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놀룰루 전투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의 일부
파일:Battle of Hawaii.jpg
날짜1942년 9월 19일 ~ 1942년 9월 30일
장소미국 미국 하와이 제도 호놀룰루
결과 미국의 승리, 일본의 하와이 점령 저지
교전국
미국 미국 일본 제국 일본 제국
지휘관
미국홀랜드 스미스
미국레이먼드 A. 스프루언스
미국체스터 니미츠
일본 제국야마모토 이소로쿠
일본 제국나구모 주이치
일본 제국야마시타 토모유키
병력
35,200명 153,800명
피해 규모
전사 - 18,760명
부상 - 19,120명
전사 - 64,008명
부상 - 22,105명

개요

태평양 전쟁시기 일본 제국이 1942년 9월 19일 미국의 하와이 제도에 감행한 상륙작전이자, 일본 해군과 육군이 합동으로 전개한 두 번째 작전이었다.

초기 상황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장관은 미드웨이 환초를 점령한 이후, 하와이 상륙을 대본영에 계속해서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6월 초의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대승에도 대본영은 하와이 제도 상륙은 너무 이르다는 원론적인 입장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사실 여기에는 해군의 전과가 너무 높아질 것을 우려한 도조 히데키 수상이 만약 하와이까지 점령하면 육군의 체면이 말이 안된다는 핑계로 계속 반대의사를 표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6월 말, 야마모토 제독이 도조 수상과의 독대를 통해 하와이 제도 상륙작전의 지지를 얻게된다. 바로 육군의 상륙사단을 작전에 투입시키고 안전히 호송하여, 진주만의 태평양 사령부 기지에 육군기만 게양하게 조치하겠다는 약속 때문이었다.

이에 도조 수상은 즉각 8개 상륙사단(약 9만여 명)과 당시에는 막 생산이 시작되어 중국전선의 최전선으로 나가기로한 치헤 중형전차 1천여 대, 및 미드웨이 활주로에서 Ki-67 폭격기 21기, Ki-119 복좌전투기 120기를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이를 통해 9월을 목표로하는 호놀룰루 상륙작전이 대본영의 심의에서 육군의 강력한 지지아래 통과되게 되었다. 하지만 7월 초에는 육군에게 비겁하게 빌붙어 작전을 수행하려한다며 야마모토 사령장관의 퇴임을 촉구하는 함대파 청년장교가 야마모토 사령장관의 우측 어깨를 총으로 쏜 사건이 발생한다. 이로인해 야마모토는 7월 말까지 작전에 대한 전념을 할 수 없었으며, 나구모 제독이 대신하여 상륙 준비를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나구모는 육군의 영향력을 최대한 배제하거나 해군이 그에 동등하게 작전에 참여할 수 있도록 조치하려고 하였다. 이에 야마모토가 복권하는 8월 전까지 해군 육전대 10개 여단(5만 명 규모)까지 육군 몰래 작전에 투입할 준비를 끝마친 상황이었다.

그리고 야마모토 제독이 복권한 이후에도 나구모 제독은 야마모토의 작전 방향성을 일부러 왜곡 해석하며 해군 중심의 상륙전을 계속해서 고안하였다. 그렇게 9월 19일이 다가왔다.

과정

일본군

일본군은 일본 제국육군의 상륙사단과, 육군항공대, 제국해군의 육전대와 해군항공대로 총 15만 여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D-Day 하루 동안 병력 9만 6천여명이 상륙하여 진주만으로 진격했다. 이후 10일 간 총 13만 여 명이 하와이 제도로 쏟아져 들어왔다.

  • 일본 제국육군 및 육군항공대
    • 제23상륙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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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드웨이 육군항공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