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 독립 전쟁

이탈리아 제국의 대외 전쟁·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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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독립 전쟁
Guerra Libia-Italiana
Libyan Independence War
1958년 12월 11일, 리비아 벵가지에서 이탈리아군의 모습
날짜
1957년 8월 11일 ~ 1962년 8월 10일[1]
장소
이탈리아령 리비아 전역
원인
이탈리아 제국 정부의 가혹한 식민통치
리비아 투쟁 전선의 영향력 확대
교전국
이탈리아 리비아 투쟁 전선 (~1961)
리비아 임시 정부 (1961~)
이집트
알제리 민족해방전선
지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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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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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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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000명 (1957년)
78,400명 (19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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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300명 (1957년)
557,800명 (1962년)
34,000명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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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00명 전사
11,500명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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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000명 전사
42,100명 부상
민간인 131,200명 사망 및 실종
총합 210,500명 이상 사망
결과
리비아 독립군의 승리
토브룩 독립 조약 체결
영향
이탈리아령 리비아의 해체
리비아의 독립

개요

이탈리아 제국의 식민지였던 이탈리아령 리비아의 독립을 목적으로 한 리비아 투쟁 전선[2]이탈리아 제국군과 벌인 전쟁이다. 전쟁의 결과 리비아 투쟁 전선의 정치적, 전술적 승리가 이뤄져 이탈리아령 리비아리비아 아랍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독립하게 된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알제리 전쟁, 인도네시아 재침공,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과 더불어 제국주의의 종말을 알린 사건으로 꼽힌다. 특히나 그중 이 전쟁은 단순한 정치적 승리 뿐만 아니라 전술적 승리를 거뒀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를 가진다.

배경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리아 왕국은 독일에게 빼앗긴 이탈리아 반도를 떠나, 시칠리아를 거쳐 이탈리아령 리비아에 망명정부를 수립하였다. 1944년 미국, 영국, 이탈리아의 합동 작전으로 이탈리아 본토가 해방되었으며 이때 수많은 리비아인들이 이탈리아군 소속으로 이탈리아의 해방을 위해 싸웠다. 이탈리아 왕국 정부는 리비아인들에게 양해를 구하면서 전쟁에 적극 협조할 시 자치권을 확대하고 점진적으로 독립시켜줄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으며 자치권은 제한적으로만 주어졌다. 1947년 리비아 내 자치 의회 설립이 허가되었지만 일정 이상의 세금을 낼 수 있는 고위층 인사들에게만 투표권이 주어졌고, 투표권을 가진 사람들의 대다수는 이탈리아계였다. 1951년 8월 법의 개정을 통하여 월 160리라의 참정권 세금은 월 50리라로 대폭 삭감되었으나 여전히 하류층 아랍인들은 선거에 참여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탈리아 제국 정부는 리비아의 독립 요구를 지속적으로 묵살하며 주민투표 실시 요구를 거부하였다.

그러던 와중 1952년부터 1953년까지 이탈리아령 리비아에서 시행된 핵 개발 실험인 알레기에리 프로젝트는 대다수 리비아인들에게 반발을 가져왔다. 리비아인들에게 양해조차 구하지 않고 시행된 핵 실험은 리비아인들이 이탈리아 정부가 약속한 자치권과 독립 추진이 사기였음을 깨닫게하였다. 1954년, 밀라노에서 열린 핵실험 및 제한적 자치권 부여에 대한 항의 시위가 이탈리아 정부에 의해 무력 진압되면서 위기가 고조되었다. 이러한 사건들로 인하여 이탈리아 내부에서도 이탈리아 공산당을 필두로 한 좌익 세력에 의하여 제국 정부의 리비아 통치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졌다.

비슷한 시기 리비아를 비롯한 아랍 내에서는 아랍 사회주의 이론이 급속도로 전파되었으며 이는 리비아인들에게 독립의 구체적인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아랍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지식인들과 민족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은 1955년 10월 15일 리비아 벵가지에서 모여 리비아 투쟁 전선(جبهة النضال الليبي, Fronte di Lotta Libico)의 설립을 선언하였다. 이 조직은 공식 명칭보다는 약자인 FDLL로 더 자주 불렸다.

FDLL은 소련 정부와 이집트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리비아 내에서 급속도로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이탈리아 정부는 FDLL을 공식 단체로 인정하지 않고 수뇌부와 조직원들을 체포하였다. FDLL은 구금된 동지들을 석방하기 위해 리비아의 주요 관공서와 치안 기관들을 습격하였다. 결정적인 사건은 1957년 8월 6일 있었던 레오 피레니체 암살 사건으로, 리비아의 부총독이자 기독교민주당의 전 사무국장이었던 레오 피레니체를 FDLL 조직원들이 자폭 테러로 암살한 사건을 뜻한다.

이탈리아 제국 정부는 레오 피레니체 암살 사건을 자국에 대한 FDLL의 선전포고라고 간주하고 1957년 8월 11일 리비아 일대에 병력 3만명을 파병하여 FDLL과 리비아 독립주의자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FDLL 역시 이탈리아 제국과 이탈리아령 리비아 식민 정부에 전쟁을 선포함으로서 이탈리아 독립 전쟁이 발발하였다.

전개

영향

1962년 5월 12일 이탈리아 제국리비아 임시정부 간의 평화 조약인 벵가리 독립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에 따라 8월 11일까지 이탈리아 제국군이 리비아 내에서 모두 철수하며 8월 11일 건국될 리비아 신정부에게 권한을 이양하도록 하였다. 이로서 전쟁 5년이 지난 1962년 8월 11일 이탈리아령 리비아는 해체되고 리비아 아랍사회주의 인민 공화국이 건국된다.

마르코 페르니체 총리는 패전 책임을 지고 1962년 5월 30일 사퇴하였다. 후임으로 로베르토 체레미사가 취임하였으며 조기 총선이 실시되어 반전을 주장한 이탈리아 사회당이 약진하였다.

후일의 68 혁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점진적으로 이탈리아의 대외 정책이 제국주의에서 탈피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평가

이탈리아의 평가

리비아의 평가

제3국의 평가

사후 처리

대중매체에서

여담

각주

  1. 실질적인 전투는 1962년 5월 12일까지 이뤄졌다.
  2. 1961년부터는 리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임시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