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중 하나의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관리자. 문서를 고치려면 이메일 인증 절차가 필요합니다. 사용자 환경 설정에서 이메일 주소를 입력하고 이메일 주소 인증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분류:뉴 오더 1987]] {{뉴 오더 1987}} {| class="wikitable" style="float: right; max-width:450px; border:2px solid #000; background-color:#000; color:#fff;" |- ! colspan="2" style="width:450px; background-color:#00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000, #222222 20%, #222222 80%, #000000); color:#fff;" | {{large|뉴 오더: 1987}}<br>New Order: 1987 |- | align=center colspan="2" style="height:130px;" | [[파일:뉴오더 1987 로고 1.png|x120px]] |- ! style="background:#111; color:#fff;" | 부제 | '''萬世一系 尊皇討奸 八紘一宇<br>만세일계 존황토간 팔굉일우''' |- ! width=25% style="background:#111; color:#fff;" | 시작일 | [[2025년]] [[5월 19일]] |- ! style="background:#111; color:#fff;" | 작가 | [[사용자:Destiny634|데스티니634]] |- ! style="background:#111; color:#fff;" | 장르 | [[정치]], [[외교]], [[대체역사]] |- ! style="background:#111; color:#fff;" | 저작권 | CC-0 |- |} {{목차}} == 개요 == '''New Order: 1987'''은 [[사용자:Destiny634|데스티니634]]가 창작한 대체역사 세계관이다. == 상세 == 추축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를 거둔 세계를 배경으로 하며 1962년이 시작 연도인 하츠 오브 아이언 4의 대체역사 모드 [[The New Order: Last days of Eorupe]](TNO)을 모티브로 삼아 이 세계관의 1987년 세계를 그린 작품이다. 사실 TNO 밀레니엄(뜨밀)은 이미 정식 서브모드로서 준비 중이지만, 필자는 이를 조금 더 독자적으로 각색했다. 1980년을 배경으로 하는 TNO 서브모드 The Fading order에서도 설정을 따오고, 또 어디에도 없는 필자의 독자적 설정을 가미하여 1987년의 추축국 질서 아래의 세계를 그려내고자 한다. 배경연도 1987년은 김진명의 소설 비명을 찾아서에서 착안했다. == 역사 == === 제2차 세계대전 === OTL과의 분기점은 프랭글린 루스벨트의 뉴딜이 실패로 돌아가고, 이에 따라 3선에 도전하지 않는 것으로 시작된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충분히 노력했다. 1940년 루스벨트는 압도적인 인기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정치적 역풍으로 인해 대통령으로서 보수적인 말벌집을 흔들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후보 지명이 시작되자 많은 민주당원들이 대통령으로 가는 길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처음에는 후보를 고르지 않기로 결정했으나 아내 엘리너는 11월에 출마하지 않을 거라면 자신이 할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이 대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FDR은 이에 동의하고 뉴딜 정책의 설계자인 해리 홉킨스가 전당대회에서 민주당 후보로 지명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한편 희망이 없다고 여겨졌던 공화당의 계획은 중간선거에서 하원 81석, 상원 8석을 획득하는 환상적인 성적을 거두며 빛을 발했다. 1940년은 1932년 이후 처음으로 백악관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있는 선거가 된 것처럼 보였다. 선거장이 혼잡한 가운데 반체제 후보인 웬델 윌키가 많은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당의 기강에 경종을 울렸다. 당은 윌키의 백악관 입성을 막기 위해 단일 후보에 합의해야 했고, 그 후보가 바로 맨해튼 지방 검사 토마스 듀이였다. 듀이는 유럽에 대한 개입을 계속 고려해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에도 불구하고 많은 규정이 적용되어 공화당은 개입주의에 관한 당 강령의 변경을 채택하지 못했다. 1940년 선거는 박빙의 승부가 이어졌고, 듀이와 홉킨스 모두 전국적인 무대에서 무명이었기에 유권자들에게 그들은 선거운동으로 정의되었다. 듀이는 카리스마 넘치는 엄격한 선거운동을 이끌었고, 이전의 알프 랜든처럼 불같은 보수주의자로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해리 홉킨스는 위암 진단을 받고도 선거 캠프에서 철저히 비밀로 유지했다. 이러한 건강 문제로 인해 홉킨스는 불안해 보였고 계획된 캠페인 행사에 불참하는 일이 잦았다. 11월 5일, 토머스 듀이는 간발의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단결된 공화당의 지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듀이 행정부는 공화당이 내부적으로 얼마나 망가졌는지를 증명했다. 공화당은 듀이의 대통령직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공화당 내 운동주의 보수파에 대한 양보는 최악의 시기에 미국의 팔을 묶어버렸다. 태프트 상원의원의 추천으로 존 브리커가 국무장관에 임명되어 유럽 난민의 입국을 거부하고 유럽과 태평양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축소했다. 듀이 행정부의 보수적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대통령과 의회는 사회보장 같은 인기 있는 뉴딜 프로그램을 축소하려는 실질적인 시도를 하지 않았지만, 테네시강 유역 개발공사 같은 것들은 민영화에 직면하고 재정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공공 사업 프로젝트가 취소되는 등 운이 좋지 않았다. 나치 독일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역시 체결했고, OTL과 똑같이 손쉽게 폴란드와 프랑스를 짓밟을 수 있었다. 여기서 또 하나의 분기점이 등장하는데, 고립된 벨기에에 갇힌 영국군, 프랑스군, 벨기에군을 히틀러가 직접 명령하여 구데리안의 기갑 부대가 궤멸시키며 됭케르크 철수작전이 실패로 돌아가 연합군의 육상전은 궤멸 수준에 이르고 만다. 일본 제국은 1937년 중국 침공을 여전히 감행하며 초반에 승승장구했지만 1939년경부터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중국에서의 교착 타개를 위해 일본은 점점 팽창의 늪으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이 벌어졌다. 모스크바 전투는 히틀러가 키예프 공세를 고집하는 대신 구데리안의 모스크바 직공안을 수용함으로서 소련은 모스크바를 방어할 만한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지 못했다. 결국 모스크바 공방전은 독일의 압승으로 끝났고 소련의 명령 체계는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스탈린은 사마라로 이동하여 저항을 지속하려 했고, 극동군을 소집했으나 모수크바가 함락되자마자 일본군이 중립조약을 깨고 극동에서 소련을 공격하면서 소련은 양면전선에 놓였다. 일본은 러시아 파시스트당의 콘스탄틴 로자옙스키를 내세워서 극동 러시아의 민심을 얻으려 했다. 양면 전선에 시달리자 소련은 극동군을 지원에 보낼 수도 없으며 이미 붉은 군대의 정예는 전부 갈려나간 판국에서혼란에 빠졌고 수 갈래로 찢어진 다음, 그대로 우랄 산맥 너머로 후퇴할수밖에 없었다. 스탈린은 우랄행 특급 열차에서 독일군 폭탄에 피격되어 사망했고, 게오르기 주코프가 긴급히 군사정부를 새워 옴스크를 수도로 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지만, 이 쿠데타는 소련을 내전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결국 레닌의 사망 19주년인 1943년 1월 21일,소련은 정식으로 해체되었다. 이로서 러시아는 우랄 이서의 독일 점령지, 극동과 동시베리아의 일본 점령지, 그 사이에 위치한 무법지대로 나뉘었다. 1943년 2월 20일 독일과 일본은 러시아 분할 관련 협정을 체결했는데, 중앙아시아(스탄 지역들)과 중시베리아를 포함하는 '중립지대'를 설정하여 이를 양국의 완충지대로 삼고, 그 동서는 서로의 지배를 인정하기로 하였다. 독일은 점령지에 모스코비엔, 오스트란트, 우크라이네, 돈-볼가, 카우카지엔을 비롯한 국가판무관부를 설치하였고, 일부 영토는 전리품으로 핀란드와 루마니아에 넘겼다. 일본은 북사할린과 캄차카, 우라지오(블라디보스토크)를 직접 영토로 편입하고, 연해주는 만주국에 넘기고, 나머지 광대한 극동시베리아 점령지에는 콘스탄틴 로자옙스키를 대통령으로, 마가단을 수도로 하는 러시아 국민국을 수립했다. 한편 미국에서, 듀이의 대통령 취임 첫 해는 재앙으로 끝날 것 같았는데, 브리커가 장관이 반대했던 대일 금수 조치에 따라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하여 정박해 있던 모든 선박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기 때문이었다. 정박해 있던 항공모함 2척을 비롯해 9척이 넘는 군함들이 침몰하고 유류 저장고도 완파되는 재앙이 벌어졌다. 다음 날 미국은 일본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독일은 일본과의 협정을 존중하여 미국에도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제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한편 미국이 참전 후 얼마 뒤, 독일이 모스크바를 함락하며 소련은 붕괴하였다. 미국의 연합국과의 공조는 미국이 차관 제공 약속을 더 느슨하게 함으로써 약화되었지만, 브리커와 영국 주재 대사인 버튼 휠러는 독일이 루시타니아 호 사건을 반복할 것을 우려하여 해외로 보낼 물자를 더 적게 협상하려고 시도하였다. 미국은 진주만 공격에 대한 보답으로 피를 흘리기를 원했고, 미국은 이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제 참전했으니 전쟁에 전념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전쟁의 목표와 일치하지 않았다. 정부가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공장주들은 법무장관과 노동부가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시간을 일하게 해달라고 요청해도 탄압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듀이 행정부는 산업계의 위법 행위에 대응하지 않았고, 여기에 더해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 해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마무리되어 미국 태평양함대는 궤멸되고 일본이 태평양을 제패하였다. 남방작전은 성공으로 돌아가 일본은 필리핀, 말레이, 보르네오, 남양군도, 뉴기니, 인도네시아, 버마에서 모두 승리하여 연합군을 축출하였다. 미국 내에선 일본을 향한 공포와 정부에 대한 불만이 일어났고 마침내 1942년 여름에 전국적으로 파업이 일어났다. 미국 소년들은 가망이 없어 보이는 전쟁에서 해외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그들의 가족마저 국내 전선에서 일하다 죽어가는 것은 완전히 부도덕해 보였다. 듀이 행정부는 파업에 대한 대중의 동정 여론을 파악하고, 파업을 해산하고 미국에 반하는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파업 조직자들을 체포하라는 압력을 가했지만, 파업 참가자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졌고 파업 지도자들은 감시 대상 명단에 오르는 데 그쳤다. 듀이 행정부는 중간 선거를 위해 국내 불만을 처리하는 능력과 불황 속에서 미국인을 다시 일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집중적으로 홍보했지만, 민주당은 국내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듀이 행정부의 뉴딜 프로그램 처리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두 정당 모두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국의 참전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였다. 1942년 중간선거 결과는 결정적이지 않았고, 듀이를 지지하는 보수적 다수가 유지되었기 때문에 변화는 미미하였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미국의 승리에 대한 희망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태평양 전쟁은 미국이 참전하게 된 동기가 되었지만 계속되는 손실로 인해 군대의 사기는 저하되었고, 초기의 너무나 거대한 패배로 인해 미국은 일본의 진격을 방어하는 데 실패했다. 필리핀에서 버티던 맥아더 장군의 죽음은 태평양 전쟁의 정신적 패배를 의미하게 되었다. 태평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손실은 1942년 8월, 무방비 상태의 하와이가 공격받기 시작했고 그해 11월 함락되어 오아후 섬의 항구에 일본 기지가 세워진 것이었다. 하와이 영토는 전쟁 내내 계엄령이 내려져 있었고 미국인들이 처절하게 저항했음에도 이미 미국 해군과 공군이 일시적으로 진공 상태에 이른 상황에서 하와이의 방어가 아무리 철저하더라도 일본군의 공습과 함께 들어오는 상륙을 견디지 못했다. 여기에 더하여 일본군의 상륙과 일본계 이민자들의 집단 사보타주와 함께 하와이는 확정적으로 무너졌다. 일본이 하와이 영토를 점령한 후 하와이 섬에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하와이는 계속 군사적 감시를 받게 되었다. 하와이의 상실은 미국에서 가장 결정적이고도 충격적인 패배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진정한 재앙은 그 뒤에 더 왔다. 1942년 12월, 하와이까지 함락된 상황에서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 해공군 세력은 그야말로 궤멸, 격멸 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제공권과 제해권을 틀어쥔 일본이 미국이 1943년부터 다시 산업력을 통해 함대를 재건하게 둘 리가 없었다. 이는 곧 미 본토공습을 구체화하였고, 대본영은 '다이메이 작전'이라 불리는 미 본토 공습을 시작했다. 1942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일어난 샌프란시스코 대공습을 시작으로, 일본 해군 항공대는 서부 해안과 알래스카를 향해 필사의 공습을 감행했다. 수천 기의 일본 해군 항공대 폭격기들과 호위 전투기들이 LA, 샌프란시스코, 샌디에이고, 기타 주요 도시들, 알래스카를 무자비하게 강타했다. 산업 시설이 주 목표였고, 민간 거주 지역에도 무차별적인 폭격이 이루어졌다. 미국인들은 본토의 안전을 믿었고, 일본은 미영전쟁 이후 처음 미국의 주(State)를 직접 공격한 나라가 되었다. 미군은 공군력을 총동원하여 공중전을 펼쳐 1943년 4월경까지 일본 폭격기들을 미국 영공에서 몰아냈지만, 이미 일본의 목표는 달성되었고 4개월 간 일본이 서부 해안을 누빈 결과는 끔찍했다. 주요 건함 계획이 걸려 있던 서부의 산업시설이 대파되거나 장기간 수리가 필요했고, 미 서부해안, 알래스카, 캐나다를 합해 사망자가 최소한 20만 명 이상 나왔고 서부 해안 산업시설 50%를 잃었다. 전세를 뒤집기 위한 함대의 대량생산은 최소한 몇 년은 미루어졌고, 태평양을 되찾을 날은 멀어져 갔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미군의 무방비 속에 결국 방어하지 못했고, 1943년 2월 일본군에 점령당하였다. 듀이 행정부는 국내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했지만 미국인들은 본토공습의 공포를 되새기고 서유럽과 소련에서 나치의 진격에 따라 최악의 상황을 예상했다. 브리커와 휠러가 듀이와 협력하기 시작한 1943년은 전쟁이 최악으로 치닫던 시기였고, 미국인들은 전쟁의 결과 대신 집으로 돌아오는 관에 지쳐 있던 시기였다. 듀이는 전쟁이 무의미한 유혈 사태만 더 일으킬 뿐이고, 미국은 이길 수 있더라도 유럽은 파괴될 것이라고 믿었다. 전쟁은 끝나야 하지만 미국의 조건으로 끝내야 했다. 영국이 바다사자 작전에 당하여 나치의 침략에 굴복한 1944년, 듀이는 선거 유세에서 재선되면 전쟁을 종식하고 징병제를 폐지하는 조약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민주당의 윌리엄 더글러스 후보는 급변하는 전쟁 상황에 대한 지식 부족과 독일에 유럽을 맡기는 것에 대한 도덕적 반대를 이유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미국은 중간에 말을 바꾸지 않았고 11월에 듀이는 다시 한 번 재선에 성공했다. 한편 미국은 일본의 본토 공습과 호주 침공을 저지한 이후, 일본에 대해 절대적으로 방어적인 입장에 몰려 있었지만 다소 일사불란하게 산업력을 재건했고, 1944년 초부터 일본이 장악한 태평양을 조금씩 압박해 나가며 일본과의 장기전에 들어가겠다는 계획을 입안했다. 유럽에서의 전쟁과 달리 산업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가진 일본을 상대로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항복을 이끌어낼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이는 도약 작전이라 불리면서 북태평양과 남태평양 각각에서 일본을 압박해 하와이까지 도달한다는 계획이었다. 일본은 1944년 4월 처음으로 미 함대의 유의미한 저항에 부딪힌 후부터 서서히 후퇴해야 했고, 전력을 보전하며 하와이를 요새화하는 데 집중했다. 알류샨 열도와 피지, 누칼레도니아에서 미국은 승리했고, 일본군은 이 지역에서 퇴각을 강요받았다. 듀이는 이제 하와이를 수복할 때가 왔다고 여겼고, 하와이와 영국을 해방시킨 뒤 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내겠다는 듀이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평화를 위한 마지막 전투는 선행되어야 했다. 1944년 7월, 미국은 하와이를 공격하기 위한 대규모 작전을 감행했다. 이 전투는 일본 연합함대와 미국 함대 간의 총력전으로 이어졌다. 일본은 이 전투에서 밀리면 하와이를 잃고, 이는 패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하고 총력을 집중시켰다. 쿠리바야시 다다미치 장군이 지휘한 하와이 탈환전, 또는 제2차 하와이 전투로 불린 이 전투는 87일 동안 이어졌고, 일본은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미국을 대패시켰다. 1944년 10월, 애써 재건되었던 미국 함대는 일본 함대의 유인 전략에 말려들어 하와이 제도에 모두 수장되었고, 오아후 섬에 상륙한 해병대 10만 명은 고립된 채 섬멸되거나 포로가 되었다. 1944년의 태평양에서의 전황 반전에 기대를 걸던 미국인들은 경악했고, 또 하와이 수복이 영영 멀어졌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미국인들은 전쟁 상황이 이제 좋아지기 어려울 것이라고 느꼈고, 듀이는 영국과 하와이가 해방된 후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믿었지만, 영국에서 교착 상태가 지속되고 미국이 하와이 탈환전에서 참혹한 패배에 직면하면서 자유로운 통일 영국, 그리고 태평양 해방에 대한 희망은 사라지고 있었다. 모든 전선에서 진전이 부진한 상황에서 원자폭탄 개발을 목표로 한 비밀 프로그램인 맨해튼 프로젝트는 뉴딜의 실패의 영향을 받아 OTL보다 부진했고, 팻맨과 리틀 보이라는 단 두 개의 사용 가능한 폭탄만 남긴 채 마무리되었다. 핵무기의 사용은 전쟁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 필수적이었고, 미국이 하늘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독일을 핵무기로 공격하는 것은 전략적 가치가 거의 없었지만 가능했다. 1945년 3월 26일, 라인강을 범람시키고 독일의 대서양 접근을 마비시키기 위해 앤트워프에 리틀 보이 핵폭탄을 투하하기로 결정했다. 태평양에서는 일본이 이제 서부 해안과 알래스카에 대한 지상 침공을 계획하며 진격하고 있었고, 미국이 일본의 진격을 막으려는 가운데 일본 함대가 미 서부 해안 앞바다에 집결하고 있었다. 3월 29일, 일본에 결정적인 전투가 될 것으로 예상되었던 전투는 일본 제국의 구축함대에 대항하기 위해 샌디에이고를 통해 태평양으로 보내진 팻맨으로 인해 함대가 대부분 침몰하면서 재앙으로 끝났다. 일본은 이에 따라 미국 서부 해안을 압박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이러한 움직임은 일본 제국과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을 크게 방해하여 평화 협상이 시작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유럽에서 아이젠하워 장군은 미국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으며 전쟁이 계속되면 독일이 사실상 고갈될 것이라는 예측을 받았고, 일본도 이미 경제력이 한계이고 이번 일본 함대의 피해를 이제 회복할 산업력이 한계이기 때문에 그들은 하와이를 더 이상 방어할 수 없다는 보고가 있었다. 하지만 영국이 교착 상태에 빠져 있고 독일도 원자 무기를 개발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예측은 너무 많은 비용이 드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 덕분에 미국과 독일, 일본은 각자의 협상을 만족스럽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1945년 4월 1일, 일본 천황은 옥음방송으로 직접 일본 국민 앞에 목소리를 내면서 제국이 그간 거둔 전과를 치하하고 전사자들을 위로하면서, 미국에 평화를 제안했다. 독일은 유럽에서 전쟁에서 승리했고 이제 유럽 대륙의 주인으로서 통치를 공고히 할 때라고 판단했다. 일본은 중국에서의 이권(왕징웨이 정권의 승인), 그리고 동남아의 점령지와 하와이를 인정받는 것으로 대동아공영권의 주인이 되기를 원했다. 마찬가지로 미국도 독일이 없으면 유럽에서 민주주의가 독일의 분노에 직면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며 전쟁이 끝났다고 여겼다. 1945년 4월 29일 미국은 휴전협정에 서명했고 1945년 9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 항모 아카기에서 체결되어 ‘아카기 조약’으로 불린 이 조약으로 전쟁은 끝났다. 조약 내용은 전쟁의 종식, 괌과 하와이를 비롯한 일부 속령의 정식 일본 할양, 일본과 독일의 현 점령지 인정, 배상금은 지불하지 않는 것을 골자로 했다. 독일은 레벤스라움을 완성하고 승인받았다. 마지막까지 남은 연합국은 중화민국이었다. 그러나 중화민국에 지원을 보내줄 국가들은 대부분 독일과 일본에 이미 패배했고, 위기를 극복하고 재정비된 일본군의 공세를 막을 만한 여력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제스는 끝까지 항복을 거부했고 일본군은 셔먼의 바다로의 행진이 우습게 보일 정도의 초토화 작전을 펼치며 충칭으로 향했다. 일본의 무자비한 폭격 전략은 도시뿐 아니라 농촌마저 가격했고, 공세를 위한 병력 공백으로 화북의 치안이 무너지자 2차 삼광작전을 통해 화북에서만 1천만 이상의 중국인을 학살했다. 파괴적 진격으로 농업 생산량은 제로에 가깝게 폭락했고 중국 전역에 대기근이 벌어졌다. 폭격과 전투보다도 기근으로만 수천만 명이 아사했다. 미국의 지원 중단으로 변변한 총마저도 생산할 수 없게 되고 농촌 각지에서 무자비하게 징집된 병사들은 칼과 죽창을 들고 일본군 총포와 탱크에 대항하다가 전멸했다. 이렇게 자유 중국을 완전히 짓밟고 충칭에 다다르기까지 장장 2년이 걸렸고, 마오쩌둥과 장제스는 충칭에서 연합해 최후의 저항을 하다가 죽음을 맞이했고, 참수되어 충칭의 잔해 위에 효수당했다. 5천만 정도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고 대다수는 중국 민간인이었다. 1947년 2월 23일, 한때 충칭이었던 잔해 더미가 함락되자 일본군은 백제성 폐허 위에서 ‘아시아와 우리 시대의 평화’를 선언했다. 이렇게 제2차 세계 대전은 추축국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이 세계관은 바로 이 1947년, 충칭 최후의 날에서부터 그 시작을 알린다. === 현재의 정세 === 1987년, 세계는 여전히 3개의 주요 블록, 즉 독일의 아인하이츠팍트,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미국의 자유 국가 기구로 나누어져 냉전을 벌이고 있다. 많은 나라들이 3대 블록에 속하거나, 또는 비동맹주의나 중립외교의 길을 걸으며 자국의 생존을 도모한다. 세계의 핵보유국은 공식적으로 미국, 독일, 일본만이 인정되고 있지만, 인도와 파키스탄, 터키 등 비공식적으로 핵무장을 감행한 국가는 존재한다. 세계의 핵무기는 두 차례에 걸친 감축협정에도 불구하고 수만 기에 이르며, 인류는 종말의 문턱에 서 있다. 보유 수량은 독일 > 미국 > 일본의 순서를 이루고 있다. 1987년은 명실상부한 파시즘,전체주의의 시대이다.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기록한 일본과 독일로 말미암아 세계 경제의 제1위는 독일의 유럽 공동체가, 제2위는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이 거머쥐고 있으며, 미국 외에는 경제대국이 거의 없는 자유진영은 제3위로서 경제력에 한참 쳐지고 있다. 군사적으로도 일본은 해군력에서, 독일은 육군력과 공군력에서 각각 세계의 정상을 자랑하여, 지구의 육해공을 장악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과 독일이라고 하여 모든 것이 완벽한 상황은 아니다. 먼저 일본은 야스다 위기가 발생한 1963년을 기점으로 20여년만에 대정익찬회를 해산하고, 정당정치를 복원시킨 바 있었다. 이에 따라 일본 내에선 주요한 정당들이 다시금 등장하였다. 여당은 주로 경제개발지향, 기술관료들이 주축을 이루고 제국주의 성향이 강한 익찬국민당(翼贊國民黨)이다. 제1야당은 일본자유당(日本自由黨)으로, 고노 이치로의 동교회에서 출발한 자유주의자들의 연합이다. 또 익찬국민당과는 구별되는 극우 성향의 유신제국당(維新帝國黨)디 있다. 63년 이래 양당이 안정적으로 정권을 주고받고 제국당이 캐스팅보드를 쥐는 안정적인 3당 체제로 63년 체제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치안유지법 하에서 사회주의나 무산정당은 금지당하였고 보수 기득권 간의 선거 경쟁이 이루어졌기에, 일본은 통제된 민주주의라고 불리고 있다. 메이지 헌법은 여전히 하나도 개정되지 않고 유효하며, 화족과 군부의 기득권적 통치는 완전한 민주화를 억제하고 있다.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체제 불만이 커지고 있다. 또한 충칭 최후의 날 이후 내전까지 거쳐가는 참화를 이겨내면서 70년대부터 성장궤도에 오른 중국 난징정부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난징은 더이상 일본에 무조건적으로 굴종하지 않으며, 그들의 권리를 요구하고 나선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중국이 부당하게 빼앗겼다고 주장하는 모든 것--만주, 광동, 대만, 화북 등등--을 되찾기 위한 투쟁의 준비에 나서려 한다. 일본은 대동아주의 수사를 통하여 난징과의 불안한 동거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 하지만, 이미 국내에서는 동아시아 패권 유지에 대한 불안이 커지고 있고 군은 선제 행동을 외치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불안감이 미국과의 데탕트로 이어져, 1980년 '환태평양 자유무역협정'으로 공영권과 OFN 간의 무역을 40년 만에 재개하여 아시아 시장을 개방하고, 하와이 왕국의 중립화에 동의하기까지 이르렀다. 독일은 일본과 달리 동방을 철저히 억누르고 분할시켰기에 외부적으로 위협 요인은 없다. 오히려 독일은 유사이래 가장 높은 경제적 번영을 누리는 중이다. 나치당의 일당독재가 굳건하며, 히틀러, 보어만, 게르하르트 클로퍼를 거쳐 1985년에 마르틴 무스그뉘를 제4대 총통으로 선출한 독일은 단결과 희망에 찬 새천년을 맞이하려 한다. 게네랄플란 오스트(동방총계획)은 1978년부터 1982년에 걸쳐 3단계가 마무리되어 오스트란트까지 독일화되었고, 동방 식민체제는 완성되었다. 유대인은 유럽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슬라브인들은 노예가 되거나 일본이 통치하는 극동으로 도망쳐 유럽에서 퇴출되었다. 히틀러가 바라던 모든 이상은 1987년 지금 이 순간,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독일의 적은 도무지 지속 불가능한 구조적 불안정성에 있다. 시민보다 노예가 많은 체제는 결코 영속할수 없으며,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내부는 썩어들어가고 있다. 나치는 지속적으로 미국에 잔존한 유대 잔당, 슬라브와 유대인을 은닉한 비열한 황인종 일본 등 '적'을 만들어 국민을 결속시키려 하지만, 이미 선전 효과는 예전같지 않으며 젊은 세대에서는 체제 회의가 점차 커지고 있다. 세계의 지배자들이 흔들려가는 동안, 40년 넘는 시간 암약하고 있던 미국은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다. 세계에 얼마 남지 않은 자유국가들을 규합하고, 다가올 투쟁을 대비하는 것이다. 1973년부터 1981년까지 조지 롬니가 집권하고, 이어서 1981년에 등장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통치 아래 미국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헨리 키신저가 주도한 일본과의 데탕트와 독일 고립 전략은 충분한 효과를 거둔 것으로 입증되었다. == 세계 정세 (1987년) == [[파일:뉴오더 세계지도.png]] - 1987년 1월 1일의 지구 설정이 조금 바뀌었기에 국경선은 세계관과 일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 세력권 === {{자유 국가 기구 회원국 (뉴 오더: 1987)}} {{아인하이츠팍트 회원국 (뉴 오더: 1987)}} {{대동아공영권 회원국 (뉴 오더: 1987)}} =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 (원본 보기) 틀:Clearfix (원본 보기) 틀:Large (원본 보기) 틀:Resize (원본 보기) 틀:글씨 색 (원본 보기) 틀:글씨 크기 (원본 보기) 틀:뉴 오더 1987 (원본 보기) 틀:대동아공영권 회원국 (뉴 오더: 1987) (원본 보기) 틀:목차 (원본 보기) 틀:아인하이츠팍트 회원국 (뉴 오더: 1987) (원본 보기) 틀:자유 국가 기구 회원국 (뉴 오더: 1987) (원본 보기) 뉴 오더: 1987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