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의 여명

역사와의 분기점

19세기는 서구 열강에 의한 아시아의 개항 및 식민지화가 극에 달한 때였다. 당시 유럽과 미국에서는 눈에 불을 켜고 아시아를 개방시켜 이권을 선점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이 즈음하여 아편 전쟁과 쿠로후네 사건으로 중국과 일본도 개항의 길을 선택했다. 민간상선인 제너럴 셔먼호 역시 비슷한 이유로 조선을 개항의 대상으로 선택하였다.

제너럴 셔먼 호에는 미국엔 선주, 프레스턴과 영국 웨일즈 출신 개신교 목사인 토마스가 조선어 통역관으로 승선해 있었다. 제너럴 셔먼호는 중국 톈진에서 출발하여,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부에 이르렀고 평양부 관민들에게 수교를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반발하여 만경대 한사정(閑似亭)까지 거슬러 올라와 약탈을 감행했다. 처음에는 제너럴 셔먼호에 식량이 떨어졌다고 도움을 요청하자 조선 측에서 소고기와 쌀과 채소 등 식량과 배에 필요한 자재를 거저 나눠주기까지 했으나 이들은 장마 비에 불어난 대동강 물을 거슬러 올라 약탈을 감행하였다. 이에 조선군이 출동하였으나 배에서 가해진 포격에 여러 군졸 및 구경하던 백성들이 죽고 다쳤다.

조선군도 대응 포격을 했지만 포의 사정거리가 짧은 탓에 효과를 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평안감사 박규수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물러가라며 중군 이현익을 보냈으나 되려 그를 잡아가두고 통상을 요구했다. 실록에 따르면 중군이 납치된 것을 본 군졸들과 백성들이 노하여 배를 포위하고 활과 화승총을 쏘아대고 돌을 던지자 제너럴 셔먼 호의 선원들은 두려워 했고, 퇴역 장교인 박춘권이 조각배를 타고 접근해오자 중군 이현익과 부하들은 셔먼 호에서 뛰어내렸고,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분노한 군민들이 몰려오는 것을 본 제너럴 셔먼 호는 도망치려고 했으나, 중군을 억류했다 풀어주는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대동강 수위가 낮아져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평안감사 박규수는 밤중에 기름을 뿌린 짚을 가득 실은 목선들을 가득히 보내서 불을 질렀고, 결국 셔먼호는 버티지 못하고 불탔다.

불탄 셔먼호에서 살아남은 몇 명이 가까스로 뭍으로 헤엄쳐 올라왔다. 개화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박규수는 이들을 죽이지 않고 잡아서 협상에 쓰고자 했고, 분노한 백성들도 마지못해 이에 수락하며,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이후 박규수는 조선 정부에 이 사실을 알렸고, 다음달 즈음인 1866년 8월 23일, 미국 아시아함대 사령관인 벨 제독이 셰넌도어호를 타고 와서 포로로 잡은 제너럴 셔먼호 선원들을 미 본토로 송환함과 동시에 한국과의 통상조약을 체결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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