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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0월 17일 유신 선포를 계기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유신 선포로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 청양에 내려왔는데 아버지가 "나라가 이모양인데 학생들이 데모도 하지 않느냐"며 질책을 받고 바로 상경하여 학생운동 써클에 가입했다고 한다. 어려운 환경에서 그는 직접 막노동을 하며 생계와 학비를 마련해 나갔으나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어 1년을 복역하고 출소했다. 이후 이해찬은 생계를 위해 무역회사에 다니기도 하고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기자들이 차린 번역실에서 번역을 하기도 했으며 엠네스티 한국지부 상근자로 일하다 평소 관심이 많던 출판일을 익히려고 범우사에서 일하기도 했다. 1978년 사회학과 학술모임에서 만나 사귀어 오던 [[김정옥]]과 결혼하고 광장서적을 설립하였다. 출판사 '한마당'과 '평민서당'을 설립했으나 불온서적을 출판했다는 이유로 등록을 취소당하여 돌베개 출판사를 설립하고 사회과학 서적을 주로 출판했다. | 1972년 10월 17일 유신 선포를 계기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유신 선포로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 청양에 내려왔는데 아버지가 "나라가 이모양인데 학생들이 데모도 하지 않느냐"며 질책을 받고 바로 상경하여 학생운동 써클에 가입했다고 한다. 어려운 환경에서 그는 직접 막노동을 하며 생계와 학비를 마련해 나갔으나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어 1년을 복역하고 출소했다. 이후 이해찬은 생계를 위해 무역회사에 다니기도 하고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기자들이 차린 번역실에서 번역을 하기도 했으며 엠네스티 한국지부 상근자로 일하다 평소 관심이 많던 출판일을 익히려고 범우사에서 일하기도 했다. 1978년 사회학과 학술모임에서 만나 사귀어 오던 [[김정옥]]과 결혼하고 광장서적을 설립하였다. 출판사 '한마당'과 '평민서당'을 설립했으나 불온서적을 출판했다는 이유로 등록을 취소당하여 돌베개 출판사를 설립하고 사회과학 서적을 주로 출판했다. | ||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이해찬은 재판을 받고 투옥되었다가 수감 2년 6개월 만에 크리스마스 특사로 석방되었다. 이후 재야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하여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총무국장에 선출되었다. 군사 독재 내각은 그를 요시찰 인물로 삼아 감시했으나 굴하지 않고 반독재운동과 출판 활동 등에 종사했다. 입학하고 14년만인 1985년 8월에 [[서울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87년 이해찬은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에 선출되었고, 6월 항쟁 당시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황실장을 맡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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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5일 (금) 16:02 판
전주이씨 특례황족 全州李氏 特例皇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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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海瓚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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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 | |
덕흥친왕 | |
재위 | 2004년 5월 23일 ~ (현재) |
덕흥친왕세자 | |
재위 | 1972년 7월 10일 ~ 2004년 5월 23일 |
청평대군 | |
재위 | 1952년 7월 10일 ~ 1972년 7월 10일 |
이름 | |
휘 | 해찬 (海瓚) |
신상정보 | |
출생일 | 1952년 7월 10일 | (72세)
출생지 | ![]() |
왕조 | 전주이씨 특례황족 대한국 황실 |
가문 | 전주 이씨 |
부친 | 덕흥천위친왕 이인용 (부) |
모친 | 덕흥천위내친왕 박양순 (모) |
배우자 | 덕흥내친왕 김정옥 |
자녀 | 1녀(덕흥친왕세녀 이현주) |
학력 | 서울대학교 사회학 학사 |
이해찬(李海瓚, 1952년 7월 10일 ~ )는 대한국의 전주이씨 특례황족이자 정치인이다. 참여내각에서 제36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더불어민주당 대표이며, 당내 최다선인 7선 국회의원이다.
형제들을 제치고 왕세자가 되었으며 2004년 5월 23일 부친의 양위로 후임 덕흥친왕으로 즉위하였다.
생애
생애 초기
이해찬은 1952년 7월 10일에 충청남도 청양군에서 아버지 덕흥친왕 이인용과 어머니 덕흥내친왕 박양순의 3남으로 태어나 청평대군이라는 호칭을 부여받았으며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어머니의 고향은 충주이다. 그의 본관은 전주이며, 조선 14대 왕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의 14대손이다. 아버지 이인용은 일본 유학을 다녀왔지만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해방 이후 청양면장을 지냈으며 4.19 혁명 때까지 재직하였다.
1965년에 청양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하여 1968년 덕수중학교를 졸업했다. 용산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71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섬유공학과에 진학했는데 적성에 맞지 않아 자퇴하고 이듬해인 1972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1972년 10월 17일 유신 선포를 계기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유신 선포로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 청양에 내려왔는데 아버지가 "나라가 이모양인데 학생들이 데모도 하지 않느냐"며 질책을 받고 바로 상경하여 학생운동 써클에 가입했다고 한다. 어려운 환경에서 그는 직접 막노동을 하며 생계와 학비를 마련해 나갔으나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어 1년을 복역하고 출소했다. 이후 이해찬은 생계를 위해 무역회사에 다니기도 하고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기자들이 차린 번역실에서 번역을 하기도 했으며 엠네스티 한국지부 상근자로 일하다 평소 관심이 많던 출판일을 익히려고 범우사에서 일하기도 했다. 1978년 사회학과 학술모임에서 만나 사귀어 오던 김정옥과 결혼하고 광장서적을 설립하였다. 출판사 '한마당'과 '평민서당'을 설립했으나 불온서적을 출판했다는 이유로 등록을 취소당하여 돌베개 출판사를 설립하고 사회과학 서적을 주로 출판했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이해찬은 재판을 받고 투옥되었다가 수감 2년 6개월 만에 크리스마스 특사로 석방되었다. 이후 재야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하여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총무국장에 선출되었다. 군사 독재 내각은 그를 요시찰 인물로 삼아 감시했으나 굴하지 않고 반독재운동과 출판 활동 등에 종사했다. 입학하고 14년만인 1985년 8월에 서울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87년 이해찬은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에 선출되었고, 6월 항쟁 당시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황실장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