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콥트 정교회
Coptic Orthodox Church  |  ϯⲉⲕ̀ⲕⲗⲏⲥⲓⲁ ⲛ̀ⲣⲉⲙⲛ̀ⲭⲏⲙⲓ ⲛ̀ⲟⲣⲑⲟⲇⲟⲝⲟ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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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에 소재한 성 마르코 대성당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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콥트 십자가
분류 기독교
설립 년도 약 1세기
451년 칼게돈 공의회
규모 약 2억 8천만명(2021년 조사)
역사 서기 약 42년경 성 마르코의 알렉산드리아 교회 설립
서기 약 68년경 성 마르코 순교
395년 기독교 국교화
451년 이집트 교회, 칼게돈 공의회 결정 거부
828년 베네치아 성 마르코 유해 도둑 미수 사건
986년 콥트 교회 자체 번역 성경 첫 출판
교황이자 총대주교 초대 복음사가 성 마르코 (초대)
현직 교황이자 알렉산드리아의 주교타와드로스 2세 (Ⲡⲁⲡⲁ Ⲁⲃⲃⲁ Ⲑⲉⲟ́ⲇⲱⲣⲟⲥ ⲡⲓⲙⲁϩ ⲃ̅) (제118대)
계통 아브라함 계통종교
종교 기독교
종파 비칼게돈파 (합성론)
교파 콥트 정교회 (알렉산드리아 전례)
최고 기관 알렉산드리아 교황청 (Ιερά Έδρα Αλεξάνδρειας, Κοπτική Ορθόδοξη Εκκλησία)
소재지 알렉산드리아 (Αλεξανδρεία)
명칭 그리스어 Κοπτική Ορθόδοξη Εκκλησία της Αλεξάνδρειας
콥트어 ϯⲉⲕ̀ⲕⲗⲏⲥⲓⲁ ⲛ̀ⲣⲉⲙⲛ̀ⲭⲏⲙⲓ ⲛ̀ⲟⲣⲑⲟⲇⲟⲝⲟⲥ
영어 Coptic Orthodox Church of Alexandria

개요

콥트 정교회(그리스어: Κοπτική Ορθόδοξη Εκκλησία της Αλεξάνδρειας, 영어: Coptic Orthodox Church of Alexandria, 콥트어: ϯⲉⲕ̀ⲕⲗⲏⲥⲓⲁ ⲛ̀ⲣⲉⲙⲛ̀ⲭⲏⲙⲓ ⲛ̀ⲟⲣⲑⲟⲇⲟⲝⲟⲥ), 콥트 오리엔트 정교회(그리스어: Κοπτική Ανατολική Ορθόδοξη Εκκλησία, 영어: Coptic Oriental Orthodox Church), 혹은 이집트 국교회(그리스어: Εθνική Εκκλησία της Αιγύπτου , 영어: Egyptian National Church)는 복음사가 성 마르코에 의해 설립되고 이집트와 북동 아프리카 및 중동에 기반을 둔 오리엔트 정교회이다. 칼게돈 공의회 이후 비칼게돈파로 갈라져 나왔으며, 현재 이집트아비시니아의 국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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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발자취

전세계 합성론 그리스도 교회의 수장인 콥트 알렉산드리아 정교회는 451년 칼게돈 공의회의 결과를 거부함으로써 오직 합성론을 수용했다. 콥트 알렉산드리아 정교회는 성 마르코로부터 비롯되었다. 서기 42년 경 복음사가 마르코 성인이 알렉산드리아에 교회를 세웠고, 마르코가 세운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전통은 콥트 교회에게 모두 계승되었으므로 마르코가 세운 교회의 직계라고 볼 수 있다.이는 정교회나 동방 가톨릭 계열과의 입장 차이가 존재한다. 또한 그는 복음사가로써 신발을 고치다가 상처를 입은 구두수선공을 치유하는 기적을 행하기도 했다. 상처가 나은 이교도이자 수선공 아니아누스는 회심하고, 후에 마르코스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의 교황이 되었다. 그러나 68년 마르코의 복음을 막으려고 하는 이교도들에 잡혀 끈에 묶인 채로 알렉산드리아 전체를 끌려 다니면서 돌팔매질을 받다가 고문으로 순교하고 말았다.

마르코의 순교에도 붉두하고 마르코가 가졌던 신앙과 복음의 정신을 물려받은 최초의 이집트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와 이교도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배교하지 않았으며, 비밀리에 신앙을 지키거나 장렬히 순교하는 선택을 했다. 로마의 황제 네로 재위시기에 복음을 전파한 마르코의 가르침을 그리스인들이나 유대인보다도 이집트인들이 더 수용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으므로 알렉산드리아 교회도 이 시점에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당대 이전부터 이집트를 사실상 통치하고 있던 파벨라노스 왕조의 바실레우스들은 이집트 내에서 팽창하고 있는 기독교를 긍정했고, 비밀리에 황제 본인부터가 신앙을 받아들이거나 지원해 국가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이 이루어지면서 이집트를 다스리던 바실레우스들도 공개적으로 가족들과 함께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러고선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지지했고, 다른 종교에 대한 신앙은 점차 제한되었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화하면서 사실상 로마 휘하의 이집트 맹주였던 바실레우스들은 이집트에서도 기독교를 일관되게 국교화했다. 이후 성 마르코의 유해를 찾고자 10년이 넘도록 알렉산드리아 전체를 조사했으며 마침내 411년에 알렉산드리아의 한 성당에서 마르코의 시신을 수습했다. 이후 인근에 "복음사가 성 마르코 대성당"을 준공하여 그곳의 지하에 마르코의 시신을 안장했으며 무덤을 열 수 있는 열쇠는 오로지 알렉산드리아 교황에게만 주어졌다.

이집트가 기독교를 국교화한 덕에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와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갈수록 많은 신자와 종교적 권위를 가지게 되었고, 그 권위와 권한은 점차 강해졌다.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는 교회를 인정하고 보호해준 보답으로 바실레우스들의 대관을 맡음으로써, 이집트 바실레우스들의 황권을 보전하고 강화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로써 이 시대부터 이집트의 황실과 교회는 서로 상부상조한 셈이다. 콥트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주로 동방교회보다는 서방교회와의 교류에 관심을 가졌다. 동방교회에서 직접적으로 분열하였기 때문에, 서방교회와의 관계개선이 콥트 알렉산드리아 교회에게는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9세기 경 베네치아의 상인들이 콥트 교회를 속이고 대성당 지하에 침입해 마르코의 시신을 훔쳐 가져가려고 한 마르코 유해 도둑 미수 사건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베네치아는 이집트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고 8년간 이집트 국내 통행이 금지되었다. 이 때 한동안 서방 교회와의 교류도 단절되었으나, 후임 알렉산드리아 교황의 노력으로 교류가 재개되었다. 미수 사건으로 인해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9세기 이후 마르코의 무덤을 알렉산드리아 교황과 일부 주교들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곳으로 이장했다. 이후 마르코의 유해는 주교들의 전승에 의해서만 그 위치가 알려지다가 1599년 교황 요안니스 14세에 의해 유해가 다시 성 마르코 대성당으로 이장되어 공개되었다. 현재도 성 마르코의 유해는 성 마르코 대성당의 지하에 있다.

거룩한 도시 알렉산드리아의 교황(총대주교)

교황은 베드로와 바울로(파울로스, 바오로)의 제자이자 복음사가 성 마르코(마르코스, 마가)의 선출된 후계자이며 초대 교회의 5대 교구 중 하나인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이고, 2억 8천만명 콥트 신자의 수위적 교도권을 가진 최고 성직이다. 총대주교직은 칼게돈파 정교회와 가톨릭교회에 의해서도 주장되고 있으나 거느리는 신자가 둘을 합쳐 50만명도 되지 않으며, 칼게돈파 정교회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는 이집트 내에서 영향력이 극히 미미하고, 가톨릭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는 로마 교황의 수위권 인정으로 인해 교황을 칭하지 않는다. 이 문서에서 설명하고 있는 콥트 알렉산드리아 교황(총대주교)은 전 아프리카와 전세계의 콥트 신자들에 대한 일치된 교도권 수위권을 지닌다.

다음은 알렉산드리아 교황의 정식 호칭이다.


위대한 도시 알렉산드리아의 교황이자 대주교이자 복음사가 성 마르코의 거룩한 정통 사도좌로서 이집트, 리비아, 펜타폴리스, 누비아, 수단, 아비시니아, 에리트레아와 전 아프리카의 총대주교

Ⲡⲁⲡⲁ Ⲁⲃⲃⲁ Ⲑⲉⲟ́ⲇⲱⲣⲟⲥ ⲡⲓⲙⲁϩ ⲃ(콥트어)

Πάπας και Κύριος Αρχιεπίσκοπος της Μεγάλης Πόλης της Αλεξάνδρειας και Πατριάρχης πάσης Αφρικής στον Ιερό Ορθόδοξο και Αποστολικό Θρόνο του Αγίου Μάρκου Ευαγγελιστή και Αγίου Αποστόλου, δηλαδή στην Αίγυπτο, την Πεντάπολη, τη Λιβύη, τη Νουβία, το Σουδάν, την Αβησσυνία, την Ερυθραία και όλη την Αφρική(그리스어)

Papa Alexandriae et Patriarcha Omnis Africae in Apostolica Sancti Marci Sede(라틴어)

Pope and Lord Archbishop of the Great City of Alexandria and Patriarch of All Africa on the Holy Orthodox and Apostolic Throne of Saint Mark the Evangelist and Holy Apostle that is, in Egypt, Pentapolis, Libya, Nubia, Sudan, Abyssinia, Eritrea and all Africa(영어)
콥트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교황)의 명칭

콥트 정교회의 성경


성서 말씀은 모두 우리에게 교훈을 주려고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에서 인내를 배우고 격려를 받아서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공동번역판)

성경에 미리 기록된 것은 우리를 가르치려고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인내를 배우고 위로를 받아 희망을 간직하게 됩니다.(가톨릭성경)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개역개정판)
로마 15:4, 콥트 정교회의 예비신자들이 읽는 책자 “예비신자:교회에 관하여-성경”의 표지에 써 있다.

구약ㆍ신약에서 각각 위와 같은 책들을 인정하고 있다. 신약은 전반적으로 모든 부분을 인정한다. 그러나 구약은 교파마다 다르듯 콥트 정교회도 정경과 제2경전 등으로 구별하여 인정하는 부분이 다르다. 콥트 정교회의 성경은 콥트어와 그리스어로 번역되어 있으며, 콥트어는 초대 교회 시절기존에 그리스어판 성경의 경우 옛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교회에서 사용하는 성경과 콥트 정교회에서 인정하는 부분을 추가로 번역한 채 그대로 사용했으나, 10세기 이후 황실과 교회에서 적극적으로 번역에 의욕을 보이면서 986년에 콥트 정교회에서 직접 번역한 그리스어ㆍ콥트어 구약ㆍ신약 초본이 편찬되었다. 이후 1009년, 1041년과 1066년에 걸쳐 각각 2ㆍ3ㆍ4본이 편찬되었으며, 13세기 이후에 책 전체의 디자인을 개정했다. 현재 콥트 정교회에서 사용하는 성경은 1913년 개정된 콥트 성경(Κοπτική Βίβλος)이다.

다른 교파와의 관계

  • 정교회
    알렉산드리아를 주축으로 하는 콥트 오리엔트 정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모스크바를 주축으로 하는 칼게돈파 정교회의 관계는 칼게돈 공의회에서 콥트 정교회가 공의회 결정에 반발하면서 악화되었으며, 이내 교류가 단절됐다. 콥트 교회는 칼게돈파 정교회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서방의 가톨릭 교회와 교류를 고집했고 이것은 칼게돈파 정교회와 관계를 더 악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콥트 정교회와 칼게돈파 정교회의 교류 단절은 5세기의 칼게돈 공의회로부터 20세기까지 계속되면서 양측이 더이상 교리 차원에서 통합할 수 없음이 증명됐다.
  • 천주교
    콥트 교회와 가톨릭교회의 관계는 칼게돈 공의회 때 이미 명목상으로 단절되었는데 미묘한 교류는 지속적으로 이어왔다. 그러나 그마저도 828년 가톨릭 국가 베네치아가 자행한 마르코 유해 도둑 미수 사건이 이집트 황제를 격노케 하면서 사실상 완전히 단절되었다. 또한 가톨릭 교회의 콥트 교회 신자를 대상으로 한 포교 시도까지 이루어지면서 양측의 관계는 더욱 악화 되었으나 1054년 가톨릭과 (칼게돈파) 정교회 사이의 대분열이 발발하면서 콥트 교회와 가톨릭 교회간의 교류가 재개되었다. 로마의 교황청은 알렉산드리아의 교황청을 콥트 교회의 수장격으로 인정하였고, 콥트 교황청은 로마 교황을 서열 1위로 다시금 인정함으로써 양측의 대결구도는 완화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