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영종의 업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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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JO-tax-trigger2" style="display:inline-block;margin:5px 1px 0px;border:1px solid rgba(178,34,34,0.45);border-radius:15px;padding:6px 20px 6px;width:200px;">집옥재<br><span style="opacity:0.7;font-size:80%;">왕립 박물관 설립</span><div class="JO-tax-content"><div style="width:calc(100% + 30px);margin:5px -15px 5px;height:1px;background:rgba(178,34,34,0.45);"></div><div style="font-size:9.5px;text-align: left;opacity:0.75;word-spacing:1px;line-height:150%;">각종 진귀한 물건과 예술품들을 한데 모아 전람하는 곳으로 왕실의 보물들을 관리하는 업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이들을 만민에게 공개하여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견문을 넓힐 수 있도록 하였다.</div></div></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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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JO-tax-trigger2" style="display:inline-block;margin:5px 1px 0px;border:1px solid rgba(178,34,34,0.45);border-radius:15px;padding:6px 20px 6px;width:200px;">한림원 설립<br><span style="opacity:0.7;font-size:80%;">전문인력의 정책개입</span><div class="JO-tax-content"><div style="width:calc(100% + 30px);margin:5px -15px 5px;height:1px;background:rgba(178,34,34,0.45);"></div><div style="font-size:9.5px;text-align: left;opacity:0.75;word-spacing:1px;line-height:150%;">영종은 예술에서는 뛰어난 두각을 보였으나, 이학과 산학, 율학에서는 그리 뛰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법도나 이치에 대해 다소 밝지 못하여 정사에 수동적인 태도를 지녔는데, 이를 극복하고자 각 분야의 지식인을 한데 모아 왕에게 자문하도록 한림원을 설립하였다. 이는 언론부 사문원과 역할이 비슷했으나, 사문원의 대다수는 유학자로 국가 정신에 맞는 국정운영을 도모하게 간하였고, 한림원은 왕에게 전문지식을 전수하고 이해시키는 것에 의의가 있었다. 나아가 한림원은 그 자체로 범학계적인 탐구가 이루어지는 곳이 되었다.</div></div></div>
<div class="JO-tax-trigger2" style="display:inline-block;margin:5px 1px 0px;border:1px solid rgba(178,34,34,0.45);border-radius:15px;padding:6px 20px 6px;width:200px;">한림원 설립<br><span style="opacity:0.7;font-size:80%;">전문인력의 국정참여</span><div class="JO-tax-content"><div style="width:calc(100% + 30px);margin:5px -15px 5px;height:1px;background:rgba(178,34,34,0.45);"></div><div style="font-size:9.5px;text-align: left;opacity:0.75;word-spacing:1px;line-height:150%;">영종은 예술에서는 뛰어난 두각을 보였으나, 이학과 산학, 율학에서는 그리 뛰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법도나 이치에 대해 다소 밝지 못하여 정사에 수동적인 태도를 지녔는데, 이를 극복하고자 각 분야의 지식인을 한데 모아 왕에게 자문하도록 한림원을 설립하였다. 이는 언론부 사문원과 역할이 비슷했으나, 사문원의 대다수는 유학자로 국가 정신에 맞는 국정운영을 도모하게 간하였고, 한림원은 왕에게 전문지식을 전수하고 이해시키는 것에 의의가 있었다. 나아가 한림원은 그 자체로 범학계적인 탐구가 이루어지는 곳이 되었다.</div></div></div>
<div class="JO-tax-trigger2" style="display:inline-block;margin:5px 1px 0px;border:1px solid rgba(178,34,34,0.45);border-radius:15px;padding:6px 20px 6px;width:200px;">태사직 설치<br><span style="opacity:0.7;font-size:80%;">군주 보좌 직책</span><div class="JO-tax-content"><div style="width:calc(100% + 30px);margin:5px -15px 5px;height:1px;background:rgba(178,34,34,0.45);"></div><div style="font-size:9.5px;text-align: left;opacity:0.75;word-spacing:1px;line-height:150%;">영종은 또한, 태사직을 부활시키고 여러 학문을 두루 섭렵하거나 당대 가장 뛰어난 인재를 태사직에 등용하여 국정을 보좌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 후대 열왕에 이르러 각계 지식이 범람함에 따라 군주가 이를 일일이 다루지 못하더라도 정사를 집행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었다.</div></div></div>
<div class="JO-tax-trigger2" style="display:inline-block;margin:5px 1px 0px;border:1px solid rgba(178,34,34,0.45);border-radius:15px;padding:6px 20px 6px;width:200px;">태사직 설치<br><span style="opacity:0.7;font-size:80%;">군주 보좌 직책</span><div class="JO-tax-content"><div style="width:calc(100% + 30px);margin:5px -15px 5px;height:1px;background:rgba(178,34,34,0.45);"></div><div style="font-size:9.5px;text-align: left;opacity:0.75;word-spacing:1px;line-height:150%;">영종은 또한, 태사직을 부활시키고 여러 학문을 두루 섭렵하거나 당대 가장 뛰어난 인재를 태사직에 등용하여 국정을 보좌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 후대 열왕에 이르러 각계 지식이 범람함에 따라 군주가 이를 일일이 다루지 못하더라도 정사를 집행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었다.</div></div></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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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14일 (화) 22:52 판

조선 23대 국왕
영종의 업적
[ 펼치기 · 접기 ]
욕연명시필정군
작통신속성만사
동심기예여백관
일인불능지만학
동국총치지업
일본 열도 병탄
텐메이 기근 이후로 일본 다이묘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고, 많은 경우 조선과의 무역으로 생활을 이어가거나 조선에 귀부하였다. 이들 중에는 전란이후 직위없는 무사계층도 있었는데, 일부는 조선에 고용되어 천황 직할령인 '어료'나 조선인이 매입한 토지의 치안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 시기 다수 유입된 조선 자본가에 의해 다이묘의 토지는 크게 감소했고, 오히려 도라이-다이묘로 불리는 조선인 대지주들이 크게 증가했다. 전기 다이묘와 로닌들은 이러한 외세 위협에 대응하지 못하는 천황과 태정관에 큰 반감을 가지게 되었고, 1800년을 전후로 다테, 우에스기, 오다, 마에다, 호소카와, 마쓰다이라 가문등이 천황보위와 막부재건을 천명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1800년, 관정의 난) 이에 영종이 친정하여 열도를 다시 평정하였으며 이 죄를 물어서 폐번치부를 단행했다. 그 결과 다이묘직은 폐지되었고 그 대신 지방관(슈고진)을 파견하여 천황이 국정을 보살피도록 했다. 나아가, 천황을 일본군왕에, 고니키시와 오이치 가문은 각각 산양공과 산음공에 봉하였으며, 열도를 조선의 땅으로 선포하였다.
뇌홍 합성법 개발
군사력 증대
양이가 개발한 화약으로 뇌홍이라 불리는데, 그 폭발력이 굉장하여 이를 이용해 조총도 새로이 짓고 포탄도 새로이 만들었다. 이를 동국이학원에 연구토록 하여 수 년만에 뇌홍을 합성할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동모식 조총과 유산탄을 제작하여 군에 보급토록 하였다. 이를 통해 기존의 조총과 달리 습기에 불리하지 아니하고 적재적소에 가용토록 하였다. 또한, 뇌홍을 합성하기 위해 북해도 일대의 수은 광산을 개발토록 하여 큰 이익을 내었다.
경성군제원계
대대적인 군제 개혁
철갑함과 동모식 조총, 유산탄등의 개발로 조선군의 전투력은 제고되었으나, 제도가 아직 옛것을 쓰고 있으니, 총체적인 군기, 전선 개량 및 교체 작업과 함께 전술과 작계도 이에 맞게 새로 짓도록 명하여 관료들이 머리를 맞대어 원계를 지어 이행토록 했다.
팔달청
철도망 증설 계획
경인철로가 개통되고 나서 군부와 재부는 이를 통해 전국으로 대규모 병사를 이송하고 조세를 안전하게 옮길 수 있도록 철로망을 대규모로 증설하도록 했다. 영종은 이를 위해서 공부 휘하에 팔달청을 설립하여 국가 철로망 건설을 주관하도록 했다.
비구 · 열기구
수소풍선 · 열기구 개발
석탄개질법으로 생성되는 수소를 채워서 날리는 물체나 공기를 가열하여 떠오르게 한 열기구 등이 발명되어 각지에서 통신수단이나 이동수단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이러한 물건을 통해 산지나 봉화대끼리 연락할 수 있도록 하였다.
광호법
빛을 이용한 통신
광원의 개폐 시간에 따라 각 부호를 지정하여 통신하도록 만들어진 일종의 은문이다. 이를 이용하여 봉수대나 전신대 사이에서 간단한 소통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군부에서는 이를 개량하여 초성만으로 뜻을 이해하도록 간소화하였다. 이를 편광호라고 하였다.
심미원
문화예술 진흥원
영종은 유년부터 예술에 조예가 깊고 서양의 관현악과 연극, 화풍, 문학을 접하였다. 이에 즉위한 뒤로 조선의 음악, 그림, 문학을 진흥하기 위해서 심미원을 설립했으며, 이를 통해 예술인을 양성 및 모집하고 각종 문화사업을 장려하였다.
청량지유원
왕립 동물원 설립
영종은 문화사업에 많은 공을 들였는데,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청량사 일대를 유원으로 조성하여 각종 동물들과 식물들로 꾸몄으며 인공 호수와 폭포를 설치하도록 했다. 또한, 이를 만민에게 열어두어 자유로이 이용하도록 했는데, 이를 통해 왕실의 자비와 권위를 알리고자 하였다.
집옥재
왕립 박물관 설립
각종 진귀한 물건과 예술품들을 한데 모아 전람하는 곳으로 왕실의 보물들을 관리하는 업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이들을 만민에게 공개하여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견문을 넓힐 수 있도록 하였다.
한림원 설립
전문인력의 국정참여
영종은 예술에서는 뛰어난 두각을 보였으나, 이학과 산학, 율학에서는 그리 뛰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법도나 이치에 대해 다소 밝지 못하여 정사에 수동적인 태도를 지녔는데, 이를 극복하고자 각 분야의 지식인을 한데 모아 왕에게 자문하도록 한림원을 설립하였다. 이는 언론부 사문원과 역할이 비슷했으나, 사문원의 대다수는 유학자로 국가 정신에 맞는 국정운영을 도모하게 간하였고, 한림원은 왕에게 전문지식을 전수하고 이해시키는 것에 의의가 있었다. 나아가 한림원은 그 자체로 범학계적인 탐구가 이루어지는 곳이 되었다.
태사직 설치
군주 보좌 직책
영종은 또한, 태사직을 부활시키고 여러 학문을 두루 섭렵하거나 당대 가장 뛰어난 인재를 태사직에 등용하여 국정을 보좌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 후대 열왕에 이르러 각계 지식이 범람함에 따라 군주가 이를 일일이 다루지 못하더라도 정사를 집행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었다.
欲延明時必整軍
평화의 때를 이어가고자 하면 필히 군을 정비하라.
作通迅速成萬事
신속하게 다니도록 하여 만사를 이루게 하라
動心技藝如百官
마음을 움직이는 기예는 백 명의 관리와 같다.
一人不能知萬學
한 사람이 어찌 모든 학문에 통달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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