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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가 극명히 갈리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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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 평가''': 바오라이는 국가 주도의 강력한 경제건설을 추진했고 덕분에 오르도스의 경제는 빠르게 성장했다. 또한 바오라이의 정권시 부패했을지언정 바오라이 그 자신은 매우 청렴했고 여성 편력도 없었다  
*'''긍정적 평가''': 바오라이는 국가 주도의 강력한 경제건설을 추진했고 덕분에 오르도스의 경제는 빠르게 성장했다. 또한 바오라이의 정권시 부패했을지언정 바오라이 그 자신은 매우 청렴했고 여성 편력도 없었다.


*'''부정적 평가''': 바오라이 시기 오르도스의 자유와 민주주의는 매우 크게 후퇴했다. 형식적인 체육관 선거는 국민의 정치 참여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했다. 그의 정권은 수많은 사람들을 고문하고 살해했으며 언론을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시켰다.
*'''부정적 평가''': 바오라이 시기 오르도스의 자유와 민주주의는 매우 크게 후퇴했다. 형식적인 체육관 선거는 국민의 정치 참여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했다. 그의 정권은 수많은 사람들을 고문하고 살해했으며 언론을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시켰다.

2022년 7월 5일 (화) 09:46 판

쿠리오 / 긴배 / 도프 / 벨지엄 / DK / Dentr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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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오르도스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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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집정부제
초대 2대
차오리쉬 리찐민
대통령중심제
3-6대
바오라이
의원내각제
7대 8대 9대 10대
다궈밍 첸웨이팡 보핑쩌 린쓰얼
오르도스 공화국 제3-6대 대통령
바오라이
彪來 | Bao Lai
출생 1946년 7월 20일
중화민국 간쑤성 란저우시
(現 오르도스 공화국 란저우직할시)
사망 2007년 1월 28일 (향년 60세)
오르도스 공화국 란저우직할시 군참모부
사인: 심장마비
국적 오르도스 공화국
재임기간 제3-6대 대통령
1991년 10월 14일 ~ 2007년 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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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없음
자녀 없음
민족 회족
종교 무종교 (무신론)
학력 황포군관학교
성향 권위적 우익
권위주의적 보수주의, 초강경 세속주의, 반공주의, 비동맹주의
정당 애국당

개요

오르도스의 군인, 정치인, 독재자.

생애

군인 바오라이

1947년 중화민국 마가군벌 란저우시에서 태어났다. 국공내전이 공산장의 승리로 끝난 이후에는 중공의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했다. 그가 사관생도이던 때, 동아시아 전쟁이 터졌다. 바오라이는 사관생도의 신분으로 전선으로 끌려가 신장에서 소련군과 전투를 치르다가 소련군에 항복했다.

이후 오르도스 공동군정청의 경무부 공안이 되었다가 간쑤성의 회족 출신이란 신분 덕분에 군정청의 내무군 비슷한 조직이었던 오르도스 보안군에 대위로 특별임관했다. 이후 계속해서 진급하던 중, 1986년 오르도스가 완전히 독립했다. 하지만 오르도스의 정치와 사회는 극히 혼란스러웠고, 수도여단장이던 바오라이는 그 때를 틈타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의 부대는 진압군과의 전투 한 번 없이 무혈입성했다. 정권을 잡은 바오라이는 이전 정부 인사들을 숙청하고 형식적인 체육관 선거를 거쳐 스스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독재자 바오라이

오르도스의 최고권력자가 된 바오라이는 자신의 취약한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하여 본격적인 경제 개발을 추진하려했다. 애시당초 그의 계획은 반공주의를 표방하며 미국의 원조를 받아 경제 건설을 위한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었는데, 쿠데타 직후 소련이 붕괴하여 그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다. 설사 소련이 붕괴하지 않았더라도 당시는 데탕트 기운이 충만할 때라서 그의 계획이 먹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태연합에까지 접촉했다 실패하자 결국 해외의 은행들로부터 빚을 얻어 경제건설을 위한 자금으로 사용했다.

이런 위태위태한 시작과는 달리 그의 경제건설 계획은 무난하게 흘러갔다. 전국이 고속도로로 연결되었고 값싼 노동력 덕분에 의류공장 등이 대규모로 건설됐다. 세수가 늘고 교육예산이 증액되었다. 문맹율은 크게 떨어졌고 국민소득이 크게 상승했다. 주요 도시에는 10층이 넘는 빌딩들이 들어섰다. 바오라이는 자신의 경제 개발 업적으로 정권 연장을 정당화했다.

이러한 눈부신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바오라이가 마냥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그의 권력에 대한 도전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공산주의자와 이슬람 원리주의자는 물론이고 민주주의자까지 탄압했다. 그는 그의 눈에 거슬리는 신문과 방송사는 모조리 폐쇄시켰고 언론은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했다. 인권은 추락했고 고문과 사법살인이 일상화되었다. 이러한 폭정은 처음에는 그를 지지했던 국민이 서서히 그에게서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급작스러운 죽음

2005년, 군사정권 내부에서 군사정권의 온갖 비윤리적인 행태에 대한 폭로문서가 외부로 유출되었다. 이는 민주주의자, 사회주의자, 이슬람주의자들의 반정부운동에 불을 지폈다.  바오라이는 계엄령을 발령하여 진압에 나섰지만 시위는 나날이 커져만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군부 내에서도 젊은 장교들을 중심으로 민정 이양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자신의 후배를 자신의 손으로 숙청하기가 뭐했던 것인지 바오라이는 군참모부에 방문해 장교들을 회유하기로 했다. 참모부 회의실에서 장교들과 토론[1]을 하던 바오라이는 점점 언성을 높이더니 갑자기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그는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사망했다. 향년 60세.

성향

매우 권위적인 사람이었고 반공주의자이기도 했다. 회족이었는데도 종교를 혐오하여 강경한 세속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평가

평가가 극명히 갈리는 인물이다.

  • 긍정적 평가: 바오라이는 국가 주도의 강력한 경제건설을 추진했고 덕분에 오르도스의 경제는 빠르게 성장했다. 또한 바오라이의 정권시 부패했을지언정 바오라이 그 자신은 매우 청렴했고 여성 편력도 없었다.
  • 부정적 평가: 바오라이 시기 오르도스의 자유와 민주주의는 매우 크게 후퇴했다. 형식적인 체육관 선거는 국민의 정치 참여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했다. 그의 정권은 수많은 사람들을 고문하고 살해했으며 언론을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시켰다.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 1991 정계 입문
애국당 1991-2007 창당, 사망

선거 이력

선거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락 비고
1991 대선 오르도스 미래의 오르도스 846표 (90.4%) 당선 초선
1995 대선 오르도스 912표 (93.5%) 당선 재선
1999 대선 오르도스 미래의 오르도스 868표 (92.7%) 당선 3선
2003 대선 오르도스 943표 (94.0%) 당선 4선

각주

  1. 을 빙자한 훈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