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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글씨 크기|10| | {{center|{{글씨 크기|10|중세까지 앙골라 지역에서는 토착 민족들이 부족국가를 세워 활동했었다.<br> 이후 400년 가까이 지속된 포르투갈의 식민통치는 앙골라 문명을 쇠퇴시키고 원주민들을 우민화하였다.<br> 1910년의 포르투갈 혁명으로 앙골라는 처음으로 자치권이 부여되었다.<br> 독립 직전까지, 앙골라는 지리적 특수성으로 포르투갈의 경제력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br> 1966년 독립 이후, 앙골라는 석유산업과 제조업을 바탕으로 초월적인 고속성장을 보여주었다. <br> 현재 앙골라는 친서방 국가이며, 미국-소련과 더불어 세계를 삼분하는 '''초강대국''' 이며 아프리카 총생산의 96%를 구성하고 있다.'''}}}} | ||
{{펼접|id=|title='''<big>목차</big><br>[ 펼치기 • 접기 ]'''|titlecolor=#bee6fe}} | |||
<div style="text-align:center; width:auto; 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 {{목차}} </div>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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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개요= | ||
앙골라는 | 앙골라는 1575년부터 포르투갈 제국의 식민지로써 설립되었다. 오랜 압제 끝에 앙골라는 1910년부터 앙골라 자치령 지위를 받으며 자치권을 얻기 시작하였으며 앙골라인들의 무장 투쟁을 통하여 포르투갈의 영향력은 루안다 주변 지역으로 국한되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앙골라인들의 독립 의지는 더욱 더 강해졌으며 1961년부터 진행된 독립 전쟁을 통하여 1966년에 완전히 독립하였다. 전쟁 직후 친소련 정당이자 군벌인 MPLA(앙골라 해방인민운동) 소속 조제 에두아르두 두스산투스 대통령이 부정선거를 통하여 앙골라 인민공화국의 1대 대선에서 승리하였으나 이에 불응한 친서방 정당 UNITA(앙골라 완전독립 민족동맹) 소속 조나스 사빔비가 자신의 군벌을 이끌고 반기를 들어 1966년 내전을 개전, 1971년 사빔비가 이끌던 UNITA가 승리하여 현재의 앙골라 공화국 체제가 정립되었다. 이후 몇 번의 헌법 개정을 통하여 현대의 앙골라 공화국의 기틀이 완성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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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배== | |||
<center>'''선사시대'''</center> | <center>'''선사시대'''</cente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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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style="margin: -4.5px -9.0px">[[파일:Mbanzacongo.jpg|center|link=]]</div> | | <div style="margin: -4.5px -9.0px">[[파일:Mbanzacongo.jpg|center|link=]]</div>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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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 서구화된 음반자콩구의 삽화'''</center> | |||
루안다, 콩고, 나미브 지역에서 발견된 다양한 유적으로 보아 구석기,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최초로 이 지역에 정착한 이들은 산족(San People)들이었으나 이후 기원후 6세기경, 제철기술, 토기제작기술, 농업기술을 가지고 있던 반투족들이 산족을 밀어내고 주류가 된다. | |||
이후 콩고 강 하류서 형성된 콩고 왕국 세력이 앙골라 지역에서 큰 영향력을 끼치는 국가로 성장했으며 건국 이후 콩고 왕국이 건설하고 천도한 도시인 음반자 콩고는 현재도 음반자콩구(M'Banza Kongo)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도시이며 자이르주의 주도이다. | |||
콩고 | |||
이후 디오고 캉(Diego Cão) 등등 포르투갈인 | 이후 디오고 캉(Diego Cão) 등등 포르투갈인 탐험가들은 현재의 루안다 지역과 음반자콩구를 통하여 앙골라 지역을 개척하기 시작했고 포르투갈인은 종교를 전파, 콩고 왕국은 상아나 자국에서 거주하던 인력을 붙잡아 '''노예''' 로 만들어 포르투갈에 제공/거래하기 시작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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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 | <center>'''포르투갈령 앙골라 설치'''</center> | ||
{|class="wikitable" style="width: 300px; border: 2px solid #99A6B6; margin: 12px auto; background: #01283f;" | {|class="wikitable" style="width: 300px; border: 2px solid #99A6B6; margin: 12px auto; background: #01283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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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margin: -0.3rem -0.6rem;">[[파일: | |<div style="margin: -0.3rem -0.6rem;">[[파일:Flag of Portugal (1521).svg|700px|link=]]</div>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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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 주앙 3세 시대 포르투갈의 깃발'''</center> | |||
포르투갈령 앙골라는 1575년, 탐험가 파울로 지아스 지 노바이스(Paulo Dias de Novais)가 100명의 포르투갈인, 400명의 군인들과 함께 현 루안다 지역에 캠프를 설치하며 설립되었다. 잠깐의 네덜란드 지배기를 제외하면 이후 앙골라는 포르투갈 왕국이 계속 통치하였다. 근 몇백년간 변방에 위치하여 지정학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식민지였으나 포르투갈 왕국이 이후 열강들과의 힘겨루기에서 밀리고, 브라질 왕국이 독립하는 등 악재가 계속 겹치자 왕국은 내륙 진출을 결정하였고 베를린 조약으로 앙골라의 국경을 확정짓게 되었다. 압도적인 무력을 바탕으로 포르투갈 왕국은 현지인들을 제압한 상태로 자원을 수탈하며 큰 부를 거머쥐게 된다. | |||
<center>'''페르난두 다 실바'''</center> | |||
1845년 2월 14일, 미국의 급진공화주의자, 흑인 해방 지지자이면서 미국-포르투갈간의 무역을 중계하던 시어도어 밀러(Theodore Miller)와 루안다의 관공서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움분두인 직원인 에스메랄다 다 실바(Esmeralda da Silva) 사이에 페르난두 밀러(Fernando Miller)가 태어난다. 페르난두는 어릴 적부터 남다른 영리함을 보였다. 항상 미국-포르투갈-앙골라를 오가며 생활했기에 페르난두와 자주 만나기 힘들었으나 교육과 자유에 관심 있던 아버지 시어도어는 페르난두를 열성적으로 지원해주었고 어머니와 함께 루안다에서 낮에는 포르투갈인 백인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학업을, 밤에는 야시장에서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교내 최고의 인재로 촉망받았다. | |||
이후 아버지의 지원으로 그는 리스본 대학교에서 기계공학 학사전공 과정을 밟아 21살의 젊은 나이에 학위를 취득(1866년), 이후 미국으로 이동하여 메사추세츠 공화대학교<small>(MIT)</small>에서 24살에 기계공학 석사학위(1869년)을, 29살에 박사학위(1874년)를 취득한다. 이 시점에서 이미 페르난두는 세계에 몇 없던 기계공학 관련 권위자였다. 한편 이 유학 기간동안 페르난두는 미국의 건국 역사와 노예제, 그리고 직전에 끝난 남북전쟁을 통한 노예제 철폐에 관한 역사에 큰 관심을 보였고 거주하던 보스턴에서 자유인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또한 이러한 관심사로 인해 생긴 가치관 덕에 앙골라에서 이루어지는 강제노역의 폐혜를 분석하는 것에 큰 관심을 보였다. | |||
페르난두는 학위 취득 이후 루안다로 복귀하여 부모들과 논의 끝에 성을 다 실바로 바꾸어 본격적으로 정체성을 포르투갈인으로 정한 뒤, 포르투갈인들과의 인맥 형성을 시작했으며, 포르투갈령 앙골라 지역 총독의 지명으로 다양한 인프라 건설 프로젝트를 총괄하며 명망을 얻는다. 1880년에는 자신의 포르투갈 리스본 대학교 유학 시절에 형성한 인맥의 도움과 미국 자본가들로부터의 투자로 루안다 근처에 벨라스 공업사<small>(Companhia Industrial do Belas)</small>를 설립하였다. CIB는 다이아몬드 광산부터 시작하여 브라질과의 무역중계업, 조선업 등 사업을 순차적으로 빠르게 확장하였다. 포르투갈 정계는 페르난두가 흑인의 피가 섞이긴 했지만 분명 외적으로는 백색의 피부를 가진, 식민사관에 동조하는 영락없는 포르투갈인 식민주의자로 취급하였고 그는 이 점을 잘 이용하여 포르투갈령 앙골라 정부와 정치-경제적 유착을 형성하여 앙골라 내 사업권을 독점해나가기 시작하였다. | |||
하지만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페르난두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탈식민주의를 지지하고 있었고 앙골라에서 발생하는 끝없는 착취를 물밑에서 해결하려는 시도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는 내륙을 순회하며 부족 사회에서의 탈출과 지적 개방을 추구하는 인재들을 자신의 공업사의 노동자들로 영입하였고 그들을 고급 인력으로 만들기 위하여 CIB 자체 재정으로 루안다 공학대학교의 전신인 벨라스 공업학원<small>(Academia Companhia Industrial do Belas) </small>을 1892년에 설립한다. 기숙사부터 자체 생필품 공급까지 CIB가 직접 진행하면서 이들의 충성심은 높아졌다. 한편 페르난두는 수율을 핑계로 앙골라 내 민족들 위주로 노동자들을 영입하였는데다 영업이익으로 포르투갈령 앙골라 총독을 매번 매수하면서 앙골라 내 정치적 실세로 등극했기 때문에 이러한 계획은 포르투갈 정부에게 전혀 발각되지 않았다. | |||
이후 페르난두는 ACIB 출신 전문직들에게 자금을 지원해주며 로비투<small>(Companhia Industrial do Lobito)</small>나 모사메드스<small>(Companhia Industrial do Moçâmedes)</small> 등지의 항구도시들에 협력 공업사 설립을 도왔다. 이들은 CIB와 더불어 포르투갈령 앙골라 내 3대 기업으로 성장하였고 페르난두의 독립 계획에 참여하였다. CIL과 CIM 역시 공업사 소속 학원들을 설립하여 앙골라 내의 친독립 인재 양성속도를 더 향상시켰고 시작했으며 1900년대 초반에는 앙골라 전역에 공업에 종사하며 교육받은 원주민들은 무려 25,000명으로 앙골라의 백인 이주자들 인구의 절반이나 되는 규모로 성장하였다. | |||
교육받은 원주민들은 전문적인 기술교육과 더불어 반식민주의 사상까지 교육받으면서도 페르난두의 보호로 포르투갈 당국의 박해로부터 안전한 생활을 영위했으며 이들 중 자치권 확대에 관심이 많았던 인물들은 페르난두의 의도대로 반식민주의 사상가들로 변모, 일부는 자발적으로 내륙으로 진출하여 다른 원주민들에게 압제에서의 해방에 관한 사상을 빠르게 퍼뜨린다. | |||
<center>'''1910년 포르투갈 혁명과 앙골라 자치령의 태동'''</center> | |||
한편 1800년대 후반부터 포르투갈 왕국의 브라간사사셰코부르크구고타 왕정은 시대에 흐름에 따라 빠른 속도로 정치력을 잃어가는 상황이었다. 1890년부터는 영국의 꾸준한 횡포와 이에 굴복했던 포르투갈의 외교정책로 인해 포르투갈 본토 내의 왕당파들의 규모는 위축되기 시작했고 공화주의자들이 힘을 가파르게 얻는다. 1900년대 중반에 접어들자 이 경향은 더 심해졌고 지속적인 반란모의가 포착되거나 포르투에서 공화파 스캔들이 터져 전 국토에 퍼져있는 공화파의 내통연락망이 포착되기도 하였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왕정과 경제적 협력관계에 있던 페르난두는 왕당파들과 카를루스 1세를 위해 유사시 앙골라로의 비상 망명 계획을 미리 구체화하였으며 이에 대한 보답으로 카를루스 1세는 포르투갈령 앙골라 총독부의 자치도를 높이고 콩친젠치(Contingente)<ref>영어로는 'Quota'. 할당제를 의미하는 단어이다.</ref> 제도를 통하여 총독부의 공직자들의 55%를 원주민에게 할당하는 정책을 시행하여 총독부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 |||
결국 1910년 10월 3일, 포르투갈 혁명이 발발, 왕정은 공화파들의 압도적 세력에 밀려 무너지면서 포르투갈 왕국은 본토에서의 긴 역사를 마무리했고 마누엘 2세와 추종자들은 리스본에 민간선적 신분으로 정박해있던 CIB 소속 장갑수송선 10척을 타고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왕당파 소속 전투함들의 호위를 받으며 앙골라로 이동했다. 반란 발발 전, 앙골라 측 인력들은 왕정이 소유했던 금을 포함한 엄청난 규모의 재화를 수송선에 적재했고 이 재화는 왕가와 함께 앙골라로 이동한다. | |||
한편 앙골라에서는 CIB의 철저한 방첩활동으로 공화파들의 준동이 미연에 방지되었으며 루안다에서 일어났던 소규모의 반란은 총독부에게 진압, 이후 마누엘 2세가 앙골라에 안전하게 도착하면서 포르투갈 왕국은 앙골라에 국체를 보존하게 된다. | |||
이후 앙골라 내의 정치적 실세였던 페르난두는 CIB의 내륙 기지에서 비밀리에 생산되던 총기로 원주민 공직자들과 루안다 주변에 거주하던 친왕당파 원주민들을 무장한뒤에 루안다에 위치한 총독부를 급습하여 총독을 구금, 포르투갈 왕국의 명목상 지도자였던 마누엘 2세의 승인으로 자신이 직접 포르투갈령 앙골라의 총독에 오른다. 한편 루안다에서 페르난두가 정치적 입지를 굳히는 동안 CIL/CIM, 그리고 페르난두의 동료들은 벵겔라나 모사메드스에서 아직 본토에서 일어난 반란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하여 갈팡질팡하던 포르투갈군들을 물량으로 제압하고 10척의 군함을 나포한다. 또한 내륙에 있던 잔존 포르투갈군들을 포섭하였다. 대부분은 공화파들에 대한 정보가 제한적인 병력들이었기에 저항 없이 왕국군으로서 앙골라에 협력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앙골라 내치를 접수하게 되자, 페르난두는 포르투갈의 본토를 완벽하게 통치하게 된 공화파들과 협상에 들어간다. | |||
페르난두는 앙골라와 CIB/CIL/CIM의 경제적 가치와 앙골라 지역에 매장된 자원, 그리고 마누엘 2세의 앙골라 체류를 방패삼아<ref>아직 포르투갈 내에 많은 왕당파들이 남아있었기에 쉽사리 국왕을 명목상 지도자로 내세운 앙골라 지역을 침공할 수 없었다.</ref> 자신을 앙골라 지역에 세워질 자치권이 있는 준국가 세력의 총리로 위임하고 왕정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포르투갈 공화국과의 전쟁과 완전지배를 피하고자 하였다. 당장 대서양을 한참 건너고 CI 계열 기업들이 건조했던 전투함들과 전투를 벌여야 앙골라에 상륙하여 페르난두 일당을 제압 가능하다는 앙골라의 지리적 이점 때문에 공화파들 사이에서도 앙골라와 타협하는 것에 큰 반대여론이 없었고 1910년 12월 1일에 '''마데이라 조약'''에 양측이 서명하며 앙골라 자치령이 설립되었다. 포르투갈은 앙골라 지역을 다시 무역거점과 포르투갈계 기업들의 자원 생산기지로 활용이 가능해졌으나 사실상 포르투갈에게 주어지는 경제적 특권 일부와 제한된 주둔군을 제외하면 앙골라에 채워졌던 모든 족쇄가 사라졌다. | |||
==앙골라 자치령== | |||
===페르난두 시대=== | |||
<center>'''앙골라 자치령 설립'''</cente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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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margin: -0.3rem -0.6rem;">[[파일:Flag of Domínio de Angola (1910).png|700px|link=]]</div>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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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 앙골라 자치령의 깃발<ref>자치령은 명목상 무너지지 않은 포르투갈 브라간사사셰코부르크구고타 왕정이 통치하는 영토였기에 자치령기는 왕국의 깃발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휘장은 1319년 설립되어 포르투갈 그리스도교의 상징으로 활용되던 포르투갈 그리스도교기사단의 십자가를 사용했다. 포르투갈 공화파들은 이 상징과 관련된 수훈들을 폐지한다. </ref>'''</center> | |||
1910년 12월 1일, 앙골라 자치령 설립과 동시에 페르난두 다 실바는 65세라는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치령의 총리로서의 장기집권을 시작한다. | |||
페르난두는 포르투갈 왕당파들에게 루안다에 거처와 복지를 제공해주는 대가로 앙골라의 산업개발에 대한 투자를 요구하였다. 앞서 말했던 수송선에 실렸던 재화는 명목상 왕가 소유였으나 재화들의 보관 및 감시는 앙골라 자치정부가 관장했기에 왕가는 이 투자를 반강제적으로 승인할 수 밖에 없었다. 이 계약으로 큰 자본을 확보하게 된 CIB/CIL/CIM은 빠른 속도로 해안선을 따라 산업기반을 확장하였고 1912년에는 다양한 기업들의 합작으로 로비투에서 앙골라 최초의 순양함을 건조하는 과업까지 달성한다. 또한 마데이라 조약에서 보장한 자치권에는 무려 외교권까지 포함되었기 때문에 앙골라 자치령은 당시 나미브 지역에서 국경을 맞대고 있던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개발을 지원해주며 이에 대한 보답으로 프리츠 하버가 개발했던 화학비료와 각종 연구기반을 지원받으며 인구부양능력과 화학분야 과학기술을 크게 향상시켰다. 이 시기부터 크게 발전한 화학기술은 이후 앙골라의 석유개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 |||
<center>'''제 1차 세계대전과 정산 기간'''</center> | |||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아프리카에 고립되어 있었으나 정치적 이해관계로는 전세계와 연결되어있던 앙골라 자치령은 생산했던 함선과 기계제조장비를 협상국과 동맹국 양쪽에 팔아넘기며 큰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으며 협상국에 발각되지 않고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에 있던 독일 제국군과 시민들에게 식량과 탄약을 지원해주었다. 이 시기, 자치령 정부는 전쟁으로 인한 안보위협 발생 방지를 빌미로 2만명 규모의 앙골라 자치령 방위대를 창설하여 포르투갈의 기습적인 탄압에 대비하고 1차대전에 소수의 병력을 파견하여 정치적 목소리를 키울 준비를 하였다. 또한 브라질에 거주중이던 자유인 흑인 이민자들을 대규모로 받아들여 역내 독립파들의 기세는 더 세졌고 포르투갈의 영향력은 더욱 약화된다. | |||
이후 영국의 지속적인 참전 요구로 포르투갈이 1차대전에 참전하자 앙골라 자치령은 독일 제국에 대한 직접적 지원을 멈출 수 밖에 없었으나, 제국군 패잔병들을 포함한 독일인들이 모사메드스 주변 해안국경을 통하여 투항할 시, 이들을 모사메드스로 조건 없이 수용하여 거처와 복지를 제공하기로 하였고 이를 통해 전쟁 기간 총 2만명의 독일인들이 모사메드스에 이주하게 되었다. 자치령은 독일에게 우호적인 행보를 보이면서도 1만명의 방위대와 직접 생산한 6척의 구축함을 포르투갈 공화국국 소속으로 임시 이전하여 유럽으로 파병하였고 협상국과 전투 임무를 수행하였다. 결국, 1918년에 독일이 패망하면서 1차대전은 종전되었고 앙골라는 전쟁 기간동안 양 세력 모두에게서 외교를 통하여 이윤을 얻고도 포르투갈을 도왔던 대가로 자치권을 더 확대할 수 있게 되었다. 본토에서 활동하는 앙골라 방위대의 규모는 대략 10만이 넘는 규모로 성장하여 앙골라 주둔 포르투갈군들을 압도하여 포르투갈의 앙골라 자치권 박탈 계획은 시도조차 되지 못 했다. | |||
이후 정산 기간(Período de liquidação)이라 불리는 1918년-1920년 사이 기간 동안 앙골라는 유럽 지역의 재건사업에 뛰어들며 특히 독일 지역에 대규모 식량 지원,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의 왈롱 지역에서 대민지원 사업으로 민가 재건을 매우 낮은 가격에 진행하며 양 세력에 대한 신뢰 확보를 성공한다. 또한 러시아 제국의 붕괴 이후이면서 전쟁 직후였기에 전세계적 정치적 혼란과 권력 재편이 발생한 기간이었기에 앙골라는 효과적으로 자국의 영향력을 증대할 수 있었다. 신질서인 미국과의 협력관계는 더욱 더 강화됐으며 양국간 교역의 활발함도 더 증가했다. | |||
<center>'''1920년대 초반'''</center> | |||
1920년대에 진입하자, 앙골라 자치령은 광란의 20년대 빠른 속도로 발전하던 미국과의 교역사업을 더 크게 확대하며 식료품과 기계 장비들을 미국에 수출하며 엄청난 무역흑자를 기록한다. 자연스럽게 앙골라 역시 경제력이 크게 상승하였다. 앙골라의 인구는 2천만명을 넘어서며 포르투갈의 인구를 3배나 웃도는 규모로 성장하였으며 앙골라 자치령 방위대는 명칭을 앙골라 자치령 방위군으로 변경하여 위상을 높혔고 규모 증대, 공군 창설, 잠수함 건조, 전차 개발 등 개혁을 진행하였다. 군은 규모 30만명을 달성하며 포르투갈군과의 격차를 더 벌리게 되었고 자치권은 더더욱 확고해졌다. | |||
한편 자치령 내에서 압도적인 위상을 자랑하던 국부이자 영웅인 페르난두는 3대 기업들이 노쇠한 자신의 사후 국정을 좌우할 것을 우려, CIB의 재정과 국고를 투입하여 각 회사들의 지분을 1차적으로 CIB 명의로 매입 후 CIB를 준공기업으로 전환하였다. 1922년, 결국 3대 기업들은 국영 모기업인 앙골라 공업부(Departamento Indústria Angolana) 산하로 재편되었고 DIA는 이후 카빈다, 북앙골라, 동앙골라 지역에 추가적으로 사무소들을 설치하여 루안다, 말란즈, 로비투, 우암부, 모사메드스, 루방구, 카빈다 총 7곳에 DIA 지사들이 위치하게 되었다. | |||
집권기 페르난두는 측근들로 국민의회 내각을 꾸렸으며 의회는 CI 출신 페르난두의 측근들이 앙골라당(Partido Angolana - PA)를 형성하여 명목상 페르난두의 의견을 대변하고 있었다. 사실상 철인통치 수준의 정치적 다양성을 보였으며 혹여 페르난두가 사망한다면 정치적인 분열이 자치령의 혼란을 넘어서 자치권의 박탈로도 이어질 수 있었다. 그나마 페르난두가 설립한 앙골라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중앙정치와는 별개로 가동하며 가끔씩 벌어지는 PA의 위법행위를 잡아내었다. 결국 사법부와 입법부가 페르난두의 입맛대로 작동했으니 앙골라의 정치지형은 심각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 |||
하지만 페르난두는 위 문제를 잘 인지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15년간 집권으로 정치적 다양성이 전제정에 가까웠던 앙골라 정치계의 개혁을 진행해왔다. 그는 독립을 지향하며 민주적 절차로 체제가 운영되는 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후계자들을 양성하지 않으면서 PA에도 입당하지 않으며 무소속으로 활동했다. 특히 지역정당들이 태동하자 이들을 중앙정계와 어떻게든 잇기 위해 노력했다. | |||
일반적인 정치인일 경우 이러한 중도적인 모습을 보였다면 모든 세력의 먹잇감으로 전락하여 정치적 몰락을 겪었겠으나 이미 앙골라를 넘어 미대륙과 유럽에도 이름이 널리 알려졌던 압도적 위상을 가진 국부이자 정치력의 정점이었던 페르난두는 개혁을 지속적으로 단행한다. 연휴였던 1925년 1월 1일, 80세 생일을 몇주 앞둔 페르난두는 총선 준비령과 급작스러운 PA의 해산령을 내림과 동시에 총리직에서 사임하였으며 곧바로 선거관리위원장에 취임하여 선거절차를 감찰하는 마지막 정치적 행보를 밟는다. 지역정계에서 활동하던 다양한 정당들은 총선거에 소속 후보들을 등록하였다. | |||
PA 의원들은 이에 당황하였고 일부는 위 결정에 반발하여 페르난두에 대한 충성을 거부한 파벌까지 형성하였으나 페르난두는 자치령 방위군의 지도부를 장악한 상태였다. 페르난두는 군을 동원하여 의회를 강제로 해산하고 국민의회 건물을 선거가 진행될 기간동안 점거하는 엄청난 강수를 두었고, 총선거는 매끄럽게 진행된다. PA에 소속되었던 대부분의 의원들은 총선거 직전까지의 3개월 가량의 기간동안 검찰과 군부가 진행했던 부패 관련 정치적 숙청으로 중앙정계에 대한 영향력을 거세당했으며 페르난두가 지원해줬던 지역정당에서 명망을 떨치던 정치인들이 총선거 참여를 위하여 정당을 형성하며 PA의 존재감은 매우 빠른 속도로 신규 정당들에게 대체되었다. | |||
<center>'''1925년 앙골라 총선거'''</center> | |||
{| class="wikitable" style="max-width: 550px; width: 100%; margin-left: auto; margin-right: auto; border: 2px solid #99A6B6; text-align: center; font-size: 10p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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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style="margin: -4.5px -9.0px">[[파일:1925 Eleição geral de Angola.png|center|link=]]</div>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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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총선에서 페르난두와 비슷하게 중도정치를 표방하는 민주당(Partido Democrático de Angola)이 국민의회 지역구 200개의 의석 중 과반을 넘는 56.5%인 지역구 113석과 비례대표 17석, 총 130석을 확보하여 당대표이자 총리 후보였던 마르코스 페레이라(Marcos Pereira)가 앙골라 자치령의 2대 총리로 당선되며 페르난두로부터 총리직을 인수인계받아 4월 1일부터 5년간의 임기를 시작한다. 의석 수의 나머지 43.5% 역시 대부분 정치색이 약한 사회당(Partido Socialista de Angola)과 자유당(Partido da Liberdade de Angola) 등의 온건정당들로 채워지며 앙골라의 정치의 첫 단추는 부드럽게 끼워지게 된다. | |||
한편 당선인 마르코스는 당대표를 제외한 '지도자'로서의 경험이 없었다. 이에 취임 직후 1개월간 페르난두를 이은 총리의 지도력을 보이기 위해 연립정부 구성을 시작한다. 자신이 소속된 민주당 말고도 온건 좌익계열인 사회당과 온건 우익계열인 자유당을 포섭하는 절차에 들어갔던 것. 양측 온건정당들은 페르난두의 부재로 인한 위기의식을 느껴 민주당에 협력하기로 결정하였으며 그 결과 마르코스는 240석의 의석들 중 민주당의 113+17석, 사회당의 41+8석과 자유당의 39+6석을 합한 224석(93%)에 달하는 의원들을 협력자들로 끌어들이며 3월 15일에 빅텐드 정당연합인 대앙골라(Grande Angola)를 창설한다. 나머지 16석 중 8석은 카빈다의 독립을 지지하는 지역정당인 카빈다 독립협회(AIC), 8석은 급진적 독립주의 정당인 앙골라 독립당(PIA)가 가져간다. | |||
입법부의 지지를 얻게 된 마르코스는 대법원 판사들과 헌법재판관 11명을 전부 교체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대법원 판사들은 행정부 수반인 마르코스와 민주당이 지목, 헌법재판관들은 11명 중 6명은 민주당이, 2석은 사회당이, 2석은 자유당이, 나머지 1석은 사법부 소속 헌법협회 소속 판사들이 지목하였다. | |||
<center>'''마르코스 페레이라는 누구인가'''</center> | |||
1875년 출생, 마르코스 페레이라는 CIB의 본격적인 세력 확장 직후부터 소년공으로서 회사에 소속되어있던 앙골라 정치사에서 입지가 확고한 사람이었다. 1882년부터 루안다 외곽에서 거주하던 극빈층 원주민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CIB에 비정규직 청소부로 입사, 이후 정규 숙련공으로 CIB가 직접 훈련시켰다. 초등과 중등교육은 CIB의 도움으로 직업과 병행, 나중에는 노동과 동시에 ACIB에서 앙골라 최초의 자립적 고등교육을 이수받은 사람이 되었으며 1890년 기계공학 학위를 취득한다. 마르코스는 어린 나이에 차석 졸업으로 학업적 성취도를 증명하였고 ACIB에서 고등교육을 이수받으며 벨라스 항구에서 미국 선적의 선원들과의 대화로 언어적인 능력을 보이는 남다른 학생이었다. | |||
졸업 직후, 마르코스는 CIB의 초대 졸업자들 지원정책을 통하여 미합중국의 시카고 대학에서 정치학과 경제학을 5년간 학사 복수전공, 조지타운 대학에서 정치학 석사학위 취득 이후 앙골라-미국을 오가며 CIB의 자금을 미 의회에 로비하여 앙골라 지역와 미국 간의 외교적 관계수립에 집중하였다. 청년기부터 이 정도 수준의 정치활동을 보였기에 앙골라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마르코스가 총리직을 얻을 수준의 거물로 성장 가능하다고 보는 여론이 팽배했다. 한편, 마르코스는 정치 로비와는 별개로 존 피어폰트 모건이 CIB에게 US 스틸의 기술자들을 파견하여 기술이전을 진행하게 하게 만든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여러모로 포르투갈령 앙골라가 자치령으로 발전할 대외적 기틀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 |||
한편 마르코스는 페르난두와 여러 번 대면하며 친분을 가지고 있긴 하였으나 페르난두는 마르코스에게 개인적인 지원은 해준 적이 없으며 마르코스는 CIB나 ACIB에서 제공하는 우수직원/학생 보너스와 장학금을 수령한 적 밖에 없다. | |||
===마르코스 시대=== | |||
<center>'''1기 마르코스 행정부 (1925-1930)'''</center> | |||
행정부의 수장이면서도 입법부의 지지를 얻으며 사법부를 길들이는 데에 성공한 마르코스는 한창 진행되는 앙골라의 압도적 경제적 성장을 가속하면서도 교역의존성 감소와 경제적 폭주상태를 방지하기 위하여 금리인상부터 진행한다. 한창 폭주중이던 미국의 소비는 마르코스의 눈에는 언제든지 무너져 내릴 수 있는 거품으로 보였고 이에 미국과의 교역으로 큰 이익을 기록하던 앙골라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당연히 고성장기임에도 금리인상부터 단행하는 마르코스의 정책에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이미 마르코스는 행정·입법·사법기관들을 전부 장악한 상태였고 큰 저항 없이 다양한 기초적인 정부조직 개편과 정책 향방을 결정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행정부의 가장 대표적인 개편으로는 페르난두 재임기에 문제를 보여주었던 국가행정조직의 효율성을 개선하기 위하여 일부 조직들은 통폐합, 일부 불충분하게 주목받았던 사회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조직들을 신설한 일이 있다. 앙골라 자치령의 국방을 담당하는 조직은 앙골라군(Forças Armadas Angolanas)이라는 이름으로 변경하여 포르투갈에 대한 저항을 더더욱 강화한다. | |||
새로 설립되어 원내에 입성한 정당들 역시 이전 앙골라의 정치세력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인다. 민주당과 사회당은 건국 직후 국제적으로 심각한 고립을 겪던 소련과의 교류도 시작하며 정치적 다양성 확보 및 경제정책 수립과 관련된 정보를 취득한다. 물론 근본적으로 미합중국과의 관계를 중요시 여기던 민주당은 사회당·독립당 2당과 함께 미합중국의 정당들과 교섭단체 설립을 통하여 정치적 성숙도를 상승시키고 미국 의회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킨다. 이 시기 일부 미국 남부 흑인들이 루안다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 |||
금융제도와 정치적 구조조정을 진행하던 마르코스는 근본적인 경제적 기반 확장을 위해 전국적인 산업개발을 시작한다. 특히 소련이 진행하던 5개년 계획과 산업개발을 비슷한 시기에 진행하며 경제적 구조에서 오는 차이들을 학습하기로 한다. 마르코스는 이 시기 200개가 넘는 행정명령을 내리며 전국 각지에 직접 대통령령으로 기반시설을 건설하였다. DIA는 특히 중남부에 위치했던 산업의 중심지들인 루안다, 말란즈, 로비투/벵겔라(아틀란티코 광역권), 우암부, 모사메드스, 루방구에 대규모 투자로 국영 시멘트, 철강, 섬유 공장들을 설립, 그리고 해안가에 원재료 가공을 통하여 차량, 함선, 중기계, 의류를 제작하는 공장들을 설립한다. 또한 DIA는 위 6개 광역권들을 잇는 고속도로망과 철도망들을 건설하여 유통속도를 증대시켰다. 이 생산품들은 유럽과 미국으로 불티나게 수출되기 시작하면서 앙골라의 국부(國富)는 빠르게 증가한다. DIA는 이러한 방식으로 국부를 2차산업 생산력에 완전 재투자하지 않고 앙골라 내부의 경제기반 확장과 인구증가정책에 집중시키며 혹여 발생할 경제적 고립기에도 내수경제만으로 국가가 운영되도록 기반을 마련한다. 이는 마르코스가 예측했던 미국의 경제적 공황상태에 대한 대비였다. | |||
대공황 직전인 1929년의 여름, 앙골라는 마르코스 집권 초기에 비해 총생산량이 대략 2배 가량 증가하였으며 인구 역시 3천만명을 향해가며 포르투갈과 격차를 더 벌렸다. 특히 제조업 거점들의 빠른 설립과 확장으로 도시들의 인구 부양능력이 매우 빠르게 증가하여, 정산 기간 이후로 정체되던 인구 증가속도가 훨씬 빨라지게 되었다. 또한 영국과 벌인 남부 지역 국경전에서 자국 조병창에서 제작한 기갑/기계화전력으로 적은 병력으로 영국군과 남아프리카 연방군에 큰 피해를 입히며 전략/전술적인 완승을 달성하자 앙골라의 국민들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 |||
<center>'''대공황 발발'''</center> | |||
1929년 10월, 미합중국 주식 시장의 대규모 주가 하락 사태로 전세계적 대공황이 발발한다. 이를 예견하던 마크로스의 선견지명으로 대공황 이전부터 진행된 미국과의 2차산업 교역의존도 감소와 1차산업 교역 증대, 대량의 금괴 확보 덕에 앙골라의 경제력은 큰 타격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앙골라 역시 20년대 초반-중반 수준의 고성장은 기대할 수 없었고 마르코스와 앙골라 자치령 정부는 경제적 제도를 개편하기 위해 노력한다. | |||
<center>'''2기 마르코스 행정부 (1930-1935)'''</center> | |||
{| class="wikitable" style="max-width: 550px; width: 100%; margin-left: auto; margin-right: auto; border: 2px solid #99A6B6; text-align: center; font-size: 10p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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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style="margin: -4.5px -9.0px">[[파일:1930 Eleição geral de Angola.png|center|link=]]</div>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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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경제 대공황의 여파를 상대적으로 매우 안정적으로 막아낸 마르코스는 정계에서 더더욱 큰 신뢰를 얻었으며 85세가 된 페르난두가 마르코스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격려하며 마르코스의 입지는 매우 확고해진다. 1930년 3월 1일에 진행된 1930년 앙골라 총선거에서 마르코스와 앙골라 민주당은 지역구 의석 200석 중 120석, 비례대표석 40석 중 24석을 획득하여 의회를 장악하면서 마르코스 2기 내각이 형성된다. 민주당의 약진에도 불구하고 확고한 지지층에 힙입어 사회당은 36+7석, 자유당은 34+7석을 얻으며 의회에서 안정적인 입지를 보여준다. 이 외에 앙골라 독립당이 세력을 살짝 확장하며 8+2석을 가져간다. 카빈다 독립협회(AIC)는 마르코스의 성공적인 1기 집권으로 인하여 카빈다 지역이 수혜를 보게 되면서 자진해산하였다. | |||
앞서 말한 대공황 극복 경제정책의 일환으로 앙골라 정부는 금리는 공황 이전보다 인하하여 소비를 20년대와 비슷한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시작하였으며 전국적인 대규모 저층 공동주택 개발로 2차산업 전반에 큰 활황을 불어넣기 시작한다. 특히 1920년대 발전기에 세워진 다양한 건설 관련 개인사업체들을 구제하면서 앙골라의 경제적 중추는 대공황을 무사히 견뎌내게 되었다. 소비재와 사치품 같은 경우 재무부의 엄격한 통제 하에 시장에 유통되는 양을 늘리며 경기 활성화를 진행한다. 또한 인프라 건설을 더더욱 증대하여 각 도시들의 중심 업무지구들의 숫자와 규모를 키우며 빠른 속도로 도시 자체의 인구부양능력을 키운다. 벨기에와의 협정으로 카빈다는 콩고 지역을 통하여 자이르-우이즈 주와 검문 없는 고속도로를 통하여 빠르게 연결 될 수 있게 되었으며 이전까지 무시당하던 북부 지역인 음반자콩구-우이즈와 동부 내륙지역인 사우리무-루에나-메농그까지 교통망과 생산기반들을 확장한다. 내륙 지역은 토질이 앙골라 내에서 제일 좋은 편이었기에 동부 지역은 앙골라 1차산업의 중심지로 올라서게 되었다. | |||
국제적으로 앙골라 정부는 직업을 잃게 된 세계 각지의 전문직들을 낮은 임금을 상쇄하는 높은 수준의 복지와 경제적 안정으로 어필하여 모집하여 앙골라 내부로 이주시켰다. 이 시기 앙골라는 앙골라 연방대학교 (UFA) 시스템을 설립하여 이주한 전문가들을 대거 교수로 기용하여 전반적인 학문적 발전을 추구했고 이 전략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앙골라 내 고등교육 이수자들의 비중이 빠르게 증가하게 되었다. | |||
한편, 열강들 사이에서 진행되던 건함 경쟁이 대공황으로 완전히 멈추자 앙골라는 이들을 헐값에 매입해와 분해하여 기술력을 축적하고 일부는 함대로 편입시키며 앙골라 해군의 규모는 독일과 러시아 해군을 합친 것의 규모보다 비대해졌다. 앞서 말한 소비재와 비슷한 방식으로, 재무부는 자신들의 통제 하에 적당량의 군 채권 발행을 통하여 육군과 공군 규모확장을 위한 자금조달을 진행하였으며 이 시기 앙골라의 기갑/총기를 비롯한 다양한 무기 설계기술이 유럽을 추월하였다. 이렇게 확장된 군대는 남아프리카 연방과 진행한 국경분쟁<ref>앙골라의 승리. 남아프리카 연방은 남서아프리카 위임통치령에 군사력을 주둔시키는 것을 금지당하였고 앙골라군이 남서아프리카에 상시 주둔하게 되었다. 자원 채굴권, 조업권 등 역시 앙골라가 강탈해간다. </ref>, 브라질과 조업권을 두고 진행한 랍스터 전쟁<ref>앙골라의 압도적 승리. 앙골라 측이 일방적으로 대서양을 건너와 어획을 진행하면서 브라질의 어업이 타격을 받으며 분쟁이 발발, 브라질 측이 강경하게 일부 앙골라측 선적을 나포하며 분쟁이 심화되었다. 이후 브라질 해군과 앙골라 해군이 직접 무력충돌했고 그 결과 중순양함을 포함 브라질의 주력함대가 궤멸당했다. 브라질은 영해를 12해리로 설정하고 그 바깥에서의 앙골라 선적들의 조업을 허가하게 되었으며 앙골라는 남대서양 전역에서 엄청난 규모의 어획을 타국의 견제 없이 진행한다. </ref>, 프랑스/영국과 진행한 남대서양 조업권 경쟁<ref>영프는 남대서양에 파견 가능한 함선이 제한되어 있었고 결국 앙골라의 지속적인 압박 끝에 영프는 자국 식민지들의 해안선 12해리 바깥에서 앙골라의 조업을 허가하게 된다.</ref>에서 앙골라가 승리하는 것에 공헌하며 국가 경쟁력 확보를 진행하면서도 채권을 효과적으로 갚는 데에 쓰였다. | |||
<center>'''이스타두 노부'''</center> | |||
1933년, 포르투갈을 대공황에서 성공적으로 건져올렸던 경제학자인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가 포르투갈 공화국의 총리로 집권한다. 살라자르는 군부를 넘어서는 권세를 거머쥐게 되었고 그러한 권력기반 위에 살라자르의 '''이스타두 노부 (Estado Novo)''' 라고 불리는 독재기간이 시작된다. 식민사관이 확고하던 살라자르는 앙골라에 자신의 우민화 정책을 강제하려는 시도를 하였고 그 외에도 다양한 앙골라의 자치권에 위협이 되는 정책을 발의한다. | |||
<center>'''앙골라 국지전'''</center> | |||
1934년 4월 20일, 살라자르는 포르투갈군을 대규모로 앙골라로 파병하여 앙골라군과의 의도적인 무력충돌을 조장하며 앙골라 자치령의 자치권을 위협한다. 이에 마르코스는 포르투갈군과의 무력충돌을 의도적으로 국지전 수준으로 키우는데, 마데이라 조약에서 보장하던 포르투갈군의 앙골라 내 대도시들에 위치한 주둔지와 군사활동가능구역들을 점거하기 위하여 앙골라군을 대규모로 동원했던 것이었다. 결국 앙골라군과 포르투갈군 간의 다수의 육상/해상/공중 무력충돌 사건들이 발발했으며 앙골라인들이 자발적으로 민병대를 형성하여 앙골라군과 함께 포르투갈군을 공격하는 모습을 보였고 '''앙골라 국지전'''이라고 불리는 폭력사태가 발발한다. | |||
국지전 초반인 4월 29일, 쿠안자술 지역 숨베시 인근 해상에서 벌어진 숨베 해전에서 포르투갈 해군의 함대가 대함전 경험이 부족했던 앙골라 3대 대함대를 대파시키며 남부 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대량의 병력을 루안다/아틀란티코/모사메드스로 안정적으로 파견하였으며 큰 규모의 대지타격을 통하여 해안 공업지대에 피해를 입힌다. 앙골라의 해안지대에 주둔하던 포르투갈군은 규모를 확충하여 내륙 도시들인 우암부와 루방구를 향했다. | |||
하지만 앙골라 해군이 제해권을 장악했던 루안다와 벨라스 항구에서 3대 대함대는 함선 대부분을 빠른 시일 내에 수리하여 기습을 계획했다. 7월 2일, 대지타격을 진행하던 포르투갈 해군을 앙골라 해군 함대가 키사마 해전을 통해 성공적으로 급습하면서 포르투갈이 파견했던 주요 함대의 기함이 침몰하고 전투함들이 대량으로 대파되면서 앙골라 해군이 제해권을 되찾는다. 또한, 타 지역의 치안임무를 맡던 앙골라군 대부분이 포르투갈군의 확장 및 상륙을 저지하는 임무에 투입되면서 전황이 반전되기 시작한다. | |||
벵겔라 지역에 주둔하던 앙골라 육군 제3군단, 루방구 지역에 주둔하던 제5군단과 우암부 지역에 주둔하던 제6군단은 포르투갈군이 대부분 점거한 아틀란티코 광역권을 탈환하고 위협받던 우암부를 보호하기 위하여 10만이 넘는 병력을 집중시키며 올리판트 작전이 개시, 앙골라군은 7월 15일부터 7월 30일까지 포르투갈군을 아틀란티코에서 전부 섬멸하고 1만의 병력을 사상, 3만의 병력을 무장해제 후 포로 신분으로 구금한다. 모사메드스에서는 상황이 좋지 않았는데, 나미브 지역에 주둔하던 앙골라 육군 제4군단의 5만 병력이 포르투갈군의 1만 규모 사막작전사단에게 대패한것. 4군단은 모사메드스의 중심부에서 빠르게 후퇴하였고, 모사메드스시 북쪽의 사코마르 공업지대와 모사메드스 공과대학교(MTU) 캠퍼스를 제외하면 모사메드스 광역권 전역이 포르투갈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결국 3,5,6군단이 아틀란티코 지역을 완전히 정리한 시점인 8월 15일부터 본격적으로 나미브 지역에 4군단을 돕기 위해 투입되었고 당시 사막작전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상륙한 5만이 넘는 포르투갈군 병력과 15만이 넘는 3,4,5,6군단이 격돌한다. 4군단에 비해 충분히 숙련되었던 3,5,6군단의 전력은 포르투갈을 질과 규모로 압도하기에 충분하였고 9월 20일 즈음에 포르투갈군 병력 1만이 포위섬멸(사살 혹은 포로), 잔존 병력 대부분이 함선을 통하여 루안다로 철수하면서 모사메드스는 다시 앙골라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다. | |||
결국 이러한 일련의 전투들 이후, 루안다를 제외한 모든 구역에서 포르투갈군 부대들이 섬멸당하고 기지들이 점령당했다. 한편 앙골라 역시 경제적 중심지에서 전투를 지속하는 것이 부담스러웠기에 포르투갈에 무력충돌 중재안을 제안했고 결국 10월 16일, '''벨라스 조약'''이 포르투갈과 앙골라 자치령 간에 체결되면서 앙골라 국지전은 막을 내린다. 벨라스 조약은 마데이라 조약을 갱신하며 앙골라에 채워진 정치적 족쇄를 더 약화시키며<ref>포르투갈군의 모든 국가적 활동은 루안다 주변 설정 구역에 한해서만 허가된다는 것이 조약의 핵심이었다.</ref> 사실상 앙골라에 독립국으로써의 확고한 지위를 부여했고 포르투갈군의 루안다 지역 일부 지정구역에서의 군사/경제적 활동만을 보장하였다. 포르투갈의 정치적 영향력을 거세해버린 이 벨라스 조약은 이후 앙골라의 독립을 위한 발판이 되었다. 이 시기부터 루안다에서는 양국의 병력들 사이에서 지속적인 총격전이 발발하면서 앙골라 내에서는 반포르투갈 감정이 더욱 더 격해졌으며 포르투갈 본토 역시 이러한 소식을 들으며 앙골라에 대한 혐오감정을 키우게 되었다. 한편 이 시점부터 이후 발생할 앙골라의 독립기까지, 이러한 정치적인 이유로 루안다의 치안은 매년 악화되어갔으며, 독립 이후에도 공장 전쟁으로 치안 개선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일부 지역은 극도로 높은 강력범죄율을 보여주었다. | |||
여담으로, 포르투갈이 이 분쟁을 얼마나 중요시 여겼는지 알 수 있는 것이 자국 병력의 40%를 파견하여 분쟁에 참가시켰으며 이는 앙골라 본국이 투입한 병력비율보다도 더 높은 수치였다. 분쟁이 진행되며 루안다에서만 포르투갈이 활동지역을 고수하는 것에 성공하자 살라자르는 30%의 포르투갈군 병력을 고정적으로 루안다 지역에 위치한 기지들에 주둔시키며 어떻게든 앙골라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 |||
<center>'''3기 마르코스 행정부 (1935-1938)'''</center> | |||
앙골라 국지전이 사실상 앙골라의 대승으로 매듭지어지며 마르코스는 페르난두에 비견될 정도로 강력한 입지를 구축한 상태인 1935년에 총선거를 치룬다. | |||
루안다 지역의 치안과 안정성이 하락함에 따라 마르코스는 남부 앙골라에 산업망을 구축하는 철십자(Cruz de Ferro) 계획을 진행, 아틀란티코, 우암부, 루방구를 비롯한 남부 대도시들을 산업거점으로 집중개발을 시작한다. 물론 루안다 역시 최대도시로서의 입지가 남아 있었기에 지속적인 개발은 진행되었으나 시/주정부의 행정력이 미비하여 민간개발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정부 개입이 없는 민간개발은 난개발의 단초가 되어버린다. | |||
<center>'''제 2차 세계대전'''</center> | |||
==앙골라 독립전쟁== | ==앙골라 독립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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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margin: -0.3rem -0.6rem;">[[파일:4 50s Congo Leaders.png|700px|link=]]</div> | |<div style="margin: -0.3rem -0.6rem;">[[파일:4 50s Congo Leaders.png|700px|link=]]</div> | ||
|} | |} | ||
<center>▶ 50년대 레오폴드빌 | <center>'''▶ 50년대 레오폴드빌 콩고의 주요 정치인들''' | ||
<small><sub>(시계방향으로 왼쪽 위부터 - 조세프 카사부부, 모부투 세세 세코, 모이스 촘베, 파트리스 루뭄바)</sub></small> | <small><sub>(시계방향으로 왼쪽 위부터 - 조세프 카사부부, 모부투 세세 세코, 모이스 촘베, 파트리스 루뭄바)</sub></small>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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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LA, MPLA 등등 다양한 이념을 지닌 독립파 세력들은 앙골라에서의 내전을 몇년 전 부터 준비중이었다. 당시 독립세력들은 전부 친서방 세력이 통치하던 레오폴드빌 콩고 (現 콩고민주공화국) 에서 활동 중이었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근본적으로 3파 이상으로 갈려졌던 콩고 내부의 정치적 특수성 때문이었다. 당시 콩고의 대통령이었던 조제프 카사부부는 파트리스 루뭄바 총리와 키부 주에서는 공산주의 반군인 '심바 반군', 남쪽에서는 모이스 촘베가 이끄는 분리독립 세력인 카탕카국과의 전쟁을 진행중이었는데 좌익 계열 MPLA 등의 앙골라 독립 반군도 사실상 독립을 위해 이념에 상관없이 카사부부 정권을 지지했기 때문에 독립파 세력들은 비교적 안전했던 킨샤사 근처 후방에서 외부세력의 사보타주 없이 내전을 준비 할 수 있었다. 내전 3개월 전, 레오폴드빌 콩고의 카사부부 대통령을 암살하고 집권한 자이르의 모부투 세세 세코는 킨샤사 주변 치안 안정화를 도왔던 MPLA 등의 좌익 계열을 포함한 모든 앙골라 반군들에게 자이르 영토에서 공세를 시작하는 것을 허용하였으며 당시 아프리카 내에서의 코메콘 세력 확장을 도모하던 소련 역시 이들을 지원한다. | FNLA, MPLA 등등 다양한 이념을 지닌 독립파 세력들은 앙골라에서의 내전을 몇년 전 부터 준비중이었다. 당시 독립세력들은 전부 친서방 세력이 통치하던 레오폴드빌 콩고 (現 콩고민주공화국) 에서 활동 중이었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근본적으로 3파 이상으로 갈려졌던 콩고 내부의 정치적 특수성 때문이었다. 당시 콩고의 대통령이었던 조제프 카사부부는 파트리스 루뭄바 총리와 키부 주에서는 공산주의 반군인 '심바 반군', 남쪽에서는 모이스 촘베가 이끄는 분리독립 세력인 카탕카국과의 전쟁을 진행중이었는데 좌익 계열 MPLA 등의 앙골라 독립 반군도 사실상 독립을 위해 이념에 상관없이 카사부부 정권을 지지했기 때문에 독립파 세력들은 비교적 안전했던 킨샤사 근처 후방에서 외부세력의 사보타주 없이 내전을 준비 할 수 있었다. 내전 3개월 전, 레오폴드빌 콩고의 카사부부 대통령을 암살하고 집권한 자이르의 모부투 세세 세코는 킨샤사 주변 치안 안정화를 도왔던 MPLA 등의 좌익 계열을 포함한 모든 앙골라 반군들에게 자이르 영토에서 공세를 시작하는 것을 허용하였으며 당시 아프리카 내에서의 코메콘 세력 확장을 도모하던 소련 역시 이들을 지원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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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 FNLA의 당기'''</center> | <center>'''▶ FNLA의 당기'''</center> | ||
부족단위 독립을 지지하던 저항운동이었던 UPNA가 이 파벌의 시작점이다. 이후 '''알바로 올뎅 호베르투'''라는 새로운 지도자가 운동의 지도자가 되며 파벌의 이름은 UPA로 개명되었다. 이후 61년 초반, 조직은 FNLA (앙골라 민족해방전선)이라는 이름으로 조직의 이름을 개명하였으며 이 시기에 킨샤사 중심부에 당 본부 건물을 설립한다.<ref>현재 이 건물은 앙골라 대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ref> 50년대 자신들이 활동하던 레오폴드빌 콩고 권력의 정점, 조제프 카사부부와 협력하며 심바 반군들과 맞서 싸우며 많은 전투경험을 쌓은 무장조직이었으며 킨샤사에서의 폭동 진압과 치안유지 등등의 활동을 해왔던 조직이다. 카사부부 암살과 그 배후에 있던 모부투 세세 세코 역시 친서방 우익 계열이던 FNLA를 공격하지 않았고 오히려 공세 지원과 카빈다 지역 접경지역에 주둔기지를 마련해준다. 한편, 개전 1개월 전이었던 61년 3월에는 FNLA가 포르투갈령 앙골라의 음반자콩고에 잠시 남하하여 포르투갈인들을 학살하고 바콩고인들을 제외한 많은 카톨릭 부족들을 학살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당시 미국과 내통하던 호베르투의 오른팔이자 UPA의 내무장관이었던 '''조나스 사빔비'''는 외교적인 감각이 없던 호베르투를 배신하여 자신의 세력인 UNITA를 창설하려는 준비를 시작한다. | 부족단위 독립을 지지하던 저항운동이었던 UPNA가 이 파벌의 시작점이다. 이후 '''알바로 올뎅 호베르투'''라는 새로운 지도자가 운동의 지도자가 되며 파벌의 이름은 UPA로 개명되었다. 이후 61년 초반, 조직은 FNLA (앙골라 민족해방전선)이라는 이름으로 조직의 이름을 개명하였으며 이 시기에 킨샤사 중심부에 당 본부 건물을 설립한다.<ref>현재 이 건물은 앙골라 대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ref> 50년대 자신들이 활동하던 레오폴드빌 콩고 권력의 정점, 조제프 카사부부와 협력하며 심바 반군들과 맞서 싸우며 많은 전투경험을 쌓은 무장조직이었으며 킨샤사에서의 폭동 진압과 치안유지 등등의 활동을 해왔던 조직이다. 카사부부 암살과 그 배후에 있던 모부투 세세 세코 역시 친서방 우익 계열이던 FNLA를 공격하지 않았고 오히려 공세 지원과 카빈다 지역 접경지역에 주둔기지를 마련해준다. 한편, 개전 1개월 전이었던 61년 3월에는 FNLA가 포르투갈령 앙골라의 음반자콩고에 잠시 남하하여 포르투갈인들을 학살하고 바콩고인들을 제외한 많은 카톨릭 부족들을 학살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당시 미국과 내통하던 호베르투의 오른팔이자 UPA의 내무장관이었던 '''조나스 사빔비'''는 외교적인 감각이 없던 호베르투를 배신하여 자신의 세력인 UNITA를 창설하려는 준비를 시작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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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 MPLA의 당기'''</center> | <center>'''▶ MPLA의 당기'''</center> | ||
앞서 언급했던 좌익 계열의 반군. 살라자르의 50년대 초반 이스타두 노부 통치기간부터 활동한 PCA (앙골라 지하 공산당)과 PLUAA등등 기타 좌익 계열 정당들과 통합하여 창설되었던 조직이다. 사실상 앙골라, 특히 루안다 출신의 흑인 지식인층 대부분은 이 정당에 속하였고 그 권력이자 지능의 정점에 있던 인물이 바로 '''아고스티뉴 네투''' 였다. 이들은 기니비사우 / 카보베르데의 독립 조직들과도 협력관계를 형성하여 포르투갈에 대항하였다. 놀랍게도 좌익 계열이었던 이들의 세력은 친서방 카사부부 대통령, 그리고 이후 집권한 모부투 대통령과의 관계는 원만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MPLA 역시 FNLA처럼 킨샤사 주변의 치안유지 활동을 도왔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키크위트 시에서의 공산주의 반군을 토벌한 전적까지 있는 그야말로 독립을 최우선 목표로 우선시하던 조직이었다. 좌익 계열인 만큼 당연히 소비에트 연방과의 내통도 활발하였으며 소련은 전투력이 떨어졌던 콩고의 심바 반군에 대한 지원은 줄이고 점점 앙골라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고자 MPLA에 대한 물자지원을 집중적으로 진행하였다. | 앞서 언급했던 좌익 계열의 반군. 살라자르의 50년대 초반 이스타두 노부 통치기간부터 활동한 PCA (앙골라 지하 공산당)과 PLUAA등등 기타 좌익 계열 정당들과 통합하여 창설되었던 조직이다. 사실상 앙골라, 특히 루안다 출신의 흑인 지식인층 대부분은 이 정당에 속하였고 그 권력이자 지능의 정점에 있던 인물이 바로 '''아고스티뉴 네투''' 였다. 이들은 기니비사우 / 카보베르데의 독립 조직들과도 협력관계를 형성하여 포르투갈에 대항하였다. 놀랍게도 좌익 계열이었던 이들의 세력은 친서방 카사부부 대통령, 그리고 이후 집권한 모부투 대통령과의 관계는 원만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MPLA 역시 FNLA처럼 킨샤사 주변의 치안유지 활동을 도왔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키크위트 시에서의 공산주의 반군을 토벌한 전적까지 있는 그야말로 독립을 최우선 목표로 우선시하던 조직이었다. 좌익 계열인 만큼 당연히 소비에트 연방과의 내통도 활발하였으며 소련은 전투력이 떨어졌던 콩고의 심바 반군에 대한 지원은 줄이고 점점 앙골라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고자 MPLA에 대한 물자지원을 집중적으로 진행하였다. | ||
===독립전쟁의 개전=== | ===독립전쟁의 개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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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4월 25일, 세계의 탈식민지화 광풍에 힘입어 앙골라 내 저항세력들 역시 포르투갈의 유사 노예통치에 반기를 들며 앙골라 독립전쟁을 시작한다. 개전 직후, 카빈다 국경에 주둔중이던 FNLA는 | 1961년 4월 25일, 세계의 탈식민지화 광풍에 힘입어 앙골라 내 저항세력들 역시 포르투갈의 유사 노예통치에 반기를 들며 앙골라 독립전쟁을 시작한다. 개전 직후, 카빈다 국경에 주둔중이던 FNLA는 자이르 영토에서 출발하여 카빈다를 개전 48시간만에 점령, MPLA는 자이르 마타디 시에서 앙골라 북부 음반자콩고시로 진격하여 포르투갈군과 교전, 6일만에 도시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당시 살라자르는 미국으로부터 마셜 플랜을 지원받을 정도로 미국과도 사이가 나쁘지 않은 서방국가였으며 NATO의 일원이기도 하였다. 소련은 개전 2주차 엄청난 석유자원/귀금속이 대량 매장되어있는 앙골라의 공산화를 추구하며 포르투갈을 견제하기 위하여 MPLA 에게 무기지원/공군지원 그리고 의용군을 파병하기 시작하였다. 개전 1개월 후, 모든 자이르 (前 레오폴드빌 콩고)국경에서 다양한 해방군들이 앙골라로 진입하면서 내전은 격화되었으며 의용군으로 왔던 소련군의 공군과 포르투갈군의 간의 공중전까지 발생한다. 물론 앙골라 전역에서 FNLA와 MPLA를 지지하는 반군 세력들 역시 무장투쟁을 시작하였다. | ||
<center>'''FNLA의 분열과 UNITA의 창설'''</center> | <center>'''FNLA의 분열과 UNITA의 창설'''</cente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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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FNLA의 지도부였던 '''알바로 올뎅 호베르투'''의 우유부단함과 이전에 음반자콩고에서의 | 한편 FNLA의 지도부였던 '''알바로 올뎅 호베르투'''의 우유부단함과 이전에 음반자콩고에서의 인종학살에 불만을 느낀 2인자 '''조나스 사빔비'''는 대학살의 트라우마에 빠져있던 FNLA 병력의 대부분을(80% 정도로 추정) 이끌고 UNITA를 창설하였으며 이에 우익이었던 호베르투는 처신하고자 좌익 반군인 MPLA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며 FNLA의 전력을 이끌고 MPLA에 참가한다. 이 과정에서 남은 FNLA 병력(10%)의 절반은 우익인 UNITA에 참가한다. 사빔비는 직접적인 공격의 위험이 없던 본거지인 카빈다를 확보하였다는 지리적 이점을 확보하였고, 카빈다에 매장돼있던 기름을 본격적으로 수출하면서 무기를 확보하고 자본을 축적하기 시작한다. 당시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최악의 인종정책을 실행했지만 친서방이라는 성향을 발판이자 협력관계로 이용하여 남아프리카 연방으로부터 보급차량 400대를 구입한다던지, UNITA가 직접 탄약과 무장을 수급할 공장을 짓고 도로/상하수도를 정비하면서 카빈다의 주민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다. 또한 카빈다에 계류중이다가 탈출하지 못한 포르투갈인 역시 루안다로 보내주면서 미국은 사빔비에게 지원을 고려하기 시작한다. 앞서 설명한 포르투갈-소련 공중전에 경악한 [[미국|{{color|#bee6fe|미국}}]]은 당시 저항전선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자 우익이었던 UNITA와 접선하여 앙골라의 공산화/소련의 전진기지화를 막고자 하였으며 친미성향이 강하던 사빔비는 포르투갈의 배후였지만 자신을 지지했던 미국과의 거래에 동의하였고 이는 앞으로 이어질 앙골라-미국 동맹의 시작었다. 이후 미국, 남아프리카의 지원을 받아 사빔비는 나미브 사막을 통하여 남부에서도 전투를 시작하였다. | ||
<center>'''전쟁의 진행과 종전'''</center> | <center>'''전쟁의 진행과 종전'''</cente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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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PLA는 자이르의 마타디 시를 보급거점으로 이용, 루안다 주변에서 게릴라전과 정글에서는 포르투갈군과의 전면전을 진행하였으며 개전 1년차에는 지속적으로 남하한에끝에 동북부 주요 도심 중 하나였던 사우리무와 서북부 대도시였던 | MPLA는 자이르의 마타디 시를 보급거점으로 이용, 루안다 주변에서 게릴라전과 정글에서는 포르투갈군과의 전면전을 진행하였으며 개전 1년차에는 지속적으로 남하한에끝에 동북부 주요 도심 중 하나였던 사우리무와 서북부 대도시였던 말란즈를 점령한다. UNITA는 나미브 시와 루방구 시를 개전 2년차인 1963년에 점령하며 포르투갈의 숨통을 조인다. 전쟁이 3년차가 되자 MPLA와 기타 협력관계에 있던 반군들은 소련의 지원으로 음반자콩고에서 시작하여 북부 본토 앙골라 지역을 대부분 점령하였으며 목시코를 비롯한 내륙지역은 특정 이념이 없던 군소군벌들의 손에 떨어진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UNITA는 포르투갈령 앙골라 최대의 병기창과 보급선이 존재하던 벵겔라와 우암부를 점령하는 치명타를 입히게 된다. 1964년 12월 즈음엔 포르투갈은 사실상 루안다와 그 주변 지역을 마지막 거점삼아 포위된 상태로 저항하였으며 이후 지정학적인 자치가 없다고 판단 1965년 1월 1일, 포르투에서 반전 시위가 발생하고 루안다에서도 폭동이 일어나자 UNITA • MPLA 대표단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앙골라에서 포르투갈은 발을 빼게 된다. 앙골라는 이 날을 독립기념일로 지정한다. | ||
==앙골라 내전== | |||
<center>'''앙골라 인민공화국 건국과 혼돈의 총선거'''</center> | |||
포르투갈 철수 직후 앙골라 내부 세력들은 정치적인 방황을 겪는다. 앙골라 영토는 군벌 단위로 쪼개져 있었으며 이들은 하나된 국가를 이끌어간 지도부를 선출할 능력이 없었다. 이때 아우구스티뉴 네투, 당시 MPLA의 지도자는 타 군벌 지도자들, UNITA의 사빔비와 함께 '국가' 건설을 제안, 1965년 2월 13일, 앙골라 인민공화국을 설립한다. 네튜는 국가원수가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 4월 15일에 열릴 총선거 직전까지만 국가를 권한대행으로 통치하고 물러나기로 하였으며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다. | |||
영웅인 네투 대신 후보로 지명된 이는 조제 에두아르두 두스산투스, 네튜의 오른손으로 매우 젊은 나이에 크게 출세하게 된 MPLA의 지도층이었다. 반대쪽에서는 미국의 지원을 받았던 UNITA의 사빔비 역시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정하며 선거 전 2개월 가량의 기간 동안 다양한 선거운동이 전개되었다. 소련-미국 양국은 지정학적/자원 가치가 풍부하던 앙골라에 대규모로 선거자금과 산업기반을 지원한다. 친서방파 조나스 사빔비는 자신이 독립전쟁기 카빈다에서 보여준 지도자로서의 자질, 앙골라 경제발전 계획과 미국의 지원금을 강조, 산투스는 이념에 무게를 실으며 포르투갈 자본가들의 착취를 비판하며 평등을 강조, 그리고 소련의 사례로 든 공업발전을 외친다. 하지만 앙골라 토착민들은 자치령 설립 이후부터는 눈에 띄게 줄어든 착취에 대한 관심이 없었으며 실용적으로 경제 발전에 초점을 맞춘 사빔비의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고 UNITA의 전국구 지지율이 70% 이상으로 상승한다. 또한 사빔비는 개인 친위대를 동원 지역별로 군벌 지도자들을 매수하거나 암살하며 약점이었던 작은 관할구역을 넓히며 세력을 키운다. 결국 4월 15일 선거의 출구조사<ref>포르투갈과 미국 언론사에서 낸 결과</ref>에서 사빔비는 80%의 추정 득표율을 획득한다. 이에 혈기왕성하고 권력욕에 가득 차있던 산투스는 4월 16일 선거 다음날, 앙골라에 파병되어있던 소련군 전차사단 2개의 2만 4천명<ref>소련 제13육군군단 소속 제60 전차사단, 제4 근위전차사단, 두 사단 모두 비교적 안전한 후방이었던 모스크바에서 파병되었다.</ref> 병력을 소련의 승인 없이 강제로 이끌고 선거용지가 모두 모인 루안다 임시선거관리위원회 청사를를 UNITA의 반격이 있기 전까지인 6시간 가량을 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후 산투스는 투표용지 분서, 위조 투표용지 생산을 하며 조작을 감행하였으며 결국 99.7%라는 말도 안되는 지지율로 당선된다. 이는 당시 흐루쇼프 내각에서도 합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당선된 정통성 없는 정부라며<ref>소련도 명목상으론 법치국가였으며 특히 흐루쇼프는 권위주의 이미지를 희석하기 위해 노력중이었다.</ref> 엄청난 비난을 보내며 2개 사단장을 송환시켜 전부 KGB가 취조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하였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4월 20일, 산투스는 60만 MPLA 대군의 비호 아래 당선을 선언하며 취임한다. 결국, 사단장들은 이후 내전의 짐조를 느낀 흐루쇼프와 소련 지도부에 의하여 다시 앙골라로 보내진다. | |||
<center>'''폭풍전야'''</center> | |||
사빔비와 미국 지도부는 격노하였으며 심지어 산투스를 후보로 지명한 네투 역시 UNITA에 가세하며 MPLA에 거센 비판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산투스가 개의치 않고 정식으로 인민공화국 공화정부를 출범시기는 5•1 선언을 발표하자 당시 남부와 카빈다 지역을 군사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UNITA의 사빔비는 내전이라는 수단을 선택, MPLA 내부의 반대파들을 포섭하는 한편 미국의 지원을 약속받는다. | |||
<center>'''전쟁 초기'''</center> | |||
{|class="wikitable" style="width: 300px; border: 2px solid #023858; margin: 12px auto; background: white;" | {|class="wikitable" style="width: 300px; border: 2px solid #023858; margin: 12px auto; background: whit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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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 직후 상황 파랑색은 UNITA가 실질적으로 통제하는 지역, 붉은색은 MPLA가 통제하는 지역, 체크 지역은 교전구역 | <center>'''▶ 개전 직후 상황 ''' | ||
<small><sub>(파랑색은 UNITA가 실질적으로 통제하는 지역, 붉은색은 MPLA가 통제하는 지역, 체크 지역은 교전구역)</sub></small>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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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펼접|id=USA-City1|title='''<big>개전 직후 전력비교</big><br>[ 펼치기 • 접기 ]'''|titlecolor=#bee6f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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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TA는 독립전쟁부터 선거기간과 내전 준비기간동안 자신들의 통제구역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내고 통제구역을 2.5배 이상 늘리는데 성공하였으며 자원 수출과 미국의 대외원조를 바탕으로 전시/평시인프라 구축과 근로시간을 보장한 면직물 생산공장/포탄 및 군수품 생산공장을 건설한다. MPLA 역시 유화책과 소련의 경제지원으로 시민들을 끌어들이려 하였으나 경제적/정치적 수완이 뛰어났던 사빔비에 비해서는 미숙한 통치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산투스는 소련에게 도움을 청했고 위의 선거조작을 감행한 2만 4천여명의 전차사단 2개와 대량의 공군부대를 선거 이후 직후 루안다 근처에 주둔시킨다. 미군 역시 이에 대응하여 F-4C라는 당대 최강의 전투기를 벵겔라 공군기지에 전진배치 시켰으며 UNITA 부대에 전차를 대량지원하고 훈련을 시작한다. 특히 중공업 기반을 UNITA에 판매하여 M60을 자체생산 하도록 만들었다. 내전 전 기간동안 미-소 해군은 기니만과 남대서양 일대에서 지속적인 신경전을 벌였으며 루안다 항에 소련의 킬로급 잠수함과 IRBM이 배치되었다. 다행인 점은 쿠바 미사일 위기로 인해 쓴 맛을 본 양국, 미국과 소련은 내전 확정 후 발발 직전 합의를 통하여 앙골라 내전을 아프리카 대륙 내로 확전하지 않기로 하였으며 앙골라에서의 손실은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을 것을 확인했다, 즉, 무제한적인 폭격과 물량전이 | {{펼접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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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6월 2일, 비에 주의 쿠이토(Kuito)라는 UNITA-MPLA 접경지역에서 UNITA가 전투를 개시하고 2시간만에 마을을 점령하며 UNITA의 선제공격으로 앙골라 내전이 개전한다. | |||
UNITA는 독립전쟁부터 선거기간과 내전 준비기간동안 자신들의 통제구역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내고 통제구역을 2.5배 이상 늘리는데 성공하였으며 자원 수출과 미국의 대외원조를 바탕으로 전시/평시인프라 구축과 근로시간을 보장한 면직물 생산공장/포탄 및 군수품 생산공장을 건설한다. MPLA 역시 유화책과 소련의 경제지원으로 시민들을 끌어들이려 하였으나 경제적/정치적 수완이 뛰어났던 사빔비에 비해서는 미숙한 통치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산투스는 소련에게 도움을 청했고 위의 선거조작을 감행한 2만 4천여명의 전차사단 2개와 대량의 공군부대를 선거 이후 직후 루안다 근처에 주둔시킨다. 미군 역시 이에 대응하여 F-4C라는 당대 최강의 전투기를 벵겔라 공군기지에 전진배치 시켰으며 UNITA 부대에 전차를 대량지원하고 훈련을 시작한다. 특히 중공업 기반을 UNITA에 판매하여 M60을 자체생산 하도록 만들었다. 내전 전 기간동안 미-소 해군은 기니만과 남대서양 일대에서 지속적인 신경전을 벌였으며 루안다 항에 소련의 킬로급 잠수함과 IRBM이 배치되었다. 다행인 점은 쿠바 미사일 위기로 인해 쓴 맛을 본 양국, 미국과 소련은 내전 확정 후 발발 직전 합의를 통하여 앙골라 내전을 아프리카 대륙 내로 확전하지 않기로 하였으며 앙골라에서의 손실은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을 것을 확인했다, 즉, 무제한적인 폭격과 물량전이 일어나도 미소 양국간의 그 어떠한 보복성 공격은 없다는 것을 확정했던 것. | |||
<center>'''UNITA의 1차 대공세'''</center> | |||
6월 2일 개전 직후 UNITA는 모든 전선에서 압도적인 숙련도와 규모르 MPLA를 압살하며 북진하였으며 위에 나열된 다양한 기갑전력이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포위섬멸을 통하여 900대에 달하는 T55/T62를 개전 2주만에 노획하는데 성공한다. 미국의 F-4C와 A-7은 전 지역을 폭격하고 제공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소련은 자이르-수단 루트를 통하여 MPLA에 대량의 최신형 무기들과 무장된 추가 병력들을 급파하며 UNITA를 개전 4개월만에 공세종말점으로 끌어들이는 데에 성공한다. UNITA는 전술대로 공세종말점에 도달하자 기갑전력의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보급부대를 동원하여 각 부대들을 재보급하면서 포병전력과 미 공군을 이용하여 MPLA 전선에 확충되는 신병들에게 신선한 불바다를 선보이며 전투력을 약화시킨다. | 6월 2일 개전 직후 UNITA는 모든 전선에서 압도적인 숙련도와 규모르 MPLA를 압살하며 북진하였으며 위에 나열된 다양한 기갑전력이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포위섬멸을 통하여 900대에 달하는 T55/T62를 개전 2주만에 노획하는데 성공한다. 미국의 F-4C와 A-7은 전 지역을 폭격하고 제공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소련은 자이르-수단 루트를 통하여 MPLA에 대량의 최신형 무기들과 무장된 추가 병력들을 급파하며 UNITA를 개전 4개월만에 공세종말점으로 끌어들이는 데에 성공한다. UNITA는 전술대로 공세종말점에 도달하자 기갑전력의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보급부대를 동원하여 각 부대들을 재보급하면서 포병전력과 미 공군을 이용하여 MPLA 전선에 확충되는 신병들에게 신선한 불바다를 선보이며 전투력을 약화시킨다. | ||
<center>'''MPLA의 반격'''</center> | |||
소련의 추가 병력이 도착하여 소련군이 대략 6만명 가까이 집결하자 MPLA는 자이르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내륙지역, 목시코 주에서 기계화부대를 이용하여 대규모 반격을 개시한다. UNITA는 의도적으로 지뢰를 가득 매설한 밀림지역 뒤에서 기다렸고 BTR-50등을 동원한 소련군/앙골라 인민군 기계화부대는 포병/지뢰/공군의 공격에 당하며 큰 피해를 입으며 3천명의 사상자를 기록한다. 그럼에도 목시코의 거점인 루에나의 주변지역을 안정화하는데 성공하며 보급을 원활하게 만드는 성과가 있었다. | 소련의 추가 병력이 도착하여 소련군이 대략 6만명 가까이 집결하자 MPLA는 자이르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내륙지역, 목시코 주에서 기계화부대를 이용하여 대규모 반격을 개시한다. UNITA는 의도적으로 지뢰를 가득 매설한 밀림지역 뒤에서 기다렸고 BTR-50등을 동원한 소련군/앙골라 인민군 기계화부대는 포병/지뢰/공군의 공격에 당하며 큰 피해를 입으며 3천명의 사상자를 기록한다. 그럼에도 목시코의 거점인 루에나의 주변지역을 안정화하는데 성공하며 보급을 원활하게 만드는 성과가 있었다. | ||
<center>'''UNITA의 심리전과 외교전'''</center> | |||
사빔비는 자원을 채굴한 돈으로 M60 생산공장 확충과 미국과 우방국에 역판매를 시작하며 자금을 확보하였고 그 자금은 포탄공장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전쟁 1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UNITA의 포탄 생산량은 전 세계 5위 수준이었고 이를 수출까지 시작했다. 사빔비는 수출하고도 남아도는 포탄을 모조리 M109를 비롯한 전선에 배치된 자주포들에게 공급하면서 전투중이 아님에도 지속적인 포격을 진행하도록 하였다. 이는 인민군들에겐 지옥도였으며 특히 탁 트여있던 해안가 사막지대 부대의 전투력은 극도로 떨어졌다. 또한 주요국가에 대한 자원수출로 UNITA가 정통정부임을 세계에 홍보하면서 외교전을 시작하였고 미국을 비롯한 32개의 서방국가는 앙골라를 정식적인 합법정부로 승인한다. | 사빔비는 자원을 채굴한 돈으로 M60 생산공장 확충과 미국과 우방국에 역판매를 시작하며 자금을 확보하였고 그 자금은 포탄공장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전쟁 1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UNITA의 포탄 생산량은 전 세계 5위 수준이었고 이를 수출까지 시작했다. 사빔비는 수출하고도 남아도는 포탄을 모조리 M109를 비롯한 전선에 배치된 자주포들에게 공급하면서 전투중이 아님에도 지속적인 포격을 진행하도록 하였다. 이는 인민군들에겐 지옥도였으며 특히 탁 트여있던 해안가 사막지대 부대의 전투력은 극도로 떨어졌다. 또한 주요국가에 대한 자원수출로 UNITA가 정통정부임을 세계에 홍보하면서 외교전을 시작하였고 미국을 비롯한 32개의 서방국가는 앙골라를 정식적인 합법정부로 승인한다. | ||
소련군과 앙골라 인민군은 포격만 받으며 전투력이 깎일 바엔 돌격을 실시하여 자주포 전력에 최대한 많은 피해를 입히기로 결정한다. 개전 1년이 되는 1966년 6월 2일, 인민군은 콴자부터 목시코까지 모든 전선에서 T-64와 62를 앞세워 | |||
<center>'''MPLA의 남방대공세'''</center> | |||
소련군과 앙골라 인민군은 포격만 받으며 전투력이 깎일 바엔 돌격을 실시하여 자주포 전력에 최대한 많은 피해를 입히기로 결정한다. 개전 1년이 되는 1966년 6월 2일, 인민군은 작전명 '타투'를<ref>아르마딜로의 포르투갈어 이름</ref> 실행, 콴자부터 목시코까지 모든 전선에서 T-64와 62를 앞세워 총공세를 시작하였으며 ISU-152와 실험적인 2S1 자주포들도 합세하여 포격을 시작하였다. 또한 MiG-21을 동원하여 고속폭격도 하는 등 모든 전선에서 MPLA가 진격하였다. 사빔비는 당시 MiG-21의 공습을 예상, 미제 호크 미사일과 다양한 지대공 미사일을 배치하였고 공세 직후 소련군은 30대가 넘는 MiG-21을 폭탄 한번 못 떨구고 잃었으며 도합 65대의 MiG-21을 손실한다. 지상은 상태가 나았는데 비에 지역의 3개의 UNITA 전차여단을 단독으로 한개 사단 혼자서 와해시키고 진군하는 상황도 생겼다. 사빔비는 F-4C와 A-7을 동원하여 전차들의 진군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소련 역시 S-125 페쵸라와 S-75 데스나를 배치, 팬텀기 10대, A-7을 30대 격추하며 미국/앙골라 공군에 큰 피해를 입힌다. 또한 이 시점에 최초의 공중전이 성사되는데, 4대의 앙골라 공군 소속 F-4C 팬텀기와 5대의 MiG-17, 7대의 MiG-21이 조우한 것이었다. F-4C는 AiM-9를 이용한 미사일 교전으로 3대의 MiG-21을 격추하고 도그파이팅을 통하여 2대의 MiG-21을 추가로 격추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MiG-17의 우월한 기동력으로 인하여 2대의 팬텀기를 손실하고 후퇴하였다. 전술적인 미제 기체의 승리였다. 한편 이 시기에 MPLA의 부서기장이던 올벵 호베르투가 전선시찰을 나갔다가 전사, 산투스의 신임을 얻은 내륙군 지도자 루시우 라라(Lúcio Lara)가 부서기장으로 임명된다. | |||
<center>'''소강상태와 양측의 재정비'''</center> | |||
양측은 큰 손실을 입었고 1966년 9월부터 1968년 11월까지 전쟁은 소강상태에 돌입한다. MPLA는 소련군의 훈련과 군사지원을 받으며 전력을 키웠으며 산업 육성사업도 본격적으로 개시하였다. UNITA는 저렴한 노동력과 공업 인프라를 바탕으로 미국의 부속 병기창으로 지정되어 전시라는 특성에 의하여 엄청난 규모의 군수품을 생산하고 NATO에 공급하였으며 그 대가로 미국은 공업기술을 대량으로 이전해주고 F-4C의 판매를 승인한다. 사빔비는 통제하고 있던 지역중 교전지역으로부터 70km 바깥에 위치한 모든 지역에 학교/병원/수도시설/아파트 건설을 시작하였으며 내륙지역의 1차산업 육성과 섬유/기계산업체를 해안가에 집중적으로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이 전쟁에서 인명 손실을 제외한다면 대외원조로 큰 적자를 입지 않았으며 그 주요 요인은 바로 UNITA의 경제성이었다. 군사하청생산과 노동력 제공은 미국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며 미국은 방위산업 공장들을 앙골라에 지으며 원가를 절감하는데 큰 효과를 보았다. 이 덕분에 군사적으로는 UNITA는 F-4C를 100대 추가도입, M60AN 앙골라 파생형 M60을 1000대 가량 도입하며 전력의 향상을 이루었고 M109는 200대 추가주문하여 MPLA에 지속적으로 포격을 날리며 MPLA의 전투력을 약화시켰다. | 양측은 큰 손실을 입었고 1966년 9월부터 1968년 11월까지 전쟁은 소강상태에 돌입한다. MPLA는 소련군의 훈련과 군사지원을 받으며 전력을 키웠으며 산업 육성사업도 본격적으로 개시하였다. UNITA는 저렴한 노동력과 공업 인프라를 바탕으로 미국의 부속 병기창으로 지정되어 전시라는 특성에 의하여 엄청난 규모의 군수품을 생산하고 NATO에 공급하였으며 그 대가로 미국은 공업기술을 대량으로 이전해주고 F-4C의 판매를 승인한다. 사빔비는 통제하고 있던 지역중 교전지역으로부터 70km 바깥에 위치한 모든 지역에 학교/병원/수도시설/아파트 건설을 시작하였으며 내륙지역의 1차산업 육성과 섬유/기계산업체를 해안가에 집중적으로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이 전쟁에서 인명 손실을 제외한다면 대외원조로 큰 적자를 입지 않았으며 그 주요 요인은 바로 UNITA의 경제성이었다. 군사하청생산과 노동력 제공은 미국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며 미국은 방위산업 공장들을 앙골라에 지으며 원가를 절감하는데 큰 효과를 보았다. 이 덕분에 군사적으로는 UNITA는 F-4C를 100대 추가도입, M60AN 앙골라 파생형 M60을 1000대 가량 도입하며 전력의 향상을 이루었고 M109는 200대 추가주문하여 MPLA에 지속적으로 포격을 날리며 MPLA의 전투력을 약화시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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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UNITA의 2차 대공세'''</cente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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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margin: -0.3rem -0.6rem;">[[파일:M109a5.jpg|700px|link=]]</div>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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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 말란즈 외곽에서 이동중인 앙골라 제4 기갑사단 제1포병지원중대 소속 M109AG'''</center> | |||
68년 12월, 전력을 2배 가까이 증강하고 대지상공격교리까지 준비한 공군을 동원, UNITA는 해안 지역에 대공세를 벌인다. F-4C 80대를 순수하게 폭격용으로 이용하는 전술로 UNITA는 루안다 남쪽 인근 지역인 남콴자에 주둔중이던 MPLA를 사실상 전멸시켰으며 (70% 이상의 병력이 무력화) 공세 1개월만에 루안다 20km 앞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이후 와해된 전력이 재조직하여 UNITA에 대한 역공세를 진행하였고 유격대까지 동원하며 반도지형인 루안다의 포위를 막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노력하였으나 사실상 국지적인 저항 수준에서 무의미하게 마무리되었으며 UNITA는 루안다를 포위, 결국 포위 1주일만에 5만명에 달하는 루안다에 포위된 MPLA 병력들이 항복한다. 1969년 1월 14일의 일이었다. 이 시점에서 MPLA는 이미 전력의 50% 가량을 상실하며 사실상 패배가 확정되어버렸고 모든 전선에서 1명의 MPLA 병사가 2명의 UNITA 병사를 상대해야 했었다. 이러한 실패는 예견되었던 것으로 UNITA 지역의 1인당 GDP는 아르헨티나보다 살짝 아래였던 $1000 후반이었으나 MPLA 지역의 GDP/C는 $180으로 이집트/한국보다 조금 높았던 수치였다. 총생산 역시 당시 인구가 1.5배 가량 많던 MPLA보다도 UNITA가 압도적으로 높았으며 무엇보다도 MPLA 점령구역에는 원래 적었던 석유기반시설과 중/경공업 기반이 대규모 폭격으로 사라져버렸다. | 68년 12월, 전력을 2배 가까이 증강하고 대지상공격교리까지 준비한 공군을 동원, UNITA는 해안 지역에 대공세를 벌인다. F-4C 80대를 순수하게 폭격용으로 이용하는 전술로 UNITA는 루안다 남쪽 인근 지역인 남콴자에 주둔중이던 MPLA를 사실상 전멸시켰으며 (70% 이상의 병력이 무력화) 공세 1개월만에 루안다 20km 앞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이후 와해된 전력이 재조직하여 UNITA에 대한 역공세를 진행하였고 유격대까지 동원하며 반도지형인 루안다의 포위를 막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노력하였으나 사실상 국지적인 저항 수준에서 무의미하게 마무리되었으며 UNITA는 루안다를 포위, 결국 포위 1주일만에 5만명에 달하는 루안다에 포위된 MPLA 병력들이 항복한다. 1969년 1월 14일의 일이었다. 이 시점에서 MPLA는 이미 전력의 50% 가량을 상실하며 사실상 패배가 확정되어버렸고 모든 전선에서 1명의 MPLA 병사가 2명의 UNITA 병사를 상대해야 했었다. 이러한 실패는 예견되었던 것으로 UNITA 지역의 1인당 GDP는 아르헨티나보다 살짝 아래였던 $1000 후반이었으나 MPLA 지역의 GDP/C는 $180으로 이집트/한국보다 조금 높았던 수치였다. 총생산 역시 당시 인구가 1.5배 가량 많던 MPLA보다도 UNITA가 압도적으로 높았으며 무엇보다도 MPLA 점령구역에는 원래 적었던 석유기반시설과 중/경공업 기반이 대규모 폭격으로 사라져버렸다. | ||
<center>'''UNITA의 자이르 주 상륙'''</center> | |||
한편 2차 대공세 당시 카빈다에서는 UNITA가 3만명의 기계화해병부대 훈련을 마무리 지었으며 자이르 주에 대한 상륙작전을 이미 구상한 뒤였다. 1969년 2월 3일, UNITA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10척 가량의 LHA와 민간수송선을 동원, 3만명의 돌파용 기계화해병부대, 3만명의 전차사단 그리고 무려 1만명에 달하는 보급지원부대를 소유(Soyo)라는 마을에 투입, 해안경비대 2백병의 저항을 제외하고 아무 저항도 없이 손쉽게 점령한다. 이후 차량화부대를 동원하여 하루만에 2000km²에 달하는 지역을 점령하였고 이후 남하하기 시작하면서 루안다에 배치된 북진하는 UNITA 선봉대와 만나기로 결정한다. 제2군 이라 명명된 민병대 10만명을 동원하여 진격을 막고자 MPLA는 저항하였으나 대인살상용 20mm 기관포를 장착한 A113-IFV에게 잔혹하게 학살 수준으로 패배당하며 저항은 분쇄되었다. 결국, 1969년 3월 2일, 벵구 주의 암브리즈라는 소도시에서 북부 상륙전력과 루안다에서 북상하던 두 전력은 접촉에 성공하였고 이를 통하여 MPLA는 해안 지대를 전부 상실하게 된다. | 한편 2차 대공세 당시 카빈다에서는 UNITA가 3만명의 기계화해병부대 훈련을 마무리 지었으며 자이르 주에 대한 상륙작전을 이미 구상한 뒤였다. 1969년 2월 3일, UNITA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10척 가량의 LHA와 민간수송선을 동원, 3만명의 돌파용 기계화해병부대, 3만명의 전차사단 그리고 무려 1만명에 달하는 보급지원부대를 소유(Soyo)라는 마을에 투입, 해안경비대 2백병의 저항을 제외하고 아무 저항도 없이 손쉽게 점령한다. 이후 차량화부대를 동원하여 하루만에 2000km²에 달하는 지역을 점령하였고 이후 남하하기 시작하면서 루안다에 배치된 북진하는 UNITA 선봉대와 만나기로 결정한다. 제2군 이라 명명된 민병대 10만명을 동원하여 진격을 막고자 MPLA는 저항하였으나 대인살상용 20mm 기관포를 장착한 A113-IFV에게 잔혹하게 학살 수준으로 패배당하며 저항은 분쇄되었다. 결국, 1969년 3월 2일, 벵구 주의 암브리즈라는 소도시에서 북부 상륙전력과 루안다에서 북상하던 두 전력은 접촉에 성공하였고 이를 통하여 MPLA는 해안 지대를 전부 상실하게 된다. | ||
소련은 루안다가 쉽게 무너지자 이미 생산은 없고 경제적 손해만 비대하던 앙골라에서 철수를 고려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8일 뒤 호전파였던 브레즈네프가 암살당하자 최고회의와 후임 안드로포프는 철수를 결정, 6만명에 달하는 소련군 지상병력을 앙골라에서 한번에 빼내버리게 된다. 공군을 제외한 전력은 남지 않았으며 소련 해군 역시 쿠바와 무르만스크로 철수한다. UNITA는 표범 | <center>'''UNITA의 MPLA 소탕 작전'''</center> | ||
소련은 루안다가 쉽게 무너지자 이미 생산은 없고 경제적 손해만 비대하던 앙골라에서 철수를 고려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8일 뒤 호전파였던 브레즈네프가 암살당하자 최고회의와 후임 안드로포프는 철수를 결정, 6만명에 달하는 소련군 지상병력을 앙골라에서 한번에 빼내버리게 된다. 공군을 제외한 전력은 남지 않았으며 소련 해군 역시 쿠바와 무르만스크로 철수한다. UNITA는 작전명 레오파르두<ref>표범</ref>라 불리우는 MPLA 소탕 작전을 가동, 내륙에 고립된 MPLA를 제거하기 시작한다. 소련의 지원이 없는 MPLA는 유류품이 부족하여 많은 수량의 전차를 유기하면서 후퇴하며 압도적인 화력의 UNITA 앞에서 큰 저항 없이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1970년 1월 1일에는 말란즈와 루에나 두 도시 모두 잃고 룬다 주에 처박혀 정글에서 참호전을 진행하는 신세가 된다. 또한 UNITA는 포격도발과 자이르의 유일한 해안지역인 키톰베를 무단점령하며 자이르에게 MPLA 지원을 멈추라는 무력협박을 보냈으며 이에 모부투 세세 세코는 MPLA의 탈출/보급로를 끊어버리고 키톰베를 반환받는다. | |||
<center>'''MPLA의 항복'''</center> | |||
산투스의 지휘 아래 의미 없는 저항을 계속하던 MPLA는 UNITA를 정글로 끌어들이며 공세종말점으로 도달시켰으나 MPLA 자신들이 먼저 굶어 죽을 판이었다. 이에 루시우 라라, 앙골라 인민공화국 부서기장은 1970년 12월 5일, 산투스가 취침 중인 시점에 그를 납치 후 권력을 탈취, 최대한 저항을 이어가다 최초의 MPLA 아사자가 발생하자 이성적인 판단으로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오전 7시, UNITA에게 항복 의사를 타진하였으며, UNITA는 이를 받아들여 1971년 1월 1일 자정, 공식적인 종전을 새해에 선언하고 임시 공화인민정부를 수립한다. | 산투스의 지휘 아래 의미 없는 저항을 계속하던 MPLA는 UNITA를 정글로 끌어들이며 공세종말점으로 도달시켰으나 MPLA 자신들이 먼저 굶어 죽을 판이었다. 이에 루시우 라라, 앙골라 인민공화국 부서기장은 1970년 12월 5일, 산투스가 취침 중인 시점에 그를 납치 후 권력을 탈취, 최대한 저항을 이어가다 최초의 MPLA 아사자가 발생하자 이성적인 판단으로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오전 7시, UNITA에게 항복 의사를 타진하였으며, UNITA는 이를 받아들여 1971년 1월 1일 자정, 공식적인 종전을 새해에 선언하고 임시 공화인민정부를 수립한다. | ||
==앙골라 국가재건 임시공화정== | ==앙골라 국가재건 임시공화정== | ||
1971년 1월 1일, 사빔비는 공화인민정부 내각을 꾸리며 UNITA의 정식 국가로서의 새출발을 준비하였다. | <center>'''재건'''</center> | ||
당시 MPLA 가 점거하고 있던 전 지역은 UNITA의 절멸수준의 포격으로 황폐화되어있던 상황이었고 남부 지역과 카빈다만이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 중이었다. 사빔비는 일단 당시 보유중이던 대량의 군사력을 절반 수준으로 감축하는 군축을 시작하며 국방비 지출과 인력을 군대에서 빼냈으며 또한 내각 수립 2주 후, 안드로포프와의 정상화담을 개최하고 소련과의 관계 역시 정상화된다. 당시 정상적으로 루안다가 수도로서 기능할 상태가 아닌 점을 감안, 사빔비는 루방구를 수도로 지정한다. 한편 미국과 서방권의 시선을 의식, 사빔비는 1인독재 체제를 도입하지 않기로 하였고 다당제는 아니지만 견제세력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여 양당제를 허용한다. 또한 UNITA 내부의 의원들의 충돌 역시 의도적으로 봉합하지 않고 최대한 다양한 의견을 듣기로 결정한다. 이는 튀르키예 건국 초기, 아타튀르크의 통치와 상당히 유사한 방식이었다. 어쨌든 종전 1년차에는 대도시들 대부분의 재건작업이 끝났으며 손상된 건물들은 전부 사빔비가 건축을 주도한 신식 아파트들로 대체하며 앙골라의 모습은 천천히 변해가기 시작했다. 내전 전까지 존재하는 부족사회는 전쟁으로 뿌리채 뽑혀나갔는데, 원시적인 삶을 영위하던 원주민들 포격과 폭격으로 삶의 터전이 완벽히 사라졌고, 사빔비의 | |||
1971년 1월 1일, 사빔비는 공화인민정부 내각을 꾸리며 UNITA의 정식 국가로서의 새출발을 준비하였다. 당시 MPLA 가 점거하고 있던 전 지역은 UNITA의 절멸수준의 포격으로 황폐화되어있던 상황이었고 남부 지역과 카빈다만이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 중이었다. 사빔비는 일단 당시 보유중이던 대량의 군사력을 절반 수준으로 감축하는 군축을 시작하며 국방비 지출과 인력을 군대에서 빼냈으며 또한 내각 수립 2주 후, 안드로포프와의 정상화담을 개최하고 소련과의 관계 역시 정상화된다. | |||
1972년, 지질조사 중 앙골라 국토부 (MTI)<ref>국토교통부 (MTIT)의 전신</ref>은 이미 석유가 나던 카빈다 지역을 넘어서 자이르에서 루안다까지를 비롯한 앙골라 북부에서 대량의 석유를 발견하였다. 백억 배럴이 넘어가는 수준이었고 이는 앙골라 경제에 | |||
당시 정상적으로 루안다가 수도로서 기능할 상태가 아닌 점을 감안, 사빔비는 루방구를 수도로 지정한다. 한편 미국과 서방권의 시선을 의식, 사빔비는 1인독재 체제를 도입하지 않기로 하였고 다당제는 아니지만 견제세력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여 양당제를 허용한다. 또한 UNITA 내부의 의원들의 충돌 역시 의도적으로 봉합하지 않고 최대한 다양한 의견을 듣기로 결정한다. 이는 튀르키예 건국 초기, 아타튀르크의 통치와 상당히 유사한 방식이었다. | |||
어쨌든 종전 1년차에는 대도시들 대부분의 재건작업이 끝났으며 손상된 건물들은 전부 사빔비가 건축을 주도한 신식 아파트들로 대체하며 앙골라의 모습은 천천히 변해가기 시작했다. 내전 전까지 존재하는 부족사회는 전쟁으로 뿌리채 뽑혀나갔는데, 원시적인 삶을 영위하던 원주민들 포격과 폭격으로 삶의 터전이 완벽히 사라졌고, 사빔비의 이주 프로젝트에 동의하여 70%의 부족인구가 도시로 이동하여 파괴된 고향보다는 도심에서 살아가기로 결정한다. | |||
<center>'''1차 유전 발견'''</center> | |||
1972년, 지질조사 중 앙골라 국토부 (MTI)<ref>국토교통부 (MTIT)의 전신</ref>은 이미 석유가 나던 카빈다 지역을 넘어서 자이르에서 루안다까지를 비롯한 앙골라 북부에서 대량의 석유를 발견하였다. 총 석유 매장량은 백억 배럴이 넘어가는 수준이었고 이는 앙골라 경제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여졌다. | |||
<center>'''고속 경제 성장의 시작'''</center> | |||
이후 석유를 세계에 공급하기 시작하며 앙골라는 국내 인프라 확충에 열을 올렸으며 이미 남부에 주로 포진해있던 중공업 기반을 북부 해안까지 확대건설하기 시작한다. 전시에 가동되었던 전차공장은 미국으로부터 라이선스를 받아온 자동차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소련의 경공업 부진 사례의 폐혜를 인지한 앙골라 정부는 섬유제조와 원단제조라는 무척이나 기초적인 산업부터 육성하기 시작하였다. 국토부 MTIT는 공업으로부터의 공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으는데 사빔비의 고향인 무낭구라는 마을이 전시에 사빔비도 인지하지 못하고 진행된 무분별한 자연개발로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결론적으로 후에 큰 도움이 될 선택이었다. 앙골라 정부는 자국을 불로소득 복지산유국으로 만드는 정책을 고려하던 힐베르토 라 크루즈 재무부장관을 경질하고 앙골라 경제자문협회 (ANAE)를 설립하고 국내 모든 경제학자들과 미국 경제학자들의 자문을 구하여 결론적으로 석유 증산은 순차적으로 진행하며 자국의 공업화를 추진하기로 결정한다. 산유국 국민들이 나태해지는 현상을 걱정했던 것. | |||
또한 [[대한민국]]의 박정희 대통령을 사빔비가 직접 루안다에 초대하여 석유협정으로 한국에 석유를 소폭 낮은 가격에 제한없이 판매하는 협정을 체결한다. 박정희는 경부고속도로를 만든 경험을 바탕으로 1번 고속도로의 건설 자문을 돕고 당시 사빔비가 진행중이던 황폐화된 내륙을 녹지화하는 사업을 돕기로 결정한다. 이 덕분에 앙골라에는 식목일이 생겼으며 한국과 똑같이 4월 5일이 식목일이다. 이러한 외교적인 접촉으로 인해 한국-앙골라 관계는 한-미 관계에 필적할 정도로 크게 가까워지며 남북한 아프리카 외교전에서 한창 북한이 우위를 점할 때에 가봉과 함께 한국의 든든한 우방국이 되어주었다. | |||
<center>'''2차 대규모 유전 발견'''</center> | |||
1차 유전 발견 사업을 진행했던 MTI의 후신인 MTIT는 남부에서의 텅스텐과 다이아몬드 광업을 위하여 남부와 내륙까지 포함한 2차 지질조사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그리고, 석유 발견의 가능성이 없을 것으로 여겨졌던 동남부 지역에서 놀랍게도 도합 1500억 배럴이 넘어가는 석유가 국토에 매장된 것을 확인하면서 앙골라의 경제는 역대급 청신호가 켜진다. 이러한 사실은 대외비로 부쳐져 사빔비와 MTI의 고위 책임자들, 최고 참모진 일부를 제외하고는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비공식적으로 앙골라는 세계 최대의 원유 매장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 |||
<center>'''제 1차 오일쇼크와 앙골라의 부상'''</center> | |||
{|class="wikitable" style="width: 300px; border: 2px solid #99A6B6; margin: 12px auto; background: #01283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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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margin: -0.3rem -0.6rem;">[[파일:Luanda1973.jpg|700px|link=]]</div>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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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 1973년 루안다 시가지의 모습'''</center> | |||
1973년, 이집트가 욤 키푸르 당일인 10월 6일에 이스라엘을 침공화며 4차 중동전이 발발한다. 앙골라는 정통성 미확보와 정식 공화정부 미수립으로 아직까지 OPEC에 가입하지 않았던 상황이었고 석유 역시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가지 않았다. 또한, 추가로 발견된 1500억 배럴의 석유매장량은 미국 고위층과 앙골라 정부, 그리고 후에 설명하겠지만 소련 고위층만 아는 극비 사실중 하나였기에 OPEC 국가들은 앙골라의 체급을 무시하였으며 선제적인 외교관계 수립도 고려하지 않았다. 어쨌든, 당시 사우디를 비롯한 다양한 OPEC 회원국들은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지원하던 서방에게 철퇴를 후리기로 결정, 석유를 감산하게 된다. 이는 서방국가들에게 엄청난 경제적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사빔비는 숨겨둔 유전을 공개하기보다는 이미 생산하던 카빈다 유전의 증산이라고 외부에 알린 뒤, 새로 발견된 유전에서 뽑혀올린 많은 양의 석유를 당시 중동의 제제에 당한 캐나다/네덜란드 등의 국가에게 공급하였다. 이는 아랍 국가들이 앙골라를 적대시 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파동은 세계를 강타하긴 하였으나 감산과 가격 증가라는 카드를 쓴 국가들과 달리 앙골라는 충실한 서방의 유전으로 기능하였고, 서방국가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보여주게 되었으며 서방 기업들과 협력도 이때 시작된다. 또한 이 시점에 앙골라는 쏟아져 들어온 돈으로 포드 F-150과 세단들의 하청생산공장을 모사메드스에 유치하는데에 성공하였고 도요타로부터 내연기관 기술력 일부를 구입하면서 국가차원으로 차량/내연기관을 비롯한 중공업 개발을 시작한다. | |||
== | ==앙골라 제2 공화국의 탄생== | ||
<center>'''앙골라 제2 공화국 설립'''</center> | |||
1974년 앙골라는 안정궤도에 접어들며 매년 7-8%에 달하는 고성장을 기록하며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였고 전국에는 사빔비가 주도한 계획경제 체제에 의거, 아파트, 학교, 병원등이 들어선다. 루안다는 다시 수도로써의 위상을 회복하였고 200m가 넘는 유리 마천루들은 대도시들 곳곳에 생기기 시작하였다. 조나스 사빔비는 이에 국가재건 공화임시정부에서 진정한 의미의 제2공화국을 설립하기로 결정하였고 1975년, 신헌법 제정과 부패개혁으로 '앙골라 공화국' 이 탄생하며 임시정부는 소멸하고 정식적으로 정부가 출범한다. 북한과 팔레스타인같은 일부 국가들을 제외한 모든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면서 수출량도 크게 늘었으며 이 시기에 인민공화국 시절에 사용하던 국장과 UNITA의 당기이던 국기 역시 현대적인 것으로 교체한다. | 1974년 앙골라는 안정궤도에 접어들며 매년 7-8%에 달하는 고성장을 기록하며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였고 전국에는 사빔비가 주도한 계획경제 체제에 의거, 아파트, 학교, 병원등이 들어선다. 루안다는 다시 수도로써의 위상을 회복하였고 200m가 넘는 유리 마천루들은 대도시들 곳곳에 생기기 시작하였다. 조나스 사빔비는 이에 국가재건 공화임시정부에서 진정한 의미의 제2공화국을 설립하기로 결정하였고 1975년, 신헌법 제정과 부패개혁으로 '앙골라 공화국' 이 탄생하며 임시정부는 소멸하고 정식적으로 정부가 출범한다. 북한과 팔레스타인같은 일부 국가들을 제외한 모든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면서 수출량도 크게 늘었으며 이 시기에 인민공화국 시절에 사용하던 국장과 UNITA의 당기이던 국기 역시 현대적인 것으로 교체한다. | ||
70년대는 냉전이 한창 고조되던 시기였고 앙골라는 미국의 | <center>'''전반적인 산업 개발'''</center> | ||
80년이 되기 전까지 앙골라는 석유 수출을 통하여 얻은 재화로 화학공업과 기본적인 소비재를 생산하는 경공업 공장을 확충하였으며 이 시기에 2백만명 가량의 이민자들을 아프리카 전역에서 데려온다. 이들은 특히 저임금이라는 장점 덕에 서방이 세운 하청공장에서 고용되어 일하기 시작하였으며 나이지리아를 비롯하여 내전에 휘말린 조국을 두고 앙골라로 이주하여 노동하는 사람들이 증가한다. | |||
1978년에는 MTIT 산하 자동차 생산기업인 FVE의 연구개발 성과로 T22 내연기관이라는 서방권의 표준보다 높은 수준의 효율을 가진 내연기관을 자체생산하였고 FVE는 자국의 차량을 해외로 판매 시도하였으나 타국은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앙골라 내의 산업화 진행과 함께 FVE 생산 화물 운송차량들은 앙골라 전역에 판매되며 빠른 시간 내에 앙골라 산업표준으로 자리잡았다. | |||
한편 미국 방산업계는 전쟁 이후에도 앙골라에 공장을 더 확충하였고,<ref>이익을 증대하기 위해 아래 설명할 공장 전쟁의 양쪽 파벌에 무기를 판매하였다</ref> 사빔비는 미국으로부터 F-14 전투기, M1 전차, LVT-7를 포함한 차량화·기계화장비 생산공장의 유치를 따냈으며 또한 우방국 혜택으로 F-14 120대 수입과 180대 라이선스 생산까지 허가받았고 1980년 초까지 F-14를 200대 이상 전력화한다. M1은 2000대 가량을 운용하며 세계 2위의 M1 운용국이 되었으며 모든 M/A113을 자국에서 생산한 LVT-7 장갑증강형으로 대체하면서 군사력도 10년만에 세계 7위로 크게 상승한다. | |||
<center>'''교육 정책'''</center> | |||
앙골라 정부는 문맹을 해결하기 위하여 공격적으로 포르투갈어와 국제 공용어의 지위를 가진 영어에 대한 언어 교육을 통한 문맹 퇴치 사업을 진행하였다. 이를 통하여 70년대 후반, 앙골라의 문해율은 95%를 달성하며 단기간에 아프리카 국가 중 국민들의 문해력이 가장 높은 나라로 올라선다. | |||
또한 내전 이후부터 각 지자체에서 진행되던 전체 성인 인구의 75%나 되는 대학 교육 미이수자들에 대한 야간학교 사업을 국립 교육부가 직접 운영하는 전국민 대상 국립중등·고등 교육 향상 사업으로 확대하여 앙골라 대학교 시스템을 세워 앙골라 연방대학교(AFU)와 앙골라 공과대학교 (AIT)를 설립하였다. 이들은 이후 80년대 앙골라의 경제와 함께 실적이 급성장하며 앙골라를 넘어서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최상의 교육기관으로 탈바꿈한다. 또한, 고등교육 이수자들 중 우등생들을 대상으로 국가가 서구권으로 해외유학까지 보내주었다. | |||
이 시기부터는 고등교육을 이수하려는 의지가 있는 인구의 양과 질을 높이기 위해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을 의무화하는 특별법안을 제정하고 사업장에서의 아동노동을 군경까지 동원하며 철저하게 단속하였으며 중등교육을 받는 학생들 중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의무적으로''' 평일 하루에 최소 10시간의 학습량과 1시간의 체육활동을 요구하며 매년 시행하던 지능검사의 결과는 해가 갈수록 높아졌다. 이러한 교육정책은 싱가포르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며 실제로 사빔비는 70년대 중반에 싱가포르 국빈방문을 5번이나 할 정도로 리콴유와의 접촉이 많았다. <ref>이러한 사회 풍조 때문인지 자살률이 크게 증가했었으며 학업을 포기한 학생들이 갱단을 형성하게 되며 도시 치안이 극도로 악화되었다.</ref> | |||
<center>'''도시권 치안 악화'''</center> | |||
하지만 위에 언급된 발전의 그림자도 만만지 않았는데, 이촌향도 현상으로 도시에 몰리는 빈민들과 법을 뛰어넘고 가업이나 의지가 없어 학업을 포기한 청년들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던 공업지대 사업가들의 조직폭력단으로 고용되어 경쟁 사업자간의 전쟁을 벌이거나 마약을 유통하는 갱단이 되어버렸던 것. 특히 내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총기류와 중화기, 심지어는 기계화장비까지 앙골라에 돌아다녔으며 심심했다 하면 대도시 외곽의 공업지대에서는 폭발음이 들렸다. 수도였던 루안다, 최대도시인 루방구, 공업도시였던 로비투-벵겔라 지역과 우암부는 이러한 현상으로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까지 엄청나게 치안이 악화되었으며 특히 앙골라 최대의 공업회서였던 벨라스 공업사(CIB)를 상대로 경쟁하던 신생 중소 공업사 연맹(MSIC)<ref>전쟁 이후 도시로 몰렸던 일부 지역 자본가들이 세운 중소 공업사들 24개가 연합해서 만든 무장단체</ref>이 전차까지 끌고 와서 CIB를 포격으로 공격하며 근 10년간 공장 전쟁이라 불리우는 폭력사태가 진행되었다. | |||
정점은 1979년 1월부터 위 4개 광역권에서 동시에 발발한 중기계 전쟁인데, 이 폭력사태에서는 CIB와 MSIC, 그리고 MSIC를 진압하려던 각 도시별 전투경찰들이 얽혀 화력전을 지속하게 되었고 앙골라 정부는 이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당시 아프리카 내 군사개입에 집중하던 앙골라 공화국군을 소집하여 MSIC를 진압하기 위해 투입했으며 결국 9월에는 MSIC 소속 24개 기업들 중 18개 기업들의 생산시설을 정부군이 완전히 점거하였고 24명의 경영자들을 전부 체포하여 말란즈에 위치한 앙골라 안보정보국(NDSI)의 본부로 보내어 심문하였다. 이 사태를 진압한 이후에도 앙골라 정부는 치안 개선을 명목으로 계엄령을 해제하지 않고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 남은 조직폭력단들과 갱단을 토벌하여 1980년 중순에야 범죄와의 전쟁의 종식을 발표하여 계엄령을 해제한다. | |||
<center>'''70년대의 황혼기'''</center> | |||
70년대 말이 되자, 경제, 인간개발, 부패, 민주주의 부분 지표가 70년대 초에 비해 크게 개선되었다. 또한 1979년, 팔라비 왕조의 붕괴와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탄생으로 제2 오일쇼크가 터지자 79년 경제성장률은 IMF가 예측한 7-8%를 훌쩍 넘은 13%를 기록하였으며 1980년이 되자 앙골라의 1인당 소득은 유럽 평균의 절반을 넘어섰고 GDP (PPP)/C의 수치는 유럽의 45%를 넘는다. 이미 이 시점에서 아프리카 최강의 국가 타이틀을 이집트로부터 따냈다는 평가가 주류였으나 아직까지는 서방으로부터 큰 관심을 받지 못 한다. | |||
===앙골라의 외교정책=== | |||
<center>'''남아프리카 국경전'''</center> | |||
{|class="wikitable" style="width: 300px; border: 2px solid #99A6B6; margin: 12px auto; background: #01283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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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margin: -0.3rem -0.6rem;">[[파일:M1-tank-16.jpg|700px|link=]]</div>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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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 나미브 사막에서 진군하는 앙골라 육군 제3 전차사단 소속 M1AG 전차'''</center> | |||
70년대는 냉전이 한창 고조되던 시기였고 앙골라는 미국의 부하이자 동맹으로써 미국의 요청으로 세계 각국의 분쟁에 개입하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남아공 국경전이었다. 남아공이 내전에서 UNITA를 지원한것과는 반대로 사빔비는 인종탄압을 자행하는 남아공 정부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으며 언젠가는 군사력을 키워 남아공과의 전면전을 계획하였다. 미국 역시 아프리카 최대의 골칫덩어리인 남아공 정권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앙골라 정부와 지속적으로 침공계획을 조율한다. 결국, 1978년 3월, 당시 반두스탄 설립과 극심해지는 흑인 탄압으로 앙골라 내부로 넘어오는 나미비아계 주민들이 많아지자 이를 빌미로 사빔비는 앙골라군 전체 30만 중 10만의 병력을 동원, 일부 병력으로 나미비아의 카프리비 회랑의 서쪽을 점령하여 약 2000명의 남아공군을 포위하였고 이에 남아공이 항의하자 오히려 군사력을 동원, 2000명 전부를 포위하여 포로로 잡아서 앙골라로 이송해버리면서 본격적인 국경전이 시작된다. 남아공은 올리판트 전차 500대와 라텔 1000대로 이루어진 30000명의 기계화병력, 그리고 1만 명에 달하는 보급부대를 동원하여 모사메드스로 진격하여 사막에서의 기갑전을 유도 하였으나 개전 직전에 직도입한 앙골라 공군 소속 F-14D와 F-4E의 압도적인 제공권 장악과 폭격으로 기갑전력의 30%가 육상전 없이 산화, 앙골라는 이후 당시 신무기였던 M1 전차 단 100대를 동원하여 남은 올리판트 전차 300대 중 절반인 154대를 한 대의 M1 손실도 없이 격파시켜 남아공군의 주력을 와해한 뒤 내륙으로 남하하기 시작한다. 해상에서는 앙골라가 라이선스 생산으로 직접 건조한 키드급 5척, 올리버 해저드 패리급 10척을 동원, 월비스 베이와 뤼데리츠 항을 봉쇄하여 해상보급을 막고 케이프타운 주변 해역 역시 제해권을 장악하여 남아공의 무역을 막았으며 C13, B1 고속도로를 비롯한 4개의 나미비아행 보급로를 주기적으로 폭격하며 남아공군을 굶기기 시작한다. 공세가 내륙으로 집중되자 남아공군은 방어를 위해 내륙으로 결집하였으나 후방이었던 나미비아 최대도시인 빈트훅이 공수작전을 통하여 투하된 A113<ref>M113을 IFV로 개조한 차량</ref>을 동원한 1000명 가량의 공수연대에게 점령당하며 퇴로까지 막히게 되었고 결국 앙골라군의 포위로 인하여 자국이 가진 30%의 전력이 포로로 잡혔다. 이후 남아공은 앙골라와 진행한 블룸폰테인 협상의 타결로 나미비아에서 완전 철수 및 나미비아 재건 비용을 부담하게 되었으며 개전 2개월만에 전면전으로 확대된 국경전은 앙골라의 '''압도적인''' 승리로 돌아간다. 이후 앙골라는 나미비아 임시통치기구를 1년 유지 후 1979년 5월, 정확히 승전기념일에 나미비아를 독립시키고 ANFN (Angolan Forces Namibia), 나미비아 주둔 앙골라군을 창설, 빈트후크와 월비스 베이에 군 기지를 소유하고 비행장을 이용하며, 지속적으로 남아공을 견제한다. 전쟁 직후 몇년간은 나미비아-남아공 국경에 전투부대를 전진배치하였으며 앙골라 안보정보국(NDSI)는 남아공에서 ANC의 활동을 지원해준다. 전후, 당시 아파르트헤이트로 인하여 백인들만을 공권력에 투입 불가능했던 상황이었던 남아공군은 30%의 백인 군대가 사라지자 치안유지병력도 부족해질 정도였고 이를 파악한 ANC 등의 저항운동층은 앙골라나 당시 신생국가였던 짐바브웨의 적극적인 무장지원으로 북부에서 산발적인 게릴라전을 시작하였고, 케이프타운이나 프리토리아 등 대도시에서 총기난사, 폭탄테러, 납치극의 빈도가 1980-81년동안 250% 증가한다. | |||
<center>'''오가덴 전쟁'''</center> | |||
{|class="wikitable" style="width: 300px; border: 2px solid #99A6B6; margin: 12px auto; background: #01283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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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margin: -0.3rem -0.6rem;">[[파일:M1a1-xf-pic103.jpg|700px|link=]]</div>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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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 하르게이사에서 디레다와로 이동하는 제3전차사단 2대대 소속 M1AG 전차'''</center> | |||
당시 에티오피아는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의 공산독재 체제 아래 굴러갔으며 소련의 비호 아래 있었다. 한편, 소말리아 역시 공산국가로 소련의 비호를 받는 상황이었다. 소말리아의 쿠데타로 집권한 지도자인 시아드 바레는 '범소말리아주의'를 내세우며 당시 소말리인이 대거 거주하던 에티오피아의 면적 1/4 을 차지하던 오가덴을 탈환하고자 1977년, 에티오피아를 침공한다. 사빔비는 사태가 터지자 마자 바로 움직인다. 당시 소말리아가 대부분의 오가덴 지역을 점령했음에도 소련은 에티오피아를 지원하자 앙골라는 당시 주도권을 잃은 소말리아의 지도자 바레에게 앙골라군 파병을 제안, 이후 바레가 사빔비를 극진히 예우하며 이를 승락하였으며 77년 11월, 앙골라 공군 소속 F-14 50대와 이후 남아공에서 승전할 100대의 M1으로 구성된 전차연대를 소말리아에 파병한다. 또한 공산국가를 지원한다는 이념적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자국 기업들의 사무소와 무역거점을 소말리아에 설립하였으며 바레는 이 사건을 계기로 중도-친미 성향을 보이게 되며 앙골라에게 주둔지를 제공한다. 어쨌든 앙골라군은 하르게이사를 보급거점으로 지속적인 디레다와에 대한 공세를 진행하였으며 결국 1978년이 되기 직전인 77년 12월 15일, 디레다와와 하라르는 함락되었고 당시 소말리아 역시 공세종말점에 도달했기에 결국 돌로-발룸발 선을 신국경선으로 설정하여 오가덴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 소말리아의 사실상 승리로 끝난다. 집권기반을 강화한 바레는 당시 망가진 소말리의 경제를 앙골라와 미국의 도움을 받아 안정권으로 만들고 모가디슈는 무역항으로 발전하며 80년대 초반에 고성장세를 보인다. | |||
<center>'''외교정책'''</center> | |||
사빔비는 [[데탕트]]로 인하여 개선되는 미-소 관계를 등한시하지 않았고 앞서 설명했듯이 내전 종전 단 2주만에 소련과의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며 오히려 다른 공산/중립국들보다 소련과 훨씬 일찍 수교한다. 양측은 모두 OPEC에 가입되어있지 않았으며 OPEC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두 국가는 자국의 석유 매장량이 상당하다는 점을 들어 OPEC의 석유 무기화를 견제하고 중동 국가들의 부상을 방지하기 위하여 비밀 기구인 '석유 자유화를 위한 국제기구' 를 설립, 미국과 접선하여 미국을 가입시키면서 중동과 다른 산유국들의 패권국가화를 견제한다. 미국-소련이 협력관계를 형성하는 최초의 사건이기도 한데 이를 앙골라가 중재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기구이다. 앙골라는 아프리카 내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나미비아를 독립시키고 남아고 내전을 유도한다. 또한 소말리아를 친서방국가화했으며 잠비아, 콩고민주공화국을 비롯한 각종 국가들에 민주화 시위를 지원하고 내전에 개입하며 주변국의 막장화를 방지한다. 이러한 정책은 아프리카의 수호자 (Guardião da áfrica)로 불렸다.<ref>당연하게도 내정개입이라는 비판을 밥먹듯이 듣는 상황이다. 물론 미국의 먼로 독트린의 결과물과는 달리 앙골라가 지원한 국가들의 막장화는 일어나지 않았다.</ref> NATO 국가들과도 지속적으로 관계를 개선하며 무기수출을 시작한다. | 사빔비는 [[데탕트]]로 인하여 개선되는 미-소 관계를 등한시하지 않았고 앞서 설명했듯이 내전 종전 단 2주만에 소련과의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며 오히려 다른 공산/중립국들보다 소련과 훨씬 일찍 수교한다. 양측은 모두 OPEC에 가입되어있지 않았으며 OPEC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두 국가는 자국의 석유 매장량이 상당하다는 점을 들어 OPEC의 석유 무기화를 견제하고 중동 국가들의 부상을 방지하기 위하여 비밀 기구인 '석유 자유화를 위한 국제기구' 를 설립, 미국과 접선하여 미국을 가입시키면서 중동과 다른 산유국들의 패권국가화를 견제한다. 미국-소련이 협력관계를 형성하는 최초의 사건이기도 한데 이를 앙골라가 중재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기구이다. 앙골라는 아프리카 내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나미비아를 독립시키고 남아고 내전을 유도한다. 또한 소말리아를 친서방국가화했으며 잠비아, 콩고민주공화국을 비롯한 각종 국가들에 민주화 시위를 지원하고 내전에 개입하며 주변국의 막장화를 방지한다. 이러한 정책은 아프리카의 수호자 (Guardião da áfrica)로 불렸다.<ref>당연하게도 내정개입이라는 비판을 밥먹듯이 듣는 상황이다. 물론 미국의 먼로 독트린의 결과물과는 달리 앙골라가 지원한 국가들의 막장화는 일어나지 않았다.</ref> NATO 국가들과도 지속적으로 관계를 개선하며 무기수출을 시작한다. | ||
==1980년대== | |||
<center>'''1980년대 초반'''</center> | |||
앙골라는 이미 1980년, 아프리카 내에서는 최대의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지역강국이었으나 경제규모로는 세계 10위 수준이었으며 인당소득 역시 유럽의 60%, 군사력은 세계 7위 수준이었고 강대국의 필수조건인 비대칭전력 역시 전무했다. 그럼에도 개도국 이라는 특성과 석유채굴, 그리고 빠른 속도로 커지는 공업력과 함께 7-8%라는 고성장세를 유지하며 많은 이들의 삶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미 건국 직후에 비해서 몆십배 가량 경제규모가 커져있던 상태였고 응골라의 기적이라는 표현도 이미 쓰여지고 있었다. 또한 당시 양당제라고 하였으나 사실상 일당 권위민주주의 체제로 돌아가던 정치판 역시 UNITA의 정치계 자유화와 노조법의 제정으로 사회민주주의 파벌 역시 힘을 얻기 시작했다. | 앙골라는 이미 1980년, 아프리카 내에서는 최대의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지역강국이었으나 경제규모로는 세계 10위 수준이었으며 인당소득 역시 유럽의 60%, 군사력은 세계 7위 수준이었고 강대국의 필수조건인 비대칭전력 역시 전무했다. 그럼에도 개도국 이라는 특성과 석유채굴, 그리고 빠른 속도로 커지는 공업력과 함께 7-8%라는 고성장세를 유지하며 많은 이들의 삶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미 건국 직후에 비해서 몆십배 가량 경제규모가 커져있던 상태였고 응골라의 기적이라는 표현도 이미 쓰여지고 있었다. 또한 당시 양당제라고 하였으나 사실상 일당 권위민주주의 체제로 돌아가던 정치판 역시 UNITA의 정치계 자유화와 노조법의 제정으로 사회민주주의 파벌 역시 힘을 얻기 시작했다. | ||
1971년에 앙골라의 국영공장(앙골라 재무부펀드 지분 95%)으로 시작된 기업인 FVE (Fábrica de veículos estatais)는 오일쇼크 당시 정부의 대규모 투자로 F-150의 라이선스 생산과 토요타의 내연기관 기술을 구입하여 고연비차량의 개발을 시작했으며 78년에 미제 내연기관보다 출력은 낮지만 연비가 2배 이상 향상된 T22 엔진을 개발하였으며 2차 오일쇼크가 터졌을 때에 T22-M이라는 향상된 내연기관을 장착한 FVESE (세단)을 유럽에 판매하기 시작하며 자동차산업에도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다. 미국의 M1 하청공장, 자국산 M1AG 라이선스 생산공장에서 M1을 생산하였고 M1AG는 K1 실전배치 전에 한국에서 500대를 수입하기도 하였다. 또한 F-14나 C-130을 생산한 기술을 기반으로 민간항공기업인 (국토부 MTIT 지분 40%) 아비앙골라(이름답게 아비브라스의 협력기업이었다)를 설립하여 소형 여객기인 AO-330부터 생산하기 시작한다. | |||
1980년 3월, 사빔비는 | <center>'''이란-이라크 전쟁과 초고속 성장의 시작'''</center> | ||
1980년 3월, 사빔비는 1980년 엑스포를 루방구에서 개최하며 자국의 성장과 산업화를 세계에 홍보한다. 특히 이 시기에 고연비차량을 생산하던 FVE 차량수입계약을 70개국으로부터 따내며 자동차산업에 청신호가 켜지는 등 앙골라 역사에 큰 의미가 있던 시기였다. 하지만 세계를 뒤흔들고 앙골라를 송두리채 바꿔버릴 사태는 따로 있었다. 이 엑스포에 참가했던 루홀라 호메이니의 경호원단과 앙골라에 있던 후세인을 추종하던 이라크계 세속주의자의들이 박람회 진행중이었던 밤에 패싸움을 벌이는 사건이 터졌고 정오가 지나자 다른 아랍권 국가들의 경호원들까지 각자의 편에 가담하여 패싸움에 가담하는 국제적인 사건이 일어나며 이란 혁명 이후 이라크와 이란의 관계가 심상치 않음을 보여주었던 것. | |||
이에 앙골라는 NDSI를 통해 사담 후세인이 8-9월 즈음에 이란을 침공한다는 첩보를 받았다. 세계 최대의 산유국들간의 전쟁이 3차 오일쇼크의 도화선이 될 것이라 판단한 경제부는 공공사업을 임시중단하면서까지 단기간에 자국의 산업역량을 최대치로 원유사업에 투자, 4개월동안 보유중이던 유전/유류저장고를 3배 이상 늘리고 석유를 5배 이상 증산하여 8월이 되기 전 유류저장고를 최대치로 채워놓는다. | |||
결국, ANI의 예측대로 9월 22에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한다. 유가는 급상승하였으며 특히 7일 뒤인 9월 29일에는 하페즈 알아사드의 명령으로<ref>당시 시리아 바트당과 이라크 바트당의 불화는 최악 수준이었다.</ref> 시리아가 쿠르드족과 함께 모술을 비롯한 이라크 북부에 진공하며 전쟁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전쟁 전부터 미국에 국빈방문이 계획되어 있던 사빔비는 9월 초반에 이미 전쟁 시작일을 22일로 정확히 예측하고 당시 [[미합중국]]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를 만나러 자국시간 기준 21일 출발하였고 개전 4시간 전인 10시까지 회담을 진행하였으며 이때 이미 사빔비는 카터와 함께 다음 날 벌어질 전쟁에 대한 논의까지 마친 상태였다. 역시나 다음 날 위의 설명대로 이라크의 이란에 대한 선제공격으로 전쟁이 발발하였고 사빔비와 카터는 그날 아침, 같은 색상의 정장을 입고 너란히 서서 개전에 대한 공동성명을 발표하였고 기자회견을 동시에 진행한다. 이는 성장한 앙골라의 외교적 지위와 미국관의 우호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TIME지에서 1980년의 사진으로 선정될만큼 의미깊은 사건이었다. 성명 직후 카터는 급상승하는 원유 가격에 앙골라와의 관계도 고려하여 앙골라의 시장진출을 허가하고 앙골라산 석유를 대량수입하여 자국 정유고를 채우며 경제적 충격에 대비한다. FVE는 바로 5일만에 이미 물밑작업을 끝낸 상태로 FVE-US 법인을 설립하였다. 앙골라 내의 FVE 납품지연도 용인하며 FVE는 무려 5만대의 차량주문을 단 1개월만에 소화하면서 입지를 크게 늘린다. 앙골라의 차량공업이 미국을 덮어버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 |||
<center>'''5차 대중동전쟁'''</center> | |||
시리아-쿠르드-이란 vs 이라크 구도로 흘러가던 그나마 단순했던 이란-이라크전은 이후 한눈팔던 시리아를 이스라엘이 공격하면서 시작된다. 이스라엘이 골란을 넘어 다마스쿠스로 진격하자 시리아가 함락될 시 단독전을 이어갈 위험이 있던 이란은 이스라엘에 의하여 전국토가 파괴되어 반유대주의가 극에 달하던 레바논이 이란 편으로 참전하도록 회유에 성공하였고, 이후 10월 1일에 파병 이란군 3만명, 레바논군 2만명이 하이파로 진격하면서 가나안에 전쟁의 불길이 번지게 된다. | |||
당시 이스라엘과의 공존과 평화를 주장하던 팔레스타인 파타당의 야세르 아라파트는 호전파들이 참전을 위해 강제로 그를 탄핵시키며 권력을 잃었고 강경파가 권력을 잡으면서 팔레스타인은 10월 5일, 예루살렘에서 전투를 시작하였고 나블루스에서 베르셰바로 미사일을 발사한다. | |||
당시 이스라엘과의 평화를 주장하던 안와르 사다트는 이 전쟁으로 자신의 입지가 약해질 것을 우려, 4차 중동전 때의 강경노선을 다시 채택하여 10월 9일, 네게브로 30만명의 병력과 500대의 지상공격기/전투기를 진격시키며 이스라엘에 총공세를 가한다. | |||
이러한 난장판에서 사우디는 아직 정치적 중립을 유지중이었으나 이란의 승리와 시아파의 준동을 우려한 수니파 지도부는 이라크를 지원하기 위해 참전을 결정, 10월 15일, 이란을 공격한다. UAE, 카타르는 이란의 미사일 오폭 사건으로 사우디와 함께 이란에 대항하기 위해 참전한다. | |||
단 3주만에 벌어진 참전 릴레이로 전 중동은 1차대전을 연상케 하는 포화 속으로 빠져들었으며 전쟁에서 안전했던 국가는 요르단과 오만, 그리고 북/남예멘밖에 없었다. 이 사태로 요르단과 오만은 대규모로 피난민들을 수용하고 반사이익을 누렸다. | |||
한편 미국은 시리아를 지지하던 소련과 타협하며 간접적인 자본 제공과 무기지원만을 합의하여 참전하지 않게 된다. | |||
<center>'''제 3차 오일쇼크'''</center> | |||
결국 일련의 일로 세계 최대의 유전의 기능이 사실상 통째로 증발하자 전 세계는 대공황의 2배에 달하는 일시적 경제적인 충격을 받았고 단 한번의 충격파로 각국의 최대기업들이 도산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대표적으로 인도의 타타그룹이 파산하였으며 아람코는 리야드가 공습당하며 본사가 폭격당하며 사실상 기업이 없어졌고 휘청거리던 동독의 트라반트는 소련의 KamaZ가 인수하였으며<ref>1980년 데탕트로 트라반트와 카마즈는 다치아와 함께 세계시장에 진출한 3개의 코메콘 소속 차량기업이었다. </ref> 폭스바겐/벤츠/바이엘 등등 다양한 공업기업들도 도산한다. | |||
이러한 경제혼란에 앙골라는 남동부에 위치한 1500억 배럴 규모 유전의 존재를 11월에 공개, 대규모 증산과 석유 무제한 수출을 발표하여 세계적인 오일쇼크를 발표 하루만에 크게 완화한다. 이후 석유 자유화를 위한 국제기구 (앙골라·미국·소련·베네수엘라·브라질) 5개국은 공동 성명을 통해 다같이 석유 증산에 나섰다. 하지만 5개국은 '자유화' 라는 명칭과 달리 자국의 이윤 추구와 패권 확보를 위하여 증산을 무제한적으로 하지 않고 유럽 기업들이 오일쇼크로 충분히 도산할 만한 수준으로 유가를 유지한다. 이 때문에 르노를 추가로 더 많은 다양한 유럽계 중공업 기업들이 무너졌으며 중국의 개혁개방정책도 크게 타격받는다. 한국은 앙골라와의 협정으로 정상유가대로 기름을 공급받으며 안정적인 성장세를 유지하였고 그 대가로 앙골라에 금성/삼성 의 공장을 유치한다. 이 덕분에 한국은 80년대 대규모 공황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 |||
<center>'''앙골라 자본의 중동 경제 잠식과 종전'''</center> | |||
{|class="wikitable" style="width: 300px; border: 2px solid #99A6B6; margin: 12px auto; background: #01283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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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margin: -0.3rem -0.6rem;">[[파일:Luanda1985.jpg|700px|link=]]</div>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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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 1985년 루안다 CBD의 모습'''</center> | |||
이미 증산해도 전쟁 전과 비슷한 생산량으로 현상유지를 하던 미국·소련·베네수엘라·브라질과는 달리 앙골라는 기존의 고성장세에 유류수출 수요로 자본유입량이 극대화되었으며 1980-1981년 GDP 성장률이 32%대라는 극빈국에서나 나올 수치를 보여주며 폭주를 시작한다. 재화가 앙골라 정부로 유입되는 가운데, 앙골라는 계획경제체제를 유지중이었기 때문에 투기나 과소비 문제를 억제시킬 권력이 행정부에 있었고 많은 돈이 구식 인프라를 최신형으로 바꾸고 고속철도사업, 경제지구 건설, 반도체와 중공업 팽창 그리고 이민자들을 대규모로 받아들일때의 지원금으로 투입되었다. 이러한 재화 소모 정책 덕분에 80년대 초중반, 5차 중동전 기간동안 앙골라의 인플레이션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 |||
또한 앙골라는 중동전에 인도와 파키스탄까지 엮이면서 카슈미르 지역에서 몇십만명이 죽는 아자드 분쟁이 발발하자 M109 등 대량의 무기들을 생산하여 서아시아 양측에 팔아넘기기 시작하였고 이때 사우디아라비아와도 무기현물거래를 통하여 전쟁으로 완전히 인프라가 파괴된 아람코의 지분 80%를 획득하며 사우디의 유전지역 땅을 챙기는데 성공한다. 이러한 딜이 있었던 배경으로는 이미 사우디의 유전지역인 담맘과 수도인 리야드, 심지어 사막 넘어 헤자즈의 메디나 일부까지 이란 혁명수비대에게 점거당한 상태였고 메카 코앞에서 공방전이 벌어지던 상황에서 알사우드 왕가는 차라리 망한 아람코 지분을 처분하고 무기를 수급받아 반전의 기회를 노리기로 생각했고 앙골라는 사우디를 성공적으로 방어하여 아람코의 가치를 재생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앙골라는 거래의 대가로 10만이 넘는 병력이 운용하는 1000대가량의 M109, 1500대의 M1전차와 이를 운용할 아프리카에서 모집한 아랍어 사용이 가능한 용병 전차병, 그리고 100대의 F-14와 파일럿들을 지원하며 사우디가 어떻게든 버티도록 하였다. 또한 메카와 항구도시인 제다에 대량의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설치하여 방공체계를 강화하여 사우디가 버틸 수 있도록 도왔다. 이후 이라크가 쿠르드-시리아-이란 3자동맹을 상대로 성공적으로 모술을 사수하며 전쟁이 수니파에게 유리하게 흘렀고, 앙골라가 파병한 공세군들이 타브리즈와 아바스를 점령하며 이란의 패색이 더 짙어졌다. 결국 이란은 기습적으로 진행된 3만명 규모의 공수기계화부대에 의해 무방비하게 테헤란을 점령당한다. | |||
87년, 몰타 협정으로 이란-이라크 양측이 정전에 합의하며 이란의 패배와 정권교체로 전쟁이 잦아들고 팔레스타인이 엄청난 피해 끝에 네게브와 에일라트를 점령하고 예루살렘 절반을 확보한 뒤 이스라엘과 종전에 합의하여 5차 중동전이 끝났다. 카이로, 텔아비브, 다마스쿠스, 바그다드, 테헤란, 베이루트, 리야드, 아부다비, 도하 등등 중동국가들의 수도는 모조리 폐허가 되었으며 유럽의 경제는 크게 침체되었다. | |||
전쟁 기간동안 앙골라는 대표적인 실적으로 폭스바겐을 인수, 자국의 공업기반을 제외한 아프리카 전역의 공업시설 95%, 자원 채굴권 70%를 MTIT가 매입 및 확장, 사우디 국가채권의 40%를 확보, 총 5억 달러의 무기를 수출 그리고 80%의 아람코 지분을 소유하며 MTIT가 아람코의 모기업이 되었으며 중동전이 정리된 1987년, 앙골라의 경제력은 1980년의 2.5배에 달해있었고 세계은행 추정 1995년, 일본의 경제력을 추월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 |||
<center>'''앙골라의 패권국가화'''</center> | |||
OPEC의 우두머리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앙골라에게 유전을 넘기게 되면서 OPEC의 존재는 유명무실화되었으며 전쟁 전 아랍 경제력의 70%가 사라지며 중동은 초토화되었다. 또한 아프리카 내 공업기반과 자원 채굴권의 대부분이 MTIT를 비롯한 앙골라 국영기업들의 자본에 잠식되게 되면서 앙골라는 아프리카 전역을 자국의 경제거점으로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이 시기에 대규모의 아프리카인들이 앙골라 내로 유입된다. 앙골라는 이 시점, GDP로 모든 유럽국가들을 압도하였고 일본을 추월할 기세로 성장하며 세계 3위의 경제력을 보유하게 되었으며 이에 비례하게 군사력 역시 미국, 소련, 중화인민공화국 다음으로 강력하게 성장했다. | |||
한편 군사·경제적 패권을 앙골라는 종전 직후 7일만에 이미 개발이 진행되었던 자국산 열핵탄두 실험을 나미브 사막에서 진행하였고 결국 핵보유국이 된다. 미국은 형식적인 제재를 단 2주간 지속하며 이를 용인하였고 소련 역시 앙골라의 핵개발에 대외적인 입장표명을 거부하며 묵인해준다. | |||
한편 유럽의 경제가 엄청난 타격으로 무너지자 프랑스와 영국, 두 UNSC (UN 안보리) 상임이사국은 패권을 유지할 힘이 없다고 판단, 상임이사국 지위를 세계 국가들의 압력으로 포기하였으며 당장 핵보유국에 세계 경제력 3위라는 타이틀을 얻은 앙골라는 엄청난 경제적 성장을 겪은 일본과 함께 상임이사국 가입을 시도, 중화인민공화국의 투표 기권과 소련/미국 그리고 앙골라 정부의 로비를 받은 비상임이사국들이 만장일치로 찬성하게 되면서 1988년, 앙골라는 UNSC 상임이사국이 된다.<ref>미국·소련·중화인민공화국·앙골라·일본</ref> | |||
==1990년대== | |||
<center>'''모스크바 회담과 냉전의 종식'''</center> | |||
제 5차 대중동전쟁 종전 이후에도 1세계, 2세계 유럽과 아시아의 경제는 초토화된채 방치되었으며 다수의 기업들이 파산 직전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이에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결속력 약화에 위협을 느껴 개혁·개방을 추진하던 소련 정권은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경제적 중계자를 통하여 잠정적 자본주의 요소 도입을 통하여 개방에 더 박차를 가했다. 1990년 1월, 소련은 이러한 개방 과정에서 미국과의 마찰을 줄이고 경제적 협력을 도모하기 위하여 모스크바에서 미국과의 협력을 합의하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하기로 결정, 2월 17일에 모스크바의 크렘린에서 미국 대통령 조지 H.W. 부시와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모스크바 회담을 통해 모스크바 성명에 서명, 이 기점으로 냉전이 단계적으로 끝나게 된다. | |||
===현재=== | ===현재=== |
2025년 5월 11일 (일) 07:47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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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400년 가까이 지속된 포르투갈의 식민통치는 앙골라 문명을 쇠퇴시키고 원주민들을 우민화하였다.
1910년의 포르투갈 혁명으로 앙골라는 처음으로 자치권이 부여되었다.
독립 직전까지, 앙골라는 지리적 특수성으로 포르투갈의 경제력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1966년 독립 이후, 앙골라는 석유산업과 제조업을 바탕으로 초월적인 고속성장을 보여주었다.
현재 앙골라는 친서방 국가이며, 미국-소련과 더불어 세계를 삼분하는 초강대국 이며 아프리카 총생산의 96%를 구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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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앙골라는 1575년부터 포르투갈 제국의 식민지로써 설립되었다. 오랜 압제 끝에 앙골라는 1910년부터 앙골라 자치령 지위를 받으며 자치권을 얻기 시작하였으며 앙골라인들의 무장 투쟁을 통하여 포르투갈의 영향력은 루안다 주변 지역으로 국한되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앙골라인들의 독립 의지는 더욱 더 강해졌으며 1961년부터 진행된 독립 전쟁을 통하여 1966년에 완전히 독립하였다. 전쟁 직후 친소련 정당이자 군벌인 MPLA(앙골라 해방인민운동) 소속 조제 에두아르두 두스산투스 대통령이 부정선거를 통하여 앙골라 인민공화국의 1대 대선에서 승리하였으나 이에 불응한 친서방 정당 UNITA(앙골라 완전독립 민족동맹) 소속 조나스 사빔비가 자신의 군벌을 이끌고 반기를 들어 1966년 내전을 개전, 1971년 사빔비가 이끌던 UNITA가 승리하여 현재의 앙골라 공화국 체제가 정립되었다. 이후 몇 번의 헌법 개정을 통하여 현대의 앙골라 공화국의 기틀이 완성되었다.
식민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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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안다, 콩고, 나미브 지역에서 발견된 다양한 유적으로 보아 구석기,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최초로 이 지역에 정착한 이들은 산족(San People)들이었으나 이후 기원후 6세기경, 제철기술, 토기제작기술, 농업기술을 가지고 있던 반투족들이 산족을 밀어내고 주류가 된다.
이후 콩고 강 하류서 형성된 콩고 왕국 세력이 앙골라 지역에서 큰 영향력을 끼치는 국가로 성장했으며 건국 이후 콩고 왕국이 건설하고 천도한 도시인 음반자 콩고는 현재도 음반자콩구(M'Banza Kongo)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도시이며 자이르주의 주도이다.
이후 디오고 캉(Diego Cão) 등등 포르투갈인 탐험가들은 현재의 루안다 지역과 음반자콩구를 통하여 앙골라 지역을 개척하기 시작했고 포르투갈인은 종교를 전파, 콩고 왕국은 상아나 자국에서 거주하던 인력을 붙잡아 노예 로 만들어 포르투갈에 제공/거래하기 시작한다.
포르투갈령 앙골라는 1575년, 탐험가 파울로 지아스 지 노바이스(Paulo Dias de Novais)가 100명의 포르투갈인, 400명의 군인들과 함께 현 루안다 지역에 캠프를 설치하며 설립되었다. 잠깐의 네덜란드 지배기를 제외하면 이후 앙골라는 포르투갈 왕국이 계속 통치하였다. 근 몇백년간 변방에 위치하여 지정학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식민지였으나 포르투갈 왕국이 이후 열강들과의 힘겨루기에서 밀리고, 브라질 왕국이 독립하는 등 악재가 계속 겹치자 왕국은 내륙 진출을 결정하였고 베를린 조약으로 앙골라의 국경을 확정짓게 되었다. 압도적인 무력을 바탕으로 포르투갈 왕국은 현지인들을 제압한 상태로 자원을 수탈하며 큰 부를 거머쥐게 된다.
1845년 2월 14일, 미국의 급진공화주의자, 흑인 해방 지지자이면서 미국-포르투갈간의 무역을 중계하던 시어도어 밀러(Theodore Miller)와 루안다의 관공서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움분두인 직원인 에스메랄다 다 실바(Esmeralda da Silva) 사이에 페르난두 밀러(Fernando Miller)가 태어난다. 페르난두는 어릴 적부터 남다른 영리함을 보였다. 항상 미국-포르투갈-앙골라를 오가며 생활했기에 페르난두와 자주 만나기 힘들었으나 교육과 자유에 관심 있던 아버지 시어도어는 페르난두를 열성적으로 지원해주었고 어머니와 함께 루안다에서 낮에는 포르투갈인 백인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학업을, 밤에는 야시장에서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교내 최고의 인재로 촉망받았다.
이후 아버지의 지원으로 그는 리스본 대학교에서 기계공학 학사전공 과정을 밟아 21살의 젊은 나이에 학위를 취득(1866년), 이후 미국으로 이동하여 메사추세츠 공화대학교(MIT)에서 24살에 기계공학 석사학위(1869년)을, 29살에 박사학위(1874년)를 취득한다. 이 시점에서 이미 페르난두는 세계에 몇 없던 기계공학 관련 권위자였다. 한편 이 유학 기간동안 페르난두는 미국의 건국 역사와 노예제, 그리고 직전에 끝난 남북전쟁을 통한 노예제 철폐에 관한 역사에 큰 관심을 보였고 거주하던 보스턴에서 자유인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또한 이러한 관심사로 인해 생긴 가치관 덕에 앙골라에서 이루어지는 강제노역의 폐혜를 분석하는 것에 큰 관심을 보였다.
페르난두는 학위 취득 이후 루안다로 복귀하여 부모들과 논의 끝에 성을 다 실바로 바꾸어 본격적으로 정체성을 포르투갈인으로 정한 뒤, 포르투갈인들과의 인맥 형성을 시작했으며, 포르투갈령 앙골라 지역 총독의 지명으로 다양한 인프라 건설 프로젝트를 총괄하며 명망을 얻는다. 1880년에는 자신의 포르투갈 리스본 대학교 유학 시절에 형성한 인맥의 도움과 미국 자본가들로부터의 투자로 루안다 근처에 벨라스 공업사(Companhia Industrial do Belas)를 설립하였다. CIB는 다이아몬드 광산부터 시작하여 브라질과의 무역중계업, 조선업 등 사업을 순차적으로 빠르게 확장하였다. 포르투갈 정계는 페르난두가 흑인의 피가 섞이긴 했지만 분명 외적으로는 백색의 피부를 가진, 식민사관에 동조하는 영락없는 포르투갈인 식민주의자로 취급하였고 그는 이 점을 잘 이용하여 포르투갈령 앙골라 정부와 정치-경제적 유착을 형성하여 앙골라 내 사업권을 독점해나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페르난두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탈식민주의를 지지하고 있었고 앙골라에서 발생하는 끝없는 착취를 물밑에서 해결하려는 시도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는 내륙을 순회하며 부족 사회에서의 탈출과 지적 개방을 추구하는 인재들을 자신의 공업사의 노동자들로 영입하였고 그들을 고급 인력으로 만들기 위하여 CIB 자체 재정으로 루안다 공학대학교의 전신인 벨라스 공업학원(Academia Companhia Industrial do Belas) 을 1892년에 설립한다. 기숙사부터 자체 생필품 공급까지 CIB가 직접 진행하면서 이들의 충성심은 높아졌다. 한편 페르난두는 수율을 핑계로 앙골라 내 민족들 위주로 노동자들을 영입하였는데다 영업이익으로 포르투갈령 앙골라 총독을 매번 매수하면서 앙골라 내 정치적 실세로 등극했기 때문에 이러한 계획은 포르투갈 정부에게 전혀 발각되지 않았다.
이후 페르난두는 ACIB 출신 전문직들에게 자금을 지원해주며 로비투(Companhia Industrial do Lobito)나 모사메드스(Companhia Industrial do Moçâmedes) 등지의 항구도시들에 협력 공업사 설립을 도왔다. 이들은 CIB와 더불어 포르투갈령 앙골라 내 3대 기업으로 성장하였고 페르난두의 독립 계획에 참여하였다. CIL과 CIM 역시 공업사 소속 학원들을 설립하여 앙골라 내의 친독립 인재 양성속도를 더 향상시켰고 시작했으며 1900년대 초반에는 앙골라 전역에 공업에 종사하며 교육받은 원주민들은 무려 25,000명으로 앙골라의 백인 이주자들 인구의 절반이나 되는 규모로 성장하였다.
교육받은 원주민들은 전문적인 기술교육과 더불어 반식민주의 사상까지 교육받으면서도 페르난두의 보호로 포르투갈 당국의 박해로부터 안전한 생활을 영위했으며 이들 중 자치권 확대에 관심이 많았던 인물들은 페르난두의 의도대로 반식민주의 사상가들로 변모, 일부는 자발적으로 내륙으로 진출하여 다른 원주민들에게 압제에서의 해방에 관한 사상을 빠르게 퍼뜨린다.
한편 1800년대 후반부터 포르투갈 왕국의 브라간사사셰코부르크구고타 왕정은 시대에 흐름에 따라 빠른 속도로 정치력을 잃어가는 상황이었다. 1890년부터는 영국의 꾸준한 횡포와 이에 굴복했던 포르투갈의 외교정책로 인해 포르투갈 본토 내의 왕당파들의 규모는 위축되기 시작했고 공화주의자들이 힘을 가파르게 얻는다. 1900년대 중반에 접어들자 이 경향은 더 심해졌고 지속적인 반란모의가 포착되거나 포르투에서 공화파 스캔들이 터져 전 국토에 퍼져있는 공화파의 내통연락망이 포착되기도 하였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왕정과 경제적 협력관계에 있던 페르난두는 왕당파들과 카를루스 1세를 위해 유사시 앙골라로의 비상 망명 계획을 미리 구체화하였으며 이에 대한 보답으로 카를루스 1세는 포르투갈령 앙골라 총독부의 자치도를 높이고 콩친젠치(Contingente)[1] 제도를 통하여 총독부의 공직자들의 55%를 원주민에게 할당하는 정책을 시행하여 총독부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결국 1910년 10월 3일, 포르투갈 혁명이 발발, 왕정은 공화파들의 압도적 세력에 밀려 무너지면서 포르투갈 왕국은 본토에서의 긴 역사를 마무리했고 마누엘 2세와 추종자들은 리스본에 민간선적 신분으로 정박해있던 CIB 소속 장갑수송선 10척을 타고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왕당파 소속 전투함들의 호위를 받으며 앙골라로 이동했다. 반란 발발 전, 앙골라 측 인력들은 왕정이 소유했던 금을 포함한 엄청난 규모의 재화를 수송선에 적재했고 이 재화는 왕가와 함께 앙골라로 이동한다.
한편 앙골라에서는 CIB의 철저한 방첩활동으로 공화파들의 준동이 미연에 방지되었으며 루안다에서 일어났던 소규모의 반란은 총독부에게 진압, 이후 마누엘 2세가 앙골라에 안전하게 도착하면서 포르투갈 왕국은 앙골라에 국체를 보존하게 된다.
이후 앙골라 내의 정치적 실세였던 페르난두는 CIB의 내륙 기지에서 비밀리에 생산되던 총기로 원주민 공직자들과 루안다 주변에 거주하던 친왕당파 원주민들을 무장한뒤에 루안다에 위치한 총독부를 급습하여 총독을 구금, 포르투갈 왕국의 명목상 지도자였던 마누엘 2세의 승인으로 자신이 직접 포르투갈령 앙골라의 총독에 오른다. 한편 루안다에서 페르난두가 정치적 입지를 굳히는 동안 CIL/CIM, 그리고 페르난두의 동료들은 벵겔라나 모사메드스에서 아직 본토에서 일어난 반란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하여 갈팡질팡하던 포르투갈군들을 물량으로 제압하고 10척의 군함을 나포한다. 또한 내륙에 있던 잔존 포르투갈군들을 포섭하였다. 대부분은 공화파들에 대한 정보가 제한적인 병력들이었기에 저항 없이 왕국군으로서 앙골라에 협력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앙골라 내치를 접수하게 되자, 페르난두는 포르투갈의 본토를 완벽하게 통치하게 된 공화파들과 협상에 들어간다.
페르난두는 앙골라와 CIB/CIL/CIM의 경제적 가치와 앙골라 지역에 매장된 자원, 그리고 마누엘 2세의 앙골라 체류를 방패삼아[2] 자신을 앙골라 지역에 세워질 자치권이 있는 준국가 세력의 총리로 위임하고 왕정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포르투갈 공화국과의 전쟁과 완전지배를 피하고자 하였다. 당장 대서양을 한참 건너고 CI 계열 기업들이 건조했던 전투함들과 전투를 벌여야 앙골라에 상륙하여 페르난두 일당을 제압 가능하다는 앙골라의 지리적 이점 때문에 공화파들 사이에서도 앙골라와 타협하는 것에 큰 반대여론이 없었고 1910년 12월 1일에 마데이라 조약에 양측이 서명하며 앙골라 자치령이 설립되었다. 포르투갈은 앙골라 지역을 다시 무역거점과 포르투갈계 기업들의 자원 생산기지로 활용이 가능해졌으나 사실상 포르투갈에게 주어지는 경제적 특권 일부와 제한된 주둔군을 제외하면 앙골라에 채워졌던 모든 족쇄가 사라졌다.
앙골라 자치령
페르난두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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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12월 1일, 앙골라 자치령 설립과 동시에 페르난두 다 실바는 65세라는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치령의 총리로서의 장기집권을 시작한다.
페르난두는 포르투갈 왕당파들에게 루안다에 거처와 복지를 제공해주는 대가로 앙골라의 산업개발에 대한 투자를 요구하였다. 앞서 말했던 수송선에 실렸던 재화는 명목상 왕가 소유였으나 재화들의 보관 및 감시는 앙골라 자치정부가 관장했기에 왕가는 이 투자를 반강제적으로 승인할 수 밖에 없었다. 이 계약으로 큰 자본을 확보하게 된 CIB/CIL/CIM은 빠른 속도로 해안선을 따라 산업기반을 확장하였고 1912년에는 다양한 기업들의 합작으로 로비투에서 앙골라 최초의 순양함을 건조하는 과업까지 달성한다. 또한 마데이라 조약에서 보장한 자치권에는 무려 외교권까지 포함되었기 때문에 앙골라 자치령은 당시 나미브 지역에서 국경을 맞대고 있던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개발을 지원해주며 이에 대한 보답으로 프리츠 하버가 개발했던 화학비료와 각종 연구기반을 지원받으며 인구부양능력과 화학분야 과학기술을 크게 향상시켰다. 이 시기부터 크게 발전한 화학기술은 이후 앙골라의 석유개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아프리카에 고립되어 있었으나 정치적 이해관계로는 전세계와 연결되어있던 앙골라 자치령은 생산했던 함선과 기계제조장비를 협상국과 동맹국 양쪽에 팔아넘기며 큰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으며 협상국에 발각되지 않고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에 있던 독일 제국군과 시민들에게 식량과 탄약을 지원해주었다. 이 시기, 자치령 정부는 전쟁으로 인한 안보위협 발생 방지를 빌미로 2만명 규모의 앙골라 자치령 방위대를 창설하여 포르투갈의 기습적인 탄압에 대비하고 1차대전에 소수의 병력을 파견하여 정치적 목소리를 키울 준비를 하였다. 또한 브라질에 거주중이던 자유인 흑인 이민자들을 대규모로 받아들여 역내 독립파들의 기세는 더 세졌고 포르투갈의 영향력은 더욱 약화된다.
이후 영국의 지속적인 참전 요구로 포르투갈이 1차대전에 참전하자 앙골라 자치령은 독일 제국에 대한 직접적 지원을 멈출 수 밖에 없었으나, 제국군 패잔병들을 포함한 독일인들이 모사메드스 주변 해안국경을 통하여 투항할 시, 이들을 모사메드스로 조건 없이 수용하여 거처와 복지를 제공하기로 하였고 이를 통해 전쟁 기간 총 2만명의 독일인들이 모사메드스에 이주하게 되었다. 자치령은 독일에게 우호적인 행보를 보이면서도 1만명의 방위대와 직접 생산한 6척의 구축함을 포르투갈 공화국국 소속으로 임시 이전하여 유럽으로 파병하였고 협상국과 전투 임무를 수행하였다. 결국, 1918년에 독일이 패망하면서 1차대전은 종전되었고 앙골라는 전쟁 기간동안 양 세력 모두에게서 외교를 통하여 이윤을 얻고도 포르투갈을 도왔던 대가로 자치권을 더 확대할 수 있게 되었다. 본토에서 활동하는 앙골라 방위대의 규모는 대략 10만이 넘는 규모로 성장하여 앙골라 주둔 포르투갈군들을 압도하여 포르투갈의 앙골라 자치권 박탈 계획은 시도조차 되지 못 했다.
이후 정산 기간(Período de liquidação)이라 불리는 1918년-1920년 사이 기간 동안 앙골라는 유럽 지역의 재건사업에 뛰어들며 특히 독일 지역에 대규모 식량 지원,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의 왈롱 지역에서 대민지원 사업으로 민가 재건을 매우 낮은 가격에 진행하며 양 세력에 대한 신뢰 확보를 성공한다. 또한 러시아 제국의 붕괴 이후이면서 전쟁 직후였기에 전세계적 정치적 혼란과 권력 재편이 발생한 기간이었기에 앙골라는 효과적으로 자국의 영향력을 증대할 수 있었다. 신질서인 미국과의 협력관계는 더욱 더 강화됐으며 양국간 교역의 활발함도 더 증가했다.
1920년대에 진입하자, 앙골라 자치령은 광란의 20년대 빠른 속도로 발전하던 미국과의 교역사업을 더 크게 확대하며 식료품과 기계 장비들을 미국에 수출하며 엄청난 무역흑자를 기록한다. 자연스럽게 앙골라 역시 경제력이 크게 상승하였다. 앙골라의 인구는 2천만명을 넘어서며 포르투갈의 인구를 3배나 웃도는 규모로 성장하였으며 앙골라 자치령 방위대는 명칭을 앙골라 자치령 방위군으로 변경하여 위상을 높혔고 규모 증대, 공군 창설, 잠수함 건조, 전차 개발 등 개혁을 진행하였다. 군은 규모 30만명을 달성하며 포르투갈군과의 격차를 더 벌리게 되었고 자치권은 더더욱 확고해졌다.
한편 자치령 내에서 압도적인 위상을 자랑하던 국부이자 영웅인 페르난두는 3대 기업들이 노쇠한 자신의 사후 국정을 좌우할 것을 우려, CIB의 재정과 국고를 투입하여 각 회사들의 지분을 1차적으로 CIB 명의로 매입 후 CIB를 준공기업으로 전환하였다. 1922년, 결국 3대 기업들은 국영 모기업인 앙골라 공업부(Departamento Indústria Angolana) 산하로 재편되었고 DIA는 이후 카빈다, 북앙골라, 동앙골라 지역에 추가적으로 사무소들을 설치하여 루안다, 말란즈, 로비투, 우암부, 모사메드스, 루방구, 카빈다 총 7곳에 DIA 지사들이 위치하게 되었다.
집권기 페르난두는 측근들로 국민의회 내각을 꾸렸으며 의회는 CI 출신 페르난두의 측근들이 앙골라당(Partido Angolana - PA)를 형성하여 명목상 페르난두의 의견을 대변하고 있었다. 사실상 철인통치 수준의 정치적 다양성을 보였으며 혹여 페르난두가 사망한다면 정치적인 분열이 자치령의 혼란을 넘어서 자치권의 박탈로도 이어질 수 있었다. 그나마 페르난두가 설립한 앙골라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중앙정치와는 별개로 가동하며 가끔씩 벌어지는 PA의 위법행위를 잡아내었다. 결국 사법부와 입법부가 페르난두의 입맛대로 작동했으니 앙골라의 정치지형은 심각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하지만 페르난두는 위 문제를 잘 인지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15년간 집권으로 정치적 다양성이 전제정에 가까웠던 앙골라 정치계의 개혁을 진행해왔다. 그는 독립을 지향하며 민주적 절차로 체제가 운영되는 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후계자들을 양성하지 않으면서 PA에도 입당하지 않으며 무소속으로 활동했다. 특히 지역정당들이 태동하자 이들을 중앙정계와 어떻게든 잇기 위해 노력했다.
일반적인 정치인일 경우 이러한 중도적인 모습을 보였다면 모든 세력의 먹잇감으로 전락하여 정치적 몰락을 겪었겠으나 이미 앙골라를 넘어 미대륙과 유럽에도 이름이 널리 알려졌던 압도적 위상을 가진 국부이자 정치력의 정점이었던 페르난두는 개혁을 지속적으로 단행한다. 연휴였던 1925년 1월 1일, 80세 생일을 몇주 앞둔 페르난두는 총선 준비령과 급작스러운 PA의 해산령을 내림과 동시에 총리직에서 사임하였으며 곧바로 선거관리위원장에 취임하여 선거절차를 감찰하는 마지막 정치적 행보를 밟는다. 지역정계에서 활동하던 다양한 정당들은 총선거에 소속 후보들을 등록하였다.
PA 의원들은 이에 당황하였고 일부는 위 결정에 반발하여 페르난두에 대한 충성을 거부한 파벌까지 형성하였으나 페르난두는 자치령 방위군의 지도부를 장악한 상태였다. 페르난두는 군을 동원하여 의회를 강제로 해산하고 국민의회 건물을 선거가 진행될 기간동안 점거하는 엄청난 강수를 두었고, 총선거는 매끄럽게 진행된다. PA에 소속되었던 대부분의 의원들은 총선거 직전까지의 3개월 가량의 기간동안 검찰과 군부가 진행했던 부패 관련 정치적 숙청으로 중앙정계에 대한 영향력을 거세당했으며 페르난두가 지원해줬던 지역정당에서 명망을 떨치던 정치인들이 총선거 참여를 위하여 정당을 형성하며 PA의 존재감은 매우 빠른 속도로 신규 정당들에게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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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총선에서 페르난두와 비슷하게 중도정치를 표방하는 민주당(Partido Democrático de Angola)이 국민의회 지역구 200개의 의석 중 과반을 넘는 56.5%인 지역구 113석과 비례대표 17석, 총 130석을 확보하여 당대표이자 총리 후보였던 마르코스 페레이라(Marcos Pereira)가 앙골라 자치령의 2대 총리로 당선되며 페르난두로부터 총리직을 인수인계받아 4월 1일부터 5년간의 임기를 시작한다. 의석 수의 나머지 43.5% 역시 대부분 정치색이 약한 사회당(Partido Socialista de Angola)과 자유당(Partido da Liberdade de Angola) 등의 온건정당들로 채워지며 앙골라의 정치의 첫 단추는 부드럽게 끼워지게 된다.
한편 당선인 마르코스는 당대표를 제외한 '지도자'로서의 경험이 없었다. 이에 취임 직후 1개월간 페르난두를 이은 총리의 지도력을 보이기 위해 연립정부 구성을 시작한다. 자신이 소속된 민주당 말고도 온건 좌익계열인 사회당과 온건 우익계열인 자유당을 포섭하는 절차에 들어갔던 것. 양측 온건정당들은 페르난두의 부재로 인한 위기의식을 느껴 민주당에 협력하기로 결정하였으며 그 결과 마르코스는 240석의 의석들 중 민주당의 113+17석, 사회당의 41+8석과 자유당의 39+6석을 합한 224석(93%)에 달하는 의원들을 협력자들로 끌어들이며 3월 15일에 빅텐드 정당연합인 대앙골라(Grande Angola)를 창설한다. 나머지 16석 중 8석은 카빈다의 독립을 지지하는 지역정당인 카빈다 독립협회(AIC), 8석은 급진적 독립주의 정당인 앙골라 독립당(PIA)가 가져간다.
입법부의 지지를 얻게 된 마르코스는 대법원 판사들과 헌법재판관 11명을 전부 교체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대법원 판사들은 행정부 수반인 마르코스와 민주당이 지목, 헌법재판관들은 11명 중 6명은 민주당이, 2석은 사회당이, 2석은 자유당이, 나머지 1석은 사법부 소속 헌법협회 소속 판사들이 지목하였다.
1875년 출생, 마르코스 페레이라는 CIB의 본격적인 세력 확장 직후부터 소년공으로서 회사에 소속되어있던 앙골라 정치사에서 입지가 확고한 사람이었다. 1882년부터 루안다 외곽에서 거주하던 극빈층 원주민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CIB에 비정규직 청소부로 입사, 이후 정규 숙련공으로 CIB가 직접 훈련시켰다. 초등과 중등교육은 CIB의 도움으로 직업과 병행, 나중에는 노동과 동시에 ACIB에서 앙골라 최초의 자립적 고등교육을 이수받은 사람이 되었으며 1890년 기계공학 학위를 취득한다. 마르코스는 어린 나이에 차석 졸업으로 학업적 성취도를 증명하였고 ACIB에서 고등교육을 이수받으며 벨라스 항구에서 미국 선적의 선원들과의 대화로 언어적인 능력을 보이는 남다른 학생이었다.
졸업 직후, 마르코스는 CIB의 초대 졸업자들 지원정책을 통하여 미합중국의 시카고 대학에서 정치학과 경제학을 5년간 학사 복수전공, 조지타운 대학에서 정치학 석사학위 취득 이후 앙골라-미국을 오가며 CIB의 자금을 미 의회에 로비하여 앙골라 지역와 미국 간의 외교적 관계수립에 집중하였다. 청년기부터 이 정도 수준의 정치활동을 보였기에 앙골라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마르코스가 총리직을 얻을 수준의 거물로 성장 가능하다고 보는 여론이 팽배했다. 한편, 마르코스는 정치 로비와는 별개로 존 피어폰트 모건이 CIB에게 US 스틸의 기술자들을 파견하여 기술이전을 진행하게 하게 만든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여러모로 포르투갈령 앙골라가 자치령으로 발전할 대외적 기틀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한편 마르코스는 페르난두와 여러 번 대면하며 친분을 가지고 있긴 하였으나 페르난두는 마르코스에게 개인적인 지원은 해준 적이 없으며 마르코스는 CIB나 ACIB에서 제공하는 우수직원/학생 보너스와 장학금을 수령한 적 밖에 없다.
마르코스 시대
행정부의 수장이면서도 입법부의 지지를 얻으며 사법부를 길들이는 데에 성공한 마르코스는 한창 진행되는 앙골라의 압도적 경제적 성장을 가속하면서도 교역의존성 감소와 경제적 폭주상태를 방지하기 위하여 금리인상부터 진행한다. 한창 폭주중이던 미국의 소비는 마르코스의 눈에는 언제든지 무너져 내릴 수 있는 거품으로 보였고 이에 미국과의 교역으로 큰 이익을 기록하던 앙골라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당연히 고성장기임에도 금리인상부터 단행하는 마르코스의 정책에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이미 마르코스는 행정·입법·사법기관들을 전부 장악한 상태였고 큰 저항 없이 다양한 기초적인 정부조직 개편과 정책 향방을 결정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행정부의 가장 대표적인 개편으로는 페르난두 재임기에 문제를 보여주었던 국가행정조직의 효율성을 개선하기 위하여 일부 조직들은 통폐합, 일부 불충분하게 주목받았던 사회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조직들을 신설한 일이 있다. 앙골라 자치령의 국방을 담당하는 조직은 앙골라군(Forças Armadas Angolanas)이라는 이름으로 변경하여 포르투갈에 대한 저항을 더더욱 강화한다.
새로 설립되어 원내에 입성한 정당들 역시 이전 앙골라의 정치세력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인다. 민주당과 사회당은 건국 직후 국제적으로 심각한 고립을 겪던 소련과의 교류도 시작하며 정치적 다양성 확보 및 경제정책 수립과 관련된 정보를 취득한다. 물론 근본적으로 미합중국과의 관계를 중요시 여기던 민주당은 사회당·독립당 2당과 함께 미합중국의 정당들과 교섭단체 설립을 통하여 정치적 성숙도를 상승시키고 미국 의회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킨다. 이 시기 일부 미국 남부 흑인들이 루안다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금융제도와 정치적 구조조정을 진행하던 마르코스는 근본적인 경제적 기반 확장을 위해 전국적인 산업개발을 시작한다. 특히 소련이 진행하던 5개년 계획과 산업개발을 비슷한 시기에 진행하며 경제적 구조에서 오는 차이들을 학습하기로 한다. 마르코스는 이 시기 200개가 넘는 행정명령을 내리며 전국 각지에 직접 대통령령으로 기반시설을 건설하였다. DIA는 특히 중남부에 위치했던 산업의 중심지들인 루안다, 말란즈, 로비투/벵겔라(아틀란티코 광역권), 우암부, 모사메드스, 루방구에 대규모 투자로 국영 시멘트, 철강, 섬유 공장들을 설립, 그리고 해안가에 원재료 가공을 통하여 차량, 함선, 중기계, 의류를 제작하는 공장들을 설립한다. 또한 DIA는 위 6개 광역권들을 잇는 고속도로망과 철도망들을 건설하여 유통속도를 증대시켰다. 이 생산품들은 유럽과 미국으로 불티나게 수출되기 시작하면서 앙골라의 국부(國富)는 빠르게 증가한다. DIA는 이러한 방식으로 국부를 2차산업 생산력에 완전 재투자하지 않고 앙골라 내부의 경제기반 확장과 인구증가정책에 집중시키며 혹여 발생할 경제적 고립기에도 내수경제만으로 국가가 운영되도록 기반을 마련한다. 이는 마르코스가 예측했던 미국의 경제적 공황상태에 대한 대비였다.
대공황 직전인 1929년의 여름, 앙골라는 마르코스 집권 초기에 비해 총생산량이 대략 2배 가량 증가하였으며 인구 역시 3천만명을 향해가며 포르투갈과 격차를 더 벌렸다. 특히 제조업 거점들의 빠른 설립과 확장으로 도시들의 인구 부양능력이 매우 빠르게 증가하여, 정산 기간 이후로 정체되던 인구 증가속도가 훨씬 빨라지게 되었다. 또한 영국과 벌인 남부 지역 국경전에서 자국 조병창에서 제작한 기갑/기계화전력으로 적은 병력으로 영국군과 남아프리카 연방군에 큰 피해를 입히며 전략/전술적인 완승을 달성하자 앙골라의 국민들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1929년 10월, 미합중국 주식 시장의 대규모 주가 하락 사태로 전세계적 대공황이 발발한다. 이를 예견하던 마크로스의 선견지명으로 대공황 이전부터 진행된 미국과의 2차산업 교역의존도 감소와 1차산업 교역 증대, 대량의 금괴 확보 덕에 앙골라의 경제력은 큰 타격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앙골라 역시 20년대 초반-중반 수준의 고성장은 기대할 수 없었고 마르코스와 앙골라 자치령 정부는 경제적 제도를 개편하기 위해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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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경제 대공황의 여파를 상대적으로 매우 안정적으로 막아낸 마르코스는 정계에서 더더욱 큰 신뢰를 얻었으며 85세가 된 페르난두가 마르코스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격려하며 마르코스의 입지는 매우 확고해진다. 1930년 3월 1일에 진행된 1930년 앙골라 총선거에서 마르코스와 앙골라 민주당은 지역구 의석 200석 중 120석, 비례대표석 40석 중 24석을 획득하여 의회를 장악하면서 마르코스 2기 내각이 형성된다. 민주당의 약진에도 불구하고 확고한 지지층에 힙입어 사회당은 36+7석, 자유당은 34+7석을 얻으며 의회에서 안정적인 입지를 보여준다. 이 외에 앙골라 독립당이 세력을 살짝 확장하며 8+2석을 가져간다. 카빈다 독립협회(AIC)는 마르코스의 성공적인 1기 집권으로 인하여 카빈다 지역이 수혜를 보게 되면서 자진해산하였다.
앞서 말한 대공황 극복 경제정책의 일환으로 앙골라 정부는 금리는 공황 이전보다 인하하여 소비를 20년대와 비슷한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시작하였으며 전국적인 대규모 저층 공동주택 개발로 2차산업 전반에 큰 활황을 불어넣기 시작한다. 특히 1920년대 발전기에 세워진 다양한 건설 관련 개인사업체들을 구제하면서 앙골라의 경제적 중추는 대공황을 무사히 견뎌내게 되었다. 소비재와 사치품 같은 경우 재무부의 엄격한 통제 하에 시장에 유통되는 양을 늘리며 경기 활성화를 진행한다. 또한 인프라 건설을 더더욱 증대하여 각 도시들의 중심 업무지구들의 숫자와 규모를 키우며 빠른 속도로 도시 자체의 인구부양능력을 키운다. 벨기에와의 협정으로 카빈다는 콩고 지역을 통하여 자이르-우이즈 주와 검문 없는 고속도로를 통하여 빠르게 연결 될 수 있게 되었으며 이전까지 무시당하던 북부 지역인 음반자콩구-우이즈와 동부 내륙지역인 사우리무-루에나-메농그까지 교통망과 생산기반들을 확장한다. 내륙 지역은 토질이 앙골라 내에서 제일 좋은 편이었기에 동부 지역은 앙골라 1차산업의 중심지로 올라서게 되었다.
국제적으로 앙골라 정부는 직업을 잃게 된 세계 각지의 전문직들을 낮은 임금을 상쇄하는 높은 수준의 복지와 경제적 안정으로 어필하여 모집하여 앙골라 내부로 이주시켰다. 이 시기 앙골라는 앙골라 연방대학교 (UFA) 시스템을 설립하여 이주한 전문가들을 대거 교수로 기용하여 전반적인 학문적 발전을 추구했고 이 전략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앙골라 내 고등교육 이수자들의 비중이 빠르게 증가하게 되었다.
한편, 열강들 사이에서 진행되던 건함 경쟁이 대공황으로 완전히 멈추자 앙골라는 이들을 헐값에 매입해와 분해하여 기술력을 축적하고 일부는 함대로 편입시키며 앙골라 해군의 규모는 독일과 러시아 해군을 합친 것의 규모보다 비대해졌다. 앞서 말한 소비재와 비슷한 방식으로, 재무부는 자신들의 통제 하에 적당량의 군 채권 발행을 통하여 육군과 공군 규모확장을 위한 자금조달을 진행하였으며 이 시기 앙골라의 기갑/총기를 비롯한 다양한 무기 설계기술이 유럽을 추월하였다. 이렇게 확장된 군대는 남아프리카 연방과 진행한 국경분쟁[4], 브라질과 조업권을 두고 진행한 랍스터 전쟁[5], 프랑스/영국과 진행한 남대서양 조업권 경쟁[6]에서 앙골라가 승리하는 것에 공헌하며 국가 경쟁력 확보를 진행하면서도 채권을 효과적으로 갚는 데에 쓰였다.
1933년, 포르투갈을 대공황에서 성공적으로 건져올렸던 경제학자인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가 포르투갈 공화국의 총리로 집권한다. 살라자르는 군부를 넘어서는 권세를 거머쥐게 되었고 그러한 권력기반 위에 살라자르의 이스타두 노부 (Estado Novo) 라고 불리는 독재기간이 시작된다. 식민사관이 확고하던 살라자르는 앙골라에 자신의 우민화 정책을 강제하려는 시도를 하였고 그 외에도 다양한 앙골라의 자치권에 위협이 되는 정책을 발의한다.
1934년 4월 20일, 살라자르는 포르투갈군을 대규모로 앙골라로 파병하여 앙골라군과의 의도적인 무력충돌을 조장하며 앙골라 자치령의 자치권을 위협한다. 이에 마르코스는 포르투갈군과의 무력충돌을 의도적으로 국지전 수준으로 키우는데, 마데이라 조약에서 보장하던 포르투갈군의 앙골라 내 대도시들에 위치한 주둔지와 군사활동가능구역들을 점거하기 위하여 앙골라군을 대규모로 동원했던 것이었다. 결국 앙골라군과 포르투갈군 간의 다수의 육상/해상/공중 무력충돌 사건들이 발발했으며 앙골라인들이 자발적으로 민병대를 형성하여 앙골라군과 함께 포르투갈군을 공격하는 모습을 보였고 앙골라 국지전이라고 불리는 폭력사태가 발발한다.
국지전 초반인 4월 29일, 쿠안자술 지역 숨베시 인근 해상에서 벌어진 숨베 해전에서 포르투갈 해군의 함대가 대함전 경험이 부족했던 앙골라 3대 대함대를 대파시키며 남부 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대량의 병력을 루안다/아틀란티코/모사메드스로 안정적으로 파견하였으며 큰 규모의 대지타격을 통하여 해안 공업지대에 피해를 입힌다. 앙골라의 해안지대에 주둔하던 포르투갈군은 규모를 확충하여 내륙 도시들인 우암부와 루방구를 향했다.
하지만 앙골라 해군이 제해권을 장악했던 루안다와 벨라스 항구에서 3대 대함대는 함선 대부분을 빠른 시일 내에 수리하여 기습을 계획했다. 7월 2일, 대지타격을 진행하던 포르투갈 해군을 앙골라 해군 함대가 키사마 해전을 통해 성공적으로 급습하면서 포르투갈이 파견했던 주요 함대의 기함이 침몰하고 전투함들이 대량으로 대파되면서 앙골라 해군이 제해권을 되찾는다. 또한, 타 지역의 치안임무를 맡던 앙골라군 대부분이 포르투갈군의 확장 및 상륙을 저지하는 임무에 투입되면서 전황이 반전되기 시작한다.
벵겔라 지역에 주둔하던 앙골라 육군 제3군단, 루방구 지역에 주둔하던 제5군단과 우암부 지역에 주둔하던 제6군단은 포르투갈군이 대부분 점거한 아틀란티코 광역권을 탈환하고 위협받던 우암부를 보호하기 위하여 10만이 넘는 병력을 집중시키며 올리판트 작전이 개시, 앙골라군은 7월 15일부터 7월 30일까지 포르투갈군을 아틀란티코에서 전부 섬멸하고 1만의 병력을 사상, 3만의 병력을 무장해제 후 포로 신분으로 구금한다. 모사메드스에서는 상황이 좋지 않았는데, 나미브 지역에 주둔하던 앙골라 육군 제4군단의 5만 병력이 포르투갈군의 1만 규모 사막작전사단에게 대패한것. 4군단은 모사메드스의 중심부에서 빠르게 후퇴하였고, 모사메드스시 북쪽의 사코마르 공업지대와 모사메드스 공과대학교(MTU) 캠퍼스를 제외하면 모사메드스 광역권 전역이 포르투갈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결국 3,5,6군단이 아틀란티코 지역을 완전히 정리한 시점인 8월 15일부터 본격적으로 나미브 지역에 4군단을 돕기 위해 투입되었고 당시 사막작전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상륙한 5만이 넘는 포르투갈군 병력과 15만이 넘는 3,4,5,6군단이 격돌한다. 4군단에 비해 충분히 숙련되었던 3,5,6군단의 전력은 포르투갈을 질과 규모로 압도하기에 충분하였고 9월 20일 즈음에 포르투갈군 병력 1만이 포위섬멸(사살 혹은 포로), 잔존 병력 대부분이 함선을 통하여 루안다로 철수하면서 모사메드스는 다시 앙골라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전투들 이후, 루안다를 제외한 모든 구역에서 포르투갈군 부대들이 섬멸당하고 기지들이 점령당했다. 한편 앙골라 역시 경제적 중심지에서 전투를 지속하는 것이 부담스러웠기에 포르투갈에 무력충돌 중재안을 제안했고 결국 10월 16일, 벨라스 조약이 포르투갈과 앙골라 자치령 간에 체결되면서 앙골라 국지전은 막을 내린다. 벨라스 조약은 마데이라 조약을 갱신하며 앙골라에 채워진 정치적 족쇄를 더 약화시키며[7] 사실상 앙골라에 독립국으로써의 확고한 지위를 부여했고 포르투갈군의 루안다 지역 일부 지정구역에서의 군사/경제적 활동만을 보장하였다. 포르투갈의 정치적 영향력을 거세해버린 이 벨라스 조약은 이후 앙골라의 독립을 위한 발판이 되었다. 이 시기부터 루안다에서는 양국의 병력들 사이에서 지속적인 총격전이 발발하면서 앙골라 내에서는 반포르투갈 감정이 더욱 더 격해졌으며 포르투갈 본토 역시 이러한 소식을 들으며 앙골라에 대한 혐오감정을 키우게 되었다. 한편 이 시점부터 이후 발생할 앙골라의 독립기까지, 이러한 정치적인 이유로 루안다의 치안은 매년 악화되어갔으며, 독립 이후에도 공장 전쟁으로 치안 개선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일부 지역은 극도로 높은 강력범죄율을 보여주었다.
여담으로, 포르투갈이 이 분쟁을 얼마나 중요시 여겼는지 알 수 있는 것이 자국 병력의 40%를 파견하여 분쟁에 참가시켰으며 이는 앙골라 본국이 투입한 병력비율보다도 더 높은 수치였다. 분쟁이 진행되며 루안다에서만 포르투갈이 활동지역을 고수하는 것에 성공하자 살라자르는 30%의 포르투갈군 병력을 고정적으로 루안다 지역에 위치한 기지들에 주둔시키며 어떻게든 앙골라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앙골라 국지전이 사실상 앙골라의 대승으로 매듭지어지며 마르코스는 페르난두에 비견될 정도로 강력한 입지를 구축한 상태인 1935년에 총선거를 치룬다.
루안다 지역의 치안과 안정성이 하락함에 따라 마르코스는 남부 앙골라에 산업망을 구축하는 철십자(Cruz de Ferro) 계획을 진행, 아틀란티코, 우암부, 루방구를 비롯한 남부 대도시들을 산업거점으로 집중개발을 시작한다. 물론 루안다 역시 최대도시로서의 입지가 남아 있었기에 지속적인 개발은 진행되었으나 시/주정부의 행정력이 미비하여 민간개발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정부 개입이 없는 민간개발은 난개발의 단초가 되어버린다.
앙골라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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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방향으로 왼쪽 위부터 - 조세프 카사부부, 모부투 세세 세코, 모이스 촘베, 파트리스 루뭄바)
FNLA, MPLA 등등 다양한 이념을 지닌 독립파 세력들은 앙골라에서의 내전을 몇년 전 부터 준비중이었다. 당시 독립세력들은 전부 친서방 세력이 통치하던 레오폴드빌 콩고 (現 콩고민주공화국) 에서 활동 중이었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근본적으로 3파 이상으로 갈려졌던 콩고 내부의 정치적 특수성 때문이었다. 당시 콩고의 대통령이었던 조제프 카사부부는 파트리스 루뭄바 총리와 키부 주에서는 공산주의 반군인 '심바 반군', 남쪽에서는 모이스 촘베가 이끄는 분리독립 세력인 카탕카국과의 전쟁을 진행중이었는데 좌익 계열 MPLA 등의 앙골라 독립 반군도 사실상 독립을 위해 이념에 상관없이 카사부부 정권을 지지했기 때문에 독립파 세력들은 비교적 안전했던 킨샤사 근처 후방에서 외부세력의 사보타주 없이 내전을 준비 할 수 있었다. 내전 3개월 전, 레오폴드빌 콩고의 카사부부 대통령을 암살하고 집권한 자이르의 모부투 세세 세코는 킨샤사 주변 치안 안정화를 도왔던 MPLA 등의 좌익 계열을 포함한 모든 앙골라 반군들에게 자이르 영토에서 공세를 시작하는 것을 허용하였으며 당시 아프리카 내에서의 코메콘 세력 확장을 도모하던 소련 역시 이들을 지원한다.
독립세력 내 주요 파벌
FN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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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단위 독립을 지지하던 저항운동이었던 UPNA가 이 파벌의 시작점이다. 이후 알바로 올뎅 호베르투라는 새로운 지도자가 운동의 지도자가 되며 파벌의 이름은 UPA로 개명되었다. 이후 61년 초반, 조직은 FNLA (앙골라 민족해방전선)이라는 이름으로 조직의 이름을 개명하였으며 이 시기에 킨샤사 중심부에 당 본부 건물을 설립한다.[8] 50년대 자신들이 활동하던 레오폴드빌 콩고 권력의 정점, 조제프 카사부부와 협력하며 심바 반군들과 맞서 싸우며 많은 전투경험을 쌓은 무장조직이었으며 킨샤사에서의 폭동 진압과 치안유지 등등의 활동을 해왔던 조직이다. 카사부부 암살과 그 배후에 있던 모부투 세세 세코 역시 친서방 우익 계열이던 FNLA를 공격하지 않았고 오히려 공세 지원과 카빈다 지역 접경지역에 주둔기지를 마련해준다. 한편, 개전 1개월 전이었던 61년 3월에는 FNLA가 포르투갈령 앙골라의 음반자콩고에 잠시 남하하여 포르투갈인들을 학살하고 바콩고인들을 제외한 많은 카톨릭 부족들을 학살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당시 미국과 내통하던 호베르투의 오른팔이자 UPA의 내무장관이었던 조나스 사빔비는 외교적인 감각이 없던 호베르투를 배신하여 자신의 세력인 UNITA를 창설하려는 준비를 시작한다.
MP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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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했던 좌익 계열의 반군. 살라자르의 50년대 초반 이스타두 노부 통치기간부터 활동한 PCA (앙골라 지하 공산당)과 PLUAA등등 기타 좌익 계열 정당들과 통합하여 창설되었던 조직이다. 사실상 앙골라, 특히 루안다 출신의 흑인 지식인층 대부분은 이 정당에 속하였고 그 권력이자 지능의 정점에 있던 인물이 바로 아고스티뉴 네투 였다. 이들은 기니비사우 / 카보베르데의 독립 조직들과도 협력관계를 형성하여 포르투갈에 대항하였다. 놀랍게도 좌익 계열이었던 이들의 세력은 친서방 카사부부 대통령, 그리고 이후 집권한 모부투 대통령과의 관계는 원만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MPLA 역시 FNLA처럼 킨샤사 주변의 치안유지 활동을 도왔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키크위트 시에서의 공산주의 반군을 토벌한 전적까지 있는 그야말로 독립을 최우선 목표로 우선시하던 조직이었다. 좌익 계열인 만큼 당연히 소비에트 연방과의 내통도 활발하였으며 소련은 전투력이 떨어졌던 콩고의 심바 반군에 대한 지원은 줄이고 점점 앙골라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고자 MPLA에 대한 물자지원을 집중적으로 진행하였다.
독립전쟁의 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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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4월 25일, 세계의 탈식민지화 광풍에 힘입어 앙골라 내 저항세력들 역시 포르투갈의 유사 노예통치에 반기를 들며 앙골라 독립전쟁을 시작한다. 개전 직후, 카빈다 국경에 주둔중이던 FNLA는 자이르 영토에서 출발하여 카빈다를 개전 48시간만에 점령, MPLA는 자이르 마타디 시에서 앙골라 북부 음반자콩고시로 진격하여 포르투갈군과 교전, 6일만에 도시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당시 살라자르는 미국으로부터 마셜 플랜을 지원받을 정도로 미국과도 사이가 나쁘지 않은 서방국가였으며 NATO의 일원이기도 하였다. 소련은 개전 2주차 엄청난 석유자원/귀금속이 대량 매장되어있는 앙골라의 공산화를 추구하며 포르투갈을 견제하기 위하여 MPLA 에게 무기지원/공군지원 그리고 의용군을 파병하기 시작하였다. 개전 1개월 후, 모든 자이르 (前 레오폴드빌 콩고)국경에서 다양한 해방군들이 앙골라로 진입하면서 내전은 격화되었으며 의용군으로 왔던 소련군의 공군과 포르투갈군의 간의 공중전까지 발생한다. 물론 앙골라 전역에서 FNLA와 MPLA를 지지하는 반군 세력들 역시 무장투쟁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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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FNLA의 지도부였던 알바로 올뎅 호베르투의 우유부단함과 이전에 음반자콩고에서의 인종학살에 불만을 느낀 2인자 조나스 사빔비는 대학살의 트라우마에 빠져있던 FNLA 병력의 대부분을(80% 정도로 추정) 이끌고 UNITA를 창설하였으며 이에 우익이었던 호베르투는 처신하고자 좌익 반군인 MPLA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며 FNLA의 전력을 이끌고 MPLA에 참가한다. 이 과정에서 남은 FNLA 병력(10%)의 절반은 우익인 UNITA에 참가한다. 사빔비는 직접적인 공격의 위험이 없던 본거지인 카빈다를 확보하였다는 지리적 이점을 확보하였고, 카빈다에 매장돼있던 기름을 본격적으로 수출하면서 무기를 확보하고 자본을 축적하기 시작한다. 당시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최악의 인종정책을 실행했지만 친서방이라는 성향을 발판이자 협력관계로 이용하여 남아프리카 연방으로부터 보급차량 400대를 구입한다던지, UNITA가 직접 탄약과 무장을 수급할 공장을 짓고 도로/상하수도를 정비하면서 카빈다의 주민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다. 또한 카빈다에 계류중이다가 탈출하지 못한 포르투갈인 역시 루안다로 보내주면서 미국은 사빔비에게 지원을 고려하기 시작한다. 앞서 설명한 포르투갈-소련 공중전에 경악한 미국은 당시 저항전선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자 우익이었던 UNITA와 접선하여 앙골라의 공산화/소련의 전진기지화를 막고자 하였으며 친미성향이 강하던 사빔비는 포르투갈의 배후였지만 자신을 지지했던 미국과의 거래에 동의하였고 이는 앞으로 이어질 앙골라-미국 동맹의 시작었다. 이후 미국, 남아프리카의 지원을 받아 사빔비는 나미브 사막을 통하여 남부에서도 전투를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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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PLA는 자이르의 마타디 시를 보급거점으로 이용, 루안다 주변에서 게릴라전과 정글에서는 포르투갈군과의 전면전을 진행하였으며 개전 1년차에는 지속적으로 남하한에끝에 동북부 주요 도심 중 하나였던 사우리무와 서북부 대도시였던 말란즈를 점령한다. UNITA는 나미브 시와 루방구 시를 개전 2년차인 1963년에 점령하며 포르투갈의 숨통을 조인다. 전쟁이 3년차가 되자 MPLA와 기타 협력관계에 있던 반군들은 소련의 지원으로 음반자콩고에서 시작하여 북부 본토 앙골라 지역을 대부분 점령하였으며 목시코를 비롯한 내륙지역은 특정 이념이 없던 군소군벌들의 손에 떨어진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UNITA는 포르투갈령 앙골라 최대의 병기창과 보급선이 존재하던 벵겔라와 우암부를 점령하는 치명타를 입히게 된다. 1964년 12월 즈음엔 포르투갈은 사실상 루안다와 그 주변 지역을 마지막 거점삼아 포위된 상태로 저항하였으며 이후 지정학적인 자치가 없다고 판단 1965년 1월 1일, 포르투에서 반전 시위가 발생하고 루안다에서도 폭동이 일어나자 UNITA • MPLA 대표단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앙골라에서 포르투갈은 발을 빼게 된다. 앙골라는 이 날을 독립기념일로 지정한다.
앙골라 내전
포르투갈 철수 직후 앙골라 내부 세력들은 정치적인 방황을 겪는다. 앙골라 영토는 군벌 단위로 쪼개져 있었으며 이들은 하나된 국가를 이끌어간 지도부를 선출할 능력이 없었다. 이때 아우구스티뉴 네투, 당시 MPLA의 지도자는 타 군벌 지도자들, UNITA의 사빔비와 함께 '국가' 건설을 제안, 1965년 2월 13일, 앙골라 인민공화국을 설립한다. 네튜는 국가원수가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 4월 15일에 열릴 총선거 직전까지만 국가를 권한대행으로 통치하고 물러나기로 하였으며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다.
영웅인 네투 대신 후보로 지명된 이는 조제 에두아르두 두스산투스, 네튜의 오른손으로 매우 젊은 나이에 크게 출세하게 된 MPLA의 지도층이었다. 반대쪽에서는 미국의 지원을 받았던 UNITA의 사빔비 역시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정하며 선거 전 2개월 가량의 기간 동안 다양한 선거운동이 전개되었다. 소련-미국 양국은 지정학적/자원 가치가 풍부하던 앙골라에 대규모로 선거자금과 산업기반을 지원한다. 친서방파 조나스 사빔비는 자신이 독립전쟁기 카빈다에서 보여준 지도자로서의 자질, 앙골라 경제발전 계획과 미국의 지원금을 강조, 산투스는 이념에 무게를 실으며 포르투갈 자본가들의 착취를 비판하며 평등을 강조, 그리고 소련의 사례로 든 공업발전을 외친다. 하지만 앙골라 토착민들은 자치령 설립 이후부터는 눈에 띄게 줄어든 착취에 대한 관심이 없었으며 실용적으로 경제 발전에 초점을 맞춘 사빔비의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고 UNITA의 전국구 지지율이 70% 이상으로 상승한다. 또한 사빔비는 개인 친위대를 동원 지역별로 군벌 지도자들을 매수하거나 암살하며 약점이었던 작은 관할구역을 넓히며 세력을 키운다. 결국 4월 15일 선거의 출구조사[9]에서 사빔비는 80%의 추정 득표율을 획득한다. 이에 혈기왕성하고 권력욕에 가득 차있던 산투스는 4월 16일 선거 다음날, 앙골라에 파병되어있던 소련군 전차사단 2개의 2만 4천명[10] 병력을 소련의 승인 없이 강제로 이끌고 선거용지가 모두 모인 루안다 임시선거관리위원회 청사를를 UNITA의 반격이 있기 전까지인 6시간 가량을 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후 산투스는 투표용지 분서, 위조 투표용지 생산을 하며 조작을 감행하였으며 결국 99.7%라는 말도 안되는 지지율로 당선된다. 이는 당시 흐루쇼프 내각에서도 합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당선된 정통성 없는 정부라며[11] 엄청난 비난을 보내며 2개 사단장을 송환시켜 전부 KGB가 취조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하였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4월 20일, 산투스는 60만 MPLA 대군의 비호 아래 당선을 선언하며 취임한다. 결국, 사단장들은 이후 내전의 짐조를 느낀 흐루쇼프와 소련 지도부에 의하여 다시 앙골라로 보내진다.
사빔비와 미국 지도부는 격노하였으며 심지어 산투스를 후보로 지명한 네투 역시 UNITA에 가세하며 MPLA에 거센 비판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산투스가 개의치 않고 정식으로 인민공화국 공화정부를 출범시기는 5•1 선언을 발표하자 당시 남부와 카빈다 지역을 군사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UNITA의 사빔비는 내전이라는 수단을 선택, MPLA 내부의 반대파들을 포섭하는 한편 미국의 지원을 약속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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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색은 UNITA가 실질적으로 통제하는 지역, 붉은색은 MPLA가 통제하는 지역, 체크 지역은 교전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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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TA | MPL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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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부 | 대통령 조나스 사빔비 부통령 안토니오 세바스티앙 뎀보 국방부장관 제레미아스 치툰다 내무부장관 안토니우 아구스티뉴 다 실바 네투[12] |
서기장 조제 에두아르두 두스산투스 부서기장 알바루 올뎅 호베르투 국방부장관 비리아투 다 크루즈 |
병력 | 26만 5천명 | 45만 8천명[13] |
파병병력 | 미군 5천여명 남아프리카 공화국군 3천여명 |
소련군 2만 4천여명(+3만 5천여명) |
전차 | M60A1 1522대, M48A5 2521대 | T55M 3142대, T62 1400대,T64A 832대 |
자주포 | M53 573대, M55 762대, M109 600대 | ISU-152 1550대, 2S1 200대, ISU-122 521대 |
장갑차 | M113A1 2200대, M113A5AR 1200대, M113FV 300대 | BTR-50 1200대, BTR-60 600대, BMP-1 200대 |
공군 | F-4C 220대, A-7 250대 | MiG-21 360대, MiG-17 220대 |
1965년 6월 2일, 비에 주의 쿠이토(Kuito)라는 UNITA-MPLA 접경지역에서 UNITA가 전투를 개시하고 2시간만에 마을을 점령하며 UNITA의 선제공격으로 앙골라 내전이 개전한다.
UNITA는 독립전쟁부터 선거기간과 내전 준비기간동안 자신들의 통제구역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내고 통제구역을 2.5배 이상 늘리는데 성공하였으며 자원 수출과 미국의 대외원조를 바탕으로 전시/평시인프라 구축과 근로시간을 보장한 면직물 생산공장/포탄 및 군수품 생산공장을 건설한다. MPLA 역시 유화책과 소련의 경제지원으로 시민들을 끌어들이려 하였으나 경제적/정치적 수완이 뛰어났던 사빔비에 비해서는 미숙한 통치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산투스는 소련에게 도움을 청했고 위의 선거조작을 감행한 2만 4천여명의 전차사단 2개와 대량의 공군부대를 선거 이후 직후 루안다 근처에 주둔시킨다. 미군 역시 이에 대응하여 F-4C라는 당대 최강의 전투기를 벵겔라 공군기지에 전진배치 시켰으며 UNITA 부대에 전차를 대량지원하고 훈련을 시작한다. 특히 중공업 기반을 UNITA에 판매하여 M60을 자체생산 하도록 만들었다. 내전 전 기간동안 미-소 해군은 기니만과 남대서양 일대에서 지속적인 신경전을 벌였으며 루안다 항에 소련의 킬로급 잠수함과 IRBM이 배치되었다. 다행인 점은 쿠바 미사일 위기로 인해 쓴 맛을 본 양국, 미국과 소련은 내전 확정 후 발발 직전 합의를 통하여 앙골라 내전을 아프리카 대륙 내로 확전하지 않기로 하였으며 앙골라에서의 손실은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을 것을 확인했다, 즉, 무제한적인 폭격과 물량전이 일어나도 미소 양국간의 그 어떠한 보복성 공격은 없다는 것을 확정했던 것.
6월 2일 개전 직후 UNITA는 모든 전선에서 압도적인 숙련도와 규모르 MPLA를 압살하며 북진하였으며 위에 나열된 다양한 기갑전력이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포위섬멸을 통하여 900대에 달하는 T55/T62를 개전 2주만에 노획하는데 성공한다. 미국의 F-4C와 A-7은 전 지역을 폭격하고 제공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소련은 자이르-수단 루트를 통하여 MPLA에 대량의 최신형 무기들과 무장된 추가 병력들을 급파하며 UNITA를 개전 4개월만에 공세종말점으로 끌어들이는 데에 성공한다. UNITA는 전술대로 공세종말점에 도달하자 기갑전력의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보급부대를 동원하여 각 부대들을 재보급하면서 포병전력과 미 공군을 이용하여 MPLA 전선에 확충되는 신병들에게 신선한 불바다를 선보이며 전투력을 약화시킨다.
소련의 추가 병력이 도착하여 소련군이 대략 6만명 가까이 집결하자 MPLA는 자이르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내륙지역, 목시코 주에서 기계화부대를 이용하여 대규모 반격을 개시한다. UNITA는 의도적으로 지뢰를 가득 매설한 밀림지역 뒤에서 기다렸고 BTR-50등을 동원한 소련군/앙골라 인민군 기계화부대는 포병/지뢰/공군의 공격에 당하며 큰 피해를 입으며 3천명의 사상자를 기록한다. 그럼에도 목시코의 거점인 루에나의 주변지역을 안정화하는데 성공하며 보급을 원활하게 만드는 성과가 있었다.
사빔비는 자원을 채굴한 돈으로 M60 생산공장 확충과 미국과 우방국에 역판매를 시작하며 자금을 확보하였고 그 자금은 포탄공장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전쟁 1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UNITA의 포탄 생산량은 전 세계 5위 수준이었고 이를 수출까지 시작했다. 사빔비는 수출하고도 남아도는 포탄을 모조리 M109를 비롯한 전선에 배치된 자주포들에게 공급하면서 전투중이 아님에도 지속적인 포격을 진행하도록 하였다. 이는 인민군들에겐 지옥도였으며 특히 탁 트여있던 해안가 사막지대 부대의 전투력은 극도로 떨어졌다. 또한 주요국가에 대한 자원수출로 UNITA가 정통정부임을 세계에 홍보하면서 외교전을 시작하였고 미국을 비롯한 32개의 서방국가는 앙골라를 정식적인 합법정부로 승인한다.
소련군과 앙골라 인민군은 포격만 받으며 전투력이 깎일 바엔 돌격을 실시하여 자주포 전력에 최대한 많은 피해를 입히기로 결정한다. 개전 1년이 되는 1966년 6월 2일, 인민군은 작전명 '타투'를[14] 실행, 콴자부터 목시코까지 모든 전선에서 T-64와 62를 앞세워 총공세를 시작하였으며 ISU-152와 실험적인 2S1 자주포들도 합세하여 포격을 시작하였다. 또한 MiG-21을 동원하여 고속폭격도 하는 등 모든 전선에서 MPLA가 진격하였다. 사빔비는 당시 MiG-21의 공습을 예상, 미제 호크 미사일과 다양한 지대공 미사일을 배치하였고 공세 직후 소련군은 30대가 넘는 MiG-21을 폭탄 한번 못 떨구고 잃었으며 도합 65대의 MiG-21을 손실한다. 지상은 상태가 나았는데 비에 지역의 3개의 UNITA 전차여단을 단독으로 한개 사단 혼자서 와해시키고 진군하는 상황도 생겼다. 사빔비는 F-4C와 A-7을 동원하여 전차들의 진군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소련 역시 S-125 페쵸라와 S-75 데스나를 배치, 팬텀기 10대, A-7을 30대 격추하며 미국/앙골라 공군에 큰 피해를 입힌다. 또한 이 시점에 최초의 공중전이 성사되는데, 4대의 앙골라 공군 소속 F-4C 팬텀기와 5대의 MiG-17, 7대의 MiG-21이 조우한 것이었다. F-4C는 AiM-9를 이용한 미사일 교전으로 3대의 MiG-21을 격추하고 도그파이팅을 통하여 2대의 MiG-21을 추가로 격추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MiG-17의 우월한 기동력으로 인하여 2대의 팬텀기를 손실하고 후퇴하였다. 전술적인 미제 기체의 승리였다. 한편 이 시기에 MPLA의 부서기장이던 올벵 호베르투가 전선시찰을 나갔다가 전사, 산투스의 신임을 얻은 내륙군 지도자 루시우 라라(Lúcio Lara)가 부서기장으로 임명된다.
양측은 큰 손실을 입었고 1966년 9월부터 1968년 11월까지 전쟁은 소강상태에 돌입한다. MPLA는 소련군의 훈련과 군사지원을 받으며 전력을 키웠으며 산업 육성사업도 본격적으로 개시하였다. UNITA는 저렴한 노동력과 공업 인프라를 바탕으로 미국의 부속 병기창으로 지정되어 전시라는 특성에 의하여 엄청난 규모의 군수품을 생산하고 NATO에 공급하였으며 그 대가로 미국은 공업기술을 대량으로 이전해주고 F-4C의 판매를 승인한다. 사빔비는 통제하고 있던 지역중 교전지역으로부터 70km 바깥에 위치한 모든 지역에 학교/병원/수도시설/아파트 건설을 시작하였으며 내륙지역의 1차산업 육성과 섬유/기계산업체를 해안가에 집중적으로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이 전쟁에서 인명 손실을 제외한다면 대외원조로 큰 적자를 입지 않았으며 그 주요 요인은 바로 UNITA의 경제성이었다. 군사하청생산과 노동력 제공은 미국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며 미국은 방위산업 공장들을 앙골라에 지으며 원가를 절감하는데 큰 효과를 보았다. 이 덕분에 군사적으로는 UNITA는 F-4C를 100대 추가도입, M60AN 앙골라 파생형 M60을 1000대 가량 도입하며 전력의 향상을 이루었고 M109는 200대 추가주문하여 MPLA에 지속적으로 포격을 날리며 MPLA의 전투력을 약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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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년 12월, 전력을 2배 가까이 증강하고 대지상공격교리까지 준비한 공군을 동원, UNITA는 해안 지역에 대공세를 벌인다. F-4C 80대를 순수하게 폭격용으로 이용하는 전술로 UNITA는 루안다 남쪽 인근 지역인 남콴자에 주둔중이던 MPLA를 사실상 전멸시켰으며 (70% 이상의 병력이 무력화) 공세 1개월만에 루안다 20km 앞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이후 와해된 전력이 재조직하여 UNITA에 대한 역공세를 진행하였고 유격대까지 동원하며 반도지형인 루안다의 포위를 막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노력하였으나 사실상 국지적인 저항 수준에서 무의미하게 마무리되었으며 UNITA는 루안다를 포위, 결국 포위 1주일만에 5만명에 달하는 루안다에 포위된 MPLA 병력들이 항복한다. 1969년 1월 14일의 일이었다. 이 시점에서 MPLA는 이미 전력의 50% 가량을 상실하며 사실상 패배가 확정되어버렸고 모든 전선에서 1명의 MPLA 병사가 2명의 UNITA 병사를 상대해야 했었다. 이러한 실패는 예견되었던 것으로 UNITA 지역의 1인당 GDP는 아르헨티나보다 살짝 아래였던 $1000 후반이었으나 MPLA 지역의 GDP/C는 $180으로 이집트/한국보다 조금 높았던 수치였다. 총생산 역시 당시 인구가 1.5배 가량 많던 MPLA보다도 UNITA가 압도적으로 높았으며 무엇보다도 MPLA 점령구역에는 원래 적었던 석유기반시설과 중/경공업 기반이 대규모 폭격으로 사라져버렸다.
한편 2차 대공세 당시 카빈다에서는 UNITA가 3만명의 기계화해병부대 훈련을 마무리 지었으며 자이르 주에 대한 상륙작전을 이미 구상한 뒤였다. 1969년 2월 3일, UNITA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10척 가량의 LHA와 민간수송선을 동원, 3만명의 돌파용 기계화해병부대, 3만명의 전차사단 그리고 무려 1만명에 달하는 보급지원부대를 소유(Soyo)라는 마을에 투입, 해안경비대 2백병의 저항을 제외하고 아무 저항도 없이 손쉽게 점령한다. 이후 차량화부대를 동원하여 하루만에 2000km²에 달하는 지역을 점령하였고 이후 남하하기 시작하면서 루안다에 배치된 북진하는 UNITA 선봉대와 만나기로 결정한다. 제2군 이라 명명된 민병대 10만명을 동원하여 진격을 막고자 MPLA는 저항하였으나 대인살상용 20mm 기관포를 장착한 A113-IFV에게 잔혹하게 학살 수준으로 패배당하며 저항은 분쇄되었다. 결국, 1969년 3월 2일, 벵구 주의 암브리즈라는 소도시에서 북부 상륙전력과 루안다에서 북상하던 두 전력은 접촉에 성공하였고 이를 통하여 MPLA는 해안 지대를 전부 상실하게 된다.
소련은 루안다가 쉽게 무너지자 이미 생산은 없고 경제적 손해만 비대하던 앙골라에서 철수를 고려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8일 뒤 호전파였던 브레즈네프가 암살당하자 최고회의와 후임 안드로포프는 철수를 결정, 6만명에 달하는 소련군 지상병력을 앙골라에서 한번에 빼내버리게 된다. 공군을 제외한 전력은 남지 않았으며 소련 해군 역시 쿠바와 무르만스크로 철수한다. UNITA는 작전명 레오파르두[15]라 불리우는 MPLA 소탕 작전을 가동, 내륙에 고립된 MPLA를 제거하기 시작한다. 소련의 지원이 없는 MPLA는 유류품이 부족하여 많은 수량의 전차를 유기하면서 후퇴하며 압도적인 화력의 UNITA 앞에서 큰 저항 없이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1970년 1월 1일에는 말란즈와 루에나 두 도시 모두 잃고 룬다 주에 처박혀 정글에서 참호전을 진행하는 신세가 된다. 또한 UNITA는 포격도발과 자이르의 유일한 해안지역인 키톰베를 무단점령하며 자이르에게 MPLA 지원을 멈추라는 무력협박을 보냈으며 이에 모부투 세세 세코는 MPLA의 탈출/보급로를 끊어버리고 키톰베를 반환받는다.
산투스의 지휘 아래 의미 없는 저항을 계속하던 MPLA는 UNITA를 정글로 끌어들이며 공세종말점으로 도달시켰으나 MPLA 자신들이 먼저 굶어 죽을 판이었다. 이에 루시우 라라, 앙골라 인민공화국 부서기장은 1970년 12월 5일, 산투스가 취침 중인 시점에 그를 납치 후 권력을 탈취, 최대한 저항을 이어가다 최초의 MPLA 아사자가 발생하자 이성적인 판단으로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오전 7시, UNITA에게 항복 의사를 타진하였으며, UNITA는 이를 받아들여 1971년 1월 1일 자정, 공식적인 종전을 새해에 선언하고 임시 공화인민정부를 수립한다.
앙골라 국가재건 임시공화정
1971년 1월 1일, 사빔비는 공화인민정부 내각을 꾸리며 UNITA의 정식 국가로서의 새출발을 준비하였다. 당시 MPLA 가 점거하고 있던 전 지역은 UNITA의 절멸수준의 포격으로 황폐화되어있던 상황이었고 남부 지역과 카빈다만이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 중이었다. 사빔비는 일단 당시 보유중이던 대량의 군사력을 절반 수준으로 감축하는 군축을 시작하며 국방비 지출과 인력을 군대에서 빼냈으며 또한 내각 수립 2주 후, 안드로포프와의 정상화담을 개최하고 소련과의 관계 역시 정상화된다.
당시 정상적으로 루안다가 수도로서 기능할 상태가 아닌 점을 감안, 사빔비는 루방구를 수도로 지정한다. 한편 미국과 서방권의 시선을 의식, 사빔비는 1인독재 체제를 도입하지 않기로 하였고 다당제는 아니지만 견제세력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여 양당제를 허용한다. 또한 UNITA 내부의 의원들의 충돌 역시 의도적으로 봉합하지 않고 최대한 다양한 의견을 듣기로 결정한다. 이는 튀르키예 건국 초기, 아타튀르크의 통치와 상당히 유사한 방식이었다.
어쨌든 종전 1년차에는 대도시들 대부분의 재건작업이 끝났으며 손상된 건물들은 전부 사빔비가 건축을 주도한 신식 아파트들로 대체하며 앙골라의 모습은 천천히 변해가기 시작했다. 내전 전까지 존재하는 부족사회는 전쟁으로 뿌리채 뽑혀나갔는데, 원시적인 삶을 영위하던 원주민들 포격과 폭격으로 삶의 터전이 완벽히 사라졌고, 사빔비의 이주 프로젝트에 동의하여 70%의 부족인구가 도시로 이동하여 파괴된 고향보다는 도심에서 살아가기로 결정한다.
1972년, 지질조사 중 앙골라 국토부 (MTI)[16]은 이미 석유가 나던 카빈다 지역을 넘어서 자이르에서 루안다까지를 비롯한 앙골라 북부에서 대량의 석유를 발견하였다. 총 석유 매장량은 백억 배럴이 넘어가는 수준이었고 이는 앙골라 경제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여졌다.
이후 석유를 세계에 공급하기 시작하며 앙골라는 국내 인프라 확충에 열을 올렸으며 이미 남부에 주로 포진해있던 중공업 기반을 북부 해안까지 확대건설하기 시작한다. 전시에 가동되었던 전차공장은 미국으로부터 라이선스를 받아온 자동차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소련의 경공업 부진 사례의 폐혜를 인지한 앙골라 정부는 섬유제조와 원단제조라는 무척이나 기초적인 산업부터 육성하기 시작하였다. 국토부 MTIT는 공업으로부터의 공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으는데 사빔비의 고향인 무낭구라는 마을이 전시에 사빔비도 인지하지 못하고 진행된 무분별한 자연개발로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결론적으로 후에 큰 도움이 될 선택이었다. 앙골라 정부는 자국을 불로소득 복지산유국으로 만드는 정책을 고려하던 힐베르토 라 크루즈 재무부장관을 경질하고 앙골라 경제자문협회 (ANAE)를 설립하고 국내 모든 경제학자들과 미국 경제학자들의 자문을 구하여 결론적으로 석유 증산은 순차적으로 진행하며 자국의 공업화를 추진하기로 결정한다. 산유국 국민들이 나태해지는 현상을 걱정했던 것.
또한 대한민국의 박정희 대통령을 사빔비가 직접 루안다에 초대하여 석유협정으로 한국에 석유를 소폭 낮은 가격에 제한없이 판매하는 협정을 체결한다. 박정희는 경부고속도로를 만든 경험을 바탕으로 1번 고속도로의 건설 자문을 돕고 당시 사빔비가 진행중이던 황폐화된 내륙을 녹지화하는 사업을 돕기로 결정한다. 이 덕분에 앙골라에는 식목일이 생겼으며 한국과 똑같이 4월 5일이 식목일이다. 이러한 외교적인 접촉으로 인해 한국-앙골라 관계는 한-미 관계에 필적할 정도로 크게 가까워지며 남북한 아프리카 외교전에서 한창 북한이 우위를 점할 때에 가봉과 함께 한국의 든든한 우방국이 되어주었다.
1차 유전 발견 사업을 진행했던 MTI의 후신인 MTIT는 남부에서의 텅스텐과 다이아몬드 광업을 위하여 남부와 내륙까지 포함한 2차 지질조사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그리고, 석유 발견의 가능성이 없을 것으로 여겨졌던 동남부 지역에서 놀랍게도 도합 1500억 배럴이 넘어가는 석유가 국토에 매장된 것을 확인하면서 앙골라의 경제는 역대급 청신호가 켜진다. 이러한 사실은 대외비로 부쳐져 사빔비와 MTI의 고위 책임자들, 최고 참모진 일부를 제외하고는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비공식적으로 앙골라는 세계 최대의 원유 매장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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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이집트가 욤 키푸르 당일인 10월 6일에 이스라엘을 침공화며 4차 중동전이 발발한다. 앙골라는 정통성 미확보와 정식 공화정부 미수립으로 아직까지 OPEC에 가입하지 않았던 상황이었고 석유 역시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가지 않았다. 또한, 추가로 발견된 1500억 배럴의 석유매장량은 미국 고위층과 앙골라 정부, 그리고 후에 설명하겠지만 소련 고위층만 아는 극비 사실중 하나였기에 OPEC 국가들은 앙골라의 체급을 무시하였으며 선제적인 외교관계 수립도 고려하지 않았다. 어쨌든, 당시 사우디를 비롯한 다양한 OPEC 회원국들은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지원하던 서방에게 철퇴를 후리기로 결정, 석유를 감산하게 된다. 이는 서방국가들에게 엄청난 경제적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사빔비는 숨겨둔 유전을 공개하기보다는 이미 생산하던 카빈다 유전의 증산이라고 외부에 알린 뒤, 새로 발견된 유전에서 뽑혀올린 많은 양의 석유를 당시 중동의 제제에 당한 캐나다/네덜란드 등의 국가에게 공급하였다. 이는 아랍 국가들이 앙골라를 적대시 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파동은 세계를 강타하긴 하였으나 감산과 가격 증가라는 카드를 쓴 국가들과 달리 앙골라는 충실한 서방의 유전으로 기능하였고, 서방국가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보여주게 되었으며 서방 기업들과 협력도 이때 시작된다. 또한 이 시점에 앙골라는 쏟아져 들어온 돈으로 포드 F-150과 세단들의 하청생산공장을 모사메드스에 유치하는데에 성공하였고 도요타로부터 내연기관 기술력 일부를 구입하면서 국가차원으로 차량/내연기관을 비롯한 중공업 개발을 시작한다.
앙골라 제2 공화국의 탄생
1974년 앙골라는 안정궤도에 접어들며 매년 7-8%에 달하는 고성장을 기록하며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였고 전국에는 사빔비가 주도한 계획경제 체제에 의거, 아파트, 학교, 병원등이 들어선다. 루안다는 다시 수도로써의 위상을 회복하였고 200m가 넘는 유리 마천루들은 대도시들 곳곳에 생기기 시작하였다. 조나스 사빔비는 이에 국가재건 공화임시정부에서 진정한 의미의 제2공화국을 설립하기로 결정하였고 1975년, 신헌법 제정과 부패개혁으로 '앙골라 공화국' 이 탄생하며 임시정부는 소멸하고 정식적으로 정부가 출범한다. 북한과 팔레스타인같은 일부 국가들을 제외한 모든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면서 수출량도 크게 늘었으며 이 시기에 인민공화국 시절에 사용하던 국장과 UNITA의 당기이던 국기 역시 현대적인 것으로 교체한다.
80년이 되기 전까지 앙골라는 석유 수출을 통하여 얻은 재화로 화학공업과 기본적인 소비재를 생산하는 경공업 공장을 확충하였으며 이 시기에 2백만명 가량의 이민자들을 아프리카 전역에서 데려온다. 이들은 특히 저임금이라는 장점 덕에 서방이 세운 하청공장에서 고용되어 일하기 시작하였으며 나이지리아를 비롯하여 내전에 휘말린 조국을 두고 앙골라로 이주하여 노동하는 사람들이 증가한다.
1978년에는 MTIT 산하 자동차 생산기업인 FVE의 연구개발 성과로 T22 내연기관이라는 서방권의 표준보다 높은 수준의 효율을 가진 내연기관을 자체생산하였고 FVE는 자국의 차량을 해외로 판매 시도하였으나 타국은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앙골라 내의 산업화 진행과 함께 FVE 생산 화물 운송차량들은 앙골라 전역에 판매되며 빠른 시간 내에 앙골라 산업표준으로 자리잡았다.
한편 미국 방산업계는 전쟁 이후에도 앙골라에 공장을 더 확충하였고,[17] 사빔비는 미국으로부터 F-14 전투기, M1 전차, LVT-7를 포함한 차량화·기계화장비 생산공장의 유치를 따냈으며 또한 우방국 혜택으로 F-14 120대 수입과 180대 라이선스 생산까지 허가받았고 1980년 초까지 F-14를 200대 이상 전력화한다. M1은 2000대 가량을 운용하며 세계 2위의 M1 운용국이 되었으며 모든 M/A113을 자국에서 생산한 LVT-7 장갑증강형으로 대체하면서 군사력도 10년만에 세계 7위로 크게 상승한다.
앙골라 정부는 문맹을 해결하기 위하여 공격적으로 포르투갈어와 국제 공용어의 지위를 가진 영어에 대한 언어 교육을 통한 문맹 퇴치 사업을 진행하였다. 이를 통하여 70년대 후반, 앙골라의 문해율은 95%를 달성하며 단기간에 아프리카 국가 중 국민들의 문해력이 가장 높은 나라로 올라선다.
또한 내전 이후부터 각 지자체에서 진행되던 전체 성인 인구의 75%나 되는 대학 교육 미이수자들에 대한 야간학교 사업을 국립 교육부가 직접 운영하는 전국민 대상 국립중등·고등 교육 향상 사업으로 확대하여 앙골라 대학교 시스템을 세워 앙골라 연방대학교(AFU)와 앙골라 공과대학교 (AIT)를 설립하였다. 이들은 이후 80년대 앙골라의 경제와 함께 실적이 급성장하며 앙골라를 넘어서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최상의 교육기관으로 탈바꿈한다. 또한, 고등교육 이수자들 중 우등생들을 대상으로 국가가 서구권으로 해외유학까지 보내주었다.
이 시기부터는 고등교육을 이수하려는 의지가 있는 인구의 양과 질을 높이기 위해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을 의무화하는 특별법안을 제정하고 사업장에서의 아동노동을 군경까지 동원하며 철저하게 단속하였으며 중등교육을 받는 학생들 중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의무적으로 평일 하루에 최소 10시간의 학습량과 1시간의 체육활동을 요구하며 매년 시행하던 지능검사의 결과는 해가 갈수록 높아졌다. 이러한 교육정책은 싱가포르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며 실제로 사빔비는 70년대 중반에 싱가포르 국빈방문을 5번이나 할 정도로 리콴유와의 접촉이 많았다. [18]
하지만 위에 언급된 발전의 그림자도 만만지 않았는데, 이촌향도 현상으로 도시에 몰리는 빈민들과 법을 뛰어넘고 가업이나 의지가 없어 학업을 포기한 청년들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던 공업지대 사업가들의 조직폭력단으로 고용되어 경쟁 사업자간의 전쟁을 벌이거나 마약을 유통하는 갱단이 되어버렸던 것. 특히 내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총기류와 중화기, 심지어는 기계화장비까지 앙골라에 돌아다녔으며 심심했다 하면 대도시 외곽의 공업지대에서는 폭발음이 들렸다. 수도였던 루안다, 최대도시인 루방구, 공업도시였던 로비투-벵겔라 지역과 우암부는 이러한 현상으로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까지 엄청나게 치안이 악화되었으며 특히 앙골라 최대의 공업회서였던 벨라스 공업사(CIB)를 상대로 경쟁하던 신생 중소 공업사 연맹(MSIC)[19]이 전차까지 끌고 와서 CIB를 포격으로 공격하며 근 10년간 공장 전쟁이라 불리우는 폭력사태가 진행되었다.
정점은 1979년 1월부터 위 4개 광역권에서 동시에 발발한 중기계 전쟁인데, 이 폭력사태에서는 CIB와 MSIC, 그리고 MSIC를 진압하려던 각 도시별 전투경찰들이 얽혀 화력전을 지속하게 되었고 앙골라 정부는 이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당시 아프리카 내 군사개입에 집중하던 앙골라 공화국군을 소집하여 MSIC를 진압하기 위해 투입했으며 결국 9월에는 MSIC 소속 24개 기업들 중 18개 기업들의 생산시설을 정부군이 완전히 점거하였고 24명의 경영자들을 전부 체포하여 말란즈에 위치한 앙골라 안보정보국(NDSI)의 본부로 보내어 심문하였다. 이 사태를 진압한 이후에도 앙골라 정부는 치안 개선을 명목으로 계엄령을 해제하지 않고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 남은 조직폭력단들과 갱단을 토벌하여 1980년 중순에야 범죄와의 전쟁의 종식을 발표하여 계엄령을 해제한다.
70년대 말이 되자, 경제, 인간개발, 부패, 민주주의 부분 지표가 70년대 초에 비해 크게 개선되었다. 또한 1979년, 팔라비 왕조의 붕괴와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탄생으로 제2 오일쇼크가 터지자 79년 경제성장률은 IMF가 예측한 7-8%를 훌쩍 넘은 13%를 기록하였으며 1980년이 되자 앙골라의 1인당 소득은 유럽 평균의 절반을 넘어섰고 GDP (PPP)/C의 수치는 유럽의 45%를 넘는다. 이미 이 시점에서 아프리카 최강의 국가 타이틀을 이집트로부터 따냈다는 평가가 주류였으나 아직까지는 서방으로부터 큰 관심을 받지 못 한다.
앙골라의 외교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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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는 냉전이 한창 고조되던 시기였고 앙골라는 미국의 부하이자 동맹으로써 미국의 요청으로 세계 각국의 분쟁에 개입하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남아공 국경전이었다. 남아공이 내전에서 UNITA를 지원한것과는 반대로 사빔비는 인종탄압을 자행하는 남아공 정부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으며 언젠가는 군사력을 키워 남아공과의 전면전을 계획하였다. 미국 역시 아프리카 최대의 골칫덩어리인 남아공 정권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앙골라 정부와 지속적으로 침공계획을 조율한다. 결국, 1978년 3월, 당시 반두스탄 설립과 극심해지는 흑인 탄압으로 앙골라 내부로 넘어오는 나미비아계 주민들이 많아지자 이를 빌미로 사빔비는 앙골라군 전체 30만 중 10만의 병력을 동원, 일부 병력으로 나미비아의 카프리비 회랑의 서쪽을 점령하여 약 2000명의 남아공군을 포위하였고 이에 남아공이 항의하자 오히려 군사력을 동원, 2000명 전부를 포위하여 포로로 잡아서 앙골라로 이송해버리면서 본격적인 국경전이 시작된다. 남아공은 올리판트 전차 500대와 라텔 1000대로 이루어진 30000명의 기계화병력, 그리고 1만 명에 달하는 보급부대를 동원하여 모사메드스로 진격하여 사막에서의 기갑전을 유도 하였으나 개전 직전에 직도입한 앙골라 공군 소속 F-14D와 F-4E의 압도적인 제공권 장악과 폭격으로 기갑전력의 30%가 육상전 없이 산화, 앙골라는 이후 당시 신무기였던 M1 전차 단 100대를 동원하여 남은 올리판트 전차 300대 중 절반인 154대를 한 대의 M1 손실도 없이 격파시켜 남아공군의 주력을 와해한 뒤 내륙으로 남하하기 시작한다. 해상에서는 앙골라가 라이선스 생산으로 직접 건조한 키드급 5척, 올리버 해저드 패리급 10척을 동원, 월비스 베이와 뤼데리츠 항을 봉쇄하여 해상보급을 막고 케이프타운 주변 해역 역시 제해권을 장악하여 남아공의 무역을 막았으며 C13, B1 고속도로를 비롯한 4개의 나미비아행 보급로를 주기적으로 폭격하며 남아공군을 굶기기 시작한다. 공세가 내륙으로 집중되자 남아공군은 방어를 위해 내륙으로 결집하였으나 후방이었던 나미비아 최대도시인 빈트훅이 공수작전을 통하여 투하된 A113[20]을 동원한 1000명 가량의 공수연대에게 점령당하며 퇴로까지 막히게 되었고 결국 앙골라군의 포위로 인하여 자국이 가진 30%의 전력이 포로로 잡혔다. 이후 남아공은 앙골라와 진행한 블룸폰테인 협상의 타결로 나미비아에서 완전 철수 및 나미비아 재건 비용을 부담하게 되었으며 개전 2개월만에 전면전으로 확대된 국경전은 앙골라의 압도적인 승리로 돌아간다. 이후 앙골라는 나미비아 임시통치기구를 1년 유지 후 1979년 5월, 정확히 승전기념일에 나미비아를 독립시키고 ANFN (Angolan Forces Namibia), 나미비아 주둔 앙골라군을 창설, 빈트후크와 월비스 베이에 군 기지를 소유하고 비행장을 이용하며, 지속적으로 남아공을 견제한다. 전쟁 직후 몇년간은 나미비아-남아공 국경에 전투부대를 전진배치하였으며 앙골라 안보정보국(NDSI)는 남아공에서 ANC의 활동을 지원해준다. 전후, 당시 아파르트헤이트로 인하여 백인들만을 공권력에 투입 불가능했던 상황이었던 남아공군은 30%의 백인 군대가 사라지자 치안유지병력도 부족해질 정도였고 이를 파악한 ANC 등의 저항운동층은 앙골라나 당시 신생국가였던 짐바브웨의 적극적인 무장지원으로 북부에서 산발적인 게릴라전을 시작하였고, 케이프타운이나 프리토리아 등 대도시에서 총기난사, 폭탄테러, 납치극의 빈도가 1980-81년동안 250% 증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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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에티오피아는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의 공산독재 체제 아래 굴러갔으며 소련의 비호 아래 있었다. 한편, 소말리아 역시 공산국가로 소련의 비호를 받는 상황이었다. 소말리아의 쿠데타로 집권한 지도자인 시아드 바레는 '범소말리아주의'를 내세우며 당시 소말리인이 대거 거주하던 에티오피아의 면적 1/4 을 차지하던 오가덴을 탈환하고자 1977년, 에티오피아를 침공한다. 사빔비는 사태가 터지자 마자 바로 움직인다. 당시 소말리아가 대부분의 오가덴 지역을 점령했음에도 소련은 에티오피아를 지원하자 앙골라는 당시 주도권을 잃은 소말리아의 지도자 바레에게 앙골라군 파병을 제안, 이후 바레가 사빔비를 극진히 예우하며 이를 승락하였으며 77년 11월, 앙골라 공군 소속 F-14 50대와 이후 남아공에서 승전할 100대의 M1으로 구성된 전차연대를 소말리아에 파병한다. 또한 공산국가를 지원한다는 이념적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자국 기업들의 사무소와 무역거점을 소말리아에 설립하였으며 바레는 이 사건을 계기로 중도-친미 성향을 보이게 되며 앙골라에게 주둔지를 제공한다. 어쨌든 앙골라군은 하르게이사를 보급거점으로 지속적인 디레다와에 대한 공세를 진행하였으며 결국 1978년이 되기 직전인 77년 12월 15일, 디레다와와 하라르는 함락되었고 당시 소말리아 역시 공세종말점에 도달했기에 결국 돌로-발룸발 선을 신국경선으로 설정하여 오가덴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 소말리아의 사실상 승리로 끝난다. 집권기반을 강화한 바레는 당시 망가진 소말리의 경제를 앙골라와 미국의 도움을 받아 안정권으로 만들고 모가디슈는 무역항으로 발전하며 80년대 초반에 고성장세를 보인다.
사빔비는 데탕트로 인하여 개선되는 미-소 관계를 등한시하지 않았고 앞서 설명했듯이 내전 종전 단 2주만에 소련과의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며 오히려 다른 공산/중립국들보다 소련과 훨씬 일찍 수교한다. 양측은 모두 OPEC에 가입되어있지 않았으며 OPEC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두 국가는 자국의 석유 매장량이 상당하다는 점을 들어 OPEC의 석유 무기화를 견제하고 중동 국가들의 부상을 방지하기 위하여 비밀 기구인 '석유 자유화를 위한 국제기구' 를 설립, 미국과 접선하여 미국을 가입시키면서 중동과 다른 산유국들의 패권국가화를 견제한다. 미국-소련이 협력관계를 형성하는 최초의 사건이기도 한데 이를 앙골라가 중재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기구이다. 앙골라는 아프리카 내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나미비아를 독립시키고 남아고 내전을 유도한다. 또한 소말리아를 친서방국가화했으며 잠비아, 콩고민주공화국을 비롯한 각종 국가들에 민주화 시위를 지원하고 내전에 개입하며 주변국의 막장화를 방지한다. 이러한 정책은 아프리카의 수호자 (Guardião da áfrica)로 불렸다.[21] NATO 국가들과도 지속적으로 관계를 개선하며 무기수출을 시작한다.
1980년대
앙골라는 이미 1980년, 아프리카 내에서는 최대의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지역강국이었으나 경제규모로는 세계 10위 수준이었으며 인당소득 역시 유럽의 60%, 군사력은 세계 7위 수준이었고 강대국의 필수조건인 비대칭전력 역시 전무했다. 그럼에도 개도국 이라는 특성과 석유채굴, 그리고 빠른 속도로 커지는 공업력과 함께 7-8%라는 고성장세를 유지하며 많은 이들의 삶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미 건국 직후에 비해서 몆십배 가량 경제규모가 커져있던 상태였고 응골라의 기적이라는 표현도 이미 쓰여지고 있었다. 또한 당시 양당제라고 하였으나 사실상 일당 권위민주주의 체제로 돌아가던 정치판 역시 UNITA의 정치계 자유화와 노조법의 제정으로 사회민주주의 파벌 역시 힘을 얻기 시작했다.
1971년에 앙골라의 국영공장(앙골라 재무부펀드 지분 95%)으로 시작된 기업인 FVE (Fábrica de veículos estatais)는 오일쇼크 당시 정부의 대규모 투자로 F-150의 라이선스 생산과 토요타의 내연기관 기술을 구입하여 고연비차량의 개발을 시작했으며 78년에 미제 내연기관보다 출력은 낮지만 연비가 2배 이상 향상된 T22 엔진을 개발하였으며 2차 오일쇼크가 터졌을 때에 T22-M이라는 향상된 내연기관을 장착한 FVESE (세단)을 유럽에 판매하기 시작하며 자동차산업에도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다. 미국의 M1 하청공장, 자국산 M1AG 라이선스 생산공장에서 M1을 생산하였고 M1AG는 K1 실전배치 전에 한국에서 500대를 수입하기도 하였다. 또한 F-14나 C-130을 생산한 기술을 기반으로 민간항공기업인 (국토부 MTIT 지분 40%) 아비앙골라(이름답게 아비브라스의 협력기업이었다)를 설립하여 소형 여객기인 AO-330부터 생산하기 시작한다.
1980년 3월, 사빔비는 1980년 엑스포를 루방구에서 개최하며 자국의 성장과 산업화를 세계에 홍보한다. 특히 이 시기에 고연비차량을 생산하던 FVE 차량수입계약을 70개국으로부터 따내며 자동차산업에 청신호가 켜지는 등 앙골라 역사에 큰 의미가 있던 시기였다. 하지만 세계를 뒤흔들고 앙골라를 송두리채 바꿔버릴 사태는 따로 있었다. 이 엑스포에 참가했던 루홀라 호메이니의 경호원단과 앙골라에 있던 후세인을 추종하던 이라크계 세속주의자의들이 박람회 진행중이었던 밤에 패싸움을 벌이는 사건이 터졌고 정오가 지나자 다른 아랍권 국가들의 경호원들까지 각자의 편에 가담하여 패싸움에 가담하는 국제적인 사건이 일어나며 이란 혁명 이후 이라크와 이란의 관계가 심상치 않음을 보여주었던 것.
이에 앙골라는 NDSI를 통해 사담 후세인이 8-9월 즈음에 이란을 침공한다는 첩보를 받았다. 세계 최대의 산유국들간의 전쟁이 3차 오일쇼크의 도화선이 될 것이라 판단한 경제부는 공공사업을 임시중단하면서까지 단기간에 자국의 산업역량을 최대치로 원유사업에 투자, 4개월동안 보유중이던 유전/유류저장고를 3배 이상 늘리고 석유를 5배 이상 증산하여 8월이 되기 전 유류저장고를 최대치로 채워놓는다.
결국, ANI의 예측대로 9월 22에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한다. 유가는 급상승하였으며 특히 7일 뒤인 9월 29일에는 하페즈 알아사드의 명령으로[22] 시리아가 쿠르드족과 함께 모술을 비롯한 이라크 북부에 진공하며 전쟁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전쟁 전부터 미국에 국빈방문이 계획되어 있던 사빔비는 9월 초반에 이미 전쟁 시작일을 22일로 정확히 예측하고 당시 미합중국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를 만나러 자국시간 기준 21일 출발하였고 개전 4시간 전인 10시까지 회담을 진행하였으며 이때 이미 사빔비는 카터와 함께 다음 날 벌어질 전쟁에 대한 논의까지 마친 상태였다. 역시나 다음 날 위의 설명대로 이라크의 이란에 대한 선제공격으로 전쟁이 발발하였고 사빔비와 카터는 그날 아침, 같은 색상의 정장을 입고 너란히 서서 개전에 대한 공동성명을 발표하였고 기자회견을 동시에 진행한다. 이는 성장한 앙골라의 외교적 지위와 미국관의 우호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TIME지에서 1980년의 사진으로 선정될만큼 의미깊은 사건이었다. 성명 직후 카터는 급상승하는 원유 가격에 앙골라와의 관계도 고려하여 앙골라의 시장진출을 허가하고 앙골라산 석유를 대량수입하여 자국 정유고를 채우며 경제적 충격에 대비한다. FVE는 바로 5일만에 이미 물밑작업을 끝낸 상태로 FVE-US 법인을 설립하였다. 앙골라 내의 FVE 납품지연도 용인하며 FVE는 무려 5만대의 차량주문을 단 1개월만에 소화하면서 입지를 크게 늘린다. 앙골라의 차량공업이 미국을 덮어버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시리아-쿠르드-이란 vs 이라크 구도로 흘러가던 그나마 단순했던 이란-이라크전은 이후 한눈팔던 시리아를 이스라엘이 공격하면서 시작된다. 이스라엘이 골란을 넘어 다마스쿠스로 진격하자 시리아가 함락될 시 단독전을 이어갈 위험이 있던 이란은 이스라엘에 의하여 전국토가 파괴되어 반유대주의가 극에 달하던 레바논이 이란 편으로 참전하도록 회유에 성공하였고, 이후 10월 1일에 파병 이란군 3만명, 레바논군 2만명이 하이파로 진격하면서 가나안에 전쟁의 불길이 번지게 된다.
당시 이스라엘과의 공존과 평화를 주장하던 팔레스타인 파타당의 야세르 아라파트는 호전파들이 참전을 위해 강제로 그를 탄핵시키며 권력을 잃었고 강경파가 권력을 잡으면서 팔레스타인은 10월 5일, 예루살렘에서 전투를 시작하였고 나블루스에서 베르셰바로 미사일을 발사한다.
당시 이스라엘과의 평화를 주장하던 안와르 사다트는 이 전쟁으로 자신의 입지가 약해질 것을 우려, 4차 중동전 때의 강경노선을 다시 채택하여 10월 9일, 네게브로 30만명의 병력과 500대의 지상공격기/전투기를 진격시키며 이스라엘에 총공세를 가한다.
이러한 난장판에서 사우디는 아직 정치적 중립을 유지중이었으나 이란의 승리와 시아파의 준동을 우려한 수니파 지도부는 이라크를 지원하기 위해 참전을 결정, 10월 15일, 이란을 공격한다. UAE, 카타르는 이란의 미사일 오폭 사건으로 사우디와 함께 이란에 대항하기 위해 참전한다.
단 3주만에 벌어진 참전 릴레이로 전 중동은 1차대전을 연상케 하는 포화 속으로 빠져들었으며 전쟁에서 안전했던 국가는 요르단과 오만, 그리고 북/남예멘밖에 없었다. 이 사태로 요르단과 오만은 대규모로 피난민들을 수용하고 반사이익을 누렸다.
한편 미국은 시리아를 지지하던 소련과 타협하며 간접적인 자본 제공과 무기지원만을 합의하여 참전하지 않게 된다.
결국 일련의 일로 세계 최대의 유전의 기능이 사실상 통째로 증발하자 전 세계는 대공황의 2배에 달하는 일시적 경제적인 충격을 받았고 단 한번의 충격파로 각국의 최대기업들이 도산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대표적으로 인도의 타타그룹이 파산하였으며 아람코는 리야드가 공습당하며 본사가 폭격당하며 사실상 기업이 없어졌고 휘청거리던 동독의 트라반트는 소련의 KamaZ가 인수하였으며[23] 폭스바겐/벤츠/바이엘 등등 다양한 공업기업들도 도산한다.
이러한 경제혼란에 앙골라는 남동부에 위치한 1500억 배럴 규모 유전의 존재를 11월에 공개, 대규모 증산과 석유 무제한 수출을 발표하여 세계적인 오일쇼크를 발표 하루만에 크게 완화한다. 이후 석유 자유화를 위한 국제기구 (앙골라·미국·소련·베네수엘라·브라질) 5개국은 공동 성명을 통해 다같이 석유 증산에 나섰다. 하지만 5개국은 '자유화' 라는 명칭과 달리 자국의 이윤 추구와 패권 확보를 위하여 증산을 무제한적으로 하지 않고 유럽 기업들이 오일쇼크로 충분히 도산할 만한 수준으로 유가를 유지한다. 이 때문에 르노를 추가로 더 많은 다양한 유럽계 중공업 기업들이 무너졌으며 중국의 개혁개방정책도 크게 타격받는다. 한국은 앙골라와의 협정으로 정상유가대로 기름을 공급받으며 안정적인 성장세를 유지하였고 그 대가로 앙골라에 금성/삼성 의 공장을 유치한다. 이 덕분에 한국은 80년대 대규모 공황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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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증산해도 전쟁 전과 비슷한 생산량으로 현상유지를 하던 미국·소련·베네수엘라·브라질과는 달리 앙골라는 기존의 고성장세에 유류수출 수요로 자본유입량이 극대화되었으며 1980-1981년 GDP 성장률이 32%대라는 극빈국에서나 나올 수치를 보여주며 폭주를 시작한다. 재화가 앙골라 정부로 유입되는 가운데, 앙골라는 계획경제체제를 유지중이었기 때문에 투기나 과소비 문제를 억제시킬 권력이 행정부에 있었고 많은 돈이 구식 인프라를 최신형으로 바꾸고 고속철도사업, 경제지구 건설, 반도체와 중공업 팽창 그리고 이민자들을 대규모로 받아들일때의 지원금으로 투입되었다. 이러한 재화 소모 정책 덕분에 80년대 초중반, 5차 중동전 기간동안 앙골라의 인플레이션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또한 앙골라는 중동전에 인도와 파키스탄까지 엮이면서 카슈미르 지역에서 몇십만명이 죽는 아자드 분쟁이 발발하자 M109 등 대량의 무기들을 생산하여 서아시아 양측에 팔아넘기기 시작하였고 이때 사우디아라비아와도 무기현물거래를 통하여 전쟁으로 완전히 인프라가 파괴된 아람코의 지분 80%를 획득하며 사우디의 유전지역 땅을 챙기는데 성공한다. 이러한 딜이 있었던 배경으로는 이미 사우디의 유전지역인 담맘과 수도인 리야드, 심지어 사막 넘어 헤자즈의 메디나 일부까지 이란 혁명수비대에게 점거당한 상태였고 메카 코앞에서 공방전이 벌어지던 상황에서 알사우드 왕가는 차라리 망한 아람코 지분을 처분하고 무기를 수급받아 반전의 기회를 노리기로 생각했고 앙골라는 사우디를 성공적으로 방어하여 아람코의 가치를 재생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앙골라는 거래의 대가로 10만이 넘는 병력이 운용하는 1000대가량의 M109, 1500대의 M1전차와 이를 운용할 아프리카에서 모집한 아랍어 사용이 가능한 용병 전차병, 그리고 100대의 F-14와 파일럿들을 지원하며 사우디가 어떻게든 버티도록 하였다. 또한 메카와 항구도시인 제다에 대량의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설치하여 방공체계를 강화하여 사우디가 버틸 수 있도록 도왔다. 이후 이라크가 쿠르드-시리아-이란 3자동맹을 상대로 성공적으로 모술을 사수하며 전쟁이 수니파에게 유리하게 흘렀고, 앙골라가 파병한 공세군들이 타브리즈와 아바스를 점령하며 이란의 패색이 더 짙어졌다. 결국 이란은 기습적으로 진행된 3만명 규모의 공수기계화부대에 의해 무방비하게 테헤란을 점령당한다.
87년, 몰타 협정으로 이란-이라크 양측이 정전에 합의하며 이란의 패배와 정권교체로 전쟁이 잦아들고 팔레스타인이 엄청난 피해 끝에 네게브와 에일라트를 점령하고 예루살렘 절반을 확보한 뒤 이스라엘과 종전에 합의하여 5차 중동전이 끝났다. 카이로, 텔아비브, 다마스쿠스, 바그다드, 테헤란, 베이루트, 리야드, 아부다비, 도하 등등 중동국가들의 수도는 모조리 폐허가 되었으며 유럽의 경제는 크게 침체되었다.
전쟁 기간동안 앙골라는 대표적인 실적으로 폭스바겐을 인수, 자국의 공업기반을 제외한 아프리카 전역의 공업시설 95%, 자원 채굴권 70%를 MTIT가 매입 및 확장, 사우디 국가채권의 40%를 확보, 총 5억 달러의 무기를 수출 그리고 80%의 아람코 지분을 소유하며 MTIT가 아람코의 모기업이 되었으며 중동전이 정리된 1987년, 앙골라의 경제력은 1980년의 2.5배에 달해있었고 세계은행 추정 1995년, 일본의 경제력을 추월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OPEC의 우두머리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앙골라에게 유전을 넘기게 되면서 OPEC의 존재는 유명무실화되었으며 전쟁 전 아랍 경제력의 70%가 사라지며 중동은 초토화되었다. 또한 아프리카 내 공업기반과 자원 채굴권의 대부분이 MTIT를 비롯한 앙골라 국영기업들의 자본에 잠식되게 되면서 앙골라는 아프리카 전역을 자국의 경제거점으로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이 시기에 대규모의 아프리카인들이 앙골라 내로 유입된다. 앙골라는 이 시점, GDP로 모든 유럽국가들을 압도하였고 일본을 추월할 기세로 성장하며 세계 3위의 경제력을 보유하게 되었으며 이에 비례하게 군사력 역시 미국, 소련, 중화인민공화국 다음으로 강력하게 성장했다.
한편 군사·경제적 패권을 앙골라는 종전 직후 7일만에 이미 개발이 진행되었던 자국산 열핵탄두 실험을 나미브 사막에서 진행하였고 결국 핵보유국이 된다. 미국은 형식적인 제재를 단 2주간 지속하며 이를 용인하였고 소련 역시 앙골라의 핵개발에 대외적인 입장표명을 거부하며 묵인해준다.
한편 유럽의 경제가 엄청난 타격으로 무너지자 프랑스와 영국, 두 UNSC (UN 안보리) 상임이사국은 패권을 유지할 힘이 없다고 판단, 상임이사국 지위를 세계 국가들의 압력으로 포기하였으며 당장 핵보유국에 세계 경제력 3위라는 타이틀을 얻은 앙골라는 엄청난 경제적 성장을 겪은 일본과 함께 상임이사국 가입을 시도, 중화인민공화국의 투표 기권과 소련/미국 그리고 앙골라 정부의 로비를 받은 비상임이사국들이 만장일치로 찬성하게 되면서 1988년, 앙골라는 UNSC 상임이사국이 된다.[24]
1990년대
제 5차 대중동전쟁 종전 이후에도 1세계, 2세계 유럽과 아시아의 경제는 초토화된채 방치되었으며 다수의 기업들이 파산 직전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이에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결속력 약화에 위협을 느껴 개혁·개방을 추진하던 소련 정권은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경제적 중계자를 통하여 잠정적 자본주의 요소 도입을 통하여 개방에 더 박차를 가했다. 1990년 1월, 소련은 이러한 개방 과정에서 미국과의 마찰을 줄이고 경제적 협력을 도모하기 위하여 모스크바에서 미국과의 협력을 합의하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하기로 결정, 2월 17일에 모스크바의 크렘린에서 미국 대통령 조지 H.W. 부시와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모스크바 회담을 통해 모스크바 성명에 서명, 이 기점으로 냉전이 단계적으로 끝나게 된다.
현재
- ↑ 영어로는 'Quota'. 할당제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 ↑ 아직 포르투갈 내에 많은 왕당파들이 남아있었기에 쉽사리 국왕을 명목상 지도자로 내세운 앙골라 지역을 침공할 수 없었다.
- ↑ 자치령은 명목상 무너지지 않은 포르투갈 브라간사사셰코부르크구고타 왕정이 통치하는 영토였기에 자치령기는 왕국의 깃발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휘장은 1319년 설립되어 포르투갈 그리스도교의 상징으로 활용되던 포르투갈 그리스도교기사단의 십자가를 사용했다. 포르투갈 공화파들은 이 상징과 관련된 수훈들을 폐지한다.
- ↑ 앙골라의 승리. 남아프리카 연방은 남서아프리카 위임통치령에 군사력을 주둔시키는 것을 금지당하였고 앙골라군이 남서아프리카에 상시 주둔하게 되었다. 자원 채굴권, 조업권 등 역시 앙골라가 강탈해간다.
- ↑ 앙골라의 압도적 승리. 앙골라 측이 일방적으로 대서양을 건너와 어획을 진행하면서 브라질의 어업이 타격을 받으며 분쟁이 발발, 브라질 측이 강경하게 일부 앙골라측 선적을 나포하며 분쟁이 심화되었다. 이후 브라질 해군과 앙골라 해군이 직접 무력충돌했고 그 결과 중순양함을 포함 브라질의 주력함대가 궤멸당했다. 브라질은 영해를 12해리로 설정하고 그 바깥에서의 앙골라 선적들의 조업을 허가하게 되었으며 앙골라는 남대서양 전역에서 엄청난 규모의 어획을 타국의 견제 없이 진행한다.
- ↑ 영프는 남대서양에 파견 가능한 함선이 제한되어 있었고 결국 앙골라의 지속적인 압박 끝에 영프는 자국 식민지들의 해안선 12해리 바깥에서 앙골라의 조업을 허가하게 된다.
- ↑ 포르투갈군의 모든 국가적 활동은 루안다 주변 설정 구역에 한해서만 허가된다는 것이 조약의 핵심이었다.
- ↑ 현재 이 건물은 앙골라 대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 포르투갈과 미국 언론사에서 낸 결과
- ↑ 소련 제13육군군단 소속 제60 전차사단, 제4 근위전차사단, 두 사단 모두 비교적 안전한 후방이었던 모스크바에서 파병되었다.
- ↑ 소련도 명목상으론 법치국가였으며 특히 흐루쇼프는 권위주의 이미지를 희석하기 위해 노력중이었다.
- ↑ 원래 MPLA의 지도자였으나 자신이 지목한 총통 후보자 산투스의 부정선거로 인해 UNITA 측으로 망명, 이후 사빔비에 의하여 내무부/재무부장관에 임명된다. 이는 MPLA의 정통성에 큰 손상을 입혔으며 50만 수준이던 MPLA 병사들의 많은 비중이 비무장을 진행하고 UNITA로 망명, 또는 UNITA에 관할구를 넘기고 편입되는 등 네투의 영향력은 사빔비에 필적하였다. 이후 사빔비가 앙골라를 부국으로 만들면서 네투의 선택은 옳았다는 것이 증명된다.
- ↑ 원래 60만이 넘어가던 병력이 안토니우 네투의 UNITA 망명으로 많은 MPLA 병력들이 자발적으로 무장해제후 UNITA에 참가하거나 직접 병력을 이끌고 UNITA에게 관할구를 넘겨버리면서 병력의 1/4이 증발한다.
- ↑ 아르마딜로의 포르투갈어 이름
- ↑ 표범
- ↑ 국토교통부 (MTIT)의 전신
- ↑ 이익을 증대하기 위해 아래 설명할 공장 전쟁의 양쪽 파벌에 무기를 판매하였다
- ↑ 이러한 사회 풍조 때문인지 자살률이 크게 증가했었으며 학업을 포기한 학생들이 갱단을 형성하게 되며 도시 치안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 ↑ 전쟁 이후 도시로 몰렸던 일부 지역 자본가들이 세운 중소 공업사들 24개가 연합해서 만든 무장단체
- ↑ M113을 IFV로 개조한 차량
- ↑ 당연하게도 내정개입이라는 비판을 밥먹듯이 듣는 상황이다. 물론 미국의 먼로 독트린의 결과물과는 달리 앙골라가 지원한 국가들의 막장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 ↑ 당시 시리아 바트당과 이라크 바트당의 불화는 최악 수준이었다.
- ↑ 1980년 데탕트로 트라반트와 카마즈는 다치아와 함께 세계시장에 진출한 3개의 코메콘 소속 차량기업이었다.
- ↑ 미국·소련·중화인민공화국·앙골라·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