디, 멕시코계의 칼루인으로서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를 통해 파시즘을 접하게 되었고, 현재 '칼루결속당'의 당수로도 군림한 상태의 인물이였다. 그는 칼루에 파시즘 정부를 수립하고자, 쿠데타 계획을 세워놓았다. 당원들과, 전국 각지에서 온 무장한 1만 7천여명의 지지자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가 보내준 국가파시스트당 소속 당원들과 산하 정치깡패인 검은 셔츠단 또한 이들의 계획에 동참하였다.

홍콩에서 사이먼 반야드는 일부 당원들과 함께 국가파시스트당 소속 당원들과 구체적인 계획을 의논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무장된 당원, 지지자, 검은 셔츠단들이 각각 A조 B조 C조로 나뉘어 A조는 의회를 B조는 군본부를 C조는 정부청사를 점령하며, 주요 인질들을 생포하는데 반드시 영국 고위 정치인과, 칼루의 거물 정치인이나 군 장성들은 한 명이라도 잡아놓기를 기다리고, 포로 확보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은 국가파시스트당은 즉각 행동에 들어가 군사를 칼루일대로 보내어 영국과 협상을 하도록 유도하여, 브리트카를 영토에서 포기하게 만들어 자체적으로 브리트카를 독립시킨 후 '칼루 파시스트 공화국'을 설립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1936년 4월 26일 행동은 시작되었다. B조의 진격이 그 누구보다 제일 빨랐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군본부를 애워싼 채 군본부의 군인들과 교전이 시작됬다. B조의 대장인 베냐민 스퀘이크(1900 ~ 1936)가 지휘하는 결속당군과 해당 소속 검은 셔츠단의 지휘장 토레이노 멜리오니(1894 ~ 1945)는 파죽지세로 군본부를 몰아세워 가고있었다.

같은 시각 사이먼 반야드가 있는 A조는 의회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고, 4월 27일 새벽 1시쯤 시엘 팬텀하이브(1899 ~ 1961), 임유섭(1887 ~ 1949), 엘튼 스테브(1890 ~ 1951)를 비롯한 14명의 정치인 인질을 잡는데 성공하였다. 사이먼 반야드는 이탈리어 국가파시스트당에게 전보를 보냈고, 그들에게는 B조가 빨리 무너지기를 바랄 뿐이였다.

시간이 조금 지나 4월 27일 오전 10시 경, B조가 아무리 파죽지세로 군본부에 공세를 퍼부었어도 이들에게는 자존감이 있었기에 파죽지세는 몇시간이 안가 헛소리가 되었고, 군본부의 매서운 반격에, 결국 후퇴를 결심하고 C조가 있는 정부청사로 후퇴하였다.

A조의 전보를 들은 이탈리아 국가파시스트당은 무솔리니의 승인과 함께 이탈리아군 4만을 브리트카에 보내기 시작하였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정부청사로 후퇴한 B조는 4월 28일 정부청사를 다 점령하고 주요 포로 7조를 잡은 C조와 함께 영국령 칼루군에게 맹렬한 공세를 퍼부었다. 4월 29일 A조 또한 사이먼 반야드와 함께 포로들을 데려가 이동하여, B조와 C조들이 있는 곳에 집결하며, 영국령 칼루군을 섬멸시키기 시작하였다. 4월 30일 그렇게 그들을 어느정도 섬멸시키고 장성들을 포로로 잡는 것 까지 성공하였지만, 남부의 영국령 칼루군들을 대비해야 했다. 그들은 '칼루 파시스트 공화국' 정부를 수립하였고, 기초적인 정치제도를 세워두었다. 하지만 브리트카는 이미 난장판이 됬다.

5월 1일, 영국의 총리 스탠리 볼드윈(1867 ~ 1947)은 파시즘 세력이 브리트카 일대를 조지고 있다는것에 골치 아파하였다. 그는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브리트카 수호군 사령관으로 비티니 지역사령부의 로이드 휴스턴(1886 ~ 1960)를 통해 사태를 정리하고자 하였다. 같은 시각에 이탈리아군 4만명 또한 브리트카에 상륙하였다. 그들은 칼루결속당 당원들과 파견 나왔던 당원들과 검은 셔츠단들에게 환호를 받았다. 그들은 이길수 있을것이란 자신감에 휩싸였다.

5월 2일 남부 섬들에 있는 영국령 칼루군들이 상륙하기 시작하였고, 칼루결속당을 중심으로 브리트카 파시즘 정부는 교전을 시작하였다. 수많은 교전들이 6일까지 계속되었고, 치열하기 그지없었다.

5월 7일, 영국 정부는 이탈리아에게 전문 하나를 보냈다. "지금 전세계가 당신들의 행위에 주목하고 있소, 당신들의 우방이라던 독일도 이번 베를린 올림픽에서 빼놓을것이라던데... 그리고 우리 국제사회는 당신들을 고립시켜놓을것이오.." 무솔리니를 비롯한 국가파시스트당의 고위 당원들은 "우리들이 너무 막나갔나?' 라고 생각하였고 결국 5월 8일 이탈리아군과 국가파시스트당이 자진 항복하면서 사이먼 반야드를 비롯한 칼루결속당은 망했다를 느꼈다. 시간이 지나 결국 5월 9일 오후 2시경, 정부 청사에서 '칼루결속당'의 지도부들이 항복하면서, 끝이났다.

이후 5월 20일 사이먼 반야드를 비롯한 칼루결속당 지도부들의 사형집행이 이루어졌으며, 5월 21일, 칼루결속당은 그렇게 강제 해산당해버렸다. 브리트카의 피해는 60%가 폐허가 됬을 정도로 꽤 심각했지만, 칼루인들의 땀과 노력이 맺은 결실 덕에 반년 후인 1938년 8월 12일 재건에 성공한다.

2차 세계대전 중립선언

1942년, 2차 세계대전 참전선언

일본제국과의 전쟁

영국으로부터 독립

현대

첫 건국, 첫 선거투표, 첫 대통령 선출

2차 세계대전 이후, 1945년 9월 2일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어 '칼루 연방'이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건국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