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노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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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1 = 양종 소황제<br>전희상<br>박재벽
|지휘관1 = 양종 소황제<br>조희연<br>안경수<br>어윤중<br>전문상<br>박재벽<br>이지백
|지휘관2 = 니콜라이 2세<br>알렉세이 크로파토킨<br>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지휘관2 = 니콜라이 2세<br>알렉세이 크로파토킨<br>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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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21일 (화) 02:01 판


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한러전쟁
Korean-Russian War
Русско-корейский война
날짜1898년 1월 19일 ~ 1899년 9월 10일
장소압록강 일대, 요녕반도, 동해, 동만주
결과 대한제국의 승리, 할빈 조약 체결
교전국
대한제국
일본 제국
러시아 제국
지휘관
양종 소황제
조희연
안경수
어윤중
전문상
박재벽
이지백
니콜라이 2세
알렉세이 크로파토킨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병력
약 50만명 대한제국군 약 35만명
일본 제국군 약 2만 8천명
피해 규모
전사 약 1만 7천명
부상자 약 3만명
전사 약 5만 7천명
부상자 약 14만명
포로 약 6만명

개요

1898년에서 1899년 사이에 대한제국러시아 제국이 압록강 일대, 요녕반도, 동해, 남만주, 동만주 일대에서 벌인 전쟁.

단동 사건으로 인해 전쟁이 막 발발했을때 서양 국가들은 아무도 대한제국이 러시아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유럽의 군사강국중 하나로 꼽히고 있었고 청의 몰락을 통해 아무도 비백인 동양 국가가 백인 유럽 국가를 꺾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가깝고 러시아 중심지에서는 매우 먼 동아시아에서 전쟁이 벌어져 러시아의 원활한 보급이 어려웠던 점, 한국이 예상외로 국력을 착실히 키우고 군사적인 준비가 철저했던 점, 러시아 내부 사정이 악화되어 모두의 예상을 깨고 러시아가 패배했다.

배경

점차 약해지는 청나라를 두고 서구열강은 중국 대륙을 어떻게든 차지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러시아 또한 마찬가지로 태평양 방면에 부동항이 필요했고 청나라를 압박해 여순, 대련 조차권을 얻어낸다. 또한 1860년 베이징 조약을 통해 얻어낸 연해주 지방을 십분 활용해 만주횡단철도를 부설했고 만주를 중심으로 점차 남하할 계획을 갖고있었다.
반대로 막 근대화에 성공한 한국은 간도를 비롯한 남만주에 조선인이 많이 살고있다는 이유로 청나라에게서 남만주를 뜯어냈고 '범조선주의'를 제창하며 만주는 조선민족의 전통적인 고유 영토였으며 이곳에 사는 만주족도 조선민족이라는 이념을 내세워 만주 전체를 영토로 삼을 생각이었다. 따라서 이 두개의 세력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의 불씨는 1890년대 초 대한제국군 10만명이 심양에 주둔하며 시작되었다. 한국은 심양 조약의 압록 이북, 혼하 이남을 대한제국의 강역으로 한다는 조문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할빈-다롄을 육로로 잇는 길 중심에 위치하고 혼하에 있었던 심양을 한국의 영토로 선포해 군대를 주둔시킨 것이다. 가능한 육로로 용원(당시 블라디보스토크)과 대련을 잇고 싶었으나 한국으로 인해 할빈까지 멀리 돌아가는 경로를 개발하려했는데 이것도 한국이 심양에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무산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는 강하게 반발했으며 이회준-발네프 협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군이 일단 물러나는 것으로 합의가 성사되었다.
하지만 한국과 러시아는 심심찮게 충돌했고 1897년 8월경 청과 한국의 경계에 매우 가까운 좌하에 러시아가 요새를 건설하려 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전개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