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재팬(IATA Code : AJ)은 1928년 '일본 비행수송 주식회사'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일본 최초의 항공사이다. 에어재팬은 여객사업부와 화물사업부로 크게 구분하며, 여객사업부는 세계 최대규모, 화물사업부는 글로벌 4개 대기업에 속해 경쟁 중에 있다.(FedEX, DHL, UPS, Air japan Cargo) 에어재팬의 슬로건은 "EXPLORE A MORE EXCITING JAPAN"으로 1960년대부터 50년 이상을 이 슬로건을 유지하고 있다. 에어재팬의 로고는 중국 신화중 하나인 서유기에 나오는 "근두운"을 모티브로 일본을 대표하는 색 5가지를 전국민을 대상으로 투표하여 만들어졌으며, 원한다면 언제든지, 어디든지, 빠르게 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에어재팬은 현재 7조 2천 3백억엔의 시가총액으로 일본 재계 22위에 안착해 있으며, 분기당 평균 영업익은 보통 600~700억엔을 넘나든다. 에어재팬의 직원수는 10만명이 넘으며,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큰 항공사다.

역사

에어재팬(IATA Code : AJ)은 1928년에 일본 비행수송 주식회사(콜사인 : JA)라는 이름으로 설립됐다.

영국인인 Joshua Carrott가 설립하여 당대엔 외국인회사로, 주로 일본 내의 서양인을 대상으로 비정기적인 국내선을 운용하였으며 일본 내 최초의 항공사라는 의미가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항공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1940년대에 돌입하면서 일본과 영국간의 불화가 심화되었던 때, 어느 날 Joshua Carrott는 런던 사무실에서 급한 연락을 받게 된다. 일본 정부가 일본 비행수송 주식회사를 압류하여 전쟁물자 수송 등에 차출한 것이다. Joshua Carrott는 영국정부에 도움을 요청하나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일본 비행수송 주식회사의 숙련된 조종사를 공군으로 차출하는가 하면 일본 비행수송 주식회사를 국유회사로 제정하고 도쿄 비행수송 주식회사의 모든 자산을 압류한다. 이후 일본은 일본 비행수송 주식회사를 국립일본항공(国立日本航空)이라는 사명으로 변경하고 당시 해외에서 항공에 대해 10년간 배우고 일본으로 돌아온 스가하라(菅原)가의 스가하라 요우타에게 국립도쿄항공을 맡게 하며, 일본에서 전장으로 차출되는 물자 운송 혹은 전장에 인력 파견/부상자 수송 등을 맡겼다. 당대 국립일본항공의 여객기 기체는 대부분 적군에 의해 격추되거나 전쟁후기 자금이 급해진 일본정부가 매각하여 없어졌으며, 1945년 8월 15일, 일본정부가 연합군 측에 패배를 인정하며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의 집정이 시작되고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일본의 항공회사 운영금지령을 내린다. 당시 사실상 대부분의 기체를 잃고 이름만 간신히 유지하는 상황에 있었던 국립일본항공은 이에 따라 완전히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영국에서 머물고 있던Joshua Carrott는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전후사정을 얘기하고, 일본 비행수송 주식회사(당시 : 국립일본항공)의 운영권을 돌려받게 되었지만 이름만 간신히 유지되어온 상황이라 일체의 자금도, 항공기도 없는 처참한 회사의 상황을 보고 낙담하여 일본 비행수송 주식회사를 완전히 정리하고 영국으로 돌아간다. (이후 그 후손들이 에어재팬과 일본정부에 보상을 요구하였으나, 일본정부와 에어재팬은 전후처리를 문제로 보상을 거부하였고 그 이후로 별다른 진전이 없다.)

1950년 6월,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일본 항공회사 운영금지령을 해제하자, 일본의 제계에서는 항공운수업을 시작하려는 조짐이 여기저기에서 포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대 전쟁물자 판매 등 전쟁 기간 동안 수많은 부를 축적하고, 연합군 사령부와 친밀했던 도쿄의 유지인 스가하라(菅原) 가문에서 (아이러니 하게도 스가하라가문의 스가하라 요우타가 국립일본항공의 전 사장 이였으며, 가미카제 조종사 훈련에 참여한 죄목으로 전범으로 판결 받아 1945년 11월에 처형되었다.) 침묵을 깨고 도쿄도 주오 구 긴자에서 당대 4억 엔의 자본으로 가문의 사람인 스가하라 요우타가 운영하였던 국립일본항공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사명을 에어재팬 주식회사로 칭하고 50년 12월, 지금의 에어재팬을 설립하였고, 스가하라 가의 실세인 스가하라 요우타와 함께 외국으로 항공에 대해 배우러 떠났지만 아직 일본에 돌아오지 않고 미국에 머물고 있었던 스가하라 카이루의 장남이인 스가하라 츠카사를 초대 사장으로 임명한다. 당시 스가하라 가와 일종의 커넥션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에어재팬의 설립을 환영하고 일본 국내선의 운항을 일임한다. 그리하여 일본 내 국내선의 대부분은 에어재팬이 운항하는 바람에 전일본공수(ANA)와 일본항공(JAL)이 초기 국내선시장에서 매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953년, 연합군 사령부(GHQ)가 일본에서 완전히 철수하자 에어재팬은 다소 제한되어 있었던 국제선 분야로 사업을 확장시켜 나갔다. 에어재팬은 당시 맥도널 더글라스사의 기체를 유독 선호하여 맥도널 더글라스사의 DC시리즈 전기종 운항기록이 있다(심지어 이후 그들이 1987년에 만든 도쿄항공박물관에는 맥도널 더글라스사의 DC시리즈 전기종이 야외에 전시되어있다.) 에어재팬은 최초의 국제선 취항지를 무려 Los Angeles 까지 가는(웨이크 섬, 호놀룰루 공항 경유) 초장거리(당대로써는) 미주노선을 개통했다. 게다가 일본의 내부사정이 점점 좋아지자 일본인의 항공수요가 늘어났고, 당시 일본 항공사 3사중 나머지 2개 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사업을 거대하게 확장한 에어재팬은 엄청난 마케팅 비용을 들이며 일본의 대표항공사라는 인식을 굳혔다. (사실상 당대 아시아의 최고, 최대 항공사였다.) 게다가 초대사장인 스가하라 츠카사는 일본을 대표하는 장국인 미소국을 뜨거운 상태로 기내에서 보관하다가 일본식 그릇에 담아 기내에서 서비스하는가 하면, 세계 최초로 생선을 차갑게 보관하여 기내에서 스시를 제공하는 등 당대 기내식으로는 엄청나게 파격적인 (현대에도 상당히 파격적인 서비스다. 실제로 에어재팬은 현재까지도 일본 내 국내선이나 일본 출발선에 희망자에 한해 미소국과 스시를 기내식으로 내기도 하며 전 세계 유일하다.) 기내식 서비스를 제공했는데, (물론 일식과 서양식 중 택할 수 있게끔 했다.) 오히려 이것이 자국민에게 자국을 대표하는 음식을 기내식으로 내놓는다는 엄청난 자부심(?)으로 다가와 국내에서 에어재팬 수요가 폭증하기도 했다. (한때 에어재팬은 일본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선정되기도 하였고, 일본 내 브랜드 가치 1위를 기록했던 적이 있다.) 또 일본을 방문하려는 타지인 에게도 엄청난 컬쳐쇼크로 다가오는가 하면, 서양인들은 특색 적이라며 엄청나게 선호하기도 하고, 이 특이한 기내식은 당대 외신에도 전면 소개되었다. *에어재팬의 기내식 서비스는 아직까지도 한 가지 콘셉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출/도착지의 특산음식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일본발 한국선에서는 비빔밥과 가츠동를 제공하는 등.

이렇게 일본에서 확고한 입지를 마련한 에어재팬은 ANA와 JAL이 안쓰러웠던지 코드쉐어를 통해 그들의 적자를 어느 정도 매꿔주기도 했을 정도의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50년대 후반 ~ 60년대 초반에 들어가면서 보잉의 제트기 개발이 격화 하자, 당시에도 정정하게 사장직을 수행하던 스가하라 츠카사는 보잉의 제트기 발표회에 직접 참관해서 보고는, 바로 이거다! 라고 외치며 현장에서 보잉사와 계약을 채결하여 보잉의 세계 최초 제트엔진 비행기 707의 최초 분을 인수했다. (그는 이 결정으로 인해 후에 세계 항공업계 관계자들에게 엄청난 칭송을 받고 있다.) 그의 예측대로 보잉이 출시했던 제트기는 세계 항공역사에 엄청난 한 획을 그었으며, 에어재팬은 세계 최초 B707 도입 사의 명예를 얻게 되었다. 이후 그는 그가 그동안 고집해왔던 맥도널 더글라스의 기체를 더 이상 도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맥도널 더글라스 사와의 밀접한 관계를 끊어버렸다. 반대로 보잉 인더스트리와는 보잉 인더스트리가 에어재팬을 아시아 최대의 파트너,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민간 항공기 부문 파트너라고 칭할 만큼 엄청나게 밀접한 관계를 현재에 와서까지도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는 에어재팬은 1962년 주식시장 상장(도쿄증권거래소 1부)에 당대 최대 규모로 출범하게 되었다. 그 정도로 60년대 일본을 대표하는 회사였던 것이다. 1969년에는 에어재팬은 팬아메리카항공(이하 : 팬암, Pan American World Airlines)과 함께 보잉의 미군 거대화물기 제작 프로젝트가 실패하자 그 설계도를 개조해서 여객기로 만들어달라고 요구한다. 이를 승낙한 보잉은 팬암과 에어재팬을 위해 세계 항공역사에 엄청난 획을 그은 B747기를 만들게 되었다. 팬암과 에어재팬은 B747의 최초기체를 먼저 가지겠다며 어이없는 주제로 다투기도 하였으나, 에어재팬의 동남아 지역 항공시장 접수계획 실시에 따른 에어재팬의 자금이 부족해지자, 주문했던 B747기도 팬암에게 양도하고 2년 후 70년대 초반에 들어서야 B747기를 인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에어재팬은 일본-동남아를 잇는 대부분의 주요노선을 완전히 장악했다.) 또, 70년대 초 에어재팬의 일본 항공시장 점유율이 폭증하면서 JAL과 ANA는 점점 설자리가 없어지게 되고, 급기야 자금이 부족해지자 그들이 증오해 마지않는(?) 에어재팬을 대상으로 JAL은 13.5%의 지분을, ANA은 23.2%의 지분을 에어재팬에게 통으로 매각하기까지 한다. (이 지분은 아직까지도 에어재팬이 소유하고 있어 JAL과 ANA의 주주 회의대마다 에어재팬이대주주로 참석해 큰 영향권을 행사하곤 한다.)

그렇게 승승장구해오던 에어재팬의 70년대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는데, 일본 정부가 나리타공항을 지으면서 부터다. 일본정부는 하네다 공항의 국제선을 전부 나리타로 이관하고자 했는데, 이때 하네다의 국제선 80% 이상이 모두 에어재팬의 것이었다. 79년도 총리로 있었던 오히라 마사요시는 나리타 국제공항으로 얌전히 이전한 JAL과 ANA와는 다르게 정부를 무시하고 나리타는 포화시 확장이 매우 어렵고 활주로의 모양이 기이하게 생겨 이착륙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주장하며 하네다에서 계속해서 국제선을 띄우는 에어재팬이 정부에 도전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인지 (사실은 당시 에어재팬이 일본의 국제선 80% 이상을 담당했기 때문에 JAL과 ANA가 나리타 국제공항으로 국제선을 이관한 것은 사실상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화가 난 오히라 마사요시는 에어재팬 국제선의 60일 비행금지령을 선포한다. 이에 에어재팬은 강하게 반발하고, 당시 일본으로 들어오는 대부분의 외국인은 에어재팬을 이용하고 있었기에 외신과 재계에서 엄청난 오히라 마사요시에 대한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에어재팬은 정부를 상대로 일본대법원에 소를 제기했는데, 어이없게도 재판에서 패배하고 60일간 국제선을 띄우지 못하게 된다. 이로 인해 에어재팬은 2개월간 막대한 손실을 보게 된다. 당시에도 42세의 나이로 일본에 돌아와 에어재팬을 세계 최고레벨의 항공사 중 하나로 일군 스가하라 츠카사(1905년생)는 당시 75세의 고령에 지병을 앓고 있었지만, 회사를 탁월하게 경영하고 있었는데, 지병이 악화되고 있었고 게다가 오히라 미사요시의 끊임없는 에어재팬 괴롭히기에 스트레스를 심각하게 받았는지 지병이 급격히 악화되어 결국 79년도에 사망했다. 대다수 일본인의 존경을 받는 애사심 넘치는 이 노인의 죽음에 일본재계는 물론 전 세계 외신, 및 그가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던 외국계 회사인 보잉 인더스트리 임원진은 물론, 일본의 대부분 국민이 애도하였다. 그러나 오히라 미사요시는 어떤 이유에선지 그의 서거에 대해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고 심지어 장례식에 참여하지도 않아 전 국민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이어 2대 사장으로 취임한 스가하라 츠카사 초대회장의 동생이자 그의 바로 밑에서20년 이상 경영에 참여한 스가하라 하루키 동경항공 CFO(재무담당자)는 형의 죽음에 오히라 미사요시를 증오하게 되었고, 곧 스가하라가문 사람들이 대주주로 있어 엄청난 영향권을 행사했던 에어재팬 3/4분기 긴급 주주총회에서는 오히라 미사요시가 바라는 나리타 공항으로의 이전에 철저한 무시로 대응하자는 의견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에어재팬은 60일의 국제선 운항정지기간에 엎친데 덮친격으로채무상환 기간과 신규 항공기 도입 대금 결제시기가 돌아와 그들의 남은 자금 대다수를 소비하게 되었다. 게다가 오히라 마사요시는 변태적(?)으로 에어재팬을 계속해서 괴롭히는데, 계속해서 에어재팬이 하네다에서 국제선을 취항하자 천문학적인 벌금을 물게 한다. (당시 그는 이 문제로 이미지가 심각하게 손상되었던 탓인지, 따가운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에어재팬을 괴롭혔다.) 또 다시 에어재팬은 일본대법원에 행정심판을 요청하며 소를 제기했지만 일본 사법부가 총리와 결탁을 했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완전히 패배하게 되었고, 에어재팬은 자신들이 60일간 운항정지를 당한 기간에 채무상환을 하게 되어 자금이 없다고 어필하였다. 그러나 오히라 마사요시는 오히려 그러면 지분으로라도 때우라며, 무려 에어재팬 30%의 지분을 일본 국가 소유로 가로채온다. 에어재팬은 당시 운항정지로 ANA와 JAL에게도 많은 시장점유율을 내준 상태였다.

에어재팬에겐 불행 중 다행으로 오히라 미사요시는 총리 재임 중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스가하라 가의 사람들은 오히려 오히라 미사요시의 장례에 참석하여 명복을 빌어주며 오히라 미사요시와는 상반대로 행동하였고, 그 것이 당시 일본 내 언론들이 스포트라이트 하며 에어재팬의 이미지 메이킹에 크게 일조했다. 오히라 미사요시가 죽고 나서 80년 7월, 스즈키 젠코가 총리로 취임하게 된다. 그는 취임과 동시에 에어재팬 측에 전정권의 횡포에 대해 사과를 건넸다. 그러나 오히라 미사요시의 지지층이 정권 내에 자리 잡고 있었고, 에어재팬은 지분 30%를 돌려받진 못한다. 그러자 스즈키 젠코는 하네다 공항의 지분 일부를 에어재팬에게 주고 에어재팬과 일본정부 도쿄도청이 손을 잡고 하네다를 크게 확장시켜 아시아 최고의 허브로 성장시키자는 제안을 하고, 이제 찬성한 스가하라 가는 가문의 전 재산을 에어재팬에 투자하여 자금을 마련하고 일본정부에서 현재 가치로 3조원, 도쿄도에서 1조원, 에어재팬에서 2조원을 투자하여 하네다 공항을 크게 확장하고 활주로 6개 규모의 초대형 항공으로 성장시켰다. 또 도쿄도와 정부는 하네다 공항 내에 에어재팬 고객전용 출입국장 시설을 만들어 에어재팬의 재기를 도와줬다. 에어재팬은 현재에도 하네다 공항에 대한 20%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80년대 초, 스즈키 젠코 집권 시기 2대 CEO이었던 스가하라 하루키는 스즈키 젠코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는데(아직까지도 커넥션의혹을 받고 있다,) 스가하라 하루키는 당시 중국의 발전가능성을 보고 중국에 외인투자형태의 항공사를 만들고자 했다. 스가하라 하루키는 일본정부에 일본의 자본투자를 통한 중국 항공사 설립 컨소시엄 구성을 제의했고 정부는 사업성 검토 후 사업성이 충분히 만족스럽다고 판단되어 북경항공 설립컨소시엄이 구성되었다. 당시 에어재팬 지분 50%, 정부지분 20%, 홍콩계 민간지분 30%로 컨소시엄이 구성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현재 수교국)에는 당시 중국국립항공 1개사만 있는 상황 이였는데 노선이 턱없이 부족하여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북경항공은 외인 자본을 등에 업고 중국 국내선 장악을 시작으로 북경수도국제공항을 중심으로 다양한 국제선을 서비스하여 중국 내 시장점유율 1위 업체로 성장하였다. 이어 스가하라 하루키는 북경항공 설립으로 그치지 않고, 에어재팬을 국제 비행화물서 비스 사업분야쪽으로 크게 성장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는 83년, 직접 도입한 화물기와 화물기를 리스하는 등 최대한 화물기를 긁어모아 에어재팬 국제화물(Air Japan Cargo Business Dept.)사업부를 출범시켰다. 당시 세계최대의 국제특송화물 기업이 탄생한 것이다. 일본의 야마토(Yamato) 택배, 서양 각국 지상택배 기업과 협약하여 그는 일본특급(Japan Express) 라는 서비스를 도입하여 기업고객 뿐 아니라 일반고객도 지상에서 간단하게 신청하면 쉽게 외국으로 개인화물을 보낼 수 있는 서비스를 만들었다. 일본특급은 에어재팬의 모든 일반 여객 체의 비어있는 화물칸을 이용해 전 세계 에어재팬이 취항하는 도시라면 어디든지 안전하고 빠르게 화물을 배송할 수 있는 매우 효율적인 서비스였고, 당대에는 파격적이기 까지도 했다. 이후 80년대 중반 일본경제의 정점, 버블경제 시기가 되자, 에어재팬 화물 사업부는 90년대 초까지 급성장 하였고 당시에는 세계 최대 화물항공사였다. 에어재팬에 엄청난 발전을 이룬 스가하라 하루키는 88년, 급성 심장마비로 세상을 뜨게 되고, 그 뒤를 이어 당시 경영지원부에서 부사장을 역임하고 있었던 스카하라 다이치 3대 에어재팬 사장이 취임하게 된다,

85년부터 91년은 일본의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했던 버블경제 시기라 항공 수요가 폭증하고 있던 중, 스가하라 다이치 3대 에어재팬사장은 버블이 계속되리라 믿고 엄청난 수의 기체를 발주하고 노선을 비약적으로 늘려나갔다. (85~91년에는 이로 인해 천문학 적인 수익을 얻지만, 버블붕괴 사태에 이르자 에어재팬은 이때 발주했던 기체를 모두 중고가에 매각하고 노선을 줄이게 되어 결과적으로 큰 손실을 보게 된다.) 이때에 얻은 수익이 워낙 방대해서 에어재팬은 일본 정부에게 에어재팬 지분 10%를 다시 자신들에게 매각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일본 정부는 이를 승낙에 일본정부의 지분율을 20%로 낮췄다.

90년대, 에어재팬은 다시 점차 시장점유율(당시 일본 항공3사 중 시장점유율 60%)을 회복하고 노후기체를 모두 퇴역시키고 신규기체를 들여온다. 그러나 이때에 에어재팬에게 엄청나게 부정적인 두 가지 사건이 터진다. 90년대 중반이 넘어가면서 버블붕괴 사태가 일어나자 에어재팬이 버블경제 때 도입했었던 새것이나 다름없었던 수많은 기체를 중고가에 처분했어야 했고, 항공수요가 급속히 줄어들었다. 또, 가장 큰 사건은 도쿄에서 베이징을 향하던 에어재팬 TK904편이 97년 일본과 관계가 매우 악화된 북한에 의해 피랍되면서 이 과정에서 165명이 사망하고 247명이 북한에 억류되었다. 일본을 대표하는 항공사가 에어재팬이기에 당연히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국내외 여론은 에어재팬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를 쏟아내고, 항공 소비자는 에어재팬 TK904편 납치사건 때문에 불안에 떨며 에어재팬을 타기를 꺼려한 것이다.

에어재팬은 앞의 두 사태로 90년대에 엄청난 암흑기를 보냈고, 60~70년대 일본을 호령하던 이 일본의 대표기업은 급속히 규모가 축소되기 시작했다. 스가하라 가 사람들은 버블때 잘못된 판단으로 회사에 엄청난 손실을 끼친 스가하라 다이치 3대사장을 해임하고, 가문의 촉망받는 경영인재인 스가하라 유타로우 3대 사장이 2001년 제 4대 CEO로 추대되었다. 스가하라 유타로우는 회사 사정이 좋지 않은 상황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퍼레이팅 리스 방식으로 ILFC에서 기체를 오히려 추가로 들여와, 취약했던 미주노선과 대양주, 유럽노선을 강화했다. 또 마케팅 비용에 천문학 적인 비용을 투자했다. 그는 당시 경제지 인터뷰에서 마케팅은 1회성 비용인데 어째서 그렇게 많은 돈을 투입하나, 대부분의 기업들은 마케팅비용을 정기적으로 적절히 투자하지 않는가? 라고 묻자 "마케팅투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이자 유일한 방법이다. 많은 사람들은 마케팅 비용을 1회성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투자한 마케팅 비용은 배수로 돌아와 우리의 기업 가치에 더해지는 것이며, 나는 우리의 기업가치가 초대사장인 스가하라 츠카시씨가 일궈놓은 진정한 에어재팬에 걸맞은 위치에 도달할 때까지 마케팅비용 투자를 아끼지 않겠다."라고 대답해 유명한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스가하라 유타로우는 2004년, 역시 스가하라 가의 사람인 스가하라 케이코를 앞세워 일본 국내선 LLC(저비용항공사)인 TokyoLink 브랜드를 런칭하여 브랜드 이름에 걸맞게 일본의 모든 지방항공 하네다 항공과 저렴한 가격에 연결시키는데 성공하고, 이 TokyoLink가 엄청난 히트를 치게 된다.

전 총리인 쿠라하시 리코도 종종 지방에 갈 때 도쿄링크를 이용하기도 한다. 라고 할 정도로 일본의 대중적인 브랜드며, 일본인이 가장 친숙해하는 항공브랜드로 도쿄링크는 성장하게 된다. 특히 일본의 대표 휴양지인 오키나와로 향하는 일본 국내선 기체의 70%는 도쿄링크를 이용하며, 일본 정부에서도 공무원의 지방 출장 시 저비용에 빠르게 갈 수 있는 도쿄링크를 권장하기도 한다.

에어재팬이 시장에서 주춤하고 있는 사이 급성장한 JAL과 ANA는 도쿄링크의 등장으로 충격을 받아 Peach항공등 저가 라인을 내놓지만 도쿄링크가 일본 국내선 LLC 시장 대부분을 접수해버리는 바람에 JAL과 ANA는 그들의 국내선 점유율을 잃고 도쿄링크가 일본 국내선 전체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스가하라 유타로우는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을 이뤄낸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의 훈장과 표창을 받기도 하였으며, 성공한 기업인으로 에어재팬을 2015년인 지금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에어재팬은 아직도 발전할 부분이 많고 성장할여지가 많은 회사다. 세계 최고의 항공사로 일궈내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현재 에어재팬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오늘날, 에어재팬은 전 세계 최대의 항공 동맹체인 '스카이팀'에 소속되어 있다. 현재 시가총액은 7조 2천3백억 엔 가량으로 일본 제계22위 자리와 세계 최대 항공사의 자리(시가총액 기준)를 지키고 있으며, 직원 수는 11만 명에 달한다. (지상직 포함) 마지막으로 공시된 14년 4분기의 영업이익은 677억 7946만 엔이다. 본사는 도쿄도 신주쿠구 160-0023에 위치, 소재한 에어재팬타워며, 미쯔비시 UFJ 타워와 신주쿠 중앙공원 사이에 위치한다. 이외에도 에어재팬은 하네다 공항에 대한 지분을 가지고 있으며 하네다 공항 내 대규모 여객기 정비고와 하네다 공항 근처에 190만 배럴을 저장할 수 있는 비축유 저장고를 5곳정도 소유하고 있다. 에어재팬의 카고사업부는 80년대 설립 이후 꾸준한 성장에 30년이 지난 지금,62기의 화물기를 소유한 전 세계 4대 항공화물업체로 꼽히고 있다.(DHL,FedEx,UPS,Air Japan Cargo Dept). 또 에어재팬 일반 여객부문은 아직도 하네다를 주축으로 사업을 하고 있으며, 현재 여객기 742기를 운용 중에 있다. 에어재팬은 2007년, 일본 정부 소유의 북경항공 지분 20%중 5%를 매입했으며, 현재 북경항공에서의 지배권 강화를 계속해서 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