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중 하나의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관리자. 문서를 고치려면 이메일 인증 절차가 필요합니다. 사용자 환경 설정에서 이메일 주소를 입력하고 이메일 주소 인증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 class="wikitable" style="border: 2px solid #030; max-width: 450px; min-width: 450px; float: right" ! colspan="3" style="background-color:#030; color: #fff" | <big>페르시아의 비잔티움 침공</big><br>Bizantin Invasion of Persian empire |- | colspan="3" | <center><div style="margin: -5.0px -9.0px">[[파일:아일랜드 전쟁.jpg|450px]]</div></center> |- | align=center colspan="3" style="font-size:8pt" | 불타는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콘스탄티노플]] |- ! width=20% colspan="1" style="font-size:10pt; background-color:#030;color:#fff;" | 기간 | colspan="2" style="font-size:10pt" | [[1248년]] [[1월 3일]] - [[1250년]] [[2월 7일]] |- ! style="font-size:10pt; background-color:#030;color:#fff;" | 장소 | colspan="2" style="font-size:10pt" | [[파일:비잔티움 국기.png|28px]] 비잔티움 제국 전역<br>[[파일:중페르시아군기.png|28px]] 중페르시아 제국 서부 |- ! style="font-size:10pt; background-color:#030;color:#fff;" | 원인 | colspan="2" style="font-size:10pt" | 중페르시아 제국의 대외 팽창 정책 |- ! rowspan="1" style="font-size:10pt; background-color:#030;color:#fff;" | 결과 | align=left colspan="2" style="font-size:10pt" |'''비잔티움 제국 멸망, [[조지아 제국]] 성립''' |- ! rowspan="1" style="font-size:10pt; background-color:#030;color:#fff;" | 영향 | align=left colspan="2" style="font-size:10pt" |아나톨리아 반도의 군사적 혼란기 도래 [[제 3제국]]의 동방식민운동 전개 급속화 |- | colspan="3" style="font-weight:" | {| class="wikitable sortable mw-collapsible mw-collapsed"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6px -1px 11px; font-size: 10.5pt; text-align: center; width: calc(100% + 20px); border: 1px solid #dddddd" data-collapsetext="상세 정보" data-expandtext="상세 정보" |+ style="background:#fff;color:#000;font-size: 100%;" | |- ! width=20% style="font-size:10pt; background-color:#030;color:#fff;" | 교전국 | align=left width=40% style="font-size:10pt;" | [[파일:중페르시아군기.png|28px]] [[중페르시아 제국]]<br>'''지원국'''<br>[[파일:엘라헨스코 대공국기.png|28px]] [[엘라헨스코 대공국]] | align=left width=40% style="font-size:10pt;" | [[파일:비잔티움 국기.png|28px]] [[비잔티움 제국]]<br>'''지원국'''<br>[[파일:구교황령.svg|28px]] [[교황령]] |- ! style="font-size:10pt; background-color:#030;color:#fff;" | 지휘관 | align=left style="font-size:10pt;" | [[파일:중페르시아군기.png|28px]] [[페르펜노스 3세]]<br>[[파일:중페르시아군기.png|28px]] [[페레기온 드 빌]] | align=left style="font-size:10pt;" | [[파일:비잔티움 국기.png|28px]] [[요안니스 4세]] [[실종|?]]<br>[[파일:비잔티움 국기.png|28px]] [[에벨리아누스 안드레아쿠스]]✝ |- ! style="font-size:10pt; background-color:#030;color:#fff;" | 병력 | align=left style="font-size:10pt;" | [[파일:중페르시아군기.png|28px]] 정규군 50,000명<br>{{여백|1em}}[[파일:중페르시아군기.png|28px]] 50,000명<br>{{여백|1em}}[[파일:엘라헨스코 대공국기.png|28px]] 관측병 10명<br>[[파일:엘라헨스코 대공국기.png|28px]] 군수지원단 50명 | align=left style="font-size:10pt;" | [[파일:비잔티움 국기.png|28px]] 방어군1,200,000명<br>[[파일:비잔티움 국기.png|28px]] 징집된 시민 300,000명<br>{{여백|1em}}[[파일:비잔티움 국기.png|28px]] 봉기군 102,483명<br>{{여백|1em}}[[파일:구교황령.svg|28px]] 라벤나와 밀라노의 수송선단 |- ! style="font-size:10pt; background-color:#030;color:#fff;" | 피해 | align=left style="font-size:10pt;" | 30,000여명 사망<br>5,000여명 부상<br>320여명 탈영 | align=left style="font-size:10pt;" | 군인 35,000명 사망<br>시민 220,000명 이상 사망<br>군인 12,000여명 이상 탈영 |- |} |} {{목차}} ===개요=== 1248년에서 1250년까지 2년간 비잔티움 제국과 동페르시아 제국의 존폐를 놓고 싸운 동유럽 역사상 최대의 전쟁이다. ===준비=== 1232년 즉위한 동페르시아의 3대 황제 [[페르펜노스 3세]]는 과거 헬레니즘 제국이 침략하기 전의 페르시아 강역을 복원하겠다는 꿈이 있었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첫 번째 과제로 주변 약소국도 아닌<ref> 당시 주변에는 [[남페르시아 왕국]]이나 [[몰다비아 왕국]]같이 약소국은 넘쳤다. 이미 바이킹이 교황령을 약탈하러 돌아다니던 무법의 시대였기 때문이다.</ref> '''천 년을 버틴 천하의 비잔티움 제국을''' 침공하겠다는 '''미친 짓'''으로 시작했다. 이미 선대인 페르펜노스 2세가 다져놓은 도로망과 기반시설물 위에서 페르펜노스 3세는 군사훈련만 시행했으며, 그 덕에 페르펜노스 3세 즉위 이전에 12,000명에 불과하던 상비군은 십수년간의 훈련을 거쳐 120,000의 정예 거대 병력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s>하지만 정작 침공 때는 5만만 동원했다.</s> 그리고 요안니스 4세가 즉위한 비잔티움 제국은 이 기미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해상 보급을 위해 동부 흑해의 패자였던 [[엘라헨스코 대공국]]에게 해상 통행권을 동맹을 대가로 요청했으며, 엘라헨스코 대공국은 이를 받아들였고 이후 이 동맹은 [[흑해 동맹]]으로 발전한다. ===진행=== 1248년 1월 3일 새벽, 동페르시아 국경선에서 상인으로 위장한 5만의 대부대가 콘스탄티노플 방면으로 선전포고 없이 침입했다. 개중 2만 명은 [[크데멘투스]]의 지휘 아래 [[시노페 방어전|시노페로 향했고,]] 나머지 3만은 페르펜노스 3세의 지휘 아래 [[콘스탄티노플|콘스탄티노플로 직행했다.]] 이후 나머지 14000의 부대가 황제의 증원 요청에 따라 급파되면서, 총 병력은 62,000에 달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콘스탄티노플은 문자 그대로 '''발칵 뒤집혔다''' 당장 왕위계승 전쟁으로 황폐화된 국토를 복원할 새도 없이 비잔티움 상비군의 80%에 달하는 6만이 쳐들어왔고, [[엘라헨스코 대공국]]과 동맹을 맺은 상황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당장에 흑해 어디로나 상륙할 수 있는 3만의 대부대를 대공국은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단공포 현상 때문에 2만에 달하는 시민과 공직자들이 콘스탄티노플을 빠져나가 [[몰다비아 왕국]]으로 망명했다. 비잔티움의 대응은 상대적으로 침착했다. 그나마 남아 있던 국고를 이용해 2000명의 바랑인 부대를 고용했다. 또한 당시 교황이던 인노첸시오 4세에게 돈을 요청했고, 그 보답으로 교황령은 라벤나와 밀라노의 무장 수송선단에 돈과 무기를 실어 보내주었다. 콘스탄티노플에만 70,000명의 방어군을 갖추고 있었기에 군대에 여유가 생긴 요안니스 4세는 시노페로 10,000명의 추가 부대를 급파했다. ===절정=== '''전쟁의 절반의 승패가 걸려 있던 시노페 방어전에서 비잔티움군은 변명할 여지 없이 처참히 깨졌다''' 당시 가장 전장에서 많이 싸워 본 군인 중 한 명인 [[에벨리누스 안드레아쿠스]]와 32,000의 대부대가 전멸한 건 전례가 없던 일이었으며, 시노페의 부대가 결사항전으로 14일을 벌어주었음에도 비잔티움 제국은 혼란에 빠져 어떠한 기회도 잡지 못했다. 당장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이 일어났을 때에도 병력이 충분했음에도 시민들을 대피시키기는커녕 시민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징집시켜 고기방패로 사용하는 미친 짓'''으로 전투를 시작했던 비잔티움군은 결국 마지망 희망이 걸려 있던 [[사르디스 전투]]에서 처참히 깨지며 마지막을 조용히 기다리게 되었다. ===최후=== 결국 '''천년고도 콘스탄티노플은 무너졌고,그토록 혐오하던 이교도들이 옛 로마 땅을 밟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이후 비잔티움 제국의 행보는 '''[[조지아 제국]]''' 문서 참조.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 (원본 보기) 틀:Clearfix (원본 보기) 틀:목차 (원본 보기) 틀:여백 (원본 보기) 페르시아의 비잔티움 침공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