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ührerreich: Legacy of the Kriegsende

서문

대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수십 년, 영국과 프랑스는 강건한 경제를 기반으로 완연한 재건에 성공했고, 세계를 뒤흔들었던 대공황은 더 이상 현재를 위협하지 못한다. 한때 경악을 사던 나치 정권조차, 더 이상 ‘새 정권’으로 불리지 않고 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던 날, 프랑스의 페르디낭 포슈 원수는 "이것은 평화가 아니다. 단지 20년간의 휴전일 뿐이다"라고 경고했지만, 그 예언은 결국 실현되지 않았다.

독일의 영도자는 이성을 붙잡았고, 파멸적 망상은 뒤로 밀려났다. 그 결과, 열강들은 1946년까지 전면전을 피하며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격동의 전조에 불과했다.

전쟁이 ‘보류된’ 세계. 총통의 나라와 종전의 유산은 이제, 눈을 번뜩이며 지평선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분기점: 1936년 6월 18일 — 약이 멈춘 날

1936년 6월, 아돌프 히틀러의 주치의였던 테오도어 모렐 박사가 자리에서 물러났다. 공식적인 사유는 건강이었으나, 그 실상은 히틀러에게 과도한 약물을 투여해왔던 그에 대한 의료계의 비판과 정치적 압박이었다. 모렐의 후임으로는 베를린의 내과 전문의 루트비히 렌츠 박사가 임명되었다.

이후 히틀러의 정신은 점차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약물 투여가 중단되고, 건강한 식단과 심리적 안정에 초점을 둔 치료가 병행되면서, 지도자로서의 판단력 또한 개선되기 시작했다. 렌츠의 치료는 헤르만 괴링에게도 확장되었고, 모르핀 중독을 완화하는 과정에서 나치 수뇌부의 균형은 서서히 회복되었다.

1937년, 히틀러는 메포 채권 확대 문제로 샤흐트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으나, 이성을 유지한 채 그의 권고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독일은 군비 확장을 추진하면서도 재정의 붕괴를 피할 수 있었고, 보다 장기적인 국가 전략을 수립할 수 있게 되었다.

제1장: 1938–1939년 — 외치 독일

1938년, 오스트리아 합병(안슐루스)은 유혈 충돌 없이 비교적 원만히 진행되었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 문제에서는 과거보다 훨씬 신중한 접근이 시도되었다. 뮌헨 협정은 체결되었지만, 체코 전역을 무력으로 병합하는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독일은 독일계 주민에 대한 자치 보장을 요구하며 외교적 압박을 지속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으나, 당장 개입할 명분은 찾지 못했다.

1939년 3월, 슬로바키아 민족주의자들이 헝가리의 지원을 받아 독립을 선언했고, 체코슬로바키아는 평화적으로 해체되었다. 독일은 슬로바키아와 보호조약을 체결하며 만족했고, 프랑스와 영국은 이를 주시하면서도 전쟁에 나설 구실은 마련하지 못했다.

제2장: 1939년–1940년 — 제국의 석양

극동아시아의 일본은 유럽의 독일과는 달리,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1939년, 할힌골에서의 국경 충돌은 소련의 전격적인 군사 개입과 함께 전면전으로 확산되었다. 주코프 휘하의 소련 기갑군은 일본 관동군의 방어선을 빠르게 붕괴시켰고, 만주국 수도 신징은 불과 몇 달 만에 함락되었다.

일본은 급히 병력을 파견했으나, 해군 중심의 전쟁 준비와 중국 전선에서의 소모로 인해 효과적인 대응이 불가능했다. 1940년 초, 소련군은 평양 근방까지 진출했으며, 미국의 중재와 독일의 개입으로 휴전이 성립되었다. 일본은 만주를 소련에 할양하는 ‘하얼빈 협정’에 서명했고, 무려 열강 간의 총력전은 허무할 정도로 일방적으로 종결되었다.

제3장: 1940–1941년 — 거인의 진군

일본을 무너뜨린 소련은 유럽에서도 자신만의 질서를 구축해 나가고 있었다. 1940년 6월, 독일과의 불가침 조약 하에 행동의 자유를 확보한 스탈린은 발트 3국에 마지막 통첩을 보내었고, 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는 무력 저항 없이 붉은 군대의 진주를 받아들였다.

곧바로 각국은 ‘자발적’으로 소련 가입을 선언했고, 크렘린은 이를 ‘사회주의 인민의 선택’이라 선전하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수천 명이 체포되었고, 국경은 철저히 봉쇄되었다. 독일은 이에 침묵으로 일관했으며, 서방 열강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동시에 소련은 루마니아에도 압박을 가했다. 1940년 7월, 스탈린은 베사라비아와 북부 부코비나의 반환을 요구하며, 군사적 행동을 암시했다. 루마니아는 독일의 묵인을 확인한 후 마지못해 요구를 수용했고, 붉은 군대는 드네스트르 강 서안까지 진출했다.

이 일련의 확장은 소련에게 전략적 완충 지대를 안겨주었으나, 동시에 독일과의 긴장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동부 국경에서 ‘적색 연방’이 조용히 영역을 넓혀가는 동안, 일본은 또 다른 균열음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제4장: 1940–1942년 — 짙어지는 저녁노을

소련과의 전쟁에서 참패한 일본은 중일전쟁에서도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일본군은 주요 거점을 방어했으나, 중화민국 국민정부와 중화인민공화국은 각각 서방과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강력히 저항했다.

일본은 베이징과 톈진 일대를 중심으로 ‘화북자치정부’를 세워 괴뢰화를 시도했으나, 이는 점차 민중의 지지를 잃고 게릴라전에 시달렸다. 1942년 이후, 일본군은 장강 이북의 통제력을 대부분 상실했고, 남중국 및 해안 지역에 병력을 집중하게 되었다.

제5장: 1940–1942년 — 북아프리카 전쟁

1940년, 무솔리니는 독일의 팽창에 자극받아 북아프리카에서 독자적인 군사 작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리비아를 거점으로 한 이집트 침공은 허술한 병참과 과도한 낙관에 발목이 잡혔고, 곧 영국군의 반격에 직면했다.

1941년, 토브루크를 탈환한 영국군은 벵가지를 포위했고, 이탈리아군은 리비아에서 철수했다. 1942년, 로마에서는 무솔리니의 무능에 분노한 쿠데타가 일어났고, 그는 체포되었다. 그와 동시에 왕국의 국왕은 영국과 휴전을 선언하며 이탈리아는 전선에서 공식적으로 이탈했다.

이에 독일은 알프스를 넘어 북부 이탈리아에 진입해 무솔리니를 구출한 뒤 밀라노에 친독 정권을 수립했고, 이탈리아는 사실상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이후 독일은 발칸 반도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제6장: 1942년–1945년 — 초저녁의 하늘

연이은 패배는 일본을 내부적으로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갔다. 해군은 미국과의 전면전을 주장하며 남방정책을 고수했고, 육군은 소련에 굴복한 정부에 반발하며 쿠데타를 감행했다.

1944년, ‘묘도 사건’이라 불린 해군과 육군 간의 유혈 충돌이 벌어졌고, 이 사건을 계기로 쇼와 천황은 군부 해체를 단행했다. 이후 오카다 총리를 중심으로 한 민간 정부가 수립되었고, 일본은 제한적인 헌정 질서의 회복을 시도했다.

한편, 소련의 전폭적 지원을 받은 중화인민공화국은 국공내전에서 승리하게 되었다. 마오쩌둥은 소련의 압박에 굴복해 이념 노선을 조정했고, 사실상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한 중화인민공화국은 독자성을 상실했다.

제7장: 1943–1945년 — 독일인의 철강으로

얄마르 샤흐트의 지휘 하에 독일 경제는 전쟁 없이도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1943년 이후 독일은 유럽 내 무역과 금융을 주도했고, 프랑스·북이탈리아와 함께 삼각 경제 블록을 형성했다. 독일의 소비재와 기계류는 동유럽을 잠식했고, 그 결과 주변국 다수는 경제적으로 예속된 위성국이 되었다.

군사 기술의 발전도 가속화되었다. 페네뮌데에서는 로켓 기술이 끊임없이 개량되었고, V-2의 선행 모델이 시험 단계에 들어섰다. 1944년 말, 독일의 '우라늄 클럽'은 임계 질량 계산에 성공하면서 독자적인 핵 개발 능력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제8장: 1945–1946년 — 폐허에도 해는 뜨는가?

전쟁의 실패와 정치적 혼란 속에 일본은 대외 팽창을 중단하고 해양 방위 중심의 전략으로 회귀했다. 1946년, 일본은 남양 군도에서 철수했고, 동남아 국가들과의 경제 협력을 시도했다.

미국은 이를 경계하면서도 일본에 대한 경제 제재를 유지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만주 반환을 요구했고, 소련은 이를 형식적으로 수용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자국의 영향권 안에 두었다.

일본은 ‘중일평화협정’에 서명했으나, 전쟁 피해의 회복은 여전히 요원한 과제로 남아 있었다.

에필로그: 1946년 5월 12일 — 예정된 파경

1946년, 독일은 더 이상 도전받는 패자가 아니었다. 재무장을 완료했고, 내정은 안정되었으며, 유럽 경제권을 주도하며 유럽의 중심에 군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우위는 영원하지도, 절대적이지도 않았다.

동방에서는 소비에트 연방이 조용히 칼을 갈고 있었다. 불가침 조약은 유지되었으나, 그것이 의미하는 평화는 허상에 가까웠다. 폴란드, 핀란드, 발트 3국은 전쟁의 불씨로 남아 있었고, 국경을 따라선 이미 전시 상태에 가까운 준비가 이뤄지고 있었다.

서유럽도 마찬가지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을 더 이상 달래려 하지 않았고, 재무장을 통해 다시 한 번 유럽의 운명을 쥐려 하고 있었다. 북아프리카 전투와 해군력의 우위는 영국을 대담하게 만들었고, 프랑스는 과거의 굴욕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대서양 건너 미국은 고립주의적 정서와 국제 개입 요구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있었고, 유일한 핵 보유국으로서 모든 열강에게 잠재적 위협이자 억제력이 되었다. 독일과 소련은 이에 대응해 핵개발 경쟁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극동의 일본은 패배와 내란의 상처를 간직한 채, 전장의 승자라 부를 수 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만주는 사라졌고, 본토는 혼란에 빠져 있었으며, 천황 중심의 헌정 회복은 미완의 상태에 머물렀다. 조선과 유구에서는 독립 요구가 거세졌고, 내부 불안정은 동아시아 전체를 뒤흔들 잠재적 불씨로 남아 있었다.

‘유예된 전쟁’—그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만 총성이 멎은 그 공백 속에서, 세계는 더 큰 전환의 문턱에 서 있었다. 전쟁이냐, 평화냐. 새로운 시대의 서막은 이제,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선택을 요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