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대학생 대표주자로 민주수호연설에 나선 임수경
평양사태를 축소보도하는 KBS 뉴스
평양시민 여러분, 지금 시내로 쿠데타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들이 쿠데타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일어나 쿠데타군과 싸웁시다!
신원 미상의 시민, 1989년 8월 20일, 계엄군의 평양 진입 직전
어느 나라의 군인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에게 반란을 일으켜 대통령을 살해하고 수도를 점령하는가? 나는 두고 볼 수 없다. 이제 나는 저들과 맞서 싸워 죽을 각오를 하고 민주주의를 되찾을 것이다.
김대중, 쿠데타군을 피해 평양에 도착한 직후

소개문

1981년, 1월 1일은 1980년 10.26 사태 직후 대남정세를 오판한 북한이 중국과 소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면남침을 강행한 이후를 그리는 대체역사 세계관이다. 북한이 전면남침을 강행한 1981년 1월 1일부터 OTL과 시간대가 분리된 별도의 세계선으로 나아간다.

간략한 타임라인

  • 1981년 1월 1일 - 북한의 전면 남침
  • 1983년 3월 17일 - 북한의 임시수도인 청진 함락, 북한정권 붕괴[1]
  • 1983년 3월 18일 - 최규하 대통령, 남북통일 선언
  • 1983년 5월 29일 - 제11대 대통령 전두환 취임[2]
  • 1984년 1월 28일 - 제8차 개헌안 통과, 제5공화국 수립
  • 1984년 4월 13일 -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 1988년 3월 1일 - 수복지구 전역에 내려졌던 계엄령 해제, 남북간 완전통합 실시[3]
  • 1988년 4월 14일 - 제 12대 국회의원 선거
  • 1988년 12월 28일 - 제9차 개헌안 통과, 제6공화국 수립
  • 1989년 3월 28일 - 제13대 대통령 선거(김영삼 당선)[4]
  • 1989년 8월 3일 - 문민정부에 대한 육군 일부의 군사반란 시작
  • 1989년 8월 4일 - 정부군과 반란군 간의 교전 시작, 김영삼 대통령 서거[5]
  • 1989년 8월 6일 - 반란군의 서울 점령 및 국가비상대책위원회 설치
  • 1989년 8월 10일 - 전국에 비상계엄 선포, 반란군의 부산에서의 대규모 시위 무력진압
  • 1989년 8월 11일 - 김대중 총재 및 여야 국회의원들의 평양 도착 및 국회 재결성[6]
  • 1989년 8월 13일 - 반란군의 수도권 장악, 정부군은 대전으로 후퇴
  • 1989년 8월 15일 - 평양 시민군 결성
  • 1989년 8월 20일 - 평양 전투 시작
  • 1989년 8월 27일 - 반란군의 평양 시가전 패퇴 및 주력 병력 와해
  • 1989년 9월 7일 - 서울에서 역쿠데타 발생. 반란군 지도부 전원 체포[7]
  • 1989년 9월 10일 - 정부의 서울 환도, 공식적인 내란 종료.
  • 1990년 12월 15일 - 제14대 대통령 선거(김대중 당선)

주요 사건

각주

  1. 김일성 사망을 실질적인 북한 정권 붕괴로 간주한다면 평양이 점령된 직후인 1982년 12월 7일이다.
  2. 4공화국 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3. 장기간 정지되었던 수복지구 거주민의 선거권이 회복되는 등 공민권 제한조치도 동일에 해제되었다.
  4. 헌정 사상 최초의 여야간 정권교체.
  5. 김영삼 대통령이 서거한 시간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이후 국회 청문회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를 빠져나간 직후인 01시 27분경으로 추정된다.
  6. 8월 11일 17시에 국회는 평양시청에서 긴급 본회의를 갖고 반란군이 불법적으로 선포한 비상계엄을 여야 의원들의 만장일치로 해제를 의결했다. 정부도 긴급히 평양에서 대통령 권한대행 이하 일부 국무위원들만 모인 가운데 국무회의를 전군에 반란군의 진압을 명령했다.
  7. 반란군 수뇌부 상당수는 역쿠데타군의 중앙청 포격에 목숨을 잃었고, 반란 주도자 15명 중에서는 3명이 역쿠데타군의 기습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