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der of Might는 1960년을 배경으로 미국과 유럽 간에 벌어지는 냉전을 다루는 대체역사 세계관이다.

리반님과 함께 현재 구상 단계에 있다.

1960년 현재

1차대전 (1904 - 1915)

동맹국-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 러시아, 오스만 제국

협상국-독일공화국(사민), 프랑스공화국(후반 전선에서 이탈), 대영제국(보수), 일본제국(군부), 이탈리아(후반 갈아탐)

-프랑스 군사쿠데타(1911.5), 필리프 페탱 장군이 브루실로프 대공세에서 프랑스군의 궤멸적인 피해를 보고 실리 없는 전쟁을 시작한 정부를 타도. 이후 프랑스는 사실상 전선에서 이탈하고 적총내전(赤蔥)에 돌입.

-영러 그레이트게임 종결(1915)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물결이 잠재워지고 민족주의 성향대두(같은 사회주의자들의 배신)

- 폴란드, 우크라이나, 발트3국, 핀란드, 캅카스, 벨로루시 독립(민주적 구성의 원칙)(1915.12)

-오헝분할(오스트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크로아티아, 민주적 구성의 원칙, 1915.12)

전간기전후

제2세계

구상

독일

모니터링 독일 제국은 1888년 즉위한 프리드리히 3세와 제국의 통일을 주도한 비스마르크 간의 충돌로 시작한다.

프리드리히 3세는 자유주의 사상에 심취한 상태였으며,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시민의 권리에 대해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이 있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민의를 대표하는 제국의회를 무시하며 정책을 진행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특히 그가 발의한 1878년의 반사회주의법은 프리드리히 3세가 보기에 시대에 뒤쳐진 반동주의적 인물이라고 보이기에 충분했다.

즉위와 동시에 프리드리히 3세는 비스마르크를 불러 사퇴를 종용했으며, 결국 1888년 7월, 황제의 명령을 받은 비스마르크가 모든 인민에 대한 언론집회출판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어떠한 검열도 금지한다는 제국 인민의 권리법, 제국인권법을 발의하고 수상직을 사퇴하며 본격적인 독일의 민주주의가 시작된다.[1] 또한 프리드리히 3세는 소선거구제를 폐지하고 완전 비례대표제를 의회에 요구하는 서한을 보내며 의원들을 압박했다. 보수당과 제국당은 법안을 재고해달라며 애원했지만 중앙당과 전국자유당이 압도적인 표차로 가결 시키면서 새 선거법이 제정되었다.[2]

급진적으로 이루어진 개혁과 함께, 1889년 프랑스혁명 100주년과 함께 세계적으로 벌어진 제2인터네셔널이 발족하면서 불과 1년 전 해체되었던 독일의 사회민주당이 이곳에 가입한다. 당시 인터네셔널에서는 독일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이는 독일이 당시 열강 가운데서 유일하게 사회주의 운동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 등이 사회민주당의 휘하에 존재하고, 평의회를 개최해 사회민주당의 당론을 의결하고 이를 따르는 제1인터네셔널과 같은 체제를 독일 내에서 구축했기 때문이다.[3]

그리고 1890년 2월 2일, 프리드리히 3세의 사상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8차 제국의회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이 득표율 35.27%로 대약진하며 397석 중 무려 140석이라는 의석을 확보하게 된다. 특히 좌익자유주의 정당인 자유사상가당과 인민당을 합치면 무려 210석 즉 과반을 확보해 연립여당을 노려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사회주의 계열 정당의 정권 창출을 볼 수 없었던 좌우익 자유주의 정당[4]과 중앙당이 연합하여 거국내각을 구성한다. 프리드리히 3세는 선거에서 최고로 많은 지지를 받은 정당이 아닌 다른 정당이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민의를 왜곡한다고 생각해 제국 신문의 투고란에 황제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란 무엇 인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투고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5]

이 선거는 또 당시 각 세계의 노조와 사회주의 정당의 친목단체 정도로만 운영되던 제2인터네셔널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제2인터네셔널의 목표인 합법적 수단을 통한 사회주의 정권 창출이라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의 가능성을 제대로 보여준 선거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회주의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불어넣은 사회민주당은 독일을 중심으로 제2인터네셔널의 총평의회를 다시 구성할 것을 세계에 타진하였고, 1891년 12월 25일 독일에서 열린 국제 사회주의자 연합 대회()에서 총평의회 의장을 선출하였는데, 그가 프리드리히 엥겔스였다. 70이 넘은 엥겔스는 노구를 이끌고 단상에 서서 다시 한 번 중앙집권적 사회주의 운동을 역설했다.

새로 구성된 독일의 새 내각은 전국자유당의 루돌프 폰 베니그센을 수상으로하는 자유주의 거국내각이었다.[6] 하지만 베니그센은 아프리카 식민지 정책이나, 대외정책에 있어서 같이 내각을 구성하던 사사건건 자유사상가당의 루돌프 버차우와 충돌했다. 특히 1891년에 독일령 동아프리카가 오만 정권을 완전히 끝장내며, 독일 동아프리카 회사로부터 경영권을 정부로 돌린 이후 이 갈등이 더욱 심해졌다. 갈등의 원인은 바로 식민지 주민들도 투표권을 가지는 지에 대한 입장 차이 때문이었다. 당시 다윈의 진화론은 사회진화론으로 변질되며, 백인이 열등한 인종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사상이 주류로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버차우는 의원 이전에 과학자였으며, 그는 대표적인 반다윈주의, 반인종주의 사상가였다. 결국 1891년 9월 버차우가 식민지 주민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하는 자신의 제안을 수용하거나 그에 상응하는 대안을 내놓지 못하면 내각을 불신임 하겠다는 최후 통첩에 베니그센이 영국식 자치령을 만들어 크게 서아프리카, 서남아프리카, 동아프리카 자치령을 세우고 각 주민들의 투표로 의회를 구성하며, 독일에서 총독을 파견하는게 어떻냐는 제안을 버차우가 받아들이며 루돌프 타협[7]이 성사된다.

한 차례의 큰 갈등이 마무리된 이후 베니그센은 버차우의 급진적인 행동이 당내에서 지지받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특히 일반 대중들이 아프리카 식민지의 사실상 방류를 심각히 원하지 않고 있었던데다가, 사회진화론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지지 받는 이론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1892년 8월 자유사상가당의 대표적 반사회주의자인 유겐 리히터와 접촉하고 그를 대표로 추대하면서 버차우를 당내 비주류로 만들어버린다. 버차우는 흔히 동지의 배신이라고 회자되는 이 사건을 통해 정치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었으며, 1892년 9월 의원직을 사퇴한다.

그리고 1893년 열린 모두가 주목하던 9차 제국의회 선거는 식민지 이탈을 주도했던 자유주의 연립정당들의 지지율이 대폭 감소하고, 보수주의 우익 정당들이 10%p이상 더 득표하며 세력을 늘렸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결과는 단연 사회민주당 40.33%, 397석 중 160석 석권이라는 것이다. 특히 자유사상가당에서 있었던 동지의 배신 이후 적지 않은 의원들이 인민당으로 옮겨가며, 인민당도 큰 성과를 거둬 9.76%, 38석을 얻은 상황이었다. 문제는 바로 이 인민당이 사회주의적 성향이 짙은 정당이라는 것이었고, 결국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주의 정당이 합법적인 과정을 거쳐 권력을 손에 넣게 된다. 이 때 새로운 수상으로 지목된 사람은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 베벨이었다.

베벨은 사회주의 정권의 탄생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엥겔스에게 제2인터네셔널의 총평의회 소집을 요청했고, 엥겔스가 전 세계에 이를 타진하자 만국의 당국의 감시를 피해 숨어 있던 사회주의자들이 독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9월 3일 오전 제국의회에서 사회연금법을 통과시킨 베벨은 내일 함부르크에서 예정되어있던 제2인터네셔널 총평의회장으로 이동 중이었으나, 알프레드 폰 발더제(Alfred von Waldersee)가 이끄는 슐레스비히의 4군단이 사문화된 반사회주의법을 근거로 그를 체포하고 베를린으로 진격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사회주의자들은 급히 탄광-철강 노조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루르 지역으로 피신하기 시작했다.....

이후 대강 구상

  • 발더제는 당시 은퇴후 기거 중이던 비스마르크를 재소환
  • 빌헬름 3세는 상황이 벌어지자 보수주의 성향이 강한 프로이센 지역 대부분의 군 장성의 지지를 얻음.
  • 바이에른 지역에서 반동주의 운동이 일어나며 뮌헨에서 왕정복고 선언을 발표하며 바이에른 왕국(배후 오헝).
  • 이후 독일이 사회주의 독일이 내륙국이됨.(알자스로렌라인지역, 후에 국경을 틀어막아 철강석탄산업을 말라죽이려고 했을 때 전쟁이 터지게할지 말지 생각 중). 평화협정을 체결하나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짐

제1차 세계대전

모니터링 1894년의 평화협정으로 독일은 프리드리히 3세를 중심으로 하는 게르만 연합왕국과 빌헬름 2세를 중심으로 하는 독일 제국으로 양분 되었다.[8][9] 한동안 평화가 유지되었으나, 1904년 프리드리히 3세가 후두암으로 사망하자 연합왕국은 그동안 명목 상 존재했던 왕정제를 폐지하고 공화국화를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빌헬름 2세가 독일 연합왕국의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며 연합왕국에 왕위 계승전쟁을 선포한다. 당시 영국은 독일과 1895년 체결한 영독협상[10]에 따라 독일 제국에 선전포고하였다. 이에 독일 제국과 삼국동맹을 체결한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영국에 선전포고하였다. 하지만 전쟁은 영독협상국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먼저 독일 공화국은 강력한 라인 지대의 산업기반이 있었지만 전략적 위치가 너무 나빴으며[11], 전쟁을 위해 준비된 정규군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결국 개전 6개월 만에 작센 공업지대가 함락당했으며, 동맹국군은 계속 진격하여 공화국의 수도인 쾰른 앞까지 도달하였다.

당시 프랑스의 페르디난트 사리아니(Ferdinand Sarrien) 총리는 노동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있었는데, 이런 정책이 인기를 잃어가는 와중에 1905년 12월 이른바 파나마 스캔들이 폭로되며 기존의 자본가, 자유주의 정당들에 대한 회의감이 하늘을 찌르면서 결국 1906년의 프랑스 총선에서 노동자 인터네셔널 프랑스 지부가 42.95%의 득표율로 좌파 연립정권을 구성하며, 사회주의 인터네셔널을 구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독일 공화국 편으로 참전하였다.[12] 이후 프랑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이루어진 하이델베르크 대공세가 성공하면서, 동맹국은 주춤하고 참호를 파기 시작했다. 1909년까지 이어진 이 참호 공방전을 끝낸 것은 영독협상군이 벌인 팀멘도르퍼 상륙작전이었다. 영국군 6만 2천 명과, 공화국군 5만 5천 명이 덴마크 해협을 우회해 발틱해에서 상륙 작전을 벌인 것이었다. 당시 북방 해상전력에 공백이 컸던 동맹국은 이를 대응할 수 없었고 전세가 단숨에 역전되며, 전방에 나가있던 주력군이 급히 후퇴하여 전선이 이중화 되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 전선에 대치 중이던 공화국군과 프랑스군이 10월 대공세를 벌이며 베를린 서쪽의 독일 지역을 거의 수복하게 된다.

패색이 짙어진 빌헬름 2세는 알프레드 폰 티르피츠 제독을 니콜라이 2세에게 파견하여, 독일 제국이 붕괴하면 러시아와 영국이 국경을 맞닿는 꼴을 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또 독일은 참전할 경우 현재 독일이 보유한 해상 전력을 조건 없이 러시아 해군에 넘기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1910년 1월 4일 러시아 제국이 대영제국에게 선전포고 하였다. 11년 봄에 개시된 브루실로프 대공세로 브란덴부르크 전선의 공화국군과 프랑스군은 무려 100만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고 엘베강 서쪽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물론 이 과정에서 동맹군, 특히 러시아군이 70만이 넘는 사상자를 내며 전투에서 승리는 했지만 너무 많은 인력과 물자들을 잃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을 주시하는 일본은 1910년 9월 3일 영일동맹을 명분으로 선전포고 없이 러시아령 뤼순항과 블라디보스토크항을 점령하고 연해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13] 그 해 10월에는 제국 해군 소속의 통상파괴를 수행하던 지중해 전단이 영국 해군의 추격 피해 오스만 제국에 정박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은 이를 거부하였으나, 빌헬름 2세가 멋대로 군함의 양도를 선언했다. 그리고 2척의 경순양함이 오스만 국기를 걸고 영국령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정박한 전함 1척에 어뢰를 발사해 침몰 시킴으로써 강제로 세계대전에 동맹국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선전포고 없는 기습공격에 분노한 대영제국은 북해와 덴마크 해협의 제해권에 쏟아부었던 해군의 절반을 지중해로 급파하였다. 러시아는 지금이 마지막으로 전세를 역전할 수 있는 시기라고 판단하고, 발틱 함대와 흑해 함대를 출격, 10월 26일과 27일 이틀 간에 걸친 양대해협 해전[14]에서 숙련도와 기술력 문제로 러시아 해군이 소멸하면서[15] 그리고 이 사실이 국내에 알려지자 1910년 11월 대대적으로 민중봉기가 발생했으며, 혁명이 발생해 니콜라이 2세는 오스트리아-헝가리로 제국을 버리고 도망갔다. 신생 러시아 공화국은 협상국과의 평화협정을 체결하기를 원했지만, 협상국은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다.[16] 러시아 공화국이 이를 거부하자 극동에서 잠시 교전을 멈췄던 일본군이 다시 진격을 시작했다.

오스만 제국은 협상국 열강들이 유럽전선에 발이 묶여있는 동안 영국령 아프리카를 침공할 계획을 세웠으나, 영국은 벨푸어를 통해 오스만 제국 내의 민족감정을 부추기고, 독립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오스만 제국은 내부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쿠르드 소수민족을 학살하며 건재함을 과시하려 했으나, 1911년 터키 민중들과 함께한 무스타파 케말 아타콘세이의 6.7 혁명을 통해 오스만 제국이 붕괴하게 된다.

전쟁의 의지가 없는 러시아와 붕괴한 오스만 제국을 뒤로 하고 남은 국가는 기존의 동맹국 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이탈리아는 전쟁 전의 전략구상에서 전쟁이 4년 안에 끝날 것으로 예상한 상황이었고, 현재 전비 지출은 예상의 5배가 넘었으며 사상자는 양국을 합쳐 30만을 넘긴 상황이었다. 특히 전쟁 참여의 대가로 독일이 넘길 것을 제안했던 전함들과 영국령 이집트는 각각의 이유로 얻어낼 수 없게 되었다.[17] 이에 사실상 1909년부터 총소리 한 발 울리지 않은 이탈리아-프랑스 국경에서는 합의 하에 서로의 주둔 병력을 철수했으며(1912)[18], 1914년에 전비지출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던 이탈리아 왕국이 무조건 평화를 제안하고 이를 협상국이 받아들이면서 이탈리아는 전쟁의 수렁에서 벗어나게 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어떻게든 바이에른을 영향권 아래에 두려고 노력했지만, 협상국이 완강히 거부하자 전쟁을 지속한다.

그러나 전선이 고착화되어 끝없는 소모전만 벌이고 있던 협상국은, 1914년 9월 영국이 이탈리아에 전시 부채를 대납하는 대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항해 협성국으로 참여할 것을 요구하고 이를 이탈리아가 받아들이며 이탈리아는 협상국으로 다시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19] 9월부터 쥐스티롤을 통해 빈으로 진격하는 영국군과 이탈리아군[20]의 보고를 받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9월 25일 패배를 인정하고 협상을 제안했다. 협상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으며, 이를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받아들이면서 동맹국이 붕괴한다. 특히 당시 빈에 머물던 니콜라이 2세가 러시아 제국의 무조건 항복도 같이 선언하였는데, 당시 러시아 공화국에서 매우 큰 반발을 불러왔고 왕정복고파가 러시아 공화국의 권력투쟁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후 마지막 남은 독일 제국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항복으로부터 2주 후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190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은 10년 만에 끝을 보게 된다.

이후 1915년 1월 14일, 승전국인 독일 공화국, 대영제국, 프랑스 공화국[21], 일본 제국, 이탈리아 왕국과 패전국인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22] 간에 쾰른 조약이 체결되며 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나게 된다.

미국은 독일 내전에서 확전된 제1차 세계대전에 어느 쪽으로도 참전하지 않았다.

전간기

1915년 맺어진 쾰른 조약의 내용은 이랬다. 먼저 독일 제국이 독일 공화국에 흡수되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반대로 제국의 동맹국이었던 참전국들에게 많은 책임이 전가되었는데, 독일 공화국은 협상국으로써 전쟁배상금 지불에 대한 의무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상자는 협상국에서만 450만 명[23]을 넘어선 상황이었고, 이 사상자의 대부분은 러시아 제국이 주도한 브루실로프 대공세에 의해 발생했다. 협상국은 러시아 제국에 대해 1320억 파운드의 채무를 지웠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역시 이 불길을 피해갈 수는 없었기 때문에 350억 파운드의 채무를 지게 되었지만, 러시아에 비해서는 사정이 나았다.

두 번째로 영러 해군조약에 합의하여 영국의 10분의 1 수준의 해군력을 유지하는 데 동의해야 했다. 마지막으로는 일본에게 점령당한 사할린 북부를 잃었다. 일본은 연해주까지 영유권을 인정해야한다고 강하게 주장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특히 1320억 파운드의 배상금 중 일본의 몫은 단 7500만 파운드로 책정되며 열강들 사이에서 체면을 구겨야 했다. 또한 영국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24][25], 러시아는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각 지방마다 자치정부를 구성할 것인 지에 대한 국민 투표를 협상국의 감시 아래 시행했는데, 여기에서 벨라루스나 발틱 공화국, 우크라이나 공화국, 캅카스 자치국이 독립의 절차를 거치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 공화국에 열렬한 사회주의자로 이름을 날리던 블라디미르 레닌은 같은 사회주의자인 독일이 앞장서 러시아를 착취하는 조약을 추진했다는 것에 사회주의에 대한 환멸을 느꼈다. 이후 러시아 내에서는 극좌와 극우 민족주의자들이 크게 힘을 얻게 되었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러시아 제국군은 쾰른 조약으로 사실상 해체되었다. 레닌은 쾰른 조약 이후 사실상 두 개의 정부로 갈라져있던 러시아 귀국길에 올랐다.

러시아 혁명 당시의 상황

1910년 혁명을 주도한 민중세력은 라브르 코르닐로프 대장에 러시아를 전쟁통에서 빼줄 것을 요청했다.[26] 코르닐로프는 미하일 알렉세예프[27], 알렉세이 브루실로프[28]와 함께 대전기의 삼두정을 펼쳤다. 협상국에는 지속적으로 평화를 요청하면서, 동맹 중이던 독일에 파병한 병력을 복귀시키는 등 전쟁지속 의사가 없음을 지속적으로 피력했다. 특히 민중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던 사회 운동의 탄압과 자유주의 개혁의 거부를 해결하는데 주력했다.

1915년까지 삼두정은 생각보다 괜찮은 성과를 보였다. 국가두마가 민중에 의해 불탔기 때문에 전권을 가지고 자유주의 개혁이 진행되었다. 코르닐로프는 공화국 헌법 제정을 띄웠으며, 알렉세예프는 일반 민중에의 투표권의 부여, 브루실로프는 국가철도계획을 수립했다. 1911년 군대 개혁, 삼두정에 대한 비판을 제외한 목표의 집회와 시위가 보장되었으며, 이러한 시위의 내용은 군의 민중장교들을 통해 빠르게 삼두정 체제로 진정되었다. 당시 민중장교라는 직제는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에 의해 제안되었고, 민중장교를 통해 효과적으로 민심을 관리할 수 있음을 깨달은 삼두정은 만네르헤임을 민중청장으로 임명해 관련된 문제들을 일임했다.[29]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던 삼두정은 1915년 쾰른에서 진행된 평화회담에서 위기를 맞는다.

주권사회주의공화국연방(Föderation der souveränen Sozialistischen Republik:FdsSR)의 수립

검은 월요일과 영국발 대공황

국가사회주의러시아노동자당(Наци:나치)의 러시아 공화국 장악

프리모리예 재무장
국민투표를 통한 벨로루시 병합
상트페테르부르크 협정과 발트 진군

2차 세계대전

크림 반도 요구와 우크라이나 침공

루마니아-폴란드 우회,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체결

이중제국 항복과 자그레브 오스트리아 수립

각주

  1. 비스마르크는 황제의 사퇴 종용으로 불려간 후 곧 수상직을 잃을 것을 직감하고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가기 위해 1888년 4월, 사회주의 정당인 사회주의노동자당을 반사회주의법을 통해 해체해버린다. 오히려 이 조치가 프리드리히 3세의 사퇴 압박을 강하게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다.
  2. 보수당과 제국당은 어쩔 수 없는 처사였는데, 지금까지는 소선거구에 결선투표제였기 때문에 득표율이 높게 책정됨과 동시에 의석을 일부 지역에서 고정적으로 얻어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 물론 평의회에서 결정되어서 따랐을 뿐, 당시 주류인 라인철강노조를 제외하고는 평의회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어낸 노조는 별로 없었다. 또한 노조들의 성향도 제각각이어서 애초에 평의회 위에 사회민주당이 있는 게 아니라 평의회 아래에 사회민주당이 있어야한다는 파벌도 존재했을 만큼 내부 잡음도 많았다. 다만 1888년의 베를린의 여름이라 불리는 새 시대 앞에 모두 잠시 이권을 내려놓았을 뿐이다.
  4. 인민당 제외
  5.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프리드리히 3세는 선출된 권력의 정당성과 자신의 왕권의 정당성 중 선출된 권력의 정당성이 더 높다고 보았다. 결국 선출된 권력은 국민의 선택을 받았지만, 자신은 그러한 권력의 정당성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1890년의 선거 이후 프리드리히 3세는 황제로서의 정치적 발언을 되도록 자제하였으며, 신문에 투고하고 가끔 기자들의 익명의 취재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정치 개입의 끝이었다.
  6. 베니그센은 과거 비스마르크가 제정한 반사회주의법을 반대했던 인물 중 하나이다. 물론 그건 사상으로서의 자유를 인정했을 뿐, 사회주의와 친하게 지내려는 생각은 아니었다.
  7. 루돌프 폰 베니그센-루돌프 버차우
  8. 연합왕국은 사회민주주의 정권이 집권한 반면, 제국은 1880년대 말 프리드리히 3세가 넓힌 의회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며 사실상 전제군주제로 변질되었다.
  9. 당시 게르만 연합왕국의 집권여당인 사회민주당은 국제주의 노선을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40년 전에 전쟁으로 뺏어온 알자스-로렌을 다시 얻기 위해 민족주의를 내세워 전쟁을 추진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집권 사민당은 영토를 되찾을 의지조차 없었다. 당장 동쪽의 구체제가 더 큰 골칫덩이였기 때문이다. 또한 영국도 러시아의 부동항 확보를 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에 대화가능한 민주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환영했고, 특히 유럽의 균형을 붕괴 시킬 우려가 있었던 삼국동맹을 크게 약화시켰다는데 이익이 있었다.
  10. 당시 게르만 왕국은 유럽에 동반자가 필요했지만, 프랑스는 알자스-로렌 무단점령으로 국민적인 감정이 문제였고,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제국은 구체제인데다 사회주의가 금지되어있어 협상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런 와중에 19세기말 혼자서는 세계에서 패권을 유지하기 어렵고, 동맹을 찾아야 하는 영국에 딱 맞는 조건의 파트너가 생긴 것이다.
  11. 독일 제국의 월경지인 바이에른 왕국과 독일 동쪽의 독일 제국, 그리고 그를 연결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이르는 너무 넓은 전선이 문제였다. 특히 독일 제국은 땅이 밀리면 후퇴할 수 있었지만 공화국은 후퇴 시 바로 라인 공업지대와 작센 공업지대이기 때문에 길고 불리한 전선에서 별다른 전략적 변환을 시행할 수 없었다.
  12. 당시에는 알자스-로렌에 대한 독일 공화국의 영구적인 영유권 포기를 조건으로 걸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13. 당시 주한 러시아 공사는 고종에게 일본에 맞서 동맹국으로의 참전을 요구했으나 고종은 이를 거절하였다. 학자들은 이 때를 계기로 고종의 노선이 친러에서 친일로 옮겨졌다고 추정하고 있다.
  14. 덴마크 해협, 보스포루스 해협
  15. 독일의 함대가 무조건적으로 러시아의 명령을 따른게 패착이었다. 러시아 해군은 근대적인 해군교리를 통한 전략을 짜지 못했고, 압도적인 숙련도 차이로 붕괴했다.
  16. 일본의 의견도 있었지만, 브루실로프 공세로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은 협상국은 무조건 평화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이었다.
  17. 애초에 이들은 왕위계승전쟁이 세계대전으로 번질 것을 상정하고 있었다. 다만 프랑스와 러시아의 참전은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였다.
  18. 1911년 발생한 적총내전 때문에 당시 프랑스 인터네셔널은 이탈리아 방면 주둔군이라도 불러와야하는 상황이었다.
  19. 애초에 이탈리아는 전쟁을 같이 일으키긴 했지만 전선에 부대를 파견하지도, 지중해에서 통상파괴를 수행하지도 않았다. 지중해의 영국 함대와 신사협정을 몰래 맺어두었기 때문이다. 또한 프랑스의 참전 이후에도 서로 참호를 파고 아무런 총격전도 오가지 않았던 점도 컸다. 하지만 딱 한번 이탈리아군이 출동한 적이 있는데 그게 브루실로프 공세로 이탈리아군은 최소한의 인력을 파병하는 조건으로 많은 전쟁물자를 무상으로 동맹국에게 넘겨야 했다. 대부분의 전시 부채는 여기서 나온 것이다.
  20. 바로 쥐스티롤을 할양 받는 조건이었다.
  21. 영국에 망명한 프랑스 인터네셔널 지도부가 참석했다. 정부가 없어진 땅에서 내전을 벌이던 적군 레 리즈(Les rigides), 파시피스트(pacifiste)와 총군 페탱은 러시아 공화국과 마찬가지로 참석하지 못했다.
  22. 러시아 공화국은 이 회의에 초대도 받지 못했다. 적법한 정부는 니콜라이 2세의 제국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23. 독일 공화국 191만, 프랑스 133만, 영국 115만
  24. 당시 영국은 러시아의 해상전력을 완전히 무력화시킴으로써 그레이트 게임이 끝났다는 것 자체에 만족한 상황이었고, 전쟁에서의 막대한 손실은 확고해진 식민지 영향력을 바탕으로 충당할 계획이었다.
  25. 영독협상의 사이가 멀어진 계기이기도 하다.
  26. 코르닐로프는 민중봉기를 진압할 생각이었지만, 시위대가 자신을 보고는 러시아를 구해달라고 소리치는 것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가장 혁명에 반발했지만, 혁명으로 인해 새로 짜여진 판에 가장 먼저 스며들었다. 삼두정을 통해 군대 개혁의 방파제로 나머지 둘을 사용하려는 것 역시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27. 코르닐로프보다는 개방적이었지만, 군대 개혁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견지했다.
  28. 가장 개방적으로 혁명의 취지에 어느정도 공감했을 뿐만아니라, 자유주의 개혁에도 긍정적이었다. 다만 브루실로프 대공세라는 큰 과오가 있어서 삼두정 내에서의 힘은 약했다. 사실상 삼두정의 바지사장이었다.
  29. 삼두정은 서로에 대한 견제와 헌법 제정 이후 정권을 확보하기 위한 군대 내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의 이름으로 정책을 실시해 득실이 생기는 것 보다 만네르헤임을 통해 정책을 집행해 변수를 최대한 없애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