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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 == 개요 == | ||
랑크의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공산주의 극좌 정당이다. | 랑크의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공산주의 극좌 정당이다. | ||
== 역사 == | |||
=== 인민전선의 부활 === | |||
랑크 내전 이후 인민전선은 무너지고 국민전선이 정권을 잡자 공산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아나키스트 계열은 탄압받기 시작했다. 그러자 공산 계열은 지하 조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제3제국 이후 공산정당마저 합법 정당으로 자리잡자 지하에서 나와 사회당을 창당하여 꾸준히 활동하기 시작했다. 인민전선의 지도자들은 1세대 지도자들에게 정통성을 인정받고 2세대 지도자들이 활동하여 다시 한번 인민전선을 규합했다. 쉬베르테 4세 시절에는 집권당이 뭐만하면 좌클릭을 해대면서 친사회주의적 정책을 펼치자, 인민전선 역시 세를 불려나가기 시작했다. 사회당은 원내 2당까지 약진하였으며, 친서민적인 이미지는 사회당과 인민전선의 큰 장점으로 발돋움했다. | |||
그러나 인민전선은 강경 공산주의 세력으로서, 툭하면 혁명을 부르고 거리의 과격 시위가 많아지고 사회 문제로 대두되면서, 인민전선의 인기는 식어가기 시작했다. 사회당은 온건 공산주의 노선을 채택하면서 인민전선과 선을 긋고 거리를 두려고 했고, 원내 공화당과 교섭단체를 이루면서 평화적인 정책을 추구했다. 이에 인민전선은 사회당의 배신이라면서 당시 사회당 당사를 점거하고 시위와 약탈을 이어갔다. 사회당과 인민전선의 갈등이 극에 달할 무렵, 사회당의 총선 결과가 당시 248석 중 단 2석만을 획득하며 사회당과 공산주의에 대한 인기가 어마어마하게 떨어졌음을 보여주었다. 그제야 사회당과 인민전선은 화해를 하고, 서로에게 협조적이고 순종적인 자세를 취했다. 다만 사회당은 1세대 인민전선에서 출발한 정당이고, 인민전선은 1세대와는 '''명백히 다른''' 2~3세대 지도층이 이끌었기 때문에 정통성 문제에서 사회당과 인민전선이 언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또한 사회당과 인민전선의 목소리는 다소 달랐기 때문에 인민전선의 주장이 사회주의 정책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 결국 사회당에 킬런 대표가 당선되자, 사회당과 인민전선 통합발기인대회를 열어, 두 당의 합당에 찬성하였으며, 이로서 1997년 랑크공산당이 탄생한 이후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
2024년 7월 15일 (월) 10:47 판
랑크 제국의 공산주의 정당 | ||||
---|---|---|---|---|
사회당 | → | 랑크공산당 | → | 현재 |
랑크인민전선 |
랑크공산당 | ||
---|---|---|
약칭 | RKP | |
표어 |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 |
창당 | 1997년 11월 5일 | |
선행 정당 | 사회당 랑크인민전선 | |
당대표 | 빌러스 / 상원 3선 (25~26, 28대) | |
상원 원내대표 | 코인쿱 / 상원 4선 | |
하원 원내대표 | 허레이프 / 하원 4선 | |
사무총장 | 템포레히 | |
이념 | 공산주의 사회민주주의 공화주의 레닌-마르크스주의 유럽 공산주의 신좌파 페미니즘 평등주의 | |
스펙트럼 | 극좌 | |
상의회 | 27석 / 300석 (9.0%) | |
평의회 | 21석 / 500석 (4.2%) | |
광역자치단체 | 1석 / 35석 (2.85%) | |
기초자치단체 | 석 / 석 (0%) | |
식민자치주 지역단체 | 0석 / 10석 (40%) | |
당색 | 노동의 피 (#FF0000) | |
당가 | 국제 노동 인터네셔널가 | |
당원수 | 약 120,350명 | |
정책연구소 | 노동복지연구소 | |
청년 조직 | 청년공산당 | |
국제 조직 | 공산당-노동자당 국제회의 |
개요
랑크의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공산주의 극좌 정당이다.
역사
인민전선의 부활
랑크 내전 이후 인민전선은 무너지고 국민전선이 정권을 잡자 공산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아나키스트 계열은 탄압받기 시작했다. 그러자 공산 계열은 지하 조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제3제국 이후 공산정당마저 합법 정당으로 자리잡자 지하에서 나와 사회당을 창당하여 꾸준히 활동하기 시작했다. 인민전선의 지도자들은 1세대 지도자들에게 정통성을 인정받고 2세대 지도자들이 활동하여 다시 한번 인민전선을 규합했다. 쉬베르테 4세 시절에는 집권당이 뭐만하면 좌클릭을 해대면서 친사회주의적 정책을 펼치자, 인민전선 역시 세를 불려나가기 시작했다. 사회당은 원내 2당까지 약진하였으며, 친서민적인 이미지는 사회당과 인민전선의 큰 장점으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인민전선은 강경 공산주의 세력으로서, 툭하면 혁명을 부르고 거리의 과격 시위가 많아지고 사회 문제로 대두되면서, 인민전선의 인기는 식어가기 시작했다. 사회당은 온건 공산주의 노선을 채택하면서 인민전선과 선을 긋고 거리를 두려고 했고, 원내 공화당과 교섭단체를 이루면서 평화적인 정책을 추구했다. 이에 인민전선은 사회당의 배신이라면서 당시 사회당 당사를 점거하고 시위와 약탈을 이어갔다. 사회당과 인민전선의 갈등이 극에 달할 무렵, 사회당의 총선 결과가 당시 248석 중 단 2석만을 획득하며 사회당과 공산주의에 대한 인기가 어마어마하게 떨어졌음을 보여주었다. 그제야 사회당과 인민전선은 화해를 하고, 서로에게 협조적이고 순종적인 자세를 취했다. 다만 사회당은 1세대 인민전선에서 출발한 정당이고, 인민전선은 1세대와는 명백히 다른 2~3세대 지도층이 이끌었기 때문에 정통성 문제에서 사회당과 인민전선이 언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또한 사회당과 인민전선의 목소리는 다소 달랐기 때문에 인민전선의 주장이 사회주의 정책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 결국 사회당에 킬런 대표가 당선되자, 사회당과 인민전선 통합발기인대회를 열어, 두 당의 합당에 찬성하였으며, 이로서 1997년 랑크공산당이 탄생한 이후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