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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풍}}[[ | {{서풍/분류|서풍|서풍/사건}} | ||
{{서풍}}<div class="WW-bg" style="position:fixed;top:0px;left:0px;width:100%;height:100vh;">[[파일:WW BG 3 BROKEN .png|link=]]</div>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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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펼접|id=USA-elec3|title={{center|'''교전 국가 및 세력<br>[ 펼치기 • 접기 ]'''}}|titlecolor=#C4D2E1}} | |||
{| class="wikitable" style="width:100%;border:none; background:#050F1C;color:#C4D2E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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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div style="display: inline-block;">[[파일:서풍 유럽합동군 심볼 .png|165px|link=유럽합동군 (서풍)]]<br>{{c|#C4D2E1|'''유럽합동군'''}}<br><br>{{글씨 크기|9|[[파일:폴란드 국기.png|18px|link=]] 폴란드<br>[[파일:독일 국기.png|18px|link=]] 독일<br>[[파일:프랑스 국기.png|18px|link=]] 프랑스<br>[[파일:베네룩스 1.png|18px|link=]] 베네룩스<br>[[파일:이탈리아 국기.png|18px|link=]] 이탈리아<br>[[파일:그리스.png|18px|link=]] 그리스<br>[[파일:캐나다.png|18px|link=]] 캐나다<br>[[파일:우크라이나 공화국 국기.png|18px|link=]] 우크라이나<br>[[파일:발트 연합 국기.png|18px|link=]] 발트 연합<br>[[파일:스웨덴 국기.png|18px|link=]] 스웨덴<br>[[파일:핀란드 국기.png|18px|link=]] 핀란드<br>[[파일:루마니아 국기.png|18px|link=]] 루마니아<br>[[파일:몰도바 공화국 국기.png|18px|link=]] 몰도바<br>[[파일:서풍 미국.png|18px|link=]] 미합중국<sup>(지원)</sup><br>[[파일:서풍 영국 국기.png|18px|link=]] 영국<sup>(지원)</sup><br>[[파일:오성홍기.png|18px|link=]] 중국<sup>(지원)</sup><br>[[파일:러시아 백청백기.svg|18px|link=]] 자유 군단 연합<br>[[파일:조지아 국기.png|18px|link=]] 조지아 민족군단<sup>(자유 군단)</sup><br>[[파일:벨라루스 백적백 국기.svg|18px|link=]] 자유 벨라루스 의용군<sup>(자유 군단)</sup>}}</div> {{여백|1em}} | |||
<div style="display: inline-block;">[[파일:서풍 유라시아 심볼 4.png|160px|link=유라시아 연방 (서풍)]]<br>{{c|#C4D2E1|'''유라시아 연방'''}}<br><br>{{글씨 크기|9|[[파일:서풍 동부해방군 기.png|18px|link=]] 동부해방군<br>[[파일:러시아 정교군 깃발.svg|18px|link=]] 러시아 정교군<br>[[파일:유라시아 의용 병단기.png|18px|link=]] 유라시아 의용 병단<br>[[파일:서풍 서슬라브인 위원회.png|18px|link=]] 서슬라브인 여단<br>[[파일:서풍 성전군 기.png|18px|link=]] 성 게오르기오스 기사단<br>[[파일:노보로시아 국기 1.svg|18px|link=]] 노보로시아<sup>(연방 구성국)</sup><br>[[파일:벨라루스 국기.png|18px|link=]] 벨라루스<sup>(연방 구성국)</sup><br>[[파일:카자흐 SSR.svg|18px|link=]] 카자흐스탄<sup>(연방 구성국)</sup><br>[[파일:트란스니스트리아 국기.png|18px|link=]] 트란스니스트리아<sup>(연방 구성국)</sup><br>[[파일:가가우지아 인민 공화국기.png|18px|link=]] 가가우지아 인민 공화국<sup>(연방 구성국)</sup><br>[[파일:트란실바니아 인민 공화국 깃발.png|18px|link=]] 트란실바니아 인민 공화국<sup>(연방 구성국)</sup><br>[[파일:서풍 투르크 여단기.jpg|18px|link=]] 도스툼 여단 의용군<br>[[파일:IRGC 깃발.svg|18px|link=]] 이슬람 혁명 수비대<br>[[파일:시리아 아랍군 군기.svg|18px|link=]] 시리아 아랍군 용병<br>[[파일: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png|18px|link=]] 리비아<sup>(지원)</sup><br>[[파일:베네수엘라 국기.png|18px|link=]] 베네수엘라<sup>(지원)</sup><br>[[파일:헝가리 국기.png|18px|link=]] 헝가리<sup>(지지)</sup><br>[[파일:터키 국기.png|18px|link=]] 튀르키예<sup>(지지)</sup><br>[[파일:바그너 그룹 심볼.png|18px|link=]] 바그너 그룹}}</div></cente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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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 크기|17|'''상세'''}}<br> | *{{글씨 크기|17|'''상세'''}}<br> | ||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조차 모호한 전쟁, 21세기 들어 가장 큰 규모와 파괴력을 자랑하는 전쟁. 제2차 조국 수호 전쟁, 또는 대동방 전쟁으로 불리는 이 전쟁은 2033년, 중동 대전과 북극해 군사 충돌 사건의 여파 속에서 발생했다. |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조차 모호한 전쟁, 21세기 들어 가장 큰 규모와 파괴력을 자랑하는 전쟁. 제2차 조국 수호 전쟁, 또는 대동방 전쟁으로 불리는 이 전쟁은 2033년, 중동 대전과 북극해 군사 충돌 사건의 여파 속에서 발생했다. 본래 푸틴 체제는 강경파와 온건파의 균형을 통해 권력을 공고히 하는 구조였으나 대외적인 위기 속에서 강경파를 주도하던 '''[[신 유라시아주의 (서풍)|{{color|#C4D2E1|신 유라시아주의자}}]]'''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고 이내, 유라시아주의 상징들이 공공장소에 설치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강경파들은 내부 통합을 위해 영토 확장으로 시선을 돌리고자 하였고 발트 3국에서 '동부해방군'이 반란을 일으키자 발트 통합을 목표로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유라시아의 확장에 대비하던 유럽 연합은 모든 평화적 교섭이 실패하자 '서풍'으로 명명된 군사 작전 계시해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동부 영토를 기습적으로 공격했으며 '''[[유럽합동군 (서풍)|{{color|#C4D2E1|유럽합동군}}]]''' 또한 이에 동참하며 대전쟁의 서막이 오르게 된다. | ||
2033년에 시작된 전쟁은 | 2033년에 시작된 전쟁은 초기엔 최첨단 장비와 새로운 전술이 사용되었으나 합동군의 진격이 민스크와 쿠르스크 공세에서 저지 당하며 전선이 고착화되었고 초기의 기동전과 첨단 무기 체계가 진흙탕, 혹한으로 제대로된 운영이 불가해지며 양측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참호를 구축했다. 이후의 전쟁은 참호를 돌파하기 위해 하루에도 수 천대의 드론을 자폭용으로 소비했으며 유라시아군은 화학작용제 및 소이탄을 일부 전선에서 사용했다. 결국 소모전화된 전쟁은 서로에게 막대한 피해를 안겨주게 되었으며 이는 유럽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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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 |||
*{{글씨 크기|17|'''전개'''}}<br> | |||
2032년 9월,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내에서 활동하던 친러시아 성향의 민병대 조직인 '동부해방군'이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을 무력으로 점령하며 발트 지역의 안보 위기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돌입하였다. 해당 사태에 대해 유럽 연합은 브뤼셀 긴급 EU 정상회담이 개최했다. 이 회담에서 EU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유럽의 공동 안보를 보장하기 위한 군사적 조치로서 유럽합동군의 발트해 지역 배치 계획을 표결에 부쳐 가결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결정은 곧바로 유라시아 연방의 강력한 반발을 초래하였다. 유라시아 측은 발트해에서의 군사적 세력 균형이 위협받고 있다고 주장하며, 자국 해군을 동원해 발트해 일대를 봉쇄하고 EJF의 진입을 실질적으로 차단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에 따라 유럽과 유라시아 간의 전면적인 군사 대치 상태가 본격화되었고, 양측 모두 긴장 수위를 높여갔다. | |||
유럽연합 측은 확전을 방지하고자 스웨덴 스톡홀름에서의 외교 회담을 제안하였다. 이 회담에서는 유라시아군의 발트해 일대 철수, EJF의 발트해 배치 일시 중단, 국제조사단을 통한 동부해방군 사태의 진상 규명이라는 세 가지 조건이 담긴 중재안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유라시아 연방은 이를 일방적인 유럽의 프레임 설정이라며 거부하였고, 오히려 극동에 주둔하고 있던 대규모 병력을 발트해 지역으로 이동시키며 군사 개입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사태 해결을 위한 후속 외교 노력은 이탈리아 2032년 12월, 제노바에서 개최된 유럽연합 외교이사회와 유라시아 대표단 간의 회담에서 이어졌다. EU는 양측의 병력 동결, 민간인 대피를 위한 안전 통로 개설, 국제 감시단의 상시 주둔 허용 등을 골자로 한 휴전 및 평화 감시 체계 구축 제안을 공식화하였다. 그러나 유라시아 측은 이에 대해 발트 3국의 완전한 비무장화 및 정치적 중립화, 러시아어 사용 인구에 대한 민족 자결권 보장, 현행 헌법의 개정을 통한 정치 체제의 변경 등을 요구하며 협상 테이블을 사실상 결렬시켰다. 이로 인해 제노바 회담은 양측의 입장차만 확인한 채 성과 없이 종료되었다. | |||
이와 같은 긴장 고조 속에서, 유럽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안긴 사건이 터지게 된다. 유라시아 연방군의 비밀 작전계획 문서, 즉 우크라이나·벨라루스·폴란드 전역에 대한 동시 침공을 담은 '에레브루 계획'이 유출된 것이다. 해당 문서에는 유라시아군이 발트해 지역을 넘어 서유럽 전면을 대상으로 한 다방면 침공 계획을 수립해왔다는 정황이 상세히 담겨 있었으며, 이로 인해 EU와 유라시아 간의 외교 관계는 사실상 단절 수준으로 악화되었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유럽연합은 우크라이나의 유럽연합 가입을 긴급 승인하며, 동부 전선에서의 유럽 방어 체계를 강화하기 위한 준비에 돌입하였다. | |||
이러한 일련의 사태로 인해 양측 간 충돌은 피할 수 없는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결국 2033년 6월 4일, EU는 '서풍'이라는 암호명 하에 전면적인 군사 작전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이는 유라시아군의 주력 병력이 배치된 동부 우크라이나 및 벨라루스의 주요 군사 기지를 겨냥한 대규모 선제타격 작전으로, 폴란드군과 우크라이나군을 주력으로 하여 유럽합동군은 창설 이후 최대 규모의 편제로 재편되었다.<br><br> | |||
<center>'''벨라루스 전역'''</center> | |||
{| class="wikitable" style="max-width: 550px; width: 100%; margin-left: auto; margin-right: auto; border: 2px solid #99A6B6; text-align: center; font-size: 10p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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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style="margin: -4.5px -9.0px">[[파일:서풍 작전 설정 2.jpg|center|link=]]</div>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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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글씨 크기|8|''유라시아 측은 EJF의 움직임을 눈치챘으나 기습적인 전력망 차단으로 인해 혼선을 겪으며 도하 작전 저지에 실패한다.''}}}}<br> | |||
6월 4일 새벽, 무인 자폭 드론이 벨라루스와 칼리닌그라드, 러시아 서부의 주요 철도와 교각, 도로, 발전소와 변전소를 정밀 공격하였으며 EJF 소속의 강습부대가 공수 작전을 전개해, 소도시 점거 후 전선의 측면 압박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4시간 뒤인 오전 8시, EJF는 자주포와 야포를 동원해 방어선에 대한 집중 포격을 시작했으며 폴란드-벨라루스 접경지 부크강 일대에 집결한 폴란드의 제4기갑군단과 독일의 기계화 전력은 교량 설치가 완료되자마자 부크강을 도하해 벨라루스 남서부 국경선을 돌파하고 브레스트 인근 교통 요충지 점령을 위해 공세하기 시작했다. 유라시아군은 다연장로켓과 자폭 드론으로 저지를 시도하고 미리 배치되어있던 벨라루스의 방어여단을 급파하나 노후한 T-14 시리즈 기반 유라시아 전차가 EJF의 MGSG 전차에 의해 격파되며 브레스트-핀스크 도로를 장악한다. 이 작전엔 EJF의 전차 350대, 장갑차 700대, 병력 25,000명 투입되었으며 부크강 전체 전선 중 60% 이상 돌파에 성공했다. 브레스트-비소우카 철도선 절단되며 벨라루스 남서부 보급로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유라시아군은 후방으로 후퇴하며 본격적인 전면전이 시작된다. | |||
EJF는 도로망을 중심으로 고속 진격하며, 바라노비치 평원을 돌파했고 일주일 뒤인 6월 11일, 민스크 서부의 몰로데치노-도멘치 선에 도달했다. 그러나 발트 전선에서 분리된 유라시아군 소속, 러시아 기계화군단이 북부, 슬루츠크-바라노비치의 EFJ 보급선을 공격하며 저항을 시도하였다. 이로인해 EJF는 전차 70여 대를 손실하고 보급선 일시적으로 마비되며 민스크 점령이 늦어진다. 덕분에 벨라루스군와 러시아군으로 혼성 된 방위군이 후퇴하여 재정비 할 수 있었고 6월 20일까지 민스크로 양측 18만명 이상의 병력이 집결했다. EFJ는 고고도 정찰 드론으로 러시아어/벨라루스어로 된 경고 전단지를 살포하고, 자폭 드론으로 도시 외곽부터 건물을 하나하나 철거하며 진입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전투는 장기화되었고 7월 중순까지 이어졌으나, EJF의 포위망이 완성되어가며 유러시아군은 민스크에서 철수해 후방 참호선을 구축하기로 결심하고 7월 17일, 대규모 후퇴가 시작되었다. 8월 6일, EJF는 민스크 전역을 점령하고 동부로 쾌속 진격하기 시작했으나 이내, 드네프르강에서 유라시아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 9월 11일까지 공군을 동원한 대규모 돌파공세를 감행하나, 유라시아측에 제공권이 유리한 상황에서 이 작전은 더 큰 피해를 불러왔고, 결국 EJF도 참호를 구축하며 벨라루스 전역은 고착화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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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우크라이나 전역'''</center> | |||
{| class="wikitable" style="max-width: 550px; width: 100%; margin-left: auto; margin-right: auto; border: 2px solid #99A6B6; text-align: center; font-size: 10p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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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style="margin: -4.5px -9.0px">[[파일:서풍 작전 설정 3-1.jpg|center|link=]]</div>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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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글씨 크기|8|''쿠르스크부터 헤르손까지 형성돤 거대한 참호전은 서풍 작전의 잔혹한 상징이 되었다.''}}}}<br> | |||
한편, 유럽연합과 유라시아 연방 간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던 시기, EU에 정식으로 가입한 우크라이나는 서풍 작전이 개시되자마자 즉시 EJF에 합류하였으며, 이에 따라 본격적인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EJF에 가입한 직후, 우크라이나군은 MDTO의 표준 지휘 체계에 따라 재편되었고, 무엇보다 전체 EJF 병력 중 가장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립 작전 권한을 부여받으며 사실상 EJF 내에서 전략적 핵심 축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2033년 6월 7일, 우크라이나군은 드네프르페트롭스크, 니코폴, 크레멘추크 등 드네프르 강 중류에 위치한 주요 지점들을 도하하는 데 성공하였고, 주력 병력을 기계화 부대 중심으로 편성해 고속 기동에 기반한 전격전을 본격적으로 개시하였다. | |||
당시 유라시아 연방 내부에서는 연방 구성국 간의 이해관계 충돌과 러시아 본국과의 갈등이 겹치며 지휘 체계 전반에 불협화음이 발생하고 있었고, 이러한 내적 균열은 곧바로 전선 유지에 심각한 차질을 야기하였다. 특히 유라시아 연방의 구성국 중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노보러시아는 내부 분열과 보급 문제,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우크라이나군의 기습적인 대규모 공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작전 개시 한 달 만인 7월 11일, 수미 인민 공화국 지역이 EJF 측에 완전히 넘어가며 사실상 북동부 전선에서의 첫 전략적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 |||
이후 루한스크에서 자포리자에 이르기까지의 광범위한 전선이 형성되었고, 전선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었으며, 특히 우크라이나 남부 지역에서는 별다른 전선 변화 없이 고착 상태에 빠진 채 소모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르키우 전선에서 전격적으로 돌파에 성공한 북부 우크라이나군은 속도감 있게 진격을 이어갔고, 결국 러시아 본토에 해당하는 쿠르스크 지역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일부 부대는 벨고로드 외곽에 도달해 사실상 러시아 본토로의 진입에 성공하게 된다. | |||
그러나 다음 해인 2034년 4월에 접어들며, 봄이 도래함에 따라 동토층이 녹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진격이 자연적으로 둔화되었다. 더불어 쿠르스크 일대는 산림과 하천, 고지대, 도시가 복잡하게 뒤섞인 혼합 지형이었기에 기계화 부대를 중심으로 한 고속 기동전이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이에 따라 전투 양상은 보병 위주의 참호전으로 전환되며 매우 잔혹한 교착 상태가 이어지게 된다. 이 시기부터 쿠르스크 일대 전선은 ‘쿠르스크 전선’으로 명명되며, 서풍 작전 전체에서 가장 치열하고 고통스러운 전장으로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양측 모두 쿠르스크 지역에서 전황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하기 시작하였고, 고온 화염병기, 열분해 폭탄 등 국제적으로 논란이 되는 무기들까지 사용되며, 깊게 파인 참호를 돌파하려는 끈질긴 시도가 반복되었다. 이러한 소모전은 참호 하나를 두고도 수천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식의 극단적인 교전으로 이어졌고 양측 병사들의 사기 또한 급속히 소진되어 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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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발트 전역'''</center> | |||
{| class="wikitable" style="max-width: 550px; width: 100%; margin-left: auto; margin-right: auto; border: 2px solid #99A6B6; text-align: center; font-size: 10p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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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style="margin: -4.5px -9.0px">[[파일:서풍 작전 설정 4.jpg|center|link=]]</div>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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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글씨 크기|8|''동부해방군은 유라시아의 지원을 바탕으로 현대화에 성공하며 후방 타격에 집중했다.''}}}}<br> | |||
서풍 작전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2033년 8월, 동유럽 전역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가운데, 발트 전쟁의 전황은 여전히 유라시아 측에 유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특히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동부에서 대규모 봉기를 일으킨 친러시아아계 민병조직인 동부해방군은 이미 수도 탈린 인근까지 세력을 확장한 상황이었으며, 에스토니아 전역은 사실상 그들의 통제하에 들어간 상태였다. 이와 동시에, 유럽합동군이 벨라루스-우크라이나 전선에 전력을 집중하는 틈을 탄 유라시아 연방군은 기민하게 발트 북부로 진격,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를 점령한 뒤 곧장 리투아니아 방면으로 향하며 칼리닌그라드와 연결되는 발트 회랑을 확보하려는 작전에 돌입했다. | |||
이에 대응하기 위해 EJF는 라트비아 국경 일대를 중심으로 이미 격전을 거쳐 흩어진 잔여 병력과 후방 경비 전력까지 동원해 재편성하였고, 유라시아 기갑군의 고속도로 축선 진격을 늦추기 위해 도심형 매복, 무인 드론을 이용한 간헐적 포격, 교량 파괴 및 도로 장악 등 지연 작전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유라시아군 전차 약 70여 대가 피해를 입는 성과를 거두었고, 도심 지역과 고속도로 북부의 산지 지형을 활용해 EJF는 재블린 대전차미사일을 보유한 소규모 전술 분대 4개를 편성, 고속도로 축선을 따라 T자형 포위 매복 작전을 전개하며 방어선 구축에 필요한 시간을 벌어냈다. | |||
하지만 유라시아군은 압도적인 병력 물량과 정찰 드론 기반의 실시간 정보 탐지 능력을 앞세워 EJF의 매복선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정면 돌파했으며, 결국 라트비아 방어선은 고착화되지 못한 채 붕괴되고 만다. 이에 따라 EJF는 심각한 병력 손실을 입고 방어 전력의 지속 가능성이 사라지게 되었으며,발트 연합은 망명 정부 형식으로 후퇴를 결정하고 유럽 본토로의 철수를 개시한다. | |||
유라시아군은 리가를 완전히 장악한 이후, 다음 전략 목표인 리투아니아 남단으로 병력을 투입했고, 이는 곧 폴란드가 벨라루스 전선에서 병력을 차출하여 리투아니아로 이동시켜 유라시아의 발트 회랑 형성을 저지하려는 군사적 대응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폴란드군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유라시아군은 칼리닌그라드에서 리투아니아를 거쳐 리가까지 연결되는 회랑을 형성하는 데 성공하며, 전략적으로 러시아 본토와 발트 전선을 연결하는 데 일시적으로 성공하게 된다. | |||
그러나 이 성공은 완전한 안정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발트 연합의 잔존 병력, 지역 민병대, 준군사 조직들이 연합 전선을 형성하고 유라시아 점령지 내부에서 기습 공격과 보급선 차단, 주요 요인 암살 등 비정규전 양상의 치명적인 저항 작전을 지속하며 유라시아군의 진격에 지속적인 균열과 차질을 야기한다. 특히 EJF 특수부대가 후방 침투 작전을 감행하며 회랑의 유지에 핵심적이었던 교통 요충지를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데 성공했고, 이로 인해 유라시아군은 보급과 통신에 심각한 문제를 겪기 시작한다. | |||
결국, 회랑의 유지 자체가 불안정해지며, 일부 지역에서 유라시아군이 철수하거나 병력을 재배치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러한 혼란을 틈탄 EJF의 반격 작전이 개시되면서 발트 회랑의 일부가 EJF 측에 의해 탈환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이로써 유라시아의 완전한 북방 전선 장악 시도는 좌절되며 2034년, 발트 전선은 다시 교착 상태로 빠져들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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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 크기|17|'''영향'''}}<br> | *{{글씨 크기|17|'''영향'''}}<br> | ||
서풍 작전은 유라시아의 동유럽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시작된 대규모 군사작전이었으나, 예상보다 치열한 저항과 전략적 실수로 인해 4년간의 장기 소모전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동유럽 전역이 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의 군사 충돌 지역으로 변했고, 유럽과 유라시아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악화되었다. | |||
유럽 연합은 전후 유럽의 통합과 군대 확장을 가속화기 시작했으며 유럽 의회의 권한이 각 국의 의회의 영향력보다 높은 위치에 차지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독일과 프랑스는 중도층이 급진화되어 극우와 극좌 정당, 단체는 무력으로 해산 당하고 유럽회의주의를 내세우 것 또한 국가적으로 탄압 받게 된다. | |||
전쟁 중 유라시아가 중국 견제를 위해 극동 지역에 배치된 대규모 군전력이 서부로 이동하게 되며 견제가 사리진 중국은 대만과 동남아시아를 겨냥한 군사 도발을 시작하며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 영향으로 피지와 투발루의 호주 영토 편입에 반발해 중국 해군이 남태평양으로 파견되어 호주와 교전을 치루게 되었으며 그동안 이어지던 미국과 중국과 공조가 끝나고 유럽에서 불던 피바람은 태평양에서까지 불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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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7월 23일 (수) 11:31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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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명:서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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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합동군 ![]() ![]() ![]() ![]() ![]() ![]() ![]() ![]() ![]() ![]() ![]() ![]() ![]() ![]() ![]() ![]() ![]() |
- 상세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조차 모호한 전쟁, 21세기 들어 가장 큰 규모와 파괴력을 자랑하는 전쟁. 제2차 조국 수호 전쟁, 또는 대동방 전쟁으로 불리는 이 전쟁은 2033년, 중동 대전과 북극해 군사 충돌 사건의 여파 속에서 발생했다. 본래 푸틴 체제는 강경파와 온건파의 균형을 통해 권력을 공고히 하는 구조였으나 대외적인 위기 속에서 강경파를 주도하던 신 유라시아주의자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고 이내, 유라시아주의 상징들이 공공장소에 설치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강경파들은 내부 통합을 위해 영토 확장으로 시선을 돌리고자 하였고 발트 3국에서 '동부해방군'이 반란을 일으키자 발트 통합을 목표로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유라시아의 확장에 대비하던 유럽 연합은 모든 평화적 교섭이 실패하자 '서풍'으로 명명된 군사 작전 계시해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동부 영토를 기습적으로 공격했으며 유럽합동군 또한 이에 동참하며 대전쟁의 서막이 오르게 된다.
2033년에 시작된 전쟁은 초기엔 최첨단 장비와 새로운 전술이 사용되었으나 합동군의 진격이 민스크와 쿠르스크 공세에서 저지 당하며 전선이 고착화되었고 초기의 기동전과 첨단 무기 체계가 진흙탕, 혹한으로 제대로된 운영이 불가해지며 양측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참호를 구축했다. 이후의 전쟁은 참호를 돌파하기 위해 하루에도 수 천대의 드론을 자폭용으로 소비했으며 유라시아군은 화학작용제 및 소이탄을 일부 전선에서 사용했다. 결국 소모전화된 전쟁은 서로에게 막대한 피해를 안겨주게 되었으며 이는 유럽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된다.
- 전개
2032년 9월,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내에서 활동하던 친러시아 성향의 민병대 조직인 '동부해방군'이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을 무력으로 점령하며 발트 지역의 안보 위기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돌입하였다. 해당 사태에 대해 유럽 연합은 브뤼셀 긴급 EU 정상회담이 개최했다. 이 회담에서 EU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유럽의 공동 안보를 보장하기 위한 군사적 조치로서 유럽합동군의 발트해 지역 배치 계획을 표결에 부쳐 가결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결정은 곧바로 유라시아 연방의 강력한 반발을 초래하였다. 유라시아 측은 발트해에서의 군사적 세력 균형이 위협받고 있다고 주장하며, 자국 해군을 동원해 발트해 일대를 봉쇄하고 EJF의 진입을 실질적으로 차단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에 따라 유럽과 유라시아 간의 전면적인 군사 대치 상태가 본격화되었고, 양측 모두 긴장 수위를 높여갔다.
유럽연합 측은 확전을 방지하고자 스웨덴 스톡홀름에서의 외교 회담을 제안하였다. 이 회담에서는 유라시아군의 발트해 일대 철수, EJF의 발트해 배치 일시 중단, 국제조사단을 통한 동부해방군 사태의 진상 규명이라는 세 가지 조건이 담긴 중재안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유라시아 연방은 이를 일방적인 유럽의 프레임 설정이라며 거부하였고, 오히려 극동에 주둔하고 있던 대규모 병력을 발트해 지역으로 이동시키며 군사 개입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사태 해결을 위한 후속 외교 노력은 이탈리아 2032년 12월, 제노바에서 개최된 유럽연합 외교이사회와 유라시아 대표단 간의 회담에서 이어졌다. EU는 양측의 병력 동결, 민간인 대피를 위한 안전 통로 개설, 국제 감시단의 상시 주둔 허용 등을 골자로 한 휴전 및 평화 감시 체계 구축 제안을 공식화하였다. 그러나 유라시아 측은 이에 대해 발트 3국의 완전한 비무장화 및 정치적 중립화, 러시아어 사용 인구에 대한 민족 자결권 보장, 현행 헌법의 개정을 통한 정치 체제의 변경 등을 요구하며 협상 테이블을 사실상 결렬시켰다. 이로 인해 제노바 회담은 양측의 입장차만 확인한 채 성과 없이 종료되었다.
이와 같은 긴장 고조 속에서, 유럽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안긴 사건이 터지게 된다. 유라시아 연방군의 비밀 작전계획 문서, 즉 우크라이나·벨라루스·폴란드 전역에 대한 동시 침공을 담은 '에레브루 계획'이 유출된 것이다. 해당 문서에는 유라시아군이 발트해 지역을 넘어 서유럽 전면을 대상으로 한 다방면 침공 계획을 수립해왔다는 정황이 상세히 담겨 있었으며, 이로 인해 EU와 유라시아 간의 외교 관계는 사실상 단절 수준으로 악화되었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유럽연합은 우크라이나의 유럽연합 가입을 긴급 승인하며, 동부 전선에서의 유럽 방어 체계를 강화하기 위한 준비에 돌입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로 인해 양측 간 충돌은 피할 수 없는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결국 2033년 6월 4일, EU는 '서풍'이라는 암호명 하에 전면적인 군사 작전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이는 유라시아군의 주력 병력이 배치된 동부 우크라이나 및 벨라루스의 주요 군사 기지를 겨냥한 대규모 선제타격 작전으로, 폴란드군과 우크라이나군을 주력으로 하여 유럽합동군은 창설 이후 최대 규모의 편제로 재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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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4일 새벽, 무인 자폭 드론이 벨라루스와 칼리닌그라드, 러시아 서부의 주요 철도와 교각, 도로, 발전소와 변전소를 정밀 공격하였으며 EJF 소속의 강습부대가 공수 작전을 전개해, 소도시 점거 후 전선의 측면 압박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4시간 뒤인 오전 8시, EJF는 자주포와 야포를 동원해 방어선에 대한 집중 포격을 시작했으며 폴란드-벨라루스 접경지 부크강 일대에 집결한 폴란드의 제4기갑군단과 독일의 기계화 전력은 교량 설치가 완료되자마자 부크강을 도하해 벨라루스 남서부 국경선을 돌파하고 브레스트 인근 교통 요충지 점령을 위해 공세하기 시작했다. 유라시아군은 다연장로켓과 자폭 드론으로 저지를 시도하고 미리 배치되어있던 벨라루스의 방어여단을 급파하나 노후한 T-14 시리즈 기반 유라시아 전차가 EJF의 MGSG 전차에 의해 격파되며 브레스트-핀스크 도로를 장악한다. 이 작전엔 EJF의 전차 350대, 장갑차 700대, 병력 25,000명 투입되었으며 부크강 전체 전선 중 60% 이상 돌파에 성공했다. 브레스트-비소우카 철도선 절단되며 벨라루스 남서부 보급로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유라시아군은 후방으로 후퇴하며 본격적인 전면전이 시작된다.
EJF는 도로망을 중심으로 고속 진격하며, 바라노비치 평원을 돌파했고 일주일 뒤인 6월 11일, 민스크 서부의 몰로데치노-도멘치 선에 도달했다. 그러나 발트 전선에서 분리된 유라시아군 소속, 러시아 기계화군단이 북부, 슬루츠크-바라노비치의 EFJ 보급선을 공격하며 저항을 시도하였다. 이로인해 EJF는 전차 70여 대를 손실하고 보급선 일시적으로 마비되며 민스크 점령이 늦어진다. 덕분에 벨라루스군와 러시아군으로 혼성 된 방위군이 후퇴하여 재정비 할 수 있었고 6월 20일까지 민스크로 양측 18만명 이상의 병력이 집결했다. EFJ는 고고도 정찰 드론으로 러시아어/벨라루스어로 된 경고 전단지를 살포하고, 자폭 드론으로 도시 외곽부터 건물을 하나하나 철거하며 진입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전투는 장기화되었고 7월 중순까지 이어졌으나, EJF의 포위망이 완성되어가며 유러시아군은 민스크에서 철수해 후방 참호선을 구축하기로 결심하고 7월 17일, 대규모 후퇴가 시작되었다. 8월 6일, EJF는 민스크 전역을 점령하고 동부로 쾌속 진격하기 시작했으나 이내, 드네프르강에서 유라시아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 9월 11일까지 공군을 동원한 대규모 돌파공세를 감행하나, 유라시아측에 제공권이 유리한 상황에서 이 작전은 더 큰 피해를 불러왔고, 결국 EJF도 참호를 구축하며 벨라루스 전역은 고착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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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유럽연합과 유라시아 연방 간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던 시기, EU에 정식으로 가입한 우크라이나는 서풍 작전이 개시되자마자 즉시 EJF에 합류하였으며, 이에 따라 본격적인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EJF에 가입한 직후, 우크라이나군은 MDTO의 표준 지휘 체계에 따라 재편되었고, 무엇보다 전체 EJF 병력 중 가장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립 작전 권한을 부여받으며 사실상 EJF 내에서 전략적 핵심 축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2033년 6월 7일, 우크라이나군은 드네프르페트롭스크, 니코폴, 크레멘추크 등 드네프르 강 중류에 위치한 주요 지점들을 도하하는 데 성공하였고, 주력 병력을 기계화 부대 중심으로 편성해 고속 기동에 기반한 전격전을 본격적으로 개시하였다.
당시 유라시아 연방 내부에서는 연방 구성국 간의 이해관계 충돌과 러시아 본국과의 갈등이 겹치며 지휘 체계 전반에 불협화음이 발생하고 있었고, 이러한 내적 균열은 곧바로 전선 유지에 심각한 차질을 야기하였다. 특히 유라시아 연방의 구성국 중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노보러시아는 내부 분열과 보급 문제,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우크라이나군의 기습적인 대규모 공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작전 개시 한 달 만인 7월 11일, 수미 인민 공화국 지역이 EJF 측에 완전히 넘어가며 사실상 북동부 전선에서의 첫 전략적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이후 루한스크에서 자포리자에 이르기까지의 광범위한 전선이 형성되었고, 전선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었으며, 특히 우크라이나 남부 지역에서는 별다른 전선 변화 없이 고착 상태에 빠진 채 소모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르키우 전선에서 전격적으로 돌파에 성공한 북부 우크라이나군은 속도감 있게 진격을 이어갔고, 결국 러시아 본토에 해당하는 쿠르스크 지역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일부 부대는 벨고로드 외곽에 도달해 사실상 러시아 본토로의 진입에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다음 해인 2034년 4월에 접어들며, 봄이 도래함에 따라 동토층이 녹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진격이 자연적으로 둔화되었다. 더불어 쿠르스크 일대는 산림과 하천, 고지대, 도시가 복잡하게 뒤섞인 혼합 지형이었기에 기계화 부대를 중심으로 한 고속 기동전이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이에 따라 전투 양상은 보병 위주의 참호전으로 전환되며 매우 잔혹한 교착 상태가 이어지게 된다. 이 시기부터 쿠르스크 일대 전선은 ‘쿠르스크 전선’으로 명명되며, 서풍 작전 전체에서 가장 치열하고 고통스러운 전장으로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양측 모두 쿠르스크 지역에서 전황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하기 시작하였고, 고온 화염병기, 열분해 폭탄 등 국제적으로 논란이 되는 무기들까지 사용되며, 깊게 파인 참호를 돌파하려는 끈질긴 시도가 반복되었다. 이러한 소모전은 참호 하나를 두고도 수천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식의 극단적인 교전으로 이어졌고 양측 병사들의 사기 또한 급속히 소진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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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풍 작전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2033년 8월, 동유럽 전역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가운데, 발트 전쟁의 전황은 여전히 유라시아 측에 유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특히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동부에서 대규모 봉기를 일으킨 친러시아아계 민병조직인 동부해방군은 이미 수도 탈린 인근까지 세력을 확장한 상황이었으며, 에스토니아 전역은 사실상 그들의 통제하에 들어간 상태였다. 이와 동시에, 유럽합동군이 벨라루스-우크라이나 전선에 전력을 집중하는 틈을 탄 유라시아 연방군은 기민하게 발트 북부로 진격,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를 점령한 뒤 곧장 리투아니아 방면으로 향하며 칼리닌그라드와 연결되는 발트 회랑을 확보하려는 작전에 돌입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EJF는 라트비아 국경 일대를 중심으로 이미 격전을 거쳐 흩어진 잔여 병력과 후방 경비 전력까지 동원해 재편성하였고, 유라시아 기갑군의 고속도로 축선 진격을 늦추기 위해 도심형 매복, 무인 드론을 이용한 간헐적 포격, 교량 파괴 및 도로 장악 등 지연 작전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유라시아군 전차 약 70여 대가 피해를 입는 성과를 거두었고, 도심 지역과 고속도로 북부의 산지 지형을 활용해 EJF는 재블린 대전차미사일을 보유한 소규모 전술 분대 4개를 편성, 고속도로 축선을 따라 T자형 포위 매복 작전을 전개하며 방어선 구축에 필요한 시간을 벌어냈다.
하지만 유라시아군은 압도적인 병력 물량과 정찰 드론 기반의 실시간 정보 탐지 능력을 앞세워 EJF의 매복선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정면 돌파했으며, 결국 라트비아 방어선은 고착화되지 못한 채 붕괴되고 만다. 이에 따라 EJF는 심각한 병력 손실을 입고 방어 전력의 지속 가능성이 사라지게 되었으며,발트 연합은 망명 정부 형식으로 후퇴를 결정하고 유럽 본토로의 철수를 개시한다.
유라시아군은 리가를 완전히 장악한 이후, 다음 전략 목표인 리투아니아 남단으로 병력을 투입했고, 이는 곧 폴란드가 벨라루스 전선에서 병력을 차출하여 리투아니아로 이동시켜 유라시아의 발트 회랑 형성을 저지하려는 군사적 대응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폴란드군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유라시아군은 칼리닌그라드에서 리투아니아를 거쳐 리가까지 연결되는 회랑을 형성하는 데 성공하며, 전략적으로 러시아 본토와 발트 전선을 연결하는 데 일시적으로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이 성공은 완전한 안정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발트 연합의 잔존 병력, 지역 민병대, 준군사 조직들이 연합 전선을 형성하고 유라시아 점령지 내부에서 기습 공격과 보급선 차단, 주요 요인 암살 등 비정규전 양상의 치명적인 저항 작전을 지속하며 유라시아군의 진격에 지속적인 균열과 차질을 야기한다. 특히 EJF 특수부대가 후방 침투 작전을 감행하며 회랑의 유지에 핵심적이었던 교통 요충지를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데 성공했고, 이로 인해 유라시아군은 보급과 통신에 심각한 문제를 겪기 시작한다.
결국, 회랑의 유지 자체가 불안정해지며, 일부 지역에서 유라시아군이 철수하거나 병력을 재배치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러한 혼란을 틈탄 EJF의 반격 작전이 개시되면서 발트 회랑의 일부가 EJF 측에 의해 탈환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이로써 유라시아의 완전한 북방 전선 장악 시도는 좌절되며 2034년, 발트 전선은 다시 교착 상태로 빠져들게 된다.
- 영향
서풍 작전은 유라시아의 동유럽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시작된 대규모 군사작전이었으나, 예상보다 치열한 저항과 전략적 실수로 인해 4년간의 장기 소모전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동유럽 전역이 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의 군사 충돌 지역으로 변했고, 유럽과 유라시아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악화되었다.
유럽 연합은 전후 유럽의 통합과 군대 확장을 가속화기 시작했으며 유럽 의회의 권한이 각 국의 의회의 영향력보다 높은 위치에 차지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독일과 프랑스는 중도층이 급진화되어 극우와 극좌 정당, 단체는 무력으로 해산 당하고 유럽회의주의를 내세우 것 또한 국가적으로 탄압 받게 된다.
전쟁 중 유라시아가 중국 견제를 위해 극동 지역에 배치된 대규모 군전력이 서부로 이동하게 되며 견제가 사리진 중국은 대만과 동남아시아를 겨냥한 군사 도발을 시작하며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 영향으로 피지와 투발루의 호주 영토 편입에 반발해 중국 해군이 남태평양으로 파견되어 호주와 교전을 치루게 되었으며 그동안 이어지던 미국과 중국과 공조가 끝나고 유럽에서 불던 피바람은 태평양에서까지 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