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보기 도움말: 데스크톱, 크롬, 제이위키 벡터 스킨 베이스 | 제작: 바벤베르크 | 세계관: 성화국 유니버스

1976년 8월 10일. 친위대원들과 함께 이곳에 온 나는 사람이 있는 집에 수류탄을 여러 개 던져 넣었다. 집은 쉽게 불이 붙고 빠르게 타오른다. 불은 다른 건물로 옮겨 붙었다. 참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사람들은 울었고, 우리는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환호성을 내지르며 울고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머리에 총을 쐈다. 이런 방식으로 벌써 건물 수십개를 파괴시켰다... 반란군들에게는 자비가 있을 수 없다. 저 저주스러운 족속들은 모두 사라져야만 할 것이다.

성화국방군 소속 병장 이지 하루히코(伊地 悠彦)의 일기

이곳 후쿠마시에 들어온 그들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탈을 쓴 악마조차 아니었다. 그저 악마 그 자체였다. 민간인이 눈에 띄면 어린아이든 노인이든 상관하지 않고 "반란군이다!"라고 외치며 그 자리에서 총으로 죽여버렸다. 만일 같은 친위대원이나 경찰이라 할지라도 자신들을 방해하거나 자기들의 마음에 들지않으면 반란군이라며 가차없이 죽여버렸다. 우리는 시민들을 지키지 못하는 무능하고, 나약하고, 멍청한 존재가 되어있었다. 내가 지켜야할 대상을 지키지도 못하고 보고만 있으려니 수치심에 차라리 내 머리에 총을 대고 죽어버리고 싶었다.

당시 후쿠마경찰서장 후소자키 코시로(富祖崎 昴志郎)의 일기

개요

1975년 제5대 성화국 대통령 선거의 결과로 이즈노카미 카즈타카 정부가 출범하자 이듬해인 1976년 무라야마현 후쿠마시에서 군사정권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인 대학생들과 지식인들, 그 직후의 시민군을 카즈타카 정부가 친위대를 이용해 학살한 사건. 사건의 발생과 동시에 카즈타카 정부는 무라야마현 전체에 대해 봉쇄령을 선포했으며 봉쇄령이 해제되는 9월 12일까지 무려 무라야마현 후쿠마시에서는 친위대와의 전투를 벌인 시민군을 포함하여 민간인 23,983명이 사망하고 42,893명이 부상을 입었다.

당시 SHK[1], KBC[2] 같은 주류언론에서는 '극우세력의 폭동으로 인한 친위대의 불가피한 진압'으로 보도했으며 세간에는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다 이즈노카미 카즈타카 대통령이 서거하고 2000년에 와서야 민간인학살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와 당시 친위대의 작전명령서[3]가 공개된 덕분에 이 사건이 민간인 학살로 규정되면서 이노카미 코자부로 대통령이 피해자들과 유가족 앞에서 직접 사죄했으며 특별법을 제정하였다. 이때 이 사건의 명칭이 '8.2 사태'에서 '1976년 피의 대학살'로 바뀌었고 민간에서는 알게모르게 혼용되어 사용되어오다가 2007년이 되서야 '1976년 피의 대학살'이라는 명칭으로 완전히 정착되었다.

현재까지도 고령층에서는 폭동으로 여기는 측면이 강하고 히츠지다 카즈오 당시 친위대 국가지도자[4], 효즈 후우타 (兵頭 風詩) 친위대 최상급집단지휘관[5]을 비롯하여 민간인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던 하마미치 신스케(浜道 進佐) 당시 친위대 연대지도자, 후카와 리쿠토 (府川 龍空翔) 당시 친위대 돌격대지도자, 토쿠시게 효지로 (徳重 豹二郎) 친위대 최고돌격지도자를 포함한 주범들의 제대로된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또한 이때 수많은 여성들이 성폭행 당했는데 진상규명보고서에 따르면 약 20,000명의 여성이 친위대 병사들에 의해 강간당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또한 당시 후쿠마시에 체류하던 취재기자들은 친위대 병사들에게 체포되면 증거인멸을 위해 현장에서 바로 사살당했다.

여담

  • 하마미치 신스케(浜道 進佐) 당시 친위대 대령, 후카와 리쿠토(府川 龍空翔) 당시 친위대 소령, 토쿠시게 효지로 (徳重 豹二郎) 친위대 대위는 누가 가장 민간인을 많이, 잔인하게 죽이는지, 다시말해 민간인 학살을 가지고 경쟁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 모두 당연히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아야했지만, 재판부는 증거가 불충분하다며 민간인 학살을 현장에서 지휘한 죄만 인정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며 그마저도 2006년 가석방되어 현재까지도 자신들의 죄를 늬우치지 않은채 자신을 애국자로 자칭하며 살고있다.
  • 히츠지다 카즈오(未田 一乙) 당시 친위대 국가지도자, 효즈 후우타 (兵頭 風詩) 친위대 최상급집단지휘관은 사건이 끝나고 성화국에서 두번째로 가장 높은 등급의 훈장인 '황금 대십자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2003년 가석방된 후 각각 2007년과 2015년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 그 외 학살에 가담했던 친위대 간부들은 학살한 민간인의 수에 따라 2계급에서 무려 5계급까지 특진을 했으며 일부는 높은 등급의 훈장을 수여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이들은 훈장서훈을 취소하라고 요구했지만 훈장 서훈자들은 모두 '사태의 성공적인 해결'이라는 명목으로 훈장을 서훈받았기 때문에 "국가내란 또는 그에 준하는 죄, 형법이 정한 강력범죄를 범한 자가 아니라면 서훈을 취소하지 아니한다."와 "국가긴급상황을 진압하기 위해 불가피한 폭력을 사용한 경우 서훈을 취소하지 아니한다."라는 상훈법 조항을 사법부에서 임의로 해석하는 바람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 2015년 8월 5일, 군 문서를 조사한 결과 친위대가 실탄 600만발 가량을 비롯해 TNT 9000kg, 권총탄 8천발 가량 등을 소모했고, 전차 등을 무라야마현 후쿠마시에 투입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물론 학살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대표적으로 소노라 아키토(薗浦 存斗) 소령은 작전에 대해 "민간인을 해칠 수 없다"라고 항의했으며 꽤 많은 수의 민간인들을 후쿠마시 밖으로 탈출시킨 것이 드러나면서 이등병으로 강등됨과 동시에 불명예 전역했고 이케에 스즈루(池江 志鶴) 중위와 우라사와 카타시(浦澤 堅) 중사는 지역 밖으로 탈출하는 민간인을 돕고 후쿠마시의 민간인을 다른 지역으로 보내면서 민간인들을 도왔으나 적발되어 1976년 8월 29일 총살되었다. 그 밖에도 보고서에 따르면 33명의 친위대 군인들이 민간인을 돕다가 강등과 동시에 총살되었고 390명은 이등병으로 강등된 후 불명예 전역 처리되었다. 이들은 사건이 끝나고도 학살자 취급을 받다가 2017년에야 본래의 계급으로 돌아왔으며 유공자로 인정되었다.
  • 당시 후쿠마시 경찰들은 8월 2일부터 민간인을 해칠 수 없다며 참여를 거부하거나 친위대로부터 민간인을 구해내려고 친위대에 항의를 해보고 카즈타카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등 민간인을 한명이라도 더 구하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다 친위대의 발포사격에 경찰 7명이 사망하자 8월 16일의 기점으로 후쿠마시 경찰은 경찰서장이었던 후소자키 코시로의 지휘 아래 시민군에 합류해서 친위대와 전투를 벌여 대부분 사망했다.

각주

  1. 성화방송협회
  2. 국민방송
  3. 당시 작전명이 '청소(清掃)작전'이었다.
  4. 최초의 중졸 출신 친위대 고위지휘관으로 인간승리의 상징격인 인물이다. 부하들에게는 좋은 지휘관이었으나, 피의 대학살 사건때는 "그 지역을 청소하라. 더 이상 반동분자들을 남겨두지 마라. 남녀노소 가리지않고 청소하라. 이제 그 지역은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라는 망언을 했으며 작전을 승인했고 학살을 최종지휘했다.
  5. 작전계획을 설계했으며 학살을 건의했다. 또한 언론에 거짓정보를 흘려 폭동으로 보도하게끔 만든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