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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width:100%;text-align:left;font-size:12px;word-spacing:1px;padding:15px 25px;color:rgba(219,42,29,.8);font-family:'GmarketSansMedium';font-weight:500; background:#222;background-image:linear-gradient(to right, rgba(0,0,0,0.3) 0%, rgba(79,55,2,0) 50%, rgba(0,0,0,0.3) 100%);text-shadow:0px 0px 2px rgba(0,0,0,0.35);border-radius:10px;box-shadow:0px 0px 3px rgba(0,0,0,.3);border:2px solid #db2a1d;margin-bottom:20px;"> | <div style="width:100%;text-align:left;font-size:12px;word-spacing:1px;padding:15px 25px;color:rgba(219,42,29,.8);font-family:'GmarketSansMedium';font-weight:500; background:#222;background-image:linear-gradient(to right, rgba(0,0,0,0.3) 0%, rgba(79,55,2,0) 50%, rgba(0,0,0,0.3) 100%);text-shadow:0px 0px 2px rgba(0,0,0,0.35);border-radius:10px;box-shadow:0px 0px 3px rgba(0,0,0,.3);border:2px solid #db2a1d;margin-bottom:20px;"> | ||
<div style="font-size:14px;letter-spacing:1px;margin-bottom:10px;color:#db2a1d;font-weight:bold;">2. 강희제의 철번과 오삼계의 궐기</div> | <div style="font-size:14px;letter-spacing:1px;margin-bottom:10px;color:#db2a1d;font-weight:bold;">2. 강희제의 철번과 오삼계의 궐기</div> | ||
1661년 순치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강희제 초기에도 이러한 삼번의 위세와 청 조정의 기본 방침에는 변함이 없었다. 변한 것이라고는, 오삼계가 형식상 운남, 귀주 두 성의 지배권을 조정에 반납한 거 뿐이고 실질적 지배권은 여전히 오삼계에 있었다. | |||
</div> | 그러나 1669년이 되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조정의 최대 권력자인 구왈기야 오보이가 반란을 일으켰다 숙청당하고, 젊은 황제 강희제의 친정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강희제는 삼번의 폐지, 즉 철번을 마음 속으로 강하게 결심하고 있는 상태였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황제의 인사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며 삼번 지역에 자신의 사람들을 계속해서 부임시켰다. 그리고 여기에 불을 당긴 것이 평남왕 상가희였다. | ||
1673년 상가희는 자신의 나이가 많고 병이 많음을 이유로 평남왕 자리를 장남 상지신에게 세습해줄 것과, 고향인 요동으로 돌아가게 해줄 것을 청원했다. 실제 번왕의 세습은 정남왕의 3대 세습을 통해 충분히 이뤄진 일이었다. 그러나 강희제는 넙죽 상가희의 귀향은 허용했으나 평남왕작의 세습은 허락치 않는 철번을 결정했다. 그리고 상가희는 이 결정을 수용했다. 아쉽고 섭섭하긴 했지만 청의 개국 공신으로서 황명에 따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강희제도 이 쿨한 결정을 환영하며 상가희를 띄워주기 바빴다. | |||
문제는 나머지 두 번왕이었다. 황제의 평남 철번이 주는 메시지는 명백했다. 위기감을 느낀 경정충과 오삼계는 뒤따라 “상가희의 예를 따라 우리도 철번하게 해주세요”라는 상소를 올리며 강희제를 떠보았다. 그리고 강희제는 즉시 응 그래 철번이라며 이 상소문을 넙죽 받아먹었다. | |||
물론 조정에서도 반대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허서리 송고투와 같은 조정 내 철번 반대론자들은 철번을 강행할 경우 삼번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고, 대만의 동녕 왕국이 호응하면 쉽게 제압이 어려울 것이라며 안정을 위해 철번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강희제와 철번 찬성론자들은 "삼번을 이대로 두면 나라가 망하고 저들의 인질을 우리가 잡고 있으니 섣불리 반란 못 일으키고, 설사 일으킨다 쳐도 오삼계 뿐, 나머지는 가담하지 않을 것이다."의 입장을 내세우며 초강경 모드로 돌입했다. | |||
그리고 예상대로 오삼계가 먼저 행동에 나섰다. 오삼계의 측근과 가신들은 대부분 궐기할 것을 주장했고 오삼계가 최종적으로 결단을 내려 1673년 11월, 청이 멸망시킨 명의 복수와 오랑캐 토벌을 대의로 내세우며 황제가 임명한 운남순무(雲南巡撫) 주국치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킨다.</div>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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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26일 (일) 14:52 판
1661년 순치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강희제 초기에도 이러한 삼번의 위세와 청 조정의 기본 방침에는 변함이 없었다. 변한 것이라고는, 오삼계가 형식상 운남, 귀주 두 성의 지배권을 조정에 반납한 거 뿐이고 실질적 지배권은 여전히 오삼계에 있었다.
그러나 1669년이 되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조정의 최대 권력자인 구왈기야 오보이가 반란을 일으켰다 숙청당하고, 젊은 황제 강희제의 친정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강희제는 삼번의 폐지, 즉 철번을 마음 속으로 강하게 결심하고 있는 상태였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황제의 인사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며 삼번 지역에 자신의 사람들을 계속해서 부임시켰다. 그리고 여기에 불을 당긴 것이 평남왕 상가희였다.
1673년 상가희는 자신의 나이가 많고 병이 많음을 이유로 평남왕 자리를 장남 상지신에게 세습해줄 것과, 고향인 요동으로 돌아가게 해줄 것을 청원했다. 실제 번왕의 세습은 정남왕의 3대 세습을 통해 충분히 이뤄진 일이었다. 그러나 강희제는 넙죽 상가희의 귀향은 허용했으나 평남왕작의 세습은 허락치 않는 철번을 결정했다. 그리고 상가희는 이 결정을 수용했다. 아쉽고 섭섭하긴 했지만 청의 개국 공신으로서 황명에 따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강희제도 이 쿨한 결정을 환영하며 상가희를 띄워주기 바빴다.
문제는 나머지 두 번왕이었다. 황제의 평남 철번이 주는 메시지는 명백했다. 위기감을 느낀 경정충과 오삼계는 뒤따라 “상가희의 예를 따라 우리도 철번하게 해주세요”라는 상소를 올리며 강희제를 떠보았다. 그리고 강희제는 즉시 응 그래 철번이라며 이 상소문을 넙죽 받아먹었다.
물론 조정에서도 반대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허서리 송고투와 같은 조정 내 철번 반대론자들은 철번을 강행할 경우 삼번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고, 대만의 동녕 왕국이 호응하면 쉽게 제압이 어려울 것이라며 안정을 위해 철번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강희제와 철번 찬성론자들은 "삼번을 이대로 두면 나라가 망하고 저들의 인질을 우리가 잡고 있으니 섣불리 반란 못 일으키고, 설사 일으킨다 쳐도 오삼계 뿐, 나머지는 가담하지 않을 것이다."의 입장을 내세우며 초강경 모드로 돌입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오삼계가 먼저 행동에 나섰다. 오삼계의 측근과 가신들은 대부분 궐기할 것을 주장했고 오삼계가 최종적으로 결단을 내려 1673년 11월, 청이 멸망시킨 명의 복수와 오랑캐 토벌을 대의로 내세우며 황제가 임명한 운남순무(雲南巡撫) 주국치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