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중 하나의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관리자. 문서를 고치려면 이메일 인증 절차가 필요합니다. 사용자 환경 설정에서 이메일 주소를 입력하고 이메일 주소 인증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부여 세계관}} {{부여 관련 문서}} {| class="wikitable" style="color:#000; border:2px solid #003478; max-width:450px; float:right;" |- | style="width:420px;" | <div style="margin: -5px -9px">{{#multimaps: 37.578667, 126.976976 | zoom = 15 | height = 300px}}</div> |- ! style="background:#003478; color:#e3ba62;" | 위치 |- |} {{목차}} == 개요 == [[부여]]의 법궁(法宮). [[부여 황실]] 일원과 황실을 보좌하는 [[궁무청]] 및 [[추밀원]]이 입주하고 있는 궁궐이다. 일반적으로 '''황거(皇居)'''라고 불린다. [[부여 황제]]가 거주하는 궁궐은 특별한 구(區)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주소는 [[종로구]]에는 속하여있지 않은 [[조선 (부여)|조선]] [[천경도]] [[천경특별시]]이다. 1965년 7월 사적으로 지정된 부여의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문화재청]]의 감시 하에 개축 및 수리가 이뤄진다. == 역사 == [[조선 (부여)|조선]]이 건국된 이후, [[정도전]]의 주도 하에 건설되었다. 건설 완료일자는 1395년 1월이었다. 그러나 이 때는 칸 수가 적고 담장도 없어 법궁이라고 하기에는 초라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후 [[성조 (부여)|성조]] 왕의 대에 들어 대대적인 개축 공사가 이뤄져 현재와 비슷한 모습을 갖추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선조가 궁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치자, 분노한 백성들에 의해 경복궁 방화 사건이 일어나면서 경복궁은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한성이 조선군에 의해 탈환된 이후에도 경복궁은 재건되지 않고 남아있었다. 경복궁의 부지는 19세기 후반까지 [[조선 왕실]] 및 [[부여 황실]]이 소유한 국유지이자 출입이 금지된 금지(禁地)였다. [[부여]]로 정권이 바뀐 이후에도 법궁은 창덕궁이었다. 그러던 1882년, [[부여]]의 개항 및 근대화로 인하여 근대적인 궁궐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인경궁]]과 더불어 경복궁이 재건되었다. 터까지 남기지 않고 파괴된 전각들이 많았기 때문에, 일부 전각들은 전통식으로 다시 지었지만 본래 [[홍례문]]과 근정전이 있던 자리는 아예 밀어버리고 근대식 건물을 지었다. 이후 근대식 건물의 이름을 [[근정전 (부여)|근정전]]으로 지으면서 황제가 거주, 업무, 회의를 모두 할 수 있는 복합 건물로 재구성하였다. 근정전은 처음 지었을때도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서양식 건물이었을 정도로 웅장한 규모였지만, 부여가 나날이 강성해짐에 따라 부여 정부가 할 일도 많아져 이후 끊임 없이 개축을 거듭하며 현재는 원래 지어졌던 규모의 2~2.5배에 가까운 규모로 커졌다. == 구조 == 전체 궁성 면적의 1/3 가량을 [[근정전 (부여)|근정전]]이 차지한다. 본당(本堂) 외에 부속 건물로 딸린 건물까지 포함하여 근정전의 영역으로 계산하기 때문이다. 근정전은 [[부여 황제]]를 위한 공간으로, 황제가 기거하며, 집무하고 회의를 여는 장소이다. 그 외에 [[궁무청]] 등의 보좌 기구들도 근정전에 대부분 입주해있으며, 부여 황제의 최고위 보좌직이자 정부 수반(총리) 위치에 속하는 [[태정령막군]]도 이 건물에서 집무하고 있다. 따라서 근정전은 '''정부 청사'''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외 1/3은 근정전을 제외한 다른 전각들로 채워져있다. 일부는 전통 방식 그대로 복원한 건물이지만 대부분은 현대식으로 개조된 건물들이다. 이 건물들은 2~3층을 넘어가는 경우가 드물고 높아야 4~5층이다. 이 건물들에는 근정전 내부에는 입주하지 않아도 되는 작은 부서들이 위치해있다. 또한 부여 황제와 황족을 제외한 궁무 직원들이 거주하는 숙소도 마련되어있으며, [[태정령막군]]을 위한 공관도 있다. 나머지 1/3은 후원이다. 후원은 북악산과 [[신무문]]을 두고서 직결되어있으며 궁 내에 근무하는 직원이나 황족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다만 보안 문제를 위해 궁 외의 시민들은 신무문을 넘을 수 없도록 되어있다. == 관광 == 경복궁은 일반적으로 대중들에게 공개되지 않지만, 일년에 단 한번 정기적으로 공개된다. 그 외에는 [[부여 황제]]가 정하는 법령으로 특별한 날에 공개하게 하고 있다. 법적으로는 정기적으로 공개할 것만을 명시했지 언제 할지는 정해두지 않았는데 관례상 정월 대보름에 공개한다. 이 날에는 [[부여 황제]]가 직접 나와 손을 흔들며 대중들에게 인사를 하는 행사를 가지며 후원을 비롯한 각종 시설들이 개방된다. 한편, 창경궁, 창덕궁 등 다른 궁궐들은 [[인경궁]]을 제외한다면 상시 개방해두고 있다. 극히 일부의 황족 및 정부 기관을 제외한다면 입주하지 않고 있는데다가 문화재적인 가치가 높기 때문에 개방하고 있는 것이다. == 여담 == * 경복궁의 부동산적인 가치는 정확한 수치가 공개되고 있지는 않지만, 대략적으로 '''캘리포니아 전체''' 혹은 '''캐나다 전체'''의 지가에 맞먹는다는 추산이 있다. 입지적으로 [[천경특별시]]의 심장인 종로구 한복판에 위치해있는데다가, 뒤로는 [[북악산]]을, 앞으로는 [[육조거리]]를 두고 있는 천혜의 위치 때문에 지가가 엄청나게 높다. [[부여 황제]] 개인의 명의로 되어있는 이 경복궁 지가 하나만으로 부여 황제는 세계 최대의 부동산 부자의 지위에 오를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 부여 황실이 워낙 숨기는게 많다보니 지하에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음모론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근정전의 부여 황제 침소에서 각종 국가 기관으로 바로 향할 수 있는 지하 통로가 있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2021년 [[궁무청]]에서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근정전에서 사직단 및 종묘로 직통하는 지하 통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져 이것은 더이상 음모론이 아니게 되었다.<br>물론 [[공안정보청]]이나 [[황립검찰청]]에서 5분이면 궁궐로 향할 수 있는 통로가 있다, 궁궐 지하에 엄청난 양의 전차가 숨겨져있다는 둥의 음모론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Large (원본 보기) 틀:Resize (원본 보기) 틀:글씨 색 (원본 보기) 틀:글씨 크기 (원본 보기) 틀:목차 (원본 보기) 틀:부여 관련 문서 (원본 보기) 틀:부여 세계관 (원본 보기) 틀:부여의 궁궐 (원본 보기) 경복궁 (부여)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