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
(→생애) |
||
52번째 줄: | 52번째 줄: | ||
== 생애 == | == 생애 == | ||
1923년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의 [[빈치]]의 유대인 가정에서 출생하였다.<ref>이 지역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고향이기도 하다.</ref> 1941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리아 침공|독일이 이탈리아 본토를 침공하자]] 시칠리아 섬으로 도피하였으며, 1942년 [[이탈리아 제국군|이탈리아 왕국군]]에 징병되어 1945년까지 군에서 복무하였다. | |||
전후 그는 [[피렌체 대학교]]의 법학과에 진학하였으나 흥미를 보이지 못하고 학생 운동을 전전하다가 대학에서 중퇴하였다. 이 당시에는 [[이탈리아 공산당]]에 소속된 젊은 공산주의자였지만, 1948년 [[베를린 봉쇄]] 당시 소련의 결정을 비판하며 공산당을 탈당하고 [[이탈리아 사회당]]에 입당하여 활동하였다. | |||
이탈리아 사회당의 청년 조직인 [[이탈리아 사회당 청년 동맹]]에서 인지도를 쌓은 그는 1954년 [[이탈리아 사회당]]의 토스카나 주 서기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2년 뒤에는 중앙당 서기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리비아 독립 전쟁]]에서 이탈리아 정부를 비판하고 리비아의 민주적 독립을 지지하면서 인지도를 넓혀갔다. 1964년 전당 대회에서 아놀도 파르미리는 전체 득표의 72.1%의 찬성으로 야당 당수로 선출되었다. | |||
=== 야당 당수로서 === | === 야당 당수로서 === | ||
=== 총리 1기 === | === 총리 1기 === | ||
57번째 줄: | 63번째 줄: | ||
=== 총리 2기 === | === 총리 2기 === | ||
=== 총리 퇴임 이후 === | === 총리 퇴임 이후 === | ||
== 평가 == | == 평가 == | ||
== 여담 == | == 여담 == |
2022년 3월 1일 (화) 16:17 판
![]() 이탈리아 제국 총리 | ||||||||||||||||||||||||||||||||||||||||||||||||
---|---|---|---|---|---|---|---|---|---|---|---|---|---|---|---|---|---|---|---|---|---|---|---|---|---|---|---|---|---|---|---|---|---|---|---|---|---|---|---|---|---|---|---|---|---|---|---|---|
[ 펼치기 · 접기 ]
|
이탈리아 제국 제5·7대 총리 아놀도 파르미리 Arnoldo Parmili | |
---|---|
출생 | 1923년 6월 15일 |
이탈리아 왕국 토스카나 주 빈치 | |
사망 | 2012년 6월 19일 (향년 89세) |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 루카 | |
국적 | ![]() |
임기 | 제5대 총리 |
1969년 1월 13일 ~ 1977년 1월 10일 | |
제7대 총리 | |
1980년 4월 16일 ~ 1983년 7월 6일 | |
가족 | 아내, 자녀 3명 |
학력 | 피렌체 황립대학교 (법학 / 중퇴) |
종교 | 유대교 |
소속 정당 | 사회당 |
약력 | 이탈리아 사회당 중앙서기위원장 이탈리아 사회당 부당수 이탈리아 사회당 당수 이탈리아 제국 제5대 총리 이탈리아 제국 제7대 총리 |
수훈 | 이탈리아 왕관 기사훈장 (Ordine della Corona d'Italia) |
개요
이탈리아의 정치인. 제5대 총리와 제7대 총리를 역임하였으며,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11년) 동안 집권한 총리이다. 집권 기간 도중 이탈리아의 복지 제도를 크게 확충하였으며, 68 혁명 당시의 의제들을 국가 정책에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83년 키프로스 전쟁의 패전 책임으로 사임하였다.
생애
1923년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의 빈치의 유대인 가정에서 출생하였다.[1] 1941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이탈리아 본토를 침공하자 시칠리아 섬으로 도피하였으며, 1942년 이탈리아 왕국군에 징병되어 1945년까지 군에서 복무하였다.
전후 그는 피렌체 대학교의 법학과에 진학하였으나 흥미를 보이지 못하고 학생 운동을 전전하다가 대학에서 중퇴하였다. 이 당시에는 이탈리아 공산당에 소속된 젊은 공산주의자였지만, 1948년 베를린 봉쇄 당시 소련의 결정을 비판하며 공산당을 탈당하고 이탈리아 사회당에 입당하여 활동하였다.
이탈리아 사회당의 청년 조직인 이탈리아 사회당 청년 동맹에서 인지도를 쌓은 그는 1954년 이탈리아 사회당의 토스카나 주 서기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2년 뒤에는 중앙당 서기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리비아 독립 전쟁에서 이탈리아 정부를 비판하고 리비아의 민주적 독립을 지지하면서 인지도를 넓혀갔다. 1964년 전당 대회에서 아놀도 파르미리는 전체 득표의 72.1%의 찬성으로 야당 당수로 선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