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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개요}}<div style="width:100%;text-align:left;font-size:12px;word-spacing:1px;padding:15px 25px;color:#cc2121;font-family:GmarketSansMedium, Chosunilbo_myungjo, ChosunSm;font-weight:500; background:#e3ba62;background-image:linear-gradient(to left, rgba(79,55,2,0.2) 20%, rgba(79,55,2,0) 100%);text-shadow:0px 0px 2px rgba(79,55,2,0.35);border-radius:10px;box-shadow:0px 0px 3px rgba(0,0,0,.3);border:2px solid #9c7e2d;">
{{앵커|개요}}<div style="width:100%;text-align:left;font-size:12px;word-spacing:1px;padding:15px 25px;color:#cc2121;font-family:Chosunilbo_myungjo, ChosunSm;font-weight:500; background:#e3ba62;background-image:linear-gradient(to left, rgba(79,55,2,0.2) 0%, rgba(79,55,2,0) 100%);text-shadow:0px 0px 2px rgba(79,55,2,0.35);border-radius:10px;box-shadow:0px 0px 3px rgba(0,0,0,.3);border:2px solid #9c7e2d;font-weight:bold;">
<div style="font-size:14px;letter-spacing:1px;margin-bottom:15px;color:#cc2121;font-weight:bold;">1. 개요</div>
<div style="font-size:15px;letter-spacing:1px;margin-bottom:15px;color:#cc2121;font-weight:bold;">1. 개요</div>
경희지절 또는 경희 시대는 헌종이 즉위한 1700년부터 퇴위한 1743년까지 총 43년간의 치세를 일컫는 말이다. 이 시기 조선은 -무굴 제국 뒤를 이어- 약 3천만명의 인구를 보유한 세계 2위의 인구 대국이자, 대외 무역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올린 경제 대국이었는데 이러한 인적, 물적 자원을 기반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했다.{{V|10}}유럽에서는 프로이센 왕국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건국되었고, 스페인과 폴란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으며 대북방전쟁이 종식되는 등 전란과 함께 종교혁명에서 발원한 계몽주의가 전 유럽을 휩쓸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과학 및 기술, 철학적 발견이 각지에서 대두되었고 이 또한 조선에서도 연구되고 전파되었다.{{V|10}}동아시아에서는 조선의 요하강과 흑룡강을 경계로 국경을 확보한 채로 내정에 힘을 쏟았으며, 여진족과 한족이 각각 중국대륙의 남북쪽에서 패권 경쟁을 지속하였고,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후 친조선파인 하라후쿠 막부에 의한 동정이 계속되고 있었다. 청을 요동에서 몰아내고 천리장성을 축조한 조선은 청의 눈치를 보지 않고 러시아와 동맹을 맺어 견제하였고 이렇게 이룩한 평화와 조선의 제도적 완성이 절충되어 황금기를 구가하였다.</div>
방갈랄왕은 막와이 황제를 위시하여 덕리를 탈환하기 위한 일련의 도발을 감행했고, 이 과정에서 영길리 동인도 회사와 군사적 충돌이 계속되었다. 이에 영길리는 인도에 직접 개입하기로 하고 미리견, 불란서, 오지리, 이태리에게 각지 식민지를 약속하며 연합을 꾀했다. 동인도 회사의 용병들이 방갈랄 일대로 진입하면서 전쟁이 발발하여 5개국 연합은 연합함대와 지상군을 파견하고 강화도와 제물포를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인천이 함락되고 한성역까지 점령되자 조정은 흥화영, 장용영, 충헌영의 3만 장병을 각지에 집결시키고 근왕병을 소집했다.{{V|10}}
경군의 저항이 격렬해 한성 공략에 진척이 없자 연합군은 평양으로 진군하여 흥화병영을 점거했고, 삼화포을 장악해 물자를 탈취했다. 그러나 이내 근왕병과 충헌영이 남쪽에서, 장용영이 북쪽에서, 경군이 동쪽에서 공격하자 크게 패하였다. 남은 병력의 일부는 삼화포로, 일부는 제물포로 후퇴하여 후일을 도모하고자 했으나 이후 황해 해전으로 연합군 해군이 큰 피해를 입고 회항하면서 모든 연합군이 항복하였다. 이후 한국, 영길리, 불란서, 막와이(방갈랄) 사이에 동래화약을 맺어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약속했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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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18일 (월) 05:26 기준 최신판

조선의 연호
광무
光武
1844년 9월 10일 ~ 1861년 12월 31일
광무 1년 9월 10일 ~ 광무 18년 12월 31일
함평
咸平
1862년 1월 1일 ~ 1888년 12월 31일
함평 1년 1월 1일 ~ 함평 27년 12월 31일
숭녕
崇寧
1889년 1월 1일 ~ 1921년 12월 31일
숭녕 1년 1월 1일 ~ 숭녕 33년 12월 31일
방갈랄 · 榜葛剌
대한 · 大韓
동래화약
東萊和約
Convention of Dongrae · Convention de Dongrae
1875년 11월 24일 · 함평 14년 11월 24일
영길리 · 英吉利
불란서 · 佛蘭西
동래화약
東萊和約
1875년 11월 24일 · 함평 14년 11월 24일
대한 · 大韓
방갈랄 · 榜葛剌
영길리 · 英吉利
불란서 · 佛蘭西
1. 개요
방갈랄왕은 막와이 황제를 위시하여 덕리를 탈환하기 위한 일련의 도발을 감행했고, 이 과정에서 영길리 동인도 회사와 군사적 충돌이 계속되었다. 이에 영길리는 인도에 직접 개입하기로 하고 미리견, 불란서, 오지리, 이태리에게 각지 식민지를 약속하며 연합을 꾀했다. 동인도 회사의 용병들이 방갈랄 일대로 진입하면서 전쟁이 발발하여 5개국 연합은 연합함대와 지상군을 파견하고 강화도와 제물포를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인천이 함락되고 한성역까지 점령되자 조정은 흥화영, 장용영, 충헌영의 3만 장병을 각지에 집결시키고 근왕병을 소집했다.
경군의 저항이 격렬해 한성 공략에 진척이 없자 연합군은 평양으로 진군하여 흥화병영을 점거했고, 삼화포을 장악해 물자를 탈취했다. 그러나 이내 근왕병과 충헌영이 남쪽에서, 장용영이 북쪽에서, 경군이 동쪽에서 공격하자 크게 패하였다. 남은 병력의 일부는 삼화포로, 일부는 제물포로 후퇴하여 후일을 도모하고자 했으나 이후 황해 해전으로 연합군 해군이 큰 피해를 입고 회항하면서 모든 연합군이 항복하였다. 이후 한국, 영길리, 불란서, 막와이(방갈랄) 사이에 동래화약을 맺어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