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벚꽃이 질때까지)


프랑스 공화국
République française | Französische Republik
국기 국장
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
자유, 평등, 우애
민주혁명 이전
비시 프랑스
상징
국가
라 마르세예즈
국화
붓꽃
국조
수탉


개요

프랑스 공화국(République française)은 서유럽에 존재하는 공화국이며, 자유 프랑스의 영향력 하에 있던 서아프리카 일부를 해외영토로 가지고 있다.

역사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게 패배한 프랑스 땅의 남부에는, 흔히들 비시 프랑스라 불리우는 괴뢰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일본이 미 태평양 연합을 합병, 독일이 워싱턴에 원자탄을 투하하면서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자, 당장 비대한 다른 영토의 관리인력도 부족한 마당에 프랑스의 북부를 직접 통치할 이유가 사라진 독일은 관계개선 겸 인력낭비 감소를 위해, 프랑스 북부를 비시 프랑스에 돌려줬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자유 프랑스 임시정부가 소소하게나마 저항을 계속했으나 진전이 없자 이들은 독일의 영향이 비교적 약한 아프리카 변방으로 대진군을 감행하면서 한동안 프랑스 본토와 멀어지게 됬고, 이후 프랑스는 아인하이츠팍트에서 독일, 이탈리아 다음으로 높은 권한을 부여받았고, 1954년 WNO(World New Order)회의에서도 하원이사국을 맡는 등, 전과 같은 영광은 누리지 못하더라도 신질서 체제의 밑에서 그럭저럭 잘 살아가는 듯 싶었다.

그러나, 1961년 하인리히 힘러가 부르뉴고 인근으로 좌천되면서부터 프랑스의 새로운 수난이 시작되었다. 이 무렵 추방에 대한 분노와 이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져, 원래부터 광기에 휩싸여있던 정신세계가 살짝 폭주하게 된 힘러는 좌천된 동안 프랑스 코뮌 잔존세력을 전부 소탕하고 프랑스에 대한 새로운 통제법을 마련한다'는 말도 안되는 구상을 계획, 자신의 친위대를 이용하여 야밤부터 진격을 시작하였고, 독일의 견제로 인해 제대로 된 군사력이 있을 리가 없던 프랑스의 대처 미비로 인해, 얼마 안되서 파리의 코앞까지 SS군이 당도하게되었다. 이들은 점령한 영토 내에서 극도의 만행과 전쟁범죄들을 저질렀으며 프랑스의 국민들은 하루하루 공포에 떨게 됐다.

이렇게 도착한 SS군은 당시 프랑스 국가대통령인 장-루이 틱지예비넝쿠흐에게 상호 신뢰와 독일 고토의 수복을 이유로 들어 부고뉴 지역을 할양할 것을 요구, 당연히 이에 반발할 수 없던 루이가 이 협상을 수락하면서, 졸지에 부르고뉴 지역 전역이 부르군트라는 힘러의 영지로 변한 신세가 되었다.

이렇게 영토 할양으로 경제력이 대폭 하락한것도 모자라서, 1965년에는 히틀러의 급사로 인해 게르만 정계가 혼란에 휩싸이면서 프랑스 또한 난장판이 되었다. 5월 1일에는 프랑스 청년들이 주프랑스 대게르만국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감행했고, 이를 나치당이 폭력진압하면서부터 프랑스 전역에 반게르만 정서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1965년 내내 곳곳에서 화염병으로 인한 화재나, 시가지에서 암살과 총격전이 밥먹듯이 벌어질 수준으로 치안이 좋지 못했고, 할로윈인 1965년 10월 말에는 에펠탑에 오른 저항세력 일부가 파리의 전력을 사보타주해 독일의 프랑스 행정을 마비시키는 등, 저항의식이 거세져갔고, 심지어 비밀리에 자유 프랑스 정부까지 개입하면서 프랑스의 정국은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으로 변모했다.

이 사태를 보고 경악한 새 총통 보어만은 권한을 총동원하여 힘러를 압박, 부르고뉴 일부 지역을 프랑스에 반환하고 마다가스카르에서의 이권 복각을 약속하는 등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을 회복시켜 주는 유화책을 어느정도 감행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부르군트 기사단국이 게르마니아 본토와 사이가 좋아지지 않는 결과도 도출됬으며,새로이 부임한 국가대통령도 기존 프랑스의 정책 노선과 다를 바 없는 활동을 계속하면서 침체기 자체의 해결은 도통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한편, 1970년대부터는 국민들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프랑스 괴뢰정부가 우민화 정책을 감행, 프랑스인들의 교육 수준을 낮추고 독일 본토에 맞먹는 오락거리등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정치에 대한 관심을 최대한 돌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 결과는 우민화를 알아챈 프랑스 국민들이 정부의 지침과 전부 반대로 행동하는 결과만 낳았고, 바람 잘 날 없는 프랑스의 혼란기는 저 멀리 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의 무능을 비료료 삼아 자라는 자유 프랑스 임시정부의 세력과 함께 서서히 성장했다.

프랑스에 유의미한 변화가 찾아온것은, 바로 1980년대 후반이었다. 슈뢰더 정권이 게르만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나빠지던 부르군트와 게르만의 사이에는 커다란 금이 가기 시작했고, 마침내 1988년 독일에서 상당한 규모의 민주화 요구 시위가 벌어지고 아예 자국민 학살극이 발생하자, 당시 비시 프랑스 내부 반독파 인사들은 대행진 이후 이탈리아 정부의 무능함을 이용해 세력을 간신히 회복해 서아프리카에서 활동하던 자유 프랑스 정부와 물밑 접촉을 시작했다. 이후 자유 프랑스 임시정부는 친독파 성향의 프랑스 국민 정부에 반기를 들며 내부 쿠데타를 시도, 알제리 방면에서부터 파리까지의 무장진군을 시작하여, 마침내 본토에서 조우한 이들은 재빨리 2.3선언을 통해 비시 프랑스와 자유 프랑스의 기적적인 통합을 이루어낸 뒤, 프랑스 공화국을 선포했다. 만약 직후 게르만이 민주화가 실패하였다면 프랑스 공화국의 멸망을 피하기 힘들었겠으나, 민주화가 기적적으로 성공하며 프랑스 공화국은 그 국위를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러나, 게르만은 묵인했어도 부르군트 기사단국은 아니였다. 서서히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지자 위기감을 느낌 부르군트 기사단국 측은 이 기회에 아예 이제 막 새로 건국된 프랑스 전역을 장악해서 본토와 결전을 펼칠 계획을 구상, 1993년 프랑스에 '공영권 자본'이 들어가 신정부가 들어선것이라고 주장하며, 다량의 병력과 사용시 지구상의 전 세력의 파멸이 보장된 핵무기를 제외한 첨단병기들을 이끌고 서부로 진격을 시작했다. 여기에 얼마 전 독자적인 나치즘 노선을 부르짖으며 독립한 아메리카국과의 동맹으로 강력해진 부르군트 기사단국은 진격을 시작한지 한 달도 되지 않아 파리를 점령하였고, 프랑스 정부는 우선적으로 제2의 수도 비시로 천도를 하며 항전을 계속했다. 한편, 당시 독일은 주변의 독립국들과 차근차근 국교를 수립해가던 도중 부르군트 기사단 국의 난동이 발생하자 초기엔 부르군트 수뇌부에 작전 중단을 요구, 그러나 무시당하자 본국에서 지원하는 물자를 전부 거덜내는 방식으로 부르군트를 경제적으로 제재하기 시작했다. 이에 기사단국은 격하게 반발하였으며, 극단적 나치즘과 수정 나치즘의 대립문제까지 겹친 일이었던지라 양측의 갈등의 골은 깊어져만 갔다. 결국 1994년, 아헨 인근에서의 사소한 양측 병사들간의 다툼은 점차 고조되었고, 사망자가 여럿 발생하자 결국 독일은 대SS전쟁을 선포하며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