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한러전쟁
Korean-Russian War
Русско-корейский война
날짜1898년 1월 1일 ~ 1899년 1월 19일
장소압록강 일대, 요녕반도, 동해, 동만주
결과 대한국의 승리, 할빈 조약 체결
교전국
대한국
일본 제국
러시아 제국
지휘관
양종 열황제
조희연
안경수
어윤중
전문상
박재벽
이지백
니콜라이 2세
알렉세이 크로파토킨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병력
대한국군 약 35만명
일본 제국군 약 2만 8천명
약 50만명
피해 규모
전사 약 1만 7천명
부상자 약 3만명
전사 약 5만 7천명
부상자 약 14만명
포로 약 6만명

개요

1898년에서 1899년 사이에 대한국러시아 제국이 압록강 일대, 요녕반도, 동해, 남만주, 동만주 일대에서 벌인 전쟁.

좌하 사건으로 인해 전쟁이 막 발발했을때 서양 국가들은 아무도 한국이 러시아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유럽의 군사강국중 하나로 꼽히고 있었고 청의 몰락을 통해 아무도 비백인 동양 국가가 백인 유럽 국가를 꺾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가깝고 러시아 중심지에서는 매우 먼 동아시아에서 전쟁이 벌어져 러시아의 원활한 보급이 어려웠던 점, 한국이 예상외로 국력을 착실히 키우고 군사적인 준비가 철저했던 점, 러시아 내부 사정이 악화되어 모두의 예상을 깨고 러시아가 패배했다.

배경

점차 약해지는 청나라를 두고 서구열강은 중국 대륙을 어떻게든 차지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러시아 또한 마찬가지로 태평양 방면에 부동항이 필요했고 청나라를 압박해 여순, 대련 조차권을 얻어낸다. 또한 1860년 베이징 조약을 통해 얻어낸 연해주 지방을 십분 활용해 만주횡단철도를 부설했고 만주를 중심으로 점차 남하할 계획을 갖고있었다.
반대로 막 근대화에 성공한 한국은 간도를 비롯한 남만주에 조선인이 많이 살고있다는 이유로 청나라에게서 남만주를 뜯어냈고 '범조선주의'를 제창하며 만주는 조선민족의 전통적인 고유 영토였으며 이곳에 사는 만주족도 조선민족이라는 이념을 내세워 만주 전체를 영토로 삼을 생각이었다. 따라서 이 두개의 세력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의 불씨는 1890년대 초 한국군 10만명이 심양에 주둔하며 시작되었다. 한국은 심양 조약의 압록 이북, 혼하 이남을 한국의 강역으로 한다는 조문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할빈-대련을 육로로 잇는 길 중심에 위치하고 혼하에 있었던 심양을 한국의 영토로 선포해 군대를 주둔시킨 것이다. 가능한 육로로 용원(당시 블라디보스토크)과 대련을 잇고 싶었으나 한국으로 인해 할빈까지 멀리 돌아가는 경로를 개발하려했는데 이것도 한국이 심양에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무산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는 강하게 반발했으며 이회준-발네프 협약을 체결하여 한국군이 일단 물러나는 것으로 합의가 성사되었다.

하지만 한국과 러시아는 심심찮게 충돌했고 1897년 12월경 청과 한국의 경계에 매우 가까운 좌하에 러시아가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절정에 달했다. 이곳 근방에 주둔하던 한국군은 러시아군에게 철수를 요구했으나 러시아군은 이에 응하지 않았고 오히려 진격하는 듯 했다가 철수하거나 매우 가까운 지역에서 돌을 던지는등 도발행위를 벌였다.
정확한 경위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으나 증언에 따르면 러시아군이 장난스럽게 던진 돌에 어느 한국군인이 맞았고 이에 화난 한국군 부대가 같이 돌을 던지며 맞섰으며 이것이 발포로 이어져 양측에서 상당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양측 군사는 서로에게 발포했고 이것이 좌하 사건이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전쟁이 발발한다.

전개

여순 전투

1898년 새해, 여순항에서는 러시아 부대가 축하파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멀리 수평선에서 불빛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국의 해군함대였다. 동시에 동북쪽에서 한국군 5군 기병들이 진격해오고 있다는 척후병의 소식이 동시에 들려왔다. 해군 함대는 해안기지에 무차별 포격을 가했고 많은 함선들이 손실되었다.
한국 기병은 다롄 방어선을 순식간에 돌파, 반룡산 동쪽을 장악했고 참호를 파기 시작했다.[1] 한국군은 빠르게 돌격해 요새를 점령할 계획이었지만 막상 여순에 직접 당도하고 나서 단숨에 여순 요새를 장악하는 것은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일을 깨닫고 작전을 바꾸었다. 10만명의 군사와 물자를 의주-대련을 잇는 철도를 통해 운송하고 대련과 여순을 잇는 철도를 재빨리 놓아 더욱 원활하게 물자를 운송할 수 있게 준비했다. 아울러 대련과 여순 해상을 왔다갔다 하며 함선에 물자를 조달할 수 있게 해놓았다.

러시아군은 함대를 통해 탈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미 많은 함선들이 파괴되었으며 해상봉쇄선을 뚫고 황해로 빠져나가도 한국 해군에게 발각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많은 한국 함선들이 해주와 남포에 주둔하고 있었다.
2월 2일경 전투준비를 끝낸 한국군은 전격적으로 빈틈이었던 이령산을 공격해 선점하고 뤼순 앞바다에 포격을 개시한다. 허를 찔린 러시아군은 뒤늦게 이령산을 공격하려 했으나 한국군 포병에 가로막혔다.
포격은 2월 3일 아침까지 이어졌으나 러시아군은 항복하지 않았다. 5군 총지휘관 전문상은 여순 앞바다를 평지로 만들어버리라고 지시했고 포격은 일주일 가까이 이어졌다.
2월 4일에는 반룡산에서 뤼순 시내로 돌격하는 양동작전을 벌였으나 러시아 방어선에 가로막혀 실패했다.
포격은 일주일 가까이 지속되었고 2월 12일 러시아군은 항복하였으며 러시아군의 제1태평양함대는 궤멸되었다.

금주 전투

1898년 1월 10일부터 2월 10일까지 대련 북부 금주에서 벌어진 전투. 대한군은 러시아군이 진지를 구축하고있던 남산을 포위했고 몇차례 포격전을 통해 이곳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러시아군은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대한군 기병에 섬멸되었다.

심양 전투

용원(블라디보스토크) 전투

1898년 6월 5일부터 그달 20일까지 용원(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벌어진 전투. 양동작전의 일환이다.

발트 함대를 출격시킨 러시아는 용원(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 닿으면 물자를 보급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한국은 이미 나진 개발을 마무리하고 있는 단계였다. 한국은 나진을 병참기지 삼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며 요녕에서 계속된 승전에 수비 병력만을 남겨놓고 8만명 정도를 떼어다가 이곳에 배치하고 있었다. 또한 용원에는 다수에 한인들이 살고있었는데 이들의 호응을 통해 용원을 장악할 계획을 확고히 했다. 하지만 이것은 거짓계획이었고 일부러 러시아측에 이 정보를 흘렸다. 실제 병력은 4만명 가량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러시아군이 모르는 것이 아니라서 러시아군은 어쩔 수 없이 두개의 전선을 강요당했다. 따라서 러시아는 전쟁을 최대한 오래 끌어 본토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군대를 수송하려 했다.

1898년 6월 5일 한국군은 나진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1만명의 병력은 육로로, 나머지 3만명은 함선에 타서 이동했다.
6월 6일 새벽에 한국군이 블라디보스토크 앞바다에 당도했을때 이곳은 매우 고요했다. 4만명의 군사는 조용히 상륙해 항구의 몇개 진지를 습격했고 갑작스런 습격에 러시아군은 섬멸되었다. 군인들은 빠르게 다시 함선으로 복귀하였고 함선은 항구에 포격을 가했다.
6월 11일 5일간의 포격전이 끝나자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는 쑥대밭이 되었고 육로로 진군하던 군사들도 블라디보스토크 시 바깥에 주둔했다.
깜짝놀란 러시아군은 요녕에 주둔하던 일부 군사 10만명 가량을 떼어 블라디보스토크로 보내려 했고 이를 알아챈 한국군은 더욱 포격을 가했다.
6월 23일경 한국군은 일괄적으로 철수했지만 러시아군은 이미 자무쓰에 당도한 뒤였다.
결과적으로 러시아가 블라디보스토크로 군사를 보낸 것은 6월 25일 심양 전투에서 한국측의 공세 작전에서 큰 손실을 입게되는 원인이 된다.

엽북(라페루즈) 해전

1898년 12월 7일에 발생한 한러전쟁의 끝을 장식한 해전.

11월에 들어서자 대한국은 서서히 한계에 치닫고 있었다. 국가 체제 자체를 전쟁 중심으로 돌아가게 바꾸고 빠른 물자 생산과 자원 채굴을 시도해 근근히 버티고 있었지만 미국과 영국에게 빌린 차관이 너무 많아 재정적으로 힘든 상황이었다. 러시아도 육지전에서는 사실상 모두 패했고 최후 최후의 수단으로 발트 함대를 파견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블라디보스토크가 큰 피해를 입은 탓에 무리한 파견이라는 의견도 컸다. 하지만 한국군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 러시아군은 발트함대를 제2태평양함대로 개칭하여 동아시아에 파견했다.

러시아 함대는 대한해협을 통과한다면 한국군 발각될 수도 있다는 겁에 사로잡혔고 석탄보급선을 상하이로 보내 대한해협을 통과할 것이라는 혼동을 주기로 했다. 하지만 본 함대는 라페루즈 해협(현재 엽북 해협)을 통과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계획을 세웠다.

한국은 러시아 함대가 어디로 갈지 몰랐기 때문에 예방 차원에서 일본과 교섭을 벌였다. 한국은 일본 제국이 자신들을 도와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러시아와 강화협상을 벌일때 일본이 사할린(현재 고엽)을 차지하게 해주겠다는 물밑 협상을 벌였고 11월 28일 이태준-고노 밀약이 맺어져 일본 제국은 한국 해군이 삿포로에 정박할 수 있게 해주었고 물자보급도 실시했다.

결과

대한국

러시아와 할빈 조약을 체결하였고 외흥안령 산맥~오제강 이남을 할양받았다. 이때부터 사실상 만주 일대는 한국의 영향 아래 떨어진다.
하바롭스크는 평정하여 흥한다는 뜻으로 평흥으로, 블라디보스토크는 발해의 동경용원부 근처에 있었다는 이유로 용원으로 개칭되었다. 본래 해삼위라고 불려 해삼, 해경, 해위등 이름이 물망에 올랐지만 용원으로 결정되었다.

러시아

러시아는 사실상 극동의 부동항은 물론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얻어낸 영토까지 모두 잃게 되었다. 러시아는 어떻게든 영토를 잃지 않으려 했지만 배상금을 낼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영토를 잃고 말았다.
패전에 주요 함대가 모두 격파되어 1차 세계대전때 해전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또한 막대한 전비를 소모해 배상금을 물어줄 여력도 없었기에 결국 연해주를 빼앗기고 말았으며 소련-현재 러시아 연방에 이르기까지 극동지역은 한참동안 소외받게 된다.

일본 제국

일본제국은 막판 엽북 해전에서 대한국을 도운 덕분에 승전국으로 인정받았고 고엽(사할린)과 천도 열도(쿠릴 열도)를 할양받았다. 원래 대한국은 사할린을 남북으로 나누어 남쪽만 일본에게 넘길 생각이었으나 어윤중등 여러 대신들이 쓸모없는 땅이라 여겨 일본에게 모두 넘겨준 것이다.

  1. 뤼순 전투는 참호가 근현대전에서 본격적으로 쓰인 최초의 전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