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문서: {{공사 중인 문서}} ==개요== 한만영은 조선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초대,7대 공화국 주석(2405~2413,24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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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민공화국의 건국자이며, '''어만(어머니)'''이라는 별명과 함께 장량과 소하,제갈량에 비견되는 뛰어난 행정능력으로 공화국을 별볼일 없던 깡촌에서 단기간에 강대한 문명국으로 끌어올린 인물이다. 또한 8년 임기를 마치고는 다시 일반 시민으로 돌아가며 공화국의 민주 정치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말년에는 공화국 내의 종교 갈등이 격화되었고, 이에 따라 벌어진 내전에서 약세인 공화국군을 이끌며 승리를 거두었으나 싸움에서 입은 부상의 악화로 2433년 8월 15일에 별세하였다. 향년 51세. | 조선인민공화국의 건국자이며, '''어만(어머니)'''이라는 별명과 함께 장량과 소하,제갈량에 비견되는 뛰어난 행정능력으로 공화국을 별볼일 없던 깡촌에서 단기간에 강대한 문명국으로 끌어올린 인물이다. 또한 8년 임기를 마치고는 다시 일반 시민으로 돌아가며 공화국의 민주 정치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말년에는 공화국 내의 종교 갈등이 격화되었고, 이에 따라 벌어진 내전에서 약세인 공화국군을 이끌며 승리를 거두었으나 싸움에서 입은 부상의 악화로 2433년 8월 15일에 별세하였다. 향년 51세. | ||
==생애== | ==생애== | ||
===어린 시절=== | |||
한만영은 2382년 4월 15일, 평양 일대에 분포하던 여러 군소 부족장 중 하나인 '''한일규'''(2347~2403)과 어머니 '''민희'''(2350~2399) 사이의 둘째 아이이자 장녀로 태어났다. 장자인 '''한시영'''(2375~2401)은 차기 부족장으로 키워진 반면, 만영과 동생들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랐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총명한 끼를 드러내어 독서에 빠져 다양한 학문을 익혔다. 그의 아버지인 한일규 족장은 이를 제지하는 대신 마음껏 책을 갖다주며 성장을 도와주었다. <br> | |||
그러던 중에 만영 바로 아래의, 두 살 터울의 여동생 '''지영'''이 열병으로 어린 나이에 죽게 된다. 이 사건으로 만영은 큰 슬픔에 빠졌으며, 마음을 정리한 뒤에는 '''사건''' 이전에 존재하던, 아파도 사람이 쉽게 죽지 않고, 굶지도 않는 풍요로운 세상을 이루리라는 꿈을 품게 된다. | |||
===부족의 성장과 평양의 통합=== | |||
만영이 슬픔을 이겨내고 가슴에 깊은 뜻을 품는 동안, 일규의 부족은 나날이 그 세를 불려가고 있었다. 대동강변을 선제적으로 차지하고 그 이점을 이용해, 일규가 처음 족장이 되었을 때 오백에도 못 미치던 부족은, 이제 천 단위의 알아주는 부족이 되었다. | |||
이에는 아들 시영의 공로가 컸으니, 훌륭한 싸움꾼이자 리더로 성장한 시영은 아버지를 따라 말 안듣는 이들의 대가리를 직접 으깨면서도, 따뜻하게 부족민들을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br> | |||
그러나 평양의 여러 부족들이 점차 발전되어 가면서, 새로운 정치체제에 대한 필요가 제기되어 갔다. 그러나 이를 실행하기에는 단 한 부족만의 힘으로는 부족했다. 여러 부족들의 단단한 결속이 필요했다. | |||
이 시점이 한만영이 막 15세가 된 것과 맞물린다. 한만영의 언변에 감탄한 부족장 일규는, 그를 부족의 외교관으로써 써먹기 시작한다. 그러나 만영의 능력은 일규를 뛰어넘는 것이었으니, 만영은 그의 아버지와 오빠가 칼과 활, 그리고 도끼로 이뤄낸 것보다 더 많은 부족들을, 더 빨리, 단시간 만에 융합한다.<br> | |||
평양의 모든 부족들이 연합하여 뭉치게 된 것이다. | |||
이후 만영은 이 부족 연합체의 핵심 정치인으로 탈바꿈하여, 자신의 지식과 두뇌를 이용해 평양의 재도시화 및 기반시설 개선, 광역화 등을 수행해 나간다.<br> | |||
그러나 시영은 이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연합체란 것을 결성한 공은 전적으로 만영에게 돌아갔고, 열심히 부족을 위해 싸워온 자신은 외부에서 사실상 악역의 이미지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 |||
자신보다 한참 어린 만영이 이렇게 부각됨은, 자칫 자신의 후계자라는 지위가 위협받는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 |||
조급함에 그는,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위험한 싸움에 자주 나갔다. 아버지와 가족들이 말렸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조급함은 더 강해질 뿐이었다. | |||
그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것은 단지 그의 명을 재촉할 뿐이었다. 2401년 6월, 황주를 치러 갔던 그는 화살에 맞고 27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는다. | |||
한때 부족 최고의 전사라는 칭호에 비하면 초라한 죽음이었다. | |||
한편 그보다 2년 정도 앞서 2399년, 어머니 희가 50의 나이로 목숨을 다하니, 일규로써는 불행이 연이어 닥치는 것이었다. | |||
이제 그에게는 딸 둘, 만영과 희영뿐이었다. 새로 부인을 들이고 싶지도 않았으며, 설령 그런다 해도 자식을 낳고 장성하기까지는 한참 걸릴 것이었다.<br> | |||
한일규는 얼마 뒤 평양 전체의 대족장으로 추대되었지만, 실제로 대족장에 걸맞는 무언가를 행사하는 이는 그의 딸, 만영이었다. 일규는 무언가를 더 이상 적극적으로 진행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 |||
막 성년이 지난 만영은, 이 시점에 이미 평양의 사실상 지도자가 되어 있던 것이다. | |||
===조선 인민 공화국의 건국=== | |||
조만간 새 나라가 세워질 것이라는 예측이 모두에게 돌았고, 만영은 새 나라를 세우기 위한 계획을 차근차근 짜기 시작했다. | |||
어릴 때의 사건 이후로, 만영이 바라는 나라의 모습은 사변 이전의 부강한 세상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기록에 의하면 사변 이전의 평양은 주체교도들의 완전한 지배 하에 있어, 다른 이들은 즉시 처형되거나 강제노역에 시달렸다고 하니 그 모습이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 |||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최선의 정부인가? | |||
수 개월, 해가 넘어가도록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으나,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 |||
그러던 중 고대 도서관 유적에서 찾은 찢어진 책, 그리고 대동강을 거슬러 상인이 갖고온 그 책의 나머지 부분. | |||
그것을 보자마자 만영의 눈은 번뜩 뜨였다. | |||
이것을 사람들에게 설명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해시키는 데에는 조금 더 많은 시간이, 수용시키는 것에는 훨씬 많은 시간이 걸렸다. | |||
그러나 마침내, 그것은 이뤄졌다. | |||
한편, 한일규는 2403년에 사망했다. | |||
만영은 부족을 물려받는 대신, 부족제를 폐기하고 이들을 '시민'으로 하도록 했다. | |||
곧이어 다른 부족장들 몇몇도 부족장 직위를 내려놓으니, 문명국으로써의 기틀이 갖춰진 것이다. | |||
2405년 5월 2일, 한만영의 선언과 함께, '''조선 인민 공화국'''이 수립되고, 즉시 치러진 선거에서 만장일치로 한만영이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 |||
이때가 한만영이 24살일 때였다. | |||
-'''''《한만영 열전》인용''''' | |||
===공화국의 발전=== | |||
한만영은 주변의 다른 부족들과 소국들로 눈길을 돌렸다. 많은 군주들은 자발적으로 귀부했고, 공화국 정부로부터 관직에 재임명받으며 자신의 영지를 계속 다스릴 수 있었다. 처음에는 부정적으로 보던 이들도 한만영의 설득과, 발달한 평양을 직접 방문하고 나서는 대부분 마음을 바꿔 병합에 찬성했다. 한편으로는 병합에 끝까지 거부하던 소수의 영주들에게는, 동맹/편입된 영주들과 평양의 중앙군 등으로 무력으로 진압하고, 그들의 영지를 평양의 정치인들과 지방 부족들에게 배분했다.<br> | |||
새로 늘어난 땅에도, 곧 근대적인 공화국의 체제가 들어왔다. 포장된 도로가 주요 도시들 사이와 내부에 깔렸고, 학교와 의원, 치안시설이 들어섰다. 또한 공화국 공통으로 적용되는 법률이 도입되었다. 이렇게 기반시설이 갖춰지고 나자, 각지의 산물들이 손쉽게 움직일 수 있었고, 중국과 한반도의 다른 지역들로 통하는 무역이 발달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쌓이는 부는 평양으로 들어왔고, 한때 야만적 부족들만이 살던 황량한 땅 평양은 한반도 내에서 손에 꼽히는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 |||
한만영의 집권 기간 동안, 공화국은 그 어디보다도 빠른 속도로 성장하였다. 평민들과 영주들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한만영의 영구 집권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세 번째 선거가 다가오던 2413년, "8년이면 족하다"며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를 통해 '''임기제'''가 확고히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 |||
===결혼과 휴식기=== | |||
2기 집권 초이던 2410년, 공화국 주석 한만영은 '''석민후'''란 청년과 혼인한다. 그는 만영의 소꿉친구였으나, 지배 계급 출신이 아닌 대장장이의 아들이었다. 그런 탓에 다른 상류층의 정치인들은 그를 좋게 보지 않았고, 함께 다니기도 어려웠다. 둘만의 시간을 갖는 것도 한만영의 엄청난 업무량과 바쁜 시간 탓에 힘들었고, 사실상 둘의 생활은 한만영이 퇴임한 2413년부터이다. | |||
이후 만영은 시골에 집을 짓고는 그곳에서 조용히 살면서, 가족과의 시간을 보낸다. 때때로 후임 주석들이 조언을 구하러 오기도 하였고, 이에 부응하여 몇 번의 외출을 하는 것이 다였다. 2416년에는 첫 아들인 '''한상홍'''이 태어났고, 2419년에는 둘째 '''한상일''', 2421년에는 막내딸 '''한상희'''가 태어났다. 공화국의 위대한 건국자는, 자신이 꿈꾸던 이상을 위해, 그리고 자신과 가족을 위해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았다. 이 시기에 한만영의 외부에 드러난 활동은, 옛 서적들을 지금의 언어로 알기 쉽게 옮기거나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글로 쓰는 정도가 다였다. | |||
하지만 시대는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 |||
===[[주체교도의 난]]=== | |||
가족과 조용히 살아가던 만영을 다시 끌어낸 것은, 격동하는 공화국의 정치 상황이었다. 주체교도 정치인들과 영주들은 공공연히 공화국의 정부를 전복시키고 자신들만의 나라를 세울 뜻을 밝혔고, 천도교도들 역시 이에 대응해 주체교를 공화국에서 금지시켜야 한다는 발언을 이어나가며 나라가 두 쪽으로 갈라지는 상황이었다.<br> | |||
한만영은 오랜 침묵을 깨고 성명을 내어, 갈등의 종식을 호소하였다. 이는 어느 정도의 효과는 분명히 있었으나, 뇌관이 타들어 가는 것을 막지는 못한 채, 그 길이만을 늘일 뿐이었다.<br> | |||
2428년 9월 23일, 당시 주석이던 '''최현갑'''은 연설 도중 난입한 자객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를 신호로 하여 각지에서 사전에 약속된 듯 주체교도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수도인 평양에서도 주체교도 민병대가 봉기해 빈 주석궁을 장악하려 했다.<br> | |||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br> | |||
임시 투표에서 한만영은 즉시 주석에 재선출되었다. 공화국군의 총지휘권을 맡게 된 그는 당장 수도에서의 소요사태를 종식시켜야 했다. 무기창고를 탈취한 주체교 지도자 '''우 린'''의 병력은 평양 시내의 60%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었고, 정부군은 각지에서 분열되어 간신히 방어만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br>한만영은 즉시 시민군을 모집하고, 그 사이 주석궁으로 몰려드는 반란군 수십 명을 직접 쓸어 버렸다.<ref>과장이란 의견도 있음</ref> 이후 평양에서는 정부군이 우세로 전환, 반란군을 압박하는 모양새가 되었으나 외부에서 급보가 들어왔으니, 평성백 '''선우곽''', 평원백이자 반군의 지도자이던 '''리기상'''이 반란군을 구원하고, 평양을 점령하기 위해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평양의 외곽 지역에는 외성이 구축되어 있었으나, 내부에 반군을 놔둔 상태로는 지키기 어려웠다. | |||
====모란봉을 지켜라!==== | |||
모란봉은 평양 북쪽에 있는 언덕으로, 성벽이 지나는 중요한 길목이자 북쪽의 반군이 평양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꼭 넘어야 할 요새가 있는 곳이었다. 이곳을 지키던 이는 '''김형교'''(2399~2441, 후에 주석 역임) 장군이었다. 리기상의 병력이 오기 전에 이 요새가 평양의 반군에게 뚫린다면, 반군의 주력군에게 길목 하나를 허무하게 내 주는 것이었고, 이는 곧 패전을 의미했다. <br> | |||
평양 내의 반란군 지도자 '''우린'''은, 이 병력만으로 평양 전체 장악은 무리란 것을 깨닫고, 모란봉에 있는 요새 하나를 집중적으로 공격해 점령하는 것으로 외부의 구원군이 손쉽게 입성할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모란봉의 수비대는 40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우린의 병력은 약 3~4천 정도였다. 한만영이 이끄는 중앙군은 거리 등의 이유로 자신들보다 최소 2~3일은 뒤에야 도착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 |||
<작성중> | |||
<references/> | |||
[[분류:부서진 마천루]] | [[분류:부서진 마천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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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한만영은 조선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초대,7대 공화국 주석(2405~2413,2429~2433)을 역임했다. 조선인민공화국의 건국자이며, 어만(어머니)이라는 별명과 함께 장량과 소하,제갈량에 비견되는 뛰어난 행정능력으로 공화국을 별볼일 없던 깡촌에서 단기간에 강대한 문명국으로 끌어올린 인물이다. 또한 8년 임기를 마치고는 다시 일반 시민으로 돌아가며 공화국의 민주 정치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말년에는 공화국 내의 종교 갈등이 격화되었고, 이에 따라 벌어진 내전에서 약세인 공화국군을 이끌며 승리를 거두었으나 싸움에서 입은 부상의 악화로 2433년 8월 15일에 별세하였다. 향년 51세.
생애
어린 시절
한만영은 2382년 4월 15일, 평양 일대에 분포하던 여러 군소 부족장 중 하나인 한일규(2347~2403)과 어머니 민희(2350~2399) 사이의 둘째 아이이자 장녀로 태어났다. 장자인 한시영(2375~2401)은 차기 부족장으로 키워진 반면, 만영과 동생들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랐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총명한 끼를 드러내어 독서에 빠져 다양한 학문을 익혔다. 그의 아버지인 한일규 족장은 이를 제지하는 대신 마음껏 책을 갖다주며 성장을 도와주었다.
그러던 중에 만영 바로 아래의, 두 살 터울의 여동생 지영이 열병으로 어린 나이에 죽게 된다. 이 사건으로 만영은 큰 슬픔에 빠졌으며, 마음을 정리한 뒤에는 사건 이전에 존재하던, 아파도 사람이 쉽게 죽지 않고, 굶지도 않는 풍요로운 세상을 이루리라는 꿈을 품게 된다.
부족의 성장과 평양의 통합
만영이 슬픔을 이겨내고 가슴에 깊은 뜻을 품는 동안, 일규의 부족은 나날이 그 세를 불려가고 있었다. 대동강변을 선제적으로 차지하고 그 이점을 이용해, 일규가 처음 족장이 되었을 때 오백에도 못 미치던 부족은, 이제 천 단위의 알아주는 부족이 되었다.
이에는 아들 시영의 공로가 컸으니, 훌륭한 싸움꾼이자 리더로 성장한 시영은 아버지를 따라 말 안듣는 이들의 대가리를 직접 으깨면서도, 따뜻하게 부족민들을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평양의 여러 부족들이 점차 발전되어 가면서, 새로운 정치체제에 대한 필요가 제기되어 갔다. 그러나 이를 실행하기에는 단 한 부족만의 힘으로는 부족했다. 여러 부족들의 단단한 결속이 필요했다.
이 시점이 한만영이 막 15세가 된 것과 맞물린다. 한만영의 언변에 감탄한 부족장 일규는, 그를 부족의 외교관으로써 써먹기 시작한다. 그러나 만영의 능력은 일규를 뛰어넘는 것이었으니, 만영은 그의 아버지와 오빠가 칼과 활, 그리고 도끼로 이뤄낸 것보다 더 많은 부족들을, 더 빨리, 단시간 만에 융합한다.
평양의 모든 부족들이 연합하여 뭉치게 된 것이다.
이후 만영은 이 부족 연합체의 핵심 정치인으로 탈바꿈하여, 자신의 지식과 두뇌를 이용해 평양의 재도시화 및 기반시설 개선, 광역화 등을 수행해 나간다.
그러나 시영은 이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연합체란 것을 결성한 공은 전적으로 만영에게 돌아갔고, 열심히 부족을 위해 싸워온 자신은 외부에서 사실상 악역의 이미지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만영이 이렇게 부각됨은, 자칫 자신의 후계자라는 지위가 위협받는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조급함에 그는,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위험한 싸움에 자주 나갔다. 아버지와 가족들이 말렸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조급함은 더 강해질 뿐이었다.
그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것은 단지 그의 명을 재촉할 뿐이었다. 2401년 6월, 황주를 치러 갔던 그는 화살에 맞고 27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는다.
한때 부족 최고의 전사라는 칭호에 비하면 초라한 죽음이었다.
한편 그보다 2년 정도 앞서 2399년, 어머니 희가 50의 나이로 목숨을 다하니, 일규로써는 불행이 연이어 닥치는 것이었다.
이제 그에게는 딸 둘, 만영과 희영뿐이었다. 새로 부인을 들이고 싶지도 않았으며, 설령 그런다 해도 자식을 낳고 장성하기까지는 한참 걸릴 것이었다.
한일규는 얼마 뒤 평양 전체의 대족장으로 추대되었지만, 실제로 대족장에 걸맞는 무언가를 행사하는 이는 그의 딸, 만영이었다. 일규는 무언가를 더 이상 적극적으로 진행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막 성년이 지난 만영은, 이 시점에 이미 평양의 사실상 지도자가 되어 있던 것이다.
조선 인민 공화국의 건국
조만간 새 나라가 세워질 것이라는 예측이 모두에게 돌았고, 만영은 새 나라를 세우기 위한 계획을 차근차근 짜기 시작했다. 어릴 때의 사건 이후로, 만영이 바라는 나라의 모습은 사변 이전의 부강한 세상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기록에 의하면 사변 이전의 평양은 주체교도들의 완전한 지배 하에 있어, 다른 이들은 즉시 처형되거나 강제노역에 시달렸다고 하니 그 모습이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최선의 정부인가? 수 개월, 해가 넘어가도록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으나,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고대 도서관 유적에서 찾은 찢어진 책, 그리고 대동강을 거슬러 상인이 갖고온 그 책의 나머지 부분. 그것을 보자마자 만영의 눈은 번뜩 뜨였다. 이것을 사람들에게 설명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해시키는 데에는 조금 더 많은 시간이, 수용시키는 것에는 훨씬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마침내, 그것은 이뤄졌다. 한편, 한일규는 2403년에 사망했다. 만영은 부족을 물려받는 대신, 부족제를 폐기하고 이들을 '시민'으로 하도록 했다. 곧이어 다른 부족장들 몇몇도 부족장 직위를 내려놓으니, 문명국으로써의 기틀이 갖춰진 것이다.
2405년 5월 2일, 한만영의 선언과 함께, 조선 인민 공화국이 수립되고, 즉시 치러진 선거에서 만장일치로 한만영이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이때가 한만영이 24살일 때였다.
-《한만영 열전》인용
공화국의 발전
한만영은 주변의 다른 부족들과 소국들로 눈길을 돌렸다. 많은 군주들은 자발적으로 귀부했고, 공화국 정부로부터 관직에 재임명받으며 자신의 영지를 계속 다스릴 수 있었다. 처음에는 부정적으로 보던 이들도 한만영의 설득과, 발달한 평양을 직접 방문하고 나서는 대부분 마음을 바꿔 병합에 찬성했다. 한편으로는 병합에 끝까지 거부하던 소수의 영주들에게는, 동맹/편입된 영주들과 평양의 중앙군 등으로 무력으로 진압하고, 그들의 영지를 평양의 정치인들과 지방 부족들에게 배분했다.
새로 늘어난 땅에도, 곧 근대적인 공화국의 체제가 들어왔다. 포장된 도로가 주요 도시들 사이와 내부에 깔렸고, 학교와 의원, 치안시설이 들어섰다. 또한 공화국 공통으로 적용되는 법률이 도입되었다. 이렇게 기반시설이 갖춰지고 나자, 각지의 산물들이 손쉽게 움직일 수 있었고, 중국과 한반도의 다른 지역들로 통하는 무역이 발달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쌓이는 부는 평양으로 들어왔고, 한때 야만적 부족들만이 살던 황량한 땅 평양은 한반도 내에서 손에 꼽히는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한만영의 집권 기간 동안, 공화국은 그 어디보다도 빠른 속도로 성장하였다. 평민들과 영주들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한만영의 영구 집권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세 번째 선거가 다가오던 2413년, "8년이면 족하다"며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를 통해 임기제가 확고히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결혼과 휴식기
2기 집권 초이던 2410년, 공화국 주석 한만영은 석민후란 청년과 혼인한다. 그는 만영의 소꿉친구였으나, 지배 계급 출신이 아닌 대장장이의 아들이었다. 그런 탓에 다른 상류층의 정치인들은 그를 좋게 보지 않았고, 함께 다니기도 어려웠다. 둘만의 시간을 갖는 것도 한만영의 엄청난 업무량과 바쁜 시간 탓에 힘들었고, 사실상 둘의 생활은 한만영이 퇴임한 2413년부터이다.
이후 만영은 시골에 집을 짓고는 그곳에서 조용히 살면서, 가족과의 시간을 보낸다. 때때로 후임 주석들이 조언을 구하러 오기도 하였고, 이에 부응하여 몇 번의 외출을 하는 것이 다였다. 2416년에는 첫 아들인 한상홍이 태어났고, 2419년에는 둘째 한상일, 2421년에는 막내딸 한상희가 태어났다. 공화국의 위대한 건국자는, 자신이 꿈꾸던 이상을 위해, 그리고 자신과 가족을 위해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았다. 이 시기에 한만영의 외부에 드러난 활동은, 옛 서적들을 지금의 언어로 알기 쉽게 옮기거나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글로 쓰는 정도가 다였다.
하지만 시대는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주체교도의 난
가족과 조용히 살아가던 만영을 다시 끌어낸 것은, 격동하는 공화국의 정치 상황이었다. 주체교도 정치인들과 영주들은 공공연히 공화국의 정부를 전복시키고 자신들만의 나라를 세울 뜻을 밝혔고, 천도교도들 역시 이에 대응해 주체교를 공화국에서 금지시켜야 한다는 발언을 이어나가며 나라가 두 쪽으로 갈라지는 상황이었다.
한만영은 오랜 침묵을 깨고 성명을 내어, 갈등의 종식을 호소하였다. 이는 어느 정도의 효과는 분명히 있었으나, 뇌관이 타들어 가는 것을 막지는 못한 채, 그 길이만을 늘일 뿐이었다.
2428년 9월 23일, 당시 주석이던 최현갑은 연설 도중 난입한 자객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를 신호로 하여 각지에서 사전에 약속된 듯 주체교도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수도인 평양에서도 주체교도 민병대가 봉기해 빈 주석궁을 장악하려 했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임시 투표에서 한만영은 즉시 주석에 재선출되었다. 공화국군의 총지휘권을 맡게 된 그는 당장 수도에서의 소요사태를 종식시켜야 했다. 무기창고를 탈취한 주체교 지도자 우 린의 병력은 평양 시내의 60%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었고, 정부군은 각지에서 분열되어 간신히 방어만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만영은 즉시 시민군을 모집하고, 그 사이 주석궁으로 몰려드는 반란군 수십 명을 직접 쓸어 버렸다.[1] 이후 평양에서는 정부군이 우세로 전환, 반란군을 압박하는 모양새가 되었으나 외부에서 급보가 들어왔으니, 평성백 선우곽, 평원백이자 반군의 지도자이던 리기상이 반란군을 구원하고, 평양을 점령하기 위해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평양의 외곽 지역에는 외성이 구축되어 있었으나, 내부에 반군을 놔둔 상태로는 지키기 어려웠다.
모란봉을 지켜라!
모란봉은 평양 북쪽에 있는 언덕으로, 성벽이 지나는 중요한 길목이자 북쪽의 반군이 평양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꼭 넘어야 할 요새가 있는 곳이었다. 이곳을 지키던 이는 김형교(2399~2441, 후에 주석 역임) 장군이었다. 리기상의 병력이 오기 전에 이 요새가 평양의 반군에게 뚫린다면, 반군의 주력군에게 길목 하나를 허무하게 내 주는 것이었고, 이는 곧 패전을 의미했다.
평양 내의 반란군 지도자 우린은, 이 병력만으로 평양 전체 장악은 무리란 것을 깨닫고, 모란봉에 있는 요새 하나를 집중적으로 공격해 점령하는 것으로 외부의 구원군이 손쉽게 입성할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모란봉의 수비대는 40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우린의 병력은 약 3~4천 정도였다. 한만영이 이끄는 중앙군은 거리 등의 이유로 자신들보다 최소 2~3일은 뒤에야 도착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작성중>
- ↑ 과장이란 의견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