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번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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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size:14px;letter-spacing:1px;margin-bottom:10px;color:#db2a1d;font-weight:bold;">2. 강희제의 철번과 오삼계의 궐기</div>
<div style="font-size:14px;letter-spacing:1px;margin-bottom:10px;color:#db2a1d;font-weight:bold;">2. 강희제의 철번과 오삼계의 궐기</div>
조선 초기의 법률은 대명률(대명법)에 의거하여 진행되었는데, 이는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자체적인 법률의 제정으로 이어졌고, 이와 함께 성리학적 방안에 입각한 사회복지제도가 탄생하였다. 세종 때에는 노비종모법과 남녀 모두 출산휴가를 지정하였으며 자자형을 금하여 인권을 상당히 진전시켰으며, 이후 사창제와 환곡제도, 대출제도를 개편하여 백성이 기아로 목숨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형법을 섬세히 조절하였다. 이후 열왕에 의해 유지되던 복지제도는 정조 때에 크게 확대되었는데, 상은제(국가수익보험)에 의해 수익의 안정성을 보장하도록 노력했으며, 노비감제법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여 오직 부채와 형벌에 의해서만 노비가 되고 세습은 불가하도록 지정하였다. 안민원을 설립하여 군사경찰에서 일반경찰로 전환함에 따라 경찰의 폭력성을 줄이고 전문성을 높여 사법윤리를 확보했으며, 재판변호제를 개편하여 모든 사람이 변호를 받고 삼심에 따라 공정하게 재판 받도록 하였다. 나아가 검약청을 설치하여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복지 확대의 기조는 고종 시기에 더욱 증가하여, 아동을 제외한 여성의 참정권을 보장하고, 서얼, 과부, 천직의 법적 차별을 없애고 연좌제, 계급제, 첩제, 부채노비제, 연좌제 철폐하는 등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형벌에 의해 공노비가 된 자를 제외한 모든 백성은 양인으로 평등한 대우를 받도록 하였다. 또한, 조혼, 무속신앙과 같은 악습을 뿌리뽑기 위해 대대적인 운동을 실시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모든 남녀 아동에 대해서 의무 교육을 실시하도록 조치하였다.
1661년 순치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강희제 초기에도 이러한 삼번의 위세와 청 조정의 기본 방침에는 변함이 없었다. 변한 것이라고는, 오삼계가 형식상 운남, 귀주 두 성의 지배권을 조정에 반납한 거 뿐이고 실질적 지배권은 여전히 오삼계에 있었다.
{{V|10}}이렇게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회를 이룩한 고종 재위기 위후 경희 시대에는 이러한 제도들이 안착되도록 노력하여 실제로 많은 차별이 철폐되었다. 성별, 재산, 혈통에 연연하지 않고 배움을 통해 능력을 개발하고 이를 통해 농상공업 나아가 국가와 가문에 기여할 수 있다는 능력주의가 전국에 만연하여 누구도 배우기를 꺼리지 않았고 오히려 향교 등에 다니지 않는 학력단절자에 대해서 무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농민들 또한 향학까지 진출하여 산학, 율학과 같은 학문을 배우고 농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또한 노비가 해방됨에 따라 지방 토호의 세력은 다소 약화되었으나 그 자본을 이용해 상공업으로 전환하는데 박차를 가하였으며, 대규모 지주의 경우 이를 처분하여 소작제가 크게 줄어들고 자영농과 상품작물재배가 큰 폭으로 증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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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669년이 되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조정의 최대 권력자인 구왈기야 오보이가 반란을 일으켰다 숙청당하고, 젊은 황제 강희제의 친정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강희제는 삼번의 폐지, 즉 철번을 마음 속으로 강하게 결심하고 있는 상태였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황제의 인사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며 삼번 지역에 자신의 사람들을 계속해서 부임시켰다. 그리고 여기에 불을 당긴 것이 평남왕 상가희였다.
 
1673년 상가희는 자신의 나이가 많고 병이 많음을 이유로 평남왕 자리를 장남 상지신에게 세습해줄 것과, 고향인 요동으로 돌아가게 해줄 것을 청원했다. 실제 번왕의 세습은 정남왕의 3대 세습을 통해 충분히 이뤄진 일이었다. 그러나 강희제는 넙죽 상가희의 귀향은 허용했으나 평남왕작의 세습은 허락치 않는 철번을 결정했다. 그리고 상가희는 이 결정을 수용했다. 아쉽고 섭섭하긴 했지만 청의 개국 공신으로서 황명에 따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강희제도 이 쿨한 결정을 환영하며 상가희를 띄워주기 바빴다.
 
문제는 나머지 두 번왕이었다. 황제의 평남 철번이 주는 메시지는 명백했다. 위기감을 느낀 경정충과 오삼계는 뒤따라 “상가희의 예를 따라 우리도 철번하게 해주세요”라는 상소를 올리며 강희제를 떠보았다. 그리고 강희제는 즉시 응 그래 철번이라며 이 상소문을 넙죽 받아먹었다.
 
물론 조정에서도 반대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허서리 송고투와 같은 조정 내 철번 반대론자들은 철번을 강행할 경우 삼번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고, 대만의 동녕 왕국이 호응하면 쉽게 제압이 어려울 것이라며 안정을 위해 철번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강희제와 철번 찬성론자들은 "삼번을 이대로 두면 나라가 망하고 저들의 인질을 우리가 잡고 있으니 섣불리 반란 못 일으키고, 설사 일으킨다 쳐도 오삼계 뿐, 나머지는 가담하지 않을 것이다."의 입장을 내세우며 초강경 모드로 돌입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오삼계가 먼저 행동에 나섰다. 오삼계의 측근과 가신들은 대부분 궐기할 것을 주장했고 오삼계가 최종적으로 결단을 내려 1673년 11월, 청이 멸망시킨 명의 복수와 오랑캐 토벌을 대의로 내세우며 황제가 임명한 운남순무(雲南巡撫) 주국치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킨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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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26일 (일) 14:52 판

2. 강희제의 철번과 오삼계의 궐기

1661년 순치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강희제 초기에도 이러한 삼번의 위세와 청 조정의 기본 방침에는 변함이 없었다. 변한 것이라고는, 오삼계가 형식상 운남, 귀주 두 성의 지배권을 조정에 반납한 거 뿐이고 실질적 지배권은 여전히 오삼계에 있었다.

그러나 1669년이 되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조정의 최대 권력자인 구왈기야 오보이가 반란을 일으켰다 숙청당하고, 젊은 황제 강희제의 친정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강희제는 삼번의 폐지, 즉 철번을 마음 속으로 강하게 결심하고 있는 상태였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황제의 인사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며 삼번 지역에 자신의 사람들을 계속해서 부임시켰다. 그리고 여기에 불을 당긴 것이 평남왕 상가희였다.

1673년 상가희는 자신의 나이가 많고 병이 많음을 이유로 평남왕 자리를 장남 상지신에게 세습해줄 것과, 고향인 요동으로 돌아가게 해줄 것을 청원했다. 실제 번왕의 세습은 정남왕의 3대 세습을 통해 충분히 이뤄진 일이었다. 그러나 강희제는 넙죽 상가희의 귀향은 허용했으나 평남왕작의 세습은 허락치 않는 철번을 결정했다. 그리고 상가희는 이 결정을 수용했다. 아쉽고 섭섭하긴 했지만 청의 개국 공신으로서 황명에 따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강희제도 이 쿨한 결정을 환영하며 상가희를 띄워주기 바빴다.

문제는 나머지 두 번왕이었다. 황제의 평남 철번이 주는 메시지는 명백했다. 위기감을 느낀 경정충과 오삼계는 뒤따라 “상가희의 예를 따라 우리도 철번하게 해주세요”라는 상소를 올리며 강희제를 떠보았다. 그리고 강희제는 즉시 응 그래 철번이라며 이 상소문을 넙죽 받아먹었다.

물론 조정에서도 반대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허서리 송고투와 같은 조정 내 철번 반대론자들은 철번을 강행할 경우 삼번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고, 대만의 동녕 왕국이 호응하면 쉽게 제압이 어려울 것이라며 안정을 위해 철번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강희제와 철번 찬성론자들은 "삼번을 이대로 두면 나라가 망하고 저들의 인질을 우리가 잡고 있으니 섣불리 반란 못 일으키고, 설사 일으킨다 쳐도 오삼계 뿐, 나머지는 가담하지 않을 것이다."의 입장을 내세우며 초강경 모드로 돌입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오삼계가 먼저 행동에 나섰다. 오삼계의 측근과 가신들은 대부분 궐기할 것을 주장했고 오삼계가 최종적으로 결단을 내려 1673년 11월, 청이 멸망시킨 명의 복수와 오랑캐 토벌을 대의로 내세우며 황제가 임명한 운남순무(雲南巡撫) 주국치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