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제의 업적

대한 2대 황제
열조 인황제의 업적
[ 펼치기 · 접기 ]
이모집의
구교위도 구사취익
세과지변 인야욕변
대동방전쟁
서구열강의 견제
방갈랄왕은 막와이 황제를 위시하여 델리를 탈환하기 위한 일련의 도발을 감행했고, 이 과정에서 영길리 동인도 회사와 군사적 충돌이 계속되었다. 이에 영길리는 인도에 직접 개입하기로 하고 미리견, 불란서, 오지리, 이태리에게 각지 식민지를 약속하고 연합을 꾀했다. 동인도 회사군이 방갈랄 일대로 진입하면서 전쟁이 발발하여 5개국 연합은 연합함대와 지상군을 파견하여 강화도와 제물포를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인천이 함락되고 한성역까지 점령되자 조정은 흥화영, 장용영, 충헌영의 3만 장병을 각지에 집결시키고 근왕병을 소집했다.
경군의 저항이 격렬해 진척이 없자 연합군은 평양으로 진군하여 흥화병영을 점거했고, 삼화포을 장악해 물자를 탈취했다. 그러나 이내 근왕병과 충헌영이 남쪽에서, 장용영이 북쪽에서, 경군이 동쪽에서 공격하자 일부는 삼화포로, 일부는 제물포로 후퇴했다. 이후 황해 해전으로 연합군 해군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 동래화약으로 전쟁을 끝냈다.
함평북방지역
노서아 동방 진출 격퇴
5개국 연합이 대한의 본토를 타격하자 이내 노서아도 군을 움직여서 극동의 자바이칼 지대를 점령하게 하였다. 이에 북려국이 큰 피해를 입어 패퇴하고 수도를 잃자 북려국왕은 대한에 몸을 의탁하고 원병을 요청했다. 이에 성상께서 친히 군을 이끌고 가서 노서아군을 물리치고 려국의 종사를 다시 세워주었다.
함평남방지역
비율빈 장악
서반아와 미리견이 구마를 두고 전쟁을 벌이자 서반아는 그간의 정을 들어 원병을 요청했다. 이에 성상께서 비율빈에 군대를 보내어 지키도록 하시고 함대를 파견하여 나성, 가주 일대를 공격하여 점령하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구마와 푸에르토리코를 빼앗긴 서반아는 전쟁을 지속하기를 포기했고 이에 따라 구마는 독립하고 비율빈은 대한의 땅이 되었다. 미리견은 괌과 푸에르토리코를 할양받았다.
함평만국공표
동아 질서 수립
경나라를 군주의 나라로 모시고 각 번병을 대한의 휘하에서 질서를 유지하며 이에 대한 간섭을 엄히 금하며 이를 무력으로 파하고자 한다면 대한은 전력을 다해 대응할 것을 만천하에 공표하였다.
사대원교
외교정책기조
인도 패권을 두고 영길리가, 태평양으로는 미리견이, 극동에는 노서아가 이권을 탐하니 대한은 경국을 사대하고 이미 친한 서반아, 화란, 포도아를 중심으로 불란서, 이태리, 덕의지, 오지리와 친분을 쌓아 유사시 아군으로 만들어야 한다.
종진화초
균형외교정책
노서아의 확장을 견제하는 영길리 사이에서 이득을 취하도록 균형외교를 펼쳤다.
함평신학제
교육제도 개편 및 확장
기존 소교-향교-상교-육교의 교육제도는 대다수 소교에서 향교로 가는 것으로 교육을 마쳤다. 향교와 상교의 위계가 정확하지 않았으며, 육교는 한성에만 있으니 지방에서는 상교에서 쉬이 더 수학할 방법이 없었다. 이를 개혁하여 소학(5년) → 중학(6년) → 대학(3년)으로 정하고 국자감을 따로 두어서 더 수학할 수 있도록 했다. 육교와 상교는 대학으로 개편되었고 한성을 제외한 전국에 11개의 국자감을 신설하도록 하였다.
무연지법
공업화 제한 정책
한성부 인근의 공업화로 인한 수질, 대기질이 악화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한성 일대를 공업화 금지 구역을 두어 개발을 금하였다.
한성지하철
지하철 계획 수립
영길리의 지하철을 본따서 한성에도 지하철을 들이기 위한 계획이 시작되어 함평제 치세 말기에 착공이 시작되었다.
以矛執義
힘으로써 정의를 세우다.
口交爲刀 口詐取益
말로 사귀고 칼로 삼는다. 말로 속이고 득을 본다.
歲過地變 人也欲變
세월이 지나면
땅이 변하고 사람도 변해야 한다.
조선 틀 목록
대한 2대 황제
함평제의 업적
[ 펼치기 · 접기 ]
대동방전쟁
서구열강의 견제
방갈랄왕은 막와이 황제를 위시하여 델리를 탈환하기 위한 일련의 도발을 감행했고, 이 과정에서 영길리 동인도 회사와 군사적 충돌이 계속되었다. 이에 영길리는 인도에 직접 개입하기로 하고 미리견, 불란서, 오지리, 이태리에게 각지 식민지를 약속하고 연합을 꾀했다. 동인도 회사군이 방갈랄 일대로 진입하면서 전쟁이 발발하여 5개국 연합은 연합함대와 지상군을 파견하여 강화도와 제물포를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인천이 함락되고 한성역까지 점령되자 조정은 흥화영, 장용영, 충헌영의 3만 장병을 각지에 집결시키고 근왕병을 소집했다.
경군의 저항이 격렬해 진척이 없자 연합군은 평양으로 진군하여 흥화병영을 점거했고, 삼화포을 장악해 물자를 탈취했다. 그러나 이내 근왕병과 충헌영이 남쪽에서, 장용영이 북쪽에서, 경군이 동쪽에서 공격하자 일부는 삼화포로, 일부는 제물포로 후퇴했다. 이후 황해 해전으로 연합군 해군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 동래화약으로 전쟁을 끝냈다.
함평북방지역
노서아 동방 진출 격퇴
5개국 연합이 대한의 본토를 타격하자 이내 노서아도 군을 움직여서 극동의 자바이칼 지대를 점령하게 하였다. 이에 북려국이 큰 피해를 입어 패퇴하고 수도를 잃자 북려국왕은 대한에 몸을 의탁하고 원병을 요청했다. 이에 성상께서 친히 군을 이끌고 가서 노서아군을 물리치고 려국의 종사를 다시 세워주었다.
함평남방지역
비율빈 장악
서반아와 미리견이 구마를 두고 전쟁을 벌이자 서반아는 그간의 정을 들어 원병을 요청했다. 이에 성상께서 비율빈에 군대를 보내어 지키도록 하시고 함대를 파견하여 나성, 가주 일대를 공격하여 점령하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구마와 푸에르토리코를 빼앗긴 서반아는 전쟁을 지속하기를 포기했고 이에 따라 구마는 독립하고 비율빈은 대한의 땅이 되었다. 미리견은 괌과 푸에르토리코를 할양받았다.
함평만국공표
동아 질서 수립
경나라를 군주의 나라로 모시고 각 번병을 대한의 휘하에서 질서를 유지하며 이에 대한 간섭을 엄히 금하며 이를 무력으로 파하고자 한다면 대한은 전력을 다해 대응할 것을 만천하에 공표하였다.
사대원교
외교정책기조
인도 패권을 두고 영길리가, 태평양으로는 미리견이, 극동에는 노서아가 이권을 탐하니 대한은 경국을 사대하고 이미 친한 서반아, 화란, 포도아를 중심으로 불란서, 이태리, 덕의지, 오지리와 친분을 쌓아 유사시 아군으로 만들어야 한다.
종진화초
균형외교정책
노서아의 확장을 견제하는 영길리 사이에서 이득을 취하도록 균형외교를 펼쳤다.
함평신학제
교육제도 개편 및 확장
기존 소교-향교-상교-육교의 교육제도는 대다수 소교에서 향교로 가는 것으로 교육을 마쳤다. 향교와 상교의 위계가 정확하지 않았으며, 육교는 한성에만 있으니 지방에서는 상교에서 쉬이 더 수학할 방법이 없었다. 이를 개혁하여 소학(5년) → 중학(6년) → 대학(3년)으로 정하고 국자감을 따로 두어서 더 수학할 수 있도록 했다. 육교와 상교는 대학으로 개편되었고 한성을 제외한 전국에 11개의 국자감을 신설하도록 하였다.
무연지법
공업화 제한 정책
한성부 인근의 공업화로 인한 수질, 대기질이 악화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한성 일대를 공업화 금지 구역을 두어 개발을 금하였다.
한성지하철
지하철 계획 수립
영길리의 지하철을 본따서 한성에도 지하철을 들이기 위한 계획이 시작되어 함평제 치세 말기에 착공이 시작되었다.
조선 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