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번째 줄: | 35번째 줄: | ||
이후 [[제1차 세계 대전 (1939)|{{글씨 색|gold|제1차 세계 대전}}]]으로 얻은 방대한 점령지를 명목상 [[제후|{{글씨 색|gold|제후}}]]들에게 할양했기 때문에 유럽 지형에서 호칭의 변화는 크게 없었다. 다만 [[식민지|{{글씨 색|gold|식민지}}]] 영역이 크게 확장됨에 따라 몇몇 자치령의 군주이자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는 [[독일인의 황제|{{글씨 색|gold|독일인의 황제}}]]를 선언하며 공식적인 칭호는 아래와 같이 변경되었다. | 이후 [[제1차 세계 대전 (1939)|{{글씨 색|gold|제1차 세계 대전}}]]으로 얻은 방대한 점령지를 명목상 [[제후|{{글씨 색|gold|제후}}]]들에게 할양했기 때문에 유럽 지형에서 호칭의 변화는 크게 없었다. 다만 [[식민지|{{글씨 색|gold|식민지}}]] 영역이 크게 확장됨에 따라 몇몇 자치령의 군주이자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는 [[독일인의 황제|{{글씨 색|gold|독일인의 황제}}]]를 선언하며 공식적인 칭호는 아래와 같이 변경되었다. | ||
'{{글씨 색|gold|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글씨 색|gold|독일인}}과 {{글씨 색|gold|게르만 민족}}의 {{글씨 색|gold|신성한 황제}}, {{글씨 색|gold| | '{{글씨 색|gold|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글씨 색|gold|독일인}}과 {{글씨 색|gold|게르만 민족}}의 {{글씨 색|gold|신성한 황제}}, {{글씨 색|gold|독일의 대제}}, {{글씨 색|gold|오스트리아의 외군주}}, {{글씨 색|gold|프로이센}}의 {{글씨 색|gold|대왕}}, {{글씨 색|gold|브란덴부르크}}의 {{글씨 색|gold|변경백}}, {{글씨 색|gold|뉘른베르크}} {{글씨 색|gold|백작}}, {{글씨 색|gold|호엔촐레른}} 백작, {{글씨 색|gold|미텔아프리카의 황제}}, {{글씨 색|gold|노이기니아 및 자모아}}, {{글씨 색|gold|클라인베네디히}}의 {{글씨 색|gold|군주}}, {{글씨 색|gold|글라츠}}, {{글씨 색|gold|슐레지엔}}의 {{글씨 색|gold|공작}}, {{글씨 색|gold|라인강 하류}}, {{글씨 색|gold|포젠}}의 {{글씨 색|gold|대공}}, {{글씨 색|gold|작센}}, {{글씨 색|gold|엥언}}, {{글씨 색|gold|베스트팔렌}}, {{글씨 색|gold|포메른}}, {{글씨 색|gold|뤼네부르크}} 의 공작, {{글씨 색|gold|슐레스비히}}, {{글씨 색|gold|홀슈타인}}, {{글씨 색|gold|크로센}}의 공작, {{글씨 색|gold|마그데부르크}}, {{글씨 색|gold|브레멘}}, {{글씨 색|gold|헬데를란트}}, {{글씨 색|gold|율리히}} 및 {{글씨 색|gold|클레베와 베르크}}의 공작, {{글씨 색|gold|벤덴}}과 {{글씨 색|gold|카슈벤 민족}}, {{글씨 색|gold|라우엔부르크}}, {{글씨 색|gold|메클렌부르크}}의 공작, {{글씨 색|gold|헤센}}, {{글씨 색|gold|튀링겐}}의 {{글씨 색|gold|방백}}, {{글씨 색|gold|상 라우지츠와 하 라우지츠}}의 {{글씨 색|gold|변경백}}, {{글씨 색|gold|오라녜}}, {{글씨 색|gold|뤼겐}}, {{글씨 색|gold|동 프리슬란트}}, {{글씨 색|gold|파더보른}}, {{글씨 색|gold|피어몬트}} 공, {{글씨 색|gold|하버슈타트}}, {{글씨 색|gold|뮌스터}}, {{글씨 색|gold|민덴}}, {{글씨 색|gold|오스나브뤼크}}, {{글씨 색|gold|힐데스하임}}, {{글씨 색|gold|베르덴}}, {{글씨 색|gold|캄민}}, {{글씨 색|gold|풀다}}, {{글씨 색|gold|나사우}}, {{글씨 색|gold|뫼르스}} 공, {{글씨 색|gold|헨넨베르크}}의 백작, {{글씨 색|gold|마르크}}, {{글씨 색|gold|라벤스부르크}}, {{글씨 색|gold|호헨슈타인}}, {{글씨 색|gold|테클렌부르크}}, {{글씨 색|gold|링엔}}의 백작, {{글씨 색|gold|만스펠트}}, {{글씨 색|gold|지크마링겐}}, {{글씨 색|gold|베링겐}}의 백작, {{글씨 색|gold|프랑크푸르트}}의 {{글씨 색|gold|영주}}이신 '''빌헬름 3세''' 폐하' | ||
</div></div> | </div></div> |
2021년 5월 13일 (목) 01:58 판
목차

Deutscher Kaiser / Kaiser von Deutschland
|
ᐳ 1 개요ᐯ 1 개요
ᐳ 2 칭호ᐯ 2 칭호
빌헬름 3세가 1941년 독일 황제로 즉위했을 때의 공식적인 칭호는 다음과 같았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독일 황제, 오스트리아의 외군주, 프로이센의 왕, 브란덴부르크의 변경백, 뉘른베르크 백작, 호엔촐레른 백작, 글라츠, 슐레지엔의 공작, 라인강 하류, 포젠의 대공, 작센, 엥언, 베스트팔렌, 포메른, 뤼네부르크 의 공작,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크로센의 공작, 마그데부르크, 브레멘, 헬데를란트, 율리히 및 클레베와 베르크의 공작, 벤덴과 카슈벤 민족, 라우엔부르크, 메클렌부르크의 공작, 헤센, 튀링겐의 방백, 상 라우지츠와 하 라우지츠의 변경백, 오라녜, 뤼겐, 동 프리슬란트, 파더보른, 피어몬트 공, 하버슈타트, 뮌스터, 민덴, 오스나브뤼크, 힐데스하임, 베르덴, 캄민, 풀다, 나사우, 뫼르스 공, 헨넨베르크의 백작, 마르크, 라벤스부르크, 호헨슈타인, 테클렌부르크, 링엔의 백작, 만스펠트, 지크마링겐, 베링겐의 백작, 프랑크푸르트의 영주이신 빌헬름 3세 폐하'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얻은 방대한 점령지를 명목상 제후들에게 할양했기 때문에 유럽 지형에서 호칭의 변화는 크게 없었다. 다만 식민지 영역이 크게 확장됨에 따라 몇몇 자치령의 군주이자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는 독일인의 황제를 선언하며 공식적인 칭호는 아래와 같이 변경되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독일인과 게르만 민족의 신성한 황제, 독일의 대제, 오스트리아의 외군주, 프로이센의 대왕, 브란덴부르크의 변경백, 뉘른베르크 백작, 호엔촐레른 백작, 미텔아프리카의 황제, 노이기니아 및 자모아, 클라인베네디히의 군주, 글라츠, 슐레지엔의 공작, 라인강 하류, 포젠의 대공, 작센, 엥언, 베스트팔렌, 포메른, 뤼네부르크 의 공작,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크로센의 공작, 마그데부르크, 브레멘, 헬데를란트, 율리히 및 클레베와 베르크의 공작, 벤덴과 카슈벤 민족, 라우엔부르크, 메클렌부르크의 공작, 헤센, 튀링겐의 방백, 상 라우지츠와 하 라우지츠의 변경백, 오라녜, 뤼겐, 동 프리슬란트, 파더보른, 피어몬트 공, 하버슈타트, 뮌스터, 민덴, 오스나브뤼크, 힐데스하임, 베르덴, 캄민, 풀다, 나사우, 뫼르스 공, 헨넨베르크의 백작, 마르크, 라벤스부르크, 호헨슈타인, 테클렌부르크, 링엔의 백작, 만스펠트, 지크마링겐, 베링겐의 백작, 프랑크푸르트의 영주이신 빌헬름 3세 폐하'
ᐳ 3 생애ᐯ 3 생애
빌헬름은 1882년 5월 6일 브란덴부르크주의 포츠담 마르모르팔레에서 태어났다. 그는 빌헬름 2세의 장남으로, 제3대 독일 황제 카이저 (1859년–1941년)와 첫 번째 부인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 (1858년–1921년)의 아우구스타 빅토리아 공주 (Augusta Victoria of Schleswig-Holstein)가 그의 부모였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증조할아버지 빌헬름 1세는 황제가 되었고, 그의 조부 프리드리히 왕세자는 왕위 계승자로 빌헬름의 3번째 왕위를 계승했다. 그의 출생은 그의 부모와 그의 할머니 빅토리아 왕세자비 사이의 논쟁을 촉발시켰다. 빌헬름이 태어나기 전에, 그의 할머니는 간호사를 찾는 것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기를 기대했지만, 그녀의 아들이 그녀를 괴롭히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기 때문에, 미래의 빌헬름 2세는 그의 이모 헬레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의 어머니는 다쳤고 그의 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은 분노했다.그의 증조부와 할아버지가 1888년에 모두 사망했을 때, 6살의 빌헬름은 독일과 프로이센 왕좌의 후계자가 되었다.
빌헬름은 1908년 독일 축구 협회에 컵을 기증하여 독일 축구에서 가장 오래된 컵 대회인 크론프린젠포칼(현 룬더포칼)을 창설하였다.독일 클럽 BFC 프레우센은 원래 그의 이름을 따서 BFC 프리드리히 빌헬름으로 명명되었다.
1914년 카이저는 포츠담에 빌헬름 왕자와 그의 가족을 위해 슐로스 세실리엔호프의 건설을 명령했다. 슐로스는 영국 버켄헤드에 있는 비드스턴 법원에서 튜더 마노르와 비슷하게 느슨하게 영감을 받았다. 1917년에 완공된 이곳은 한때 황태자의 주요 거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