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네이션즈의 공식 문서입니다.
이 문서에 대한 모든 권리는 네이션즈 이사회에게 있으며, 그 외 유저의 허가 없는 무단 편집은 반달(문서 훼손) 행위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네이션즈 이사회의 별도의 허락 없이 이 문서를 무단으로 수정 및 삭제하거나, 전재 및 재배포하는 행위를 엄격하게 금하고 있으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폴란드
Polska
폴란드 제2왕국
Królestwo Polskie Polska

1919년
표어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수도 루블린

폴란드 제2왕국 혹은 폴란드는 유럽 중부에 위치하는 전제군주제 국가이다. 북쪽에는 프로이센이 있으며 동쪽에는 우크라이나가 있다. 수도는 대도시인 루블린이다. 공용어는 폴란드어이다.

9세기에 폴라니아가 생겨지며 많은 폴라니아인들이 현재 폴란드 지역에 모이게 되었다. 그 이후 1025년에 폴란드 왕국이 건국되고 계속해서 리투아니아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이는 1569년에 리투아니아와 동군연합을 맺게 된 계기가 된다. 그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으며 군사를 유지해 유럽에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펼치는 노력을 했으나,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국력을 손실하고 프로이센과 러시아에게 분할당하게 되며 수도인 바르샤바를 잃고, 바르샤바가 바르샤우로 개명되는 치욕을 겪게 된다. 이후 제2공화국을 세우고 외교노선을 중립으로 하며 유럽에서의 전쟁을 되도록 회피하게 된다. 하지만 대전쟁 이후에도 바르샤바를 수복하지 못한 의회에 군부와 시민들은 분노하게 되어 폴란드 11월 내전을 벌인다. 1919년 12월 13일, 자신을 야기에우워 왕조의 후손이라고 밝힌 아우구스트가 군부 세력의 지지를 받고 왕위에 오르며, 폴란드 제2왕국이 건국되었다.

역사

폴란드 왕국 이전

폴란드 영지

그니에즈노에서 세력을 키우던 폴란인들이 다른 부족을 무찌르고 있던 960년에 오늘날의 폴란드 왕조의 시초가 되는 미에슈코 1세가 지도자가 되어 폴란드를 성장시키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독일 영주들은 아직 부족 국과에 불과하던 폴란드를 이교도 토벌이라는 목적으로 전투를 벌이기 시작하여, 결국 966년에 개종하여 이교도 토벌이라는 명분에서 벗어나고 같은 가톨릭 국가들과 동맹을 맺기 시작하였다. 또한 자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포즈난에 교회를 설치하여 교황의 직속 영지가 되었다. 이 개종으로 폴란드는 유럽과 외교를 하기 시작하였고 폴란드가 중세시대의 유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위치까지 올려주었다.

폴란드 왕국

마에슈코 1세 사후, 맏아들인 볼레스와프 1세는 즉위한후 오토 3세와의 친분을 앞세우고 타국과의 전쟁에 앞섰다. 하지만 오토 3세가 사망하고 하인리히 2세가 즉위하였으나 그의 즉위에 불만을 가지게 되어 신성로마제국과의 전쟁까지 발생하였다. 하지만 1024년 하인리히 2세가 사망하며 폴란드의 공식 국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그 이후 폴란드는 여러 국왕들의 의하여 번영하였으나 볼레스와프 3세가 사망하자 그의 후계들이 그들 관할의 영토를 공국으로 세워 내전을 일으켰고 이 내전은 200년 동안 이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1304년부터 브와디디스와프 1세가 폴란드를 통일하였다.
통일 이후 폴란드는 급속도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공 지위를 얻어내며 동군연합 체제로 리투아니아를 폴란드에 병합하는데 성공하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동군연합이 되며 폴란드는 엄청난 성장을 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독일 기사단국이 폴란드를 공격하게 되어 폴란드가 위험한 상황에 쳐했으나 리투아니아의 기사단이 활약하여 그룬발트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패배한 독일 기사단국은 폴란드에게 일부 지역을 넘겨주었으며, 폴란드 왕국의 봉신국이 되었다. 그 이후 지그문트 1세는 기사단장이던 알브레히트 폰 프로이센에게 세속화 조치로 독일 기사단국 이후에 세워진 프로이센 공국의 공작 지위를 승인해주었다.

이후 1569년에 맺어진 루블린 협정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동군연합 체제가 아닌 연방제가 되며 하나의 국가가 되었다. 그 이후 연방은 입헌군주국으로서 동유럽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단치히를 무력으로 복속시켰으며, 정예 기병부대인 윙드 후사르를 창설하였고, 러시아를 침공하기까지 하였다. 1592년엔 지그문트 3세가 즉위하여 스웨덴에게 승리할뻔 하였으며[1], 러시아의 모스크바를 점령하여 당시 차르를 압송하고 자신의 아들을 차르 자리에 2년 동안 앉히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스웨덴 왕위까지 노리며 계속해서 전쟁을 치루자 윙드 후사르가 패하기도 하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위신이 크게 떨어지게 된다. 그 이후에 즉위한 브와디스와프 4세는 탁월한 군사적 재능으로 스웨덴에게 승리하고 러시아의 차르도 해보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대홍수와 봉기, 타국의 침략으로 1667년에 채결한 안드루소보 협정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유럽의 영향력을 끼치기도 어려울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 이후에 오스트리아와 동맹도 맺으며 폴란드의 재기를 꿈꾸었으나 아우구스트 2세가 즉위하고 대북방전쟁에서 패배하며 폴란드는 親스웨덴 국왕이 즉위하게 된다. 하지만 러시아가 대북방전쟁에서 승기를 잡자 아우구스트 2세가 다시 즉위하게 되었으며, 러시아의 보호국과 비슷하게 된다. 하지만 1733년에 아우구스트 2세가 사망하게 되고 프랑스의 도움으로 스타니스와프 1세가 즉위하게 된다. 하지만 폴란드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을까 두려워진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폴란드에 전쟁을 선포하게 되어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난다.

폴란드 분할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이후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폴란드의 일정 영토를 점령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오스트리아가 조약으로 폴란드의 영토를 점령하지 않았기에 폴란드 왕국은 존속되었으나 수도인 바르샤바가 프로이센에 의해 바르샤우로 개명되는 사태는 막을 수 없었다.

폴란드 제2공화국

폴란드 분할 이후 시민들은 왕권에 대하여 불신을 가지게 되어 폴란드는 공화정을 채택한다.
대전쟁 이후에도 폴란드가 독일에게 바르샤바를 탈환하는데 실패하자 분노한 시민들과 군부 세력들은 폴란드 11월 내전을 일으켜 폴란드 제2왕국을 세웠다.

폴란드 11월 내전

폴란드 11월 내전은 바르샤바 탈환에 실패한 정부와 군부 세력들이 분노하여 대통령궁을 공격하며 발발한 내전이다.

1919년 11월 16일, 군부는 자신들의 뜻을 따르는 시민들과 병력들을 모으고 대통령궁을 봉쇄하였다. 대통령궁을 장악한 군부 세력에서 브와디스와프 5세는 폴란드 왕국의 재건을 시민들에게 공표하였다. 당연하게도 이 일이 발생한 직후 진압 병력이 투입되었으나, 진압에 투입된 병력들도 대전쟁에서 복무했던 군인들이였기에 몇몇은 반기를 들었다. 결국 진압 작전에 실패하고 역으로 군부의 병력만이 늘어나게 되었다.

11월 18일, 2차 진압 작전이 진행되었다. 2차 진압 작전에서는 시가전이 번번하게 발생하였기에 시민들은 군부 세력에게 큰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다만 2차 진압 작전은 실패하고 군부 세력은 정부의 무능력함이 다시 한번 더 보여졌다는 내용의 연설을 진행하였다.

11월 21일, 정부는 군부 세력에게 협상을 하고 싶다는 내용의 문서를 대통령궁으로 수신하였다. 이를 확인한 군부 세력은 협상을 하자는 온건파와 협상을 거부하는 과격파로 나누어졌다.

11월 24일, 군부 세력에서 협상을 수락하며 대통령궁에서 협상을 진행할 것임을 밝혔다. 당연케도 정부측의 대다수는 이를 거부하였으나 부통령이 긍정의 의사를 밝히며 26일에 5명의 수행원과 함께 대통령궁으로 갈 것이라 공표하였다.

11월 26일, 부통령이 대통령궁으로 찾아가 브와디스와프 5세와 함께 오후 2시부터 협상을 하기 시작하였다. 양측이 원만하게 해결된듯 웃으며 오후 5시에 나오던 그때, 군부에서 과격파 중에 과격파였던 요안나 뤤케가 부통령을 사살하였다. 부통령이 사망하자 수행원들은 교전하였으나 요안나 뤤케에 의해 전원 사살 당하였다.

11월 27일, 부통령이 '실종' 되어버린 정부는 내전을 끝내기 위해서 군부와 전투하는 것만이 답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렇기에 정부는 군부 세력이 대통령을 납치하고, "부통령을 피살하였다고 하며 나라를 혼란으로 빠트리는 군부를 몰아내기 위하여 전투하자"라는 내용의 선전물을 뿌리기 시작하였다. 선전물을 확인한 시민들은 군부 세력에 분노하였고 시민들이 직접 叛군부 조직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군부 세력과 군부에 반대하는 시민 세력, 그리고 정부가 서로 지속적인 전투를 벌였으나 부통령을 사살한 이유로 군으로 투입된 요안나 뤤케 하사가 이끄는 분대가 맹활약하며 내전은 결국 군부의 승리로 끝이나게 되었다.
군부는 내전이 끝난 이후 전 정권에 대한 프로파간다와 민심 복구를 위한 정책을 이행하였다.

  1. 세임들의 거부권 행사로 정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