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공화국 (고려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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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왕조 시대 ===
=== 대왕조 시대 ===


=== 용왕조 시대 ===
=== 온왕조 시대 ===


=== 이왕조 시대 ===
=== 이왕조 시대 ===

2021년 9월 14일 (화) 18:37 판

고려공화국
Republic of Korea
高麗共和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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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상징
국가 애국가(1899년~1919년)
공화국의 노래(1919년~1950년)
고려인의 노래(1919년~현재)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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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제1공화국 수립 1898년 12월 25일
  • 고려 제2공화국 수립 1919년 6월 10일
  • 10.18 군사정변 1931년 10월 18일
  • 고려 제3공화국 수립 1932년 5월 15일
  • 고려 제4공화국 수립 1942년 11월 10일
  • UN 가입 1949년 9월 9일
  • 고려 제5공화국 수립 1960년 11월 10일
  • 동아시아연합 가입 2016년 3월 1일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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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평양부
최대 도시
양주부
접경국
소비에트 공화국 연방, 여진공화국, 거란연방공화국, 대연민국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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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총 인구
1억 6236만 명(2020년 인구주택총조사)
출산율
1.58명
기대 수명
79세
공용어
고려어, 여진어[1], 거란어[2]
공용 문자
고려문
종교
국교
없음
분포
불교 36%
카톨릭 24%
개신교 15%
무종교 20%
기타 5%
군대
고려공화국 국군
하위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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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역자치단체
19도 9부 1주
기초자치단체
275시 530군 373현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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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민주공화제(국민주권), 자유민주주의, 단일국가, 문민통제, 국무령제, 양원제, 다당제, 지방자치, 성문법주의(대륙법계)
민주주의 지수
8.15점 (완전한 민주주의)
정부
요인
국무령
(국가원수)
부채형
부국무령
(중추원 의장 겸임)
원성국
의정원(하원)
의장
서은필
국가평리원장
목승성
여당
[[파일:|90px|link=민주당]]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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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GDP
(명목)
전체 GDP
$5조 2200억
1인당 GDP
$32,150
무역
수입
$1조 2,150억
수출
$1조 1,933억
예산
세입
$2조 317억
세출
$2조 902억
외환 보유고
$1조 8,290억
신용 등급
무디스 A1
S&P A
Fitch A
화폐
공식 화폐
고려 환
ISO 4217
KRH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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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연호
서력기원
시간대
UTC+9
도량형
SI단위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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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가입
1949년
ccTLD
.kr
국가 코드
410, KOR, KR
전화 코드
+82


개요

고려공화국(高麗共和國, Republic of Korea)은 동아시아 동부에 위치한 민주공화국이다. 약칭은 고려(高麗) 혹은 여(麗)[3]

상징

국호

1898년 12월 25일 발효된 고려공화국 기본법 제1조에서는 국호를 '고려공화국'으로 명시하고 있으며, 공식 번역은 'Republic of Korea'이다. 1902년 11월 10일 발효된 국무원고시를 통해 약칭은 '고려', '高麗', 'Korea'로 규정되었다.

'고려'라는 국호는 B.C 37년 건국된 고려국(고씨 왕조)에서 유래했다. 고씨 왕조는 건국 초부터 자신들의 이름을 한자로 음차한 高離(고리), 高駒驪(고구려), 句麗(구려), 駒驪(구려) 등의 국호를 혼용해왔고 3세기에 이르러 '고구려'가 대세가 되었으나, 4세기경부터 이를 축약한 형태의 高麗(고려)라는 단어가 등장하여 장수왕 시기인 서기 422년부터 공식적으로 '고려'를 국호로 확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국내성계는 '고구려'를 자칭하며 평양의 장수왕 정권과 내전에 가까운 대립을 벌였으나, 결과적으로 고씨 왕조에 이은 연씨 왕조가 한반도를 통합하고 고려의 국호를 지속함으로써 오늘날 고려인들의 국호이자 민족명으로 자리잡았다. '코리아'는 9세기 경 실크로드를 따라 고려와 교역하던 아랍 지역 상인들이 전파한 단어로 추정되고 있다.

'Goryo' 혹은 'Goryeo'는 역사적으로 현재 존재하지 않는 국가들, 즉 1898년 12월 24일 이전까지 고려사의 일부로 존재하였던 고려 왕조국가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며 현대 고려와는 구별된다. 또한 페르시아나 실크로드 국가들 통해 '맥-고려'로 추측되는 무쿠리(Mukuri 혹은 Mukuli)라는 단어도 서방에 널리 퍼졌으나 고려라는 국명이 오랫동안 소개되면서 현재는 고대 고려를 이르는 단어로 한정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코라이'로 음독한다. 그러나 대략 10세기까지도 高麗라 쓰고 '코마'라 읽는 독법이 있었는데, 백제에서 고구려를 '곰'으로 비하한 흔적으로 보기도 한다. 이것이 아이누에도 전해져 아이누에서는 현재도 고려를 '카무이모시르', 즉 곰나라로 부르고 있다. 아이누어에서는 곰과 신을 모두 '카무이'로 부르는데, 이를 오해해서 한때 아이누인들은 고려를 신의 나라로 모신다는 황당한 이야기가 돌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옛 대고려제국의 용법을 따라 '대고려' 혹은 '대고려공화국' 등으로 지칭하나 공식적으로는 '대(大)'를 붙이지 않는다. 국무원의 공식적인 입장은 '고려공화국의 국제적 지위는 국제법과 연합국기구헌장에 의해 전세계 국가들과 평등함이 보장되므로 국호에 별도의 수식어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제1공화국 출범 초기에는 제도권 정치인들 사이에서 비공식적으로 '신고려' 혹은 '새고려'라는 호칭도 사용되었으나 2공화국 이후로는 거의 사장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찾아볼 수 없다.

국가

1898년 혁명과 함께 기존 대고려제국 애국가는 황제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 기존 가사를 폐지하고 공화국 체제에 맞춰 개사한 2~4절을 덧붙여 그대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승전 이후 인민들의 공화국에 대한 소속감과 시민 참여가 늘어나면서 제2공화국이 수립, 제국 애국가에 기반을 둔 기존 애국가를 폐지하고 새로운 국가인 '공화국 노래'가 제정되어 1919년부터 공식적으로 시행되었다.

'공화국 노래'는 제1차 세계대전을 비롯하여 고려인들의 투쟁사를 바탕으로 한 가사와 행진곡풍의 음율로 많은 인기를 끌었으나, 그만큼 호전적인 내용 때문에 타 국가 - 특히 1차대전의 주 상대였던 연, 제 등 - 에서 큰 반감을 초래했으며 국내에서도 아동, 청소년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특히 1931년 10.18 정변으로 집권한 제3공화국은 오언성 국무령의 종신집권을 시도하면서 제국 애국가 수준의 국가원수 찬양 가사로 도배된 4절과 5절을 무리하게 삽입하고 기존 1절 대신 4절을 공식적으로 제창하게 하면서 국내에서도 큰 저항에 부딪쳤다. 결국 1942년 혁명으로 제3공화국이 무너진 이후 4절과 5절은 폐지되었으나, 10년간의 군부정권 시기동안 국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공화국 노래'에 대한 반발이 거세져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50년 국민공모를 통해 새롭게 '고려가'를 국가로 채택하였다.

역사

상고시대

고려의 기원은 대체로 B.C.8000년~B.C.3000년경 요강 연안에서 형성된 요강문화(신락-홍산문화)로 보고 있으며, 요강문화의 유산을 대거 물려받은 조선, 그리고 조선의 영향을 받아 수립된 북부의 부여와 남부의 삼한(진) 등이 고려사의 도입부를 구성한다.

요강문화는 비슷한 시기 존재했던 황하문명에 비해 문화에서 문명으로의 발전은 다소 늦었으며 그 과정에서 황하문명과의 대규모 교류 흔적도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B.C.2000년경에 이르면 요강 동안지역에서 1천명 이상 규모의 도시국가들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황하문명 계통의 국가들과 구분되어 '발'혹은 '조선' 등으로 불리는 연맹체를 수립하였으며 B.C.4세기에 이르러서는 왕을 칭하며 연과 국경 영토분쟁을 벌이기도 하였으나, B.C. 3세기에 이르러 연의 침공으로 요강 동안지역은 연의 지배하에 복속되고 청천강-대동강 연안의 평야지대에 위치한 왕검성 세력이 새롭게 조선의 주도권을 차지하였다.

왕검성 시대의 조선은 부자세습이 정착하며 연맹왕국에서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마지막 왕 준왕 시기 연 출신의 망명 장수 위만이 쿠데타를 일으켜 조선왕위를 차지하고 위씨 왕조를 열었다. 위조는 연에서 수입한 철기를 조선에 전파하고 2대 위기문을 거쳐 3대 위우거에 이르기까지 남방의 진과 중원의 한나라 간 중계무역으로 큰 부를 쌓았으나, 일방적으로 직무역을 차단당한 진과 한 모두의 불만을 산 끝에 한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아 B.C.108년 왕검성이 함락되고 멸망한 옛 땅에는 낙랑군을 비롯한 군현이 설치되었다.

조선 후기인 B.C.3세기 경에는 동시베리아 지역에서 남하한 주민집단과 조선계 주민들이 조선의 영향을 받아 동요강 상류-은강 중류 유역과 동해안 일대에 일단의 도시국가군을 형성하였다. 이 중 은강 유역의 도시국가들은 퉁구스계의 숙신 등과 교류 및 항쟁을 거듭하며 부여 해씨 왕조로 발전하였으며, 동해안 북부의 집단은 옥저, 남부의 집단은 예 등으로 불렸다. 은강 평원지대에서 연맹왕국으로 발전한 부여와 달리 옥저와 예는 동해안 지역의 지형조건으로 인해 국가체계를 수립하는데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이 시기의 고려 동북방은 고고학적 발굴 결과 예맥계와 숙신계가 뚜렷한 영역 구분 없이 공존하고 있는 양상을 보인다. 이 중 부여에서 갈라져나온 홀본 세력이 고려로 발전하여 오늘날 고려의 직계 조상이 된다.

한편 조선 남부지방에서는 역시 조선의 영향을 받은 한(韓)계 주민들이 높은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도시국가들을 수립하는데, 오늘날 천안시 지역에 위치해있던 목지국이 이들의 맹주로 여겨지며 특히 목지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연맹체를 마한이라 칭했다. 이와 함께 낙동강 중류-형산강 일대의 진한, 섬진강-낙동강 하류의 변한 등이 마한과 함께 삼한을 형성하였으며 통칭 진국이라고도 하였다.

고왕조 시대

B.C.40년경, 부여 왕실의 방계였던 추모는 왕위계승전에서 패하여 부여 남부로 탈출하였으며, 압록강 인근 홀본(현 안환도 환주시)에 위치한 고구려국(혹은 홀본국)에 이르러 국왕 연타발의 사위가 되었다. 이후 B.C.37년 연타발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며 고씨를 칭하여 고려 고왕조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고구려는 압록강 중상류의 맥계 국가들을 병합하고 인근 말갈 및 부여계 세력과 교전을 벌이며 세력을 확대하였으며, 2대 국왕인 유리명왕대에 홀본에서 압록강 연안의 국내성으로 천도하였다.

고왕조 건국 초기에는 추모왕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으며 은강 연안 평원지대를 차지하여 강대한 국력을 자랑하던 부여가 주요 항쟁 대상이었으나, 이후 1세기 후반~2세기경에 이르면 중국 왕조들과의 투쟁이 격렬해진다. 2세기 초반까지는 중국 군현 및 요동 공손씨 정권 등이 주요 교전 대상이었으나, 242년에 이르면 동천왕의 서안평 공격에 관구검이 지휘하는 위나라 중앙군이 전면 침공하는 등 그 규모도 대거 확대되었다. 결국 위진남북조 시기의 혼란기를 틈타 311년 국가적 숙원이었던 서안평을 점령하면서 압록강 하구까지 진출에 성공하였고, 이어 313년 낙랑군, 314년 대방군이 고려에 의해 멸망하고 편입된 반면 부여는 285년 선비 모용부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국력이 쇠락하면서 고려-부여 관계는 역전을 맞이했다.

한편 고왕조의 건국과 비슷한 시기 조선 동남부 형산강 유역에서는 진한의 사로국이 영역을 확대해 신라로 발전하였으며(B.C.57년), 조선 중부에서는 추모왕의 의붓아들이자 홀본왕 연타발의 외손인 온조가 홀본 유민들을 이끌고 건국한 백제가(B.C.18년) 목지국으로부터 마한의 주도권을 빼앗아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고려는 대방군을 점령하면서 백제와 국경을 접하였으며, 이에 고려와 백제는 369년 치양 전투를 시작으로 장장 150년에 걸친 피튀기는 혈전을 벌였다. 여제전쟁 초기 백제는 남평양(현 한해도 한성시)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391년 광개토대왕의 등장으로 고려가 요동 영유권을 확립하고 부여를 정복하였으며 한강 이북까지 진격함에 따라 여제간 균형은 급격하게 무너졌다. 백제는 왜, 가야와 연합하여 신라를 침공하고 한수 이북의 영토를 일부 회복하는 등 이 구도를 타파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였으며, 특히 광개토대왕의 사후 장수왕 대 발발한 내전과 숙청을 틈타 신라, 북위 등과 연계하여 고구려에 대한 견제를 추진하였다. 신라 역시 400년 이래 노골적인 고려의 내정간섭을 탈피하고 고려의 남부영토를 획득하기 위해 백제와의 동맹을 택하였다.

그러나 427년 평양성 천도와 함께 공식 국호를 '고려'로 선언한 장수왕은 450년대까지 고구려 국내의 정치적 사안을 해결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468년 신라의 실직주를 침공하여 점령한 데 이어 치밀한 사전 공작 끝에 475년 백제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여 개로왕과 왕제 부여문주를 비롯한 백제 왕족들을 대거 학살 혹은 압송하고 백제의 도성인 한성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한성백제의 멸망 직후 백제는 왜에 체재중이던 진사왕의 손자 부여사나와 개로왕의 둘째아우 부여곤지가 서로 백제왕위를 자처하며 귀국은 하지도 못하는 최악의 대공위시대가 도래했으며, 왕족들이 모두 죽거나 끌려가 섭정조차 세우지 못하는 상황에서 백제 지방군과 신라군의 대응마저 늦어 고려군의 쾌속 남진을 저지할 수 없었다. 고려군은 백제 북부를 무인지경으로 휩쓸어 금강 하구의 기벌포와 덕근군(現 홍청도 은진시)에 이르렀으며, 477년에서야 신라의 지원으로 왕위 경쟁에서 승리한 부여곤지가 귀국해 완산성에 도읍을 정하였으나 이미 국가 체제가 마비 상태에 이르렀다. 이 때 백제가 멸망하지 않은 것은 고려가 주 전선이었던 북방전선에서 유연과의 지두우 분할을 기획하면서 상당한 시일과 인력이 소모될 것으로 예상되는 백제 지역 평정을 일시 중단했기 때문이다.

대신 백제 중앙의 처참한 몰락을 지켜본 서남부의 마한계 신규 편입세력들은 완산으로 몰려와 공백상태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정쟁을 벌이며 끈 떨어진 왕실을 압박했고, 나제동맹이 유효성을 상실했다고 판단한 신라마저 백제의 남은 유산이라도 차지하겠다는 생각으로 백제 동부 국경지대를 공격했다. 그러나 장수왕은 481년 백제에 이어 신라를 공격하여 수도 서라벌을 점령, 소지마립간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죽령 이남 40개 성을 획득하였으며, 486년에는 대가야까지 공격해 멸망시킴으로써 나제간 동맹은 물론 상호 연락까지 차단하였다.

이러한 장수왕대의 왕성한 남진정책은 고려가 조선 최대의 생산력과 산업잠재력을 지닌 한강 유역을 안정적으로 영위할 수 있게 하였으며, 470년대까지 상호 동맹을 통해 고려의 남진을 저지할 수 있었던 조선 남부 국가들은 고려의 동맹국을 빙자한 번국으로 전락하였다. 490년대 후반 북위와의 대치와 물길과의 전쟁은 고려의 남방 통제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사건이었으나, 고려는 이를 남방 국가들로부터 병력을 차출해 전선에 동원해버리는 것으로 대응했다. 결국 문자명왕 시기 고려의 북방 전쟁에 끌려다니며 남은 국력을 소진한 남방 국가들은 백제와 신라의 주도로 가야 소국들에 대한 흡수합병을 시도하였으나, 고려는 태종 안장왕대에 들어와 가야 병합 시도를 빌미로 대대적인 침공을 가해 523년 백제가 멸망하였으며 528년에는 신라가, 529년에는 조선반도 최후의 독립국이었던 고자국이 멸망하면서 조선반도 전역이 고려의 강역에 편입되었다.

태종 안장왕의 조선반도 통일로 고려는 드디어 한반도의 드높은 생산력을 기반으로 북방에서의 전쟁에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으나, 정작 안장왕은 통일 3년만에 백제왕실 출신의 부여자상에게 암살당하였고, 그 아우인 안원왕은 545년 평양성을 피로 물들인 후계내전에 대처하지 못하여 왕권의 실추를 야기했으며, 안장왕의 암살 혐의로 백제왕실 출신 인사들을 가혹하게 처리하면서 구 백제 유민들의 반감을 자극하였다. 결국 통일 30년만인 559년 금마성주 해이강이 완산성을 점령하고 백제 부활을 선포한데 이어, 565년에는 이에 자극받은 동남부에서도 금관태수 김무력이 금관국 재건을 선포, 566년에는 책성 일대에서 부여계 주민들이 숙신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등 국내 정세는 혼란에 휩싸였다.

안장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평원왕은 이러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우선 동부여 출신인 동부 세력을 동원하여 책성 지역 반란을 진압하였다. 자신들의 세력기반인 책성 지역의 혼란상을 눈뜨고 볼 수 없었던 동부 세력의 호응으로 이는 상당한 효과를 거두어 570년이 되면 책성 일대는 완전히 평정되었다. 그러나 577년 후주의 침공으로 남부지방 평정은 미루어졌고, 이들 지역은 580년이 되어서야 구 신라 박씨왕가의 공격으로 후금관이 무너지고 582년 후백제가 멸망하면서 23년간의 조선반도 재통일이 완수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동서남북의 내우외환을 진압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우며 특히 책성 일대를 사실상 사유화한 동부의 연씨 가문이 급부상하였고, 이들이 병권을 관할하는 막리지 지위를 독점, 세습하며 안원-양원왕대 약화된 왕권에 큰 위협이 되었다. 평원왕과 뒤를 이은 영양왕은 이를 제어하기 위해 온달과 같은 수도의 하급 귀족 및 평민세력을 등용하며 친위세력을 육성, 견제를 시도하였으나, 중원대륙에서 남북조시대가 종결되고 통일제국인 수나라가 등장하여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안보환경에 직면하면서 이들 고위귀족 세력에 협조를 요청할수밖에 없게 되었다.

연왕조 시대

대왕조 시대

온왕조 시대

이왕조 시대

공화국 시대

자연환경

흔히 '6천리 강산'으로 불리는 바와 같이 국토가 상당히 긴 모양을 취하고 있다. 정확히는 서남-동북 방면으로 길고 서북 방면으로는 거리가 다소 짧은 편이다. 본토 최남단인 전무도 해남군 땅끝마을에서 최북단인 하유도 하음군 하음세관까지는 직선거리로 2,357㎞에 달한다. 국토면적은 총 875,526㎢로 세계 40위 수준이다.

위도로는 북위 33도~북위 53도(본토는 북위 34도~북위 53도), 경도로는 동경 121-131도 사이에 위치한다. 때문에 지도를 그리기 위해 잘라보면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가 나오지만, 상술했듯이 좌하-우상으로 길쭉한 형태라 보통 동남부의 일본열도, 서북부의 여진, 거란 등의 지역은 엄청난 공간낭비를 보여주거나 각종 범례 등으로 도배되기 일쑤다. 이처럼 남북으로 국토가 길기 때문에 1월 평균기온은 최남단 지자체인 제주 대정시에서 10℃이나 최북단 지자체인 하유도 하음군에서는 -22℃이며, 8월 평균기온은 제주 대정시에서 30℃이나 하유도 하음군에서는 17℃ 수준이다.

최고봉은 백두산(2,750m)으로, 백두산맥과 장백산맥의 발원지로써 고려 4대 지방 중 조선, 요동, 부여의 3개 지방을 형성하는 근원이다. 이 때문에 고왕조 시기부터 태백산, 백산 등으로 불리며 신성시되었다. 다만 4대 지방 중 옥저지방은 백두-장백산맥과는 별개의 계통인 옥저산맥에 기반하고 있으며, 옥저산맥의 최고봉인 도양산은 해발 2,090m로 백두산에 비해 전체적인 고도는 낮으나 빙하의 침식작용으로 백두-장백산맥과 뚜렷이 구별되는 지형 특성을 볼 수 있다.

주요 하천으로는 최장하천인 흑강(4,444㎞)을 비롯해 은강(1,725㎞), 요강(1,390㎞), 우술강(897㎞), 압록강(790㎞), 두만강(521㎞) 등이 있다. 다만 흑강은 국경하천이자 국제하천으로 절반 정도의 영역은 여진과 소련의 국경지대를 형성하며, 고려의 관리하에 놓인 구역은 은강 합수부 이후의 약 2,790㎞ 정도다. 요강 역시 상류 697㎞ 구간은 거란령에 속한다. 때문에 이들 하천의 수자원 관리를 두고 근대 이후 많은 분쟁이 있었으며, 이는 동아시아연맹의 출범에도 기여했다. 대부분의 대형하천은 요동, 부여, 원동지역에 위치하며 조선에는 낙동강(510㎞)을 제외하면 500㎞ 이하의 중소형하천들이 분포한다.

주요 호수로는 고려 최대 호수인 미타호와 가장 깊은 호수인 백두산 천지 등이 있다. 특히 미타호는 코코누르 호수에 이은 동아시아 2위의 대형호수이며, 그 외에 외룡호, 파라도, 동·서번포 등의 자연호수와 약 100여개의 인공호수가 산재해있다.

  1. 북부 3도
  2. 서부 3주
  3. 麗-日관계와 같이 고려를 한글자로 표현할 때 주로 사용한다. 과거 高로 칭하는 경우도 있으나 일반적인 사용빈도가 매우 높은 단어인 탓에 주된 사용법은 아니었고 현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