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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프랑스 정부는 홍강 유역에 주둔 중인 프랑스군 중에서 1만을 진군시키기로 결정하였다.<br/>
결국 프랑스 정부는 홍강 유역에 주둔 중인 프랑스군 중에서 1만을 진군시키기로 결정하였다.<br/>
그리고 그 목표를 양광과 안남의 중간지대에 위치한 최대 도시 랑선(諒山)으로 하였다.<br/>
그리고 그 목표를 양광과 안남의 중간지대에 위치한 최대 도시 랑선(諒山)으로 하였다.<br/>
이들을 막아선 군대는 당경숭이 이끄는 경자군(景字軍) 7천과 풍자재(馮子材)가 이끄는 광무군 1만
이들을 막아선 군대는 당경숭이 이끄는 경자군(景字軍) 7천과 풍자재(馮子材)가 이끄는 광무군 1만<br/>
반정신(潘鼎新)이 이끄는 회군 4천 그리고 왕덕방(王徳榜)이 이끄는 호광군 5천이었다.<br/>
반정신(潘鼎新)이 이끄는 회군 4천 그리고 왕덕방(王徳榜)이 이끄는 호광군 5천이었다.<br/>
하지만 이들은 프랑스군을 막지 못하였고 랑선을 비롯한 그 일대가 프랑스군이 점령하게 되었다.<br/>
하지만 이들은 프랑스군을 막지 못하였고 랑선을 비롯한 그 일대가 프랑스군이 점령하게 되었다.<br/>

2025년 2월 28일 (금) 03:20 판



태평천국 대체역사 스레드

개요

天下大勢 (천하대세) 分久必合 (분구필합) 合久必分 (합구필분)

 
— 삼국지 연의

• 석달개가 천경사변에서 권력을 잡다.
-> 모든 경쟁자(왕)을 제거하고 유일한 왕이 되다.
-> 종교적 색채보다 반청에 중심을 두다.
-> 정상국가화 태평천국, 다만 지도층이 석달개의 측근들 즉 군벌이었다.
-> 태평천국은 점령지에서 징집령을 통해 대규모 군대를 만들다.
-> 북경을 정복하고 자금성을 장악하니, 양(梁)의 개국이었다.
-> 양이 개국된 뒤에도 석달개의 군대는 여전히 징집을 멈추지 않았다. (반란 진압 명목)

• 청나라의 명을 받은 향용(鄕勇), 향신(郷紳)
-> 상군(湘軍), 회군(淮軍), 초군(楚軍/楚勇)
-> 증국번, 이홍장, 좌종단
-> 상승군(Frederick Townsend Ward/Charles George Gordon)
-> 상첩군(Auguste Léopold Protet)
-> 부강전장(阜康錢莊), 호설암(胡雪巖), 자금 지원

• 염군(捻軍) 장락행(張樂行)
• 회민(回民) 백언호, 야쿱 벡 1862년부터 본격화
• 오병감(伍秉鑑)의 아들 오숭요(伍崇曜)
• 홍문
-> 가로회(哥老會), 사천성(四川省)
-> 천지회(天地會), 복건 연해지구 = 화교, 삼합회

• 사대구 우열(尢列), 손문(孫文). 양학령(楊鶴齡). 진소백(陳少白) 넷 다 60년대 중반에 출생

• 공친왕 북수(北狩) 당하다.

• 8대 젭춘담바 후툭투(복드 칸), 할하(喀爾), 가한(可汗)

• 혁현(순현왕)-> 황제

• 해방새방-> 육군 vs 해군 -> 상계군벌 vs 직례군벌

• 신금(ice aisin gurun) -> 선경장군이 세운 나라

타임라인

석량건국

• 석달개(石達開)가 왕위에 오르다.
북경 공방전에서 너무 쉽게 팔기군과 녹영을 무너트리고 자금성을 장악하다.
조정은 함풍제(咸豊帝)의 사망으로 붕괴하였다.
상대적으로 온전한 자금성에서 석달개가 황제로 즉위하여 석량(石梁)을 건국하였다.
이때가 1861년 10월이었다.

• 만백성에게 평화와 변혁을 약속하다.
건흥 원년(1862) 1월 말 석달개는 건흥국시(建興國是)를 석량 전역에 공표했다.
- 천경사변 이후 미루고 있던 천조전무(天朝田畝)를 재개할 것
- 천조전무가 정착하기 시작하면 징병제를 끝내고 군을 개편할 것
- 청의 조공국과 속국을 비롯한 청의 영역을 석량의 영역으로 간주할 것
- 청과 맺어진 조약들은 석량이 아닌 청과 맺은 조약이므로 새롭게 조율할 것

• 염군(捻軍)의 난
본래 염군의 태평천국의 협력자들이었다.
석달개가 북벌을 할 때도 이들을 지원하였다.
1855년 대한명왕(大漢明王)으로 등극한 장락행(張樂行) 산하로 염군은 오기군제로 개편했다.
1860년 석달개의 승리가 가까워지자 중원에 정착하였다.
건흥국시를 기반으로 천조전무가 재개되자 전통적인 향촌 체계를 인정하는 염군과 갈등하였고
결국 건흥 원년(1862) 10월 수확한 곡식의 분배로 석량과 염군이 갈등, 유혈사태 발생했다.
건흥 2년(1863) 3월 겨울이 끝나자 염군이 석량에 전격 대항하고 염군의 난 시작됐다.
다만 염군의 지지층 중 하나였던 빈민층은 여전히 석량을 지지하였다.

• 공행(公行)의 난
공행은 남경조약 이전까지 본디 중화와 서방을 잇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남경조약 이후 그 기세가 수그러들었지만, 오병감(伍秉鑑)의 위세는 멈출 줄 몰랐다.
그의 위세는 아들 오숭요(伍崇曜)의 대에도 여전하였다.
오숭요는 태평천국이 일어나자 자신의 부와 정치력을 적극 활용하여 광주를 수호하였다.
2차 아편전쟁에서는 태수의 명으로 영국영사와 협상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을 기반으로 본격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였다.
석달개가 석량을 건국한 뒤 대세를 따라 광주는 석량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건흥국시가 공표되고 천조전무가 재개되자 즉각 저항을 시작했다.
이들은 염군의 난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공행을 중심으로 석량으로부터 독립을 선하였다.
그리고 정치기구로서 광주십삼행(廣州十三行)을 구성하고 의장으로 오숭요를 선출하였다.
다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광주의 자치기구로서 천자가 돌아오면 해산할 것을 명시했다.

• 향용(鄕勇)의 부활
태평천국이 일어나자 청은 지방 향신(郷紳)들에게 향용을 조직해 난을 진압하라고 명했다.
이러한 부름에 가장 먼저 대답한 이들이 화중의 향신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증국번(曾國藩)의 상군(湘軍)은 호설암(胡雪巖)의 후원을 받아 대규모 군대로 성장하였다.
이들의 공세에도 태평천국은 굴하지 않았고 끝내 석달개는 북경을 점령하고 석량을 건국한다.
이후 향용은 화중 일대를 유량하며 석량에 대항하였다.
이후 염군의 난과 공행의 난이 발생하자, 상군은 다시 한 번 모습을 들어냈다.
이들은 이홍장이 구출한 순현왕(醇賢王)을 선덕제(宣德帝)로 즉위시키니
이때가 건흥 2년(1863) 7월이었다.

• 민심이 동요하다.
건흥제는 급진적인 천조전무 재개가 난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하여 건흥제는 다시 한 번 조서를 공표하여 천조전무를 미루고 난을 진압하기 위한 징집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건흥제의 조치는 석량의 찬성파에게도, 석량의 반대파에게도 지지를 받지 못한다.
천조전무로 토지의 균등한 분배를 바랬던 석량의 찬성파는 천조전무의 연기에 불만을 품었고
석량의 반대파는 천조전무를 연기했다는 이유만으로 청 조정을 무너트린 대역죄인에게 충성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로인해 난의 영향을 받지 않은 지역들에서도 동란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 개봉(開封) 전투
직예에서 모은 징집병과 북경의 정예병을 이끌게된 장수는 건흥제 본인이었다.
그는 건흥제의 명에 따라 10만의 군을 이끌고 염군을 진압하기 위해 나섰다.
태평군이 가장 먼저 도착한 염군의 도시는 개봉이었다.
개봉은 중화의 8대 고도이자 대운하의 중심에 있던 도시로서 크게 번영하는 도시였다.
그만큼 막대한 부가 모이는 곳이었고 천조전무를 강력히 반대하는 곳이기도 했다.
특히 개봉의 유대인들은 개봉의 방위를 위해 적극적으로 부를 사용했다.
하지만 이수성의 10만 대군이 개봉을 봉쇄하니 개봉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다.
이때 등장한 것이 대한명왕 장락행의 8만 대군이었다.
건흥제의 군과 장락행의 군이 싸워 장락행이 이겨 건흥제를 죽이고 개봉을 해방하니
이때가 건흥 3년(1864) 2월이었다.

군웅할거

• 군웅할거(群雄割據)
건흥제가 사망하자 석량은 북경과 그 일대인 직예와 섬감을 제외한 지역의 통제력을 잃게 된다.
회민(回民)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국교로 삼은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봉기했고
동삼성(東三省)의 성경장군(盛京將軍)은 청 왕실의 후신을 찾아나섰다.
보르지기트 셍게린첸(博爾濟吉特 僧格林沁)은 흠차대신의 특권을 악용하여 칸(汗)을 자칭하는 등
무수히 많은 군웅이 천하를 할거하였다.

• 홍덕제(洪德帝)의 즉위
건흥제가 사망하고 석량의 조정은 혼란에 빠졌다.
이들의 혼란은 몇달 간 계속되었다.
그러다 옛 태평천국의 장수 중 한 명이었던 이수성(李秀成)이 익왕(翼王)에 올라 사태를 수습하였다.
그리고 이수성의 추천으로 석정충(石定忠)이 6살의 나이에 황제가 되니
이때가 건흥 3년(1864) 5월이었다.

• 호붕위수(呼朋爲獸)
익왕에 오른 이수성은 본격적으로 군벌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개봉 전투에서 탈영한 정예병들을 자신의 친위대인 익군(翼軍) 구성원으로 포섭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군대는 반군을 토벌하기보다 자신의 권력을 탐하기에 급급했고
석량의 권위가 아직 남아있던 직예와 섬감을 수탈하였다.
어느날 건흥제의 동료이자 이수성의 친우가 그의 악행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니
이수성은 그를 짐승보다 못한 자라고 욕하며 참형에 쳐하였다.
이러한 이수성의 포악함을 사람들은 호붕위수(呼朋爲獸)이라 욕하였다.

• 연해주(沿海州) 분쟁
석달개의 군대가 북경을 향해 진격하고 있던 1860년 10월
북경에서는 이미 외세의 군대가 자금성에 입성하였다.
이들은 무너져가는 청 조정에게 더욱더 많은 이권을 요구하였다.
하여 청 조정은 그들의 이권을 인정하는 조약을 맺으니, 이것이 북경 조약이다.
본디 북경 조약은 청 조정과 영프 간의 조약이었다.
하지만 이 조약에 러시아가 중재에 나섰다.
그리고 그 대가로 흑룡강(黑龍江)과 오소리강(烏蘇里江) 넘어의 땅을 할양 받으니 그 땅을 연해주(沿海州)라 하였다.
해삼위(海蔘威)에는 해군기지가 설치되어 그들 말로 블라디보스토크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연해주 북쪽에서는 러시아의 카자크 부대가 연해주로 밀고 들어왔다.
하지만 흑룡강의 흑룡강장군과 오소리강의 길림장군은 러시아의 남하를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이들은 러시아 군이 남하하고 있음에도 연해주에서 철수하지 않았다.
결국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러시아 군과 옛 청의 장군들이 전투를 벌였으니
이때가 건흥 3년(1864) 8월이었다.

• 익왕이 외교관의 목을 베다.
연해주에서 전투가 심화되자 북경 조약의 참여자인 영국과 프랑스는 북경 조약의 효력을 의심했다.
하여 영국과 프랑스는 북경에 외교관을 파견해 북경 조약의 효력을 재확인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미 호붕위수로 그 포악함이 극에 달한 익왕은 이들에게 북경 조약의 파기를 선언했다.
외교관들은 이에 반발하였으나 본국에 돌아간 것은 그들의 목 뿐이었다.
결국 북경을 점거하는 것만으로는 중원에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외세는
군대를 보내기를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때가 건흥 3년(1864) 9월이었다.

• 상승군(常勝軍)과 상첩군(常捷軍)
영국과 프랑스의 새로운 교섭 상대로 나선 이들은 민절(閩浙)과 양광(兩江)의 상인들이었다.
광주의 오숭요는 영국과 프랑스와 체결한 조약을 받아들이되, 경제적 협력을 받았고
상해의 호설암(胡雪巖)은 영국과 프랑스에게 군사적 지원을 받는 대가로 조약을 인정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호설암에게 무기와 장수를 보내었고, 호설암은 그 무기와 장수를 증국번과 좌종당에게 보냈다.
그리하여 증국번의 상군 산하에 영국의 지원을 받은 상승군과
좌종당의 초군 산하에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상첩군이 결성되었다.
이때가 홍덕 원년(1865) 1월이었다.

• 강릉(江陵) 전투
외인부대의 첫 번째 전장은 호광(湖廣)의 강릉(江陵)이었다.
성도(成都)에서 거병한 천사도(天師道)의 군대가 사천(四川)을 벗어나 호광에 당도했기 때문이다.
이 군대는 호광의 대도시 중 하나인 무창(武昌)을 점령하기 위해 진격하고 있었다.
좌종당의 초군과 상첩군은 형주성(荊州城)이 위치한 강릉에서 천사도의 군세를 막기로 하였고
이곳에서 처음으로 서방식 화포를 동원해 전투를 벌였다.
특히 성 밖에서 주둔하고 있던 상첩군의 포병대의 포격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고정된 포대가 아닌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육상의 포병대 자체가 당시 중원의 상식과 전혀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좌종당의 초군은 천사도의 군대를 패퇴시켰다.
이때가 홍덕 원년(1865) 5월이었다.

양무운동

• 양무운동(洋務運動)
상첩군의 승전은 곧 중원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누구는 청을 붕괴시킨 외세를 끌어들인 역적이라고 욕했고
누구는 중원의 통일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힘이라고 기대했다.
민절, 호광, 양광이 주로 전자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이 지역들은 서방의 정치 세력과 직접 교류를 했고 이 업무를 담당하는 이들을 양무라고 하였다.
영국과 프랑스 또한 북경 조약을 준수하기로 한 세 지역에 조금씩 투자하기 시작했다.

• 윤륭하(尹隆河) 전투
서방의 위세가 민절과 양광을 넘어 호광까지 진격하자 염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락행은 반청반외의 뜻을 세워 군을 소집했다.
이렇게 소집된 군대가 뇌문광(頼文光)을 지휘관으로 한 4만의 하남군(河南軍)이었다.
이렇게 소집된 하남군은 천사도의 군세와 동일하게 무창을 점령하기 위해 진군했다.
이들의 군세는 안륙(安陆)에 이르러 막히게 되니
유명전(劉銘傳)을 지휘관으로 한 2만의 회군(淮軍)과 5천의 상승군이 하남군을 막아섰다.
둘의 전투는 강릉 전투와 마찬가지로 회군의 승리로 끝이났으니 청이 다시 부활하기 시작했다.
이때가 홍덕 3년(1867) 7월이었다.

• 청의 복위를 선언하다.
청의 왕족들은 크게 북경에 잔류한 자들과 함풍제와 함께 열하(熱河)로 도주한 자들로 나뉘어 있었다.
이중에 전자는 북경 공방전에서 석달개의 명으로 전부 사망하였다.
열하에 남은 왕족들도 함풍제의 사망으로 청 조정이 붕괴하면서 대부분 흩어졌다.
그러다가 강릉 전투와 윤륭하 전투로 청의 복위를 주장하는 이들이 위세를 얻으니
청의 왕족들도 성경장군(盛京將軍)의 지원을 받아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아이신기오로 이힌(愛新覺羅 奕訢)을 황제로 즉위 시키고 청의 복위를 선언하였다.
이때가 홍덕 3년(1867) 9월이었다.

• 외세의 수탈이 심화되다.
외세를 상업의 경쟁자로 여기며 부분적으로 서방을 수용한 양광과 달리
민절과 호광은 청의 복위를 위해 서방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받아드렸다.
하여 홍덕 4년(1868) 2월에는 중원 최초의 철도인 오송철도(吴淞铁路)가 개통하였다.
하지만 서방에게 무기를 구매하고 외인부대를 고용한 향신들은 서방에게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고
거기에 서방의 상인들이 대량의 공산품으로 민절과 호광의 시장을 어지러피기 시작했다.
그러자 반외를 외치는 탄원들이 하나 둘 향신들에게 도착하기 시작했다.
이때가 홍덕 4년(1868) 5월이었다.

• 상해교안(上海敎案)
상해는 서방의 조계지로 성장한 도시였다.
당연하게도 외세의 영향력이 큰 도시로서 번영과 수탈이 공존하는 도시였다.
교회 또한 관용조관(寛容条款)의 특권을 기반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덕 5년(1869) 9월 상해에는 아이들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상해의 주민들 사이에서는 이 사건이 교회가 유아를 살해하고 약재로 사용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러다가 같은 해 11월 납치범이 체포되었는데 그는 공범으로 신자 한 명을 지목했다.
물론 그와 교회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하지만 주민들의 분노에 불을 붙이기에는 충분했다.
거기에 교회 보호를 위해 파견된 공사관의 군이 발포까지 하면서
상해에서는 반교반외 성향의 폭동이 일어났다.
교회나 영사관에 방화가 일어나고 외국인 20여 명과 중국인 40여 명이 살해되었으며
수녀 10명이 강간당한 뒤 신체가 절단당했다.
이때가 홍덕 6년(1870) 1월이었다.

• 향신이 외세를 견제하기 시작하다.
홍덕 6년(1870) 1월, 상해에 조계지가 있던 7개국의 함대가 상해에 도착하였다.
해당 사건이 프랑스인 교회에서 발생했기에 프랑스가 중심에 있었다.
이때 외국 대사들과 협상을 한 자는 증국번이었다.
그는 배상금으로 사태를 종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이러한 증국번의 노력은 외세와 교회에대한 반감을 오히려 증폭시켰다.
뿐만 아니라 그의 위상에도 흠집을 남겼다.
이를 계기로 향신들은 외세와의 적극적인 협력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때가 홍덕 6년(1870) 2월이었다.

• 홍호자(紅鬍子)의 난
홍덕 2년(1866) 연해주의 흑룡강장군과 길림장군은 결국 철군을 선택했다.
하지만 연해주에는 홍호자(紅鬍子)라고 불리는 마적단이 세를 키워나가고 있었다.
이들은 본래 삶이 어려워진 지역 주민들이 모여든 마적단이었는데
흑룡강장군과 길림장군의 후원을 받아 준군사조직으로 성장하였다.
옛 청의 군을 몰아낸 러시아는 처음에는 마적단 수준의 홍호자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러시아 이주민들이 연해주로 유입되면서 지역 주민과 분쟁이 커지자
보호비를 받던 홍호자가 정교회 교회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가 또 한 번 연해주로 군을 파견하니
홍호자와 러시아가 전면으로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때가 홍덕 6년(1870) 8월이었다.

• 열하의 변(熱河之變)
홍덕 5년(1869) 11월 7대 젭춘담바 후툭투가 사망하고
8대 젭춘담바 후툭투가 홍덕 6년(1870) 4월에 칼카 대칸(喀爾大可汗)으로 즉위하였다.
2대 칼카 대칸은 태어나자마자 칸이 되었기에
보르지긴 씨족이자 자사그투칸(札薩克圖汗)인 체렌돈두브(車林端多布)가 섭정이 되었다.
섭정으로 등극한 체렌돈두브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열하를 침공한 것이다.
그는 청 황제의 존재가 반드시 몽골에 위협이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의 첨병에 내몽골의 셍게린첸이 열하를 지키기 위해 기병대를 이끄고 달렸지만
기병대가 열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열하가 폐허가 된 뒤였다.
아이신기오로 이힌은 이미 북수(北狩)한 뒤였다.
이때가 홍덕 6년(1870) 10월이었다.

회민의 난

• 보계(寶鷄) 전투
본디 백언호(白彦虎)의 회군(回軍)은 섬서(陝西)에 그 거점을 두었다.
하지만 섬서를 염군이 점령하고 섬서군(陝西軍)이 결성되면서 거점을 감숙(甘肅)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야쿱 벡(阿古柏)과 함께 회민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고 그 기반을 다졌다.
그러던 홍덕 7년(1871) 4월, 백언호는 섬서 수복을 위해 20만 대군을 거병하였다.
그러자 염군에서는 장종우(張宗禹)가 이끄는 섬서군을 주축으로 보계에서 방어전에 나섰다.
하지만 장종우의 섬서군은 상군과의 전투로 바쁜 양강의 염군에게 지원을 받지 못해 패전하게 된다.
이때가 홍덕 7년(1871) 12월이었다.

• 양양(襄陽) 전투
백언호의 회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진군하였다.
이들은 섬서군의 공백 덕에 손쉽게 림분(臨汾)을 점령하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군세는 무창에도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으니
유명전의 회군 6만과 백언호의 회군 12만이 양양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유명전은 백언호의 회군에게 막심한 피해를 주었으나 끝내 패전하였다.
이후 무창은 백언호의 회군에게 봉쇄되었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때가 홍덕 8년(1872) 8월이었다.

• 계림입관(桂林入關)
귀주(貴州)에서 봉기한 묘족(苗族)은 염군과 함께 태평천국의 협력자들이었다.
이들은 천경사변 이후 태평천국에서 벗어나 장수미(張秀眉)를 왕으로 내세워 초(楚)를 건국하였다.
초는 독립 이후에도 태평천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건흥제가 석량을 건국한 뒤에도 초는 석량의 봉신국으로서 귀주왕(貴州王)에 봉해졌다.
하지만 건흥제 사망하고 이수성이 익왕이 되자 장수미는 귀주왕을 포기하고 다시 한 번 독립하였다.
혼란스러운 천하에서 초는 초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장개격(張開格)을 지휘관으로 하는 초군 6만이 계림으로 향하였다.
계림을 방어하고 있던 것은 헨리 버제빈(白齊文)이 지휘하는 신식 공행군(公行軍) 6천이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초군은 전투도 하지 않고 버제빈의 항복을 받아냈다.
하지만 상승군과 공행군에서의 배신 경력에 장개격은 항복한 버제빈을 익사시켰다.
이때가 홍덕 9년(1873) 4월이었다.

• 삼선부제독(三宣副提督)
유영복(劉永福)은 본래 태평천국과 협력한 청의 장수였다.
하지만 천경사변이 일어나고 지도부와 연락망이 끊어지면서
독자적으로 군을 결성하게 되고 그 이름을 흑기군(黑旗軍)이라 하였다.
이들은 양광의 청 관군과 전투에 밀려 안남(安南)으로 남하하여
안남의 사덕제(嗣德帝)에게 삼선부제독(三宣副提督)직을 수여받았다.
이후 유영복은 홍강(紅江) 하류에 정착하여 프랑스의 유입을 저지하였다.
특히 통킹(東京)을 점령하려는 가르니에(安鄴)의 군대를 저지시켰다.
그리고 그 공을 인정받아 유영복은 일등의용남작(一等義勇男爵)을 수여 받으니
이때가 홍덕 12년(1873) 5월이었다.

• 양광역병(兩廣疫病)
묘족이 공행군을 물리쳤다는 소식에 평남(平南)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평남은 마여룡(馬如龍)을 지휘관으로 하는 15만 대군을 출병시켰다.
이들의 군대는 남녕(南寧)을 목표로 진군하였고 그 길목의 백색(百色)을 점령하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 뒤로 백색에서는 백성들이 병에 걸려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운남에서 55년부터 돌기 시작한 역병이 아직 양광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때문에 마여룡의 군은 백색에서 발목이 잡혔고 양광에는 역병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때가 홍덕 9년(1873) 6월이었다.

• 형양학살(衡陽虐殺)
계림에 무혈입성한 장개격은 역병 소식을 듣고 4만의 초군을 이끌고 호남으로 향했다.
이들은 영주(永州)의 상군을 손쉽게 격파하고 형양(衡陽)으로 진군했다.
형양은 좌종당과 별개로 초군을 조직한 유곤일(劉坤一)이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개격은 형양의 깃발에 적힌 초 한자를 보고 이미 투항한 도시인 줄 알았다.
유일곤은 이를 기회로 여겨 장개격을 형양 안으로 들였고 그들에게 군대에게 잔치를 해주었다.
잔치가 끝난 늦은 밤 유곤일은 장개격의 초군을 학살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곤일은 피하식별을 위해 군의 이름을 초용(楚勇)으로 바꿀 것을 명했다.
이때가 홍덕 9년(1873) 10월이었다.

• 동선회(同善會)의 결성
양광에 역병이 퍼지자 광주는 혼란에 빠졌다.
신식 기술이 적극적으로 유입되면서 혼란 속의 번영조차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서방의 상인들이 역병을 해외로 전파하여 양광역병은 천하에 기리 남을 공포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양한 집단들이 역병을 막기 위해 노력했는데
특히 상해에 거점을 두고 있는 런던선교회(倫敦宣敎會)는 윌리엄 록하트(諾魏林)를 파견하였다.
그는 본래 외과의이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중원에서 의사로 활동한 경력이 있어 다른 의술에도 능하였다.
록하트는 양광의 지방 통치 기구인 공행과 자치 기구인 선당(善堂), 선회(善會)의 지원을 받아
역병 퇴치와 서양 의술 전파를 목표로 하는 동선회(同善會)를 결성하게 된다.
이때가 홍덕 10년(1874) 2월이었다.

• 모란사(牡丹社) 사건
대만(臺灣)에는 종종 유구(琉球)의 표류민들이 조난되곤 했다.
하지만 홍덕 7년(1871) 12월에 조난된 유구인들은 이전과는 다른 결과를 맞이했다.
이때 조난된 66명 중 54명이 학살 당하고 12명만이 간신히 유구로 돌아갔다.
일본은 이 사건을 명분으로 대만 남부 모란향(牡丹社)에 3천의 신식군을 상륙시켰다.
청이 해체된 지금 일본의 진군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으니
이때가 홍덕 10년(1874) 5월이었다.

홍덕친정

• 홍덕친정(洪德親政)
백언호의 회군이 다시 감숙으로 철군하고 향신의 군대가 초의 군과 전투를 벌이니 염군은 다시 섬서를 장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섬서군을 복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 이를 간파한 이수성의 7만 익군이 산동을 점령하여 직례를 통합하기 위해 홍덕 10년(1874) 5월에 거병하였다.
익군이 산동 점령을 위해 북경을 비우자 홍덕제는 반익왕 장군들을 소집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북경에 남아있는 잔여 익군을 전부 처리하고 친정(親政)을 선언하였다.
북경의 백성들은 홍덕제의 친정에 환호했다.
이때가 홍덕 10년(1874) 7월이었다.

• 선경장군의 입궐
선경장군은 본래 청 조정의 부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목적은 청의 부활이 아닌 새로운 조정의 높은 관직이었다.
체렌돈두브가 열하를 공격하여 초토화 시킨 뒤에도 그의 야망은 멈출 줄 몰랐다.
한편 홍덕친정이 시작되고 홍덕제는 익왕을 처단할 새로운 힘이 필요했다.
그는 비록 표면적이라 할지라도 청이 아닌 자신에게 충성할 장수를 찾고 있었다.
그리하여 홍덕제가 선경장군에게 밀서를 보내고
그 밀서를 받은 선경장군이 12만의 군을 이끌고 자금성에 입궐하니
이때가 홍덕 10년(1874) 10월이었다.

• 창주(滄州) 전투
선경장군의 군대는 당시 중원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규모 있는 군대였다.
익왕 이수성 또한 그 사실을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직 선경장군의 군이 제대로 석량에 편입되기 이전에 홍덕친정을 무너트리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산동에서 회군하는 이수성의 익군은 즉시 북경으로 향했다.
그런 익군을 막아선 것은 선경장군이 파견해놓은 15만의 군이었다.
2배가 넘는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익군은 결국 패하여 다시 산동으로 돌아가니
이때가 홍덕 11년(1875) 3월이었다.

• 장가구(張家口) 전투
북경의 권력 공백을 기회로 여긴 자는 선경장군만이 아니었다.
청의 복위를 목표로 하던 외몽골의 셍게린첸 또한 석량을 멸망시킬 기회가 왔다고 여겼다.
그의 18만 군대는 자금성 정복을 위해 달렸으나
북경의 북쪽 문, 만리상정의 몽골 관문이었던 장가구에서 막히게 된다.
이때가 홍덕 11년(1875) 9월이었다.

• 배임수뢰(背任受賂)
선경장군은 홍덕제의 충실한 신하로서 직례총독직을 수여 받고 북경과 직례 일대를 안정시켰다.
하여 직례의 백성 중에 선경장군을 칭송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시간이 흘러 선경장군이 황제의 신임까지 받게된 어느날
선경장군은 남몰래 임무를 저버리고 부정한 돈을 벌고 있었다.
그는 러시아와 연락책을 두고 자금성의 막대한 보물들을 팔아넘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러시아는 연해주를 안정시키고 중원으로 진출할 부를 축적하고
성경장군은 자신의 배를 채우고 군에게 신식 무기를 공급하니
이때가 홍덕 11년(1875) 10월이었다.

• 이구통상대신(二口通商大臣)
홍덕제는 선경장군에게 더욱더 많은 권력을 위임하였다.
우선 동삼성에 총독직을 창설하여 선경장군에게 그 직을 수여하였다.
또한 서양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자 하였던 선경장군의 강력한 의지 표명에
홍덕제는 천진과 영구(營口)의 항구를 개항하여 양인들이 유입하도록 하였고
두 항구를 관리하고 서양과의 통상을 담당하는 이구통상대신직을 창설하고 수여하였다.
이때가 홍덕 12년(1876) 1월이었다.

• 아무르스키 백작과 삼구통상대신
니콜라이 아무르스키(阿穆尔斯基) 백작은 러시아의 극동 진출에 무척이나 큰 관심을 가졌다.
그런 그에게 청의 혼란은 그의 야망을 마음껏 발현 시킬 아주 좋은 기회가 되어주었다.
석량이 건국되던 1861년에는 아무르스키 백작이 청했던 총독직의 신설은 받아드려졌다.
그리하여 아무르스키 백작은 프리모리예 군관구장이되었다.
그는 카자크 군대를 지원 받아 연해주에서 저항하는 길림장군과 흑룡강장군을 처단했다.
그러나 이후 홍호자의 난이 일어나자 연해주 관리에 애를 먹고 정부에 지원을 청했다.
하지만 정부는 곡물 자급이 불가능하다면 이 이상의 지원은 불가능하다고 선을 그었다.
아무르스키 백작은 그런 정부를 무시하고 독단으로 선경장군에게 접근하였다.
그는 선경장군에게 동삼성의 이권을 판매하도록 유도하였다.
선경장군은 그 제안을 받아드렸고 러시아인들이 동삼성에 유입되었다.
홍덕제도 러시아와의 협력을 긍정적으로 받아드려 합이빈(哈尔滨) 구역을 창설하였다.
그리하여 선경장군의 이구통상대신은 세개의 구역을 관리하는 삼구통상대신이 되었다.
이때가 홍덕 12년(1876) 5월이었다.

• 해방새방지쟁(海防與塞防之爭)
바다에서는 일본이 대만을 점령하고 프랑스가 안남을 침략하고 육상에는 회민이 난을 일으키고 러시아가 남하하니
상해의 향신들을 중심으로 군비 증축에 관해 논쟁을 시작했다.
증국번 사후 회군과 함께 상군 또한 이끌게 된 이홍장을 중심으로 해상의 방비를 강화해야 한다는 해방론과
호북에서 초군을 이끌며 회민을 제압한 좌종당을 중심으로 육상의 난을 진압해야 한다는 새방론이었다.
상해에서 시작된 이 논쟁은 양광과 민절 그리고 호북의 향신과 공행에게 퍼져나갔다.
이들의 논쟁이 한 세력의 승리로 끝나는 일은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군비 증축에대한 여론이 심화되니
향신과 공행을 시작으로 염군, 회민, 석량도 군비를 증축하였다.
이때가 홍덕 12년(1876) 8월이었다.

• 호광군(湖廣軍)과 복건수사(福建水師)
새방론을 주장한 좌종당은 초군 체제를 개편하여 호광군(湖廣軍)을 결성하였다.
호광군은 기존의 지역 단위의 민병대 체계였던 초군과 달리 서방식 지휘체계를 따랐으며
무기 또한 호북에서 생산한 신식 소총과 영국에게서 수입한 신식 화포를 사용했다.
한편 해방론을 주장한 이홍장은 상군과 회군을 개편하기보단 함대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마미(馬尾)에 복주선정국(福州船政局)를 건설하고 신식 군함을 구매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이홍장의 함대를 복건수사(福建水師)라고 칭하였다.
그리하여 좌종당은 염군과 회민을 제압하고 다시 천자의 질서를 복구하고자 하였고
이홍장은 중원 넘어의 새로운 위협을 경계하고 대만을 수복하고자 하였으니
이때가 홍덕 13년(1877) 4월이었다.

• 광무군(廣務軍)
장자동(張之洞)이 만든 광무국(廣務局)은 광주십삼행 산하의 기구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한 기구였다.
광무국은 양광에 신식 공장과 철도를 건설하는 등 다양한 일을 하였다.
하지만 신식군을 양성하는 것은 공행의 허가를 받지 못하여 딱히 진척을 보이지 못하였다.
호광군의 창설을 계기로 결국 공행은 신식군의 창설을 허가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잠육영(岑毓英)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광무군(廣務軍)의 창설이었다.
이때가 홍덕 13년(1877) 6월이었다.

염군붕괴

• 정주(鄭州) 전투
한편 산동에서 위세를 키운 익왕은 다시 염군 정벌을 재개하였다.
그는 염군의 세력을 자신의 군세로 통합하여 다시 북경으로 진군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벌써 곧 일흔을 앞둔 장락행의 별장이 위치한 정주를 침공하였다.
그의 군대는 산동에서 위세를 키우면서 신식 무기로 무장하였으니
정주 인근의 개봉을 손쉽게 점령하고 정주마저 봉쇄시켰다.
염군은 대한명왕이 휴식을 취하던 정주가 봉쇄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 16만 대군을 꾸려 정주를 봉쇄한 8만 익군을 공격했다.
하지만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익군을 끝내 물리치지 못하였고 정주는 익군에게 점령되었다.
포악한 이수성은 노년의 장락행을 성벽 위에서 떨어트리니
이때가 홍덕 13년(1877) 10월이었다.

• 향용의 북상
장락행의 사망 소식은 향신들에게 큰 기회로 다가왔다.
향신들은 염군의 땅을 얻으면 청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며
동시에 새로이 조직된 신식 군대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리하여 좌종당의 호광군은 신양(信陽)으로 진군하여 서양 화포의 위력을 보였고
이홍장의 복건수사는 남통(南通)으로 진군하여 함포 사격으로 상군의 진군을 지원하였다.
그리하여 향용이 두 도시를 점령하고 계속해서 북상하니
이때가 홍덕 14년(1878) 8월이었다.

• 염군의 붕괴
향용이 북상하고 익군이 남하하니 염군은 최후의 결전을 시작하였다.
염군은 크게 군을 셋으로 나누어 세 곳에서 진군하는 군을 막아섰다.
우선 장락행을 구출하기 위해 집결한 오기군 7만이 장락행 사후에도 여전히 익왕을 막아섰다.
그리고 좌종당의 호광군을 막기 위해 뇌문광의 하남군 6만이 집결하였고
이홍장의 상군을 막기 위해 임화방(任化邦)의 염군 8만이 집결하니
양군을 다 합치면 거의 50만이 넘는 대군이 중원 각지에서 전투를 벌였다.
염군은 장락행의 죽음을 힘으로 삼아 익왕을 죽이는 업적을 세웠지만
북상하는 향용을 막아내지 못했고 염군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그리하여 염군의 남은 잔당은 장종우의 섬서군 뿐이니
이때가 홍덕 15년(1879) 2월이었다.

• 연대상륙(煙台上陸)
연대(煙台)는 본래 등주(登州)라고 불리는 항구 도시였다.
2차 아편전쟁 당시 프랑스에 의해 점령되었고 이후로도 프랑스의 관리를 받는 도시가 되었다.
석량 건국 이후에는 천진을 대신하여 서양 조계지가 번성한 도시였다.
염군이 이 일대를 장악한 뒤에도 프랑스의 보호를 받았으나 익왕의 원정으로 결국 도시가 함락되었다.
프랑스는 도시를 수복하기 위해 즉각 함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프랑스의 화포를 노획한 익군에게 패배하고 만다.
그러다가 염군을 무너트린 상군이 산동으로 진군하자
프랑스는 즉각 공사관을 통해 이홍장에게 접근하여 연대 공략을 제안하였다.
이홍장은 그 제안을 받아드렸고 프랑스의 함대와 복건수사가 연대에 포격을 가하고 회군을 상륙시키니
이때가 홍덕 15년(1879) 11월이었다.

• 임치(臨淄) 전투
향용의 위세가 점차 커지고 청의 복위가 가까워지자 움직인 것은 석량이었다.
러시아의 무기 대량 수입한 선경장군의 군대가 권력의 공백이 생긴 산동으로 남하하였다.
상구(商丘)를 공략하고 있던 호광군은 그 소식에 공략을 멈추고 산둥으로 진격하였다.
그리하여 임치에서 선경장군의 12만 대군과 10만 호광군이 임치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선경장군이 승리하여 산동에서 세력을 확장하니
이때가 홍덕 16년(1880) 5월이었다.

• 셍게린첸의 전향
선경장군은 몽골 출신으로 본래 셍게린첸의 부하였다.
그는 셍게린첸과 함께 북경 일대에서 활약하고 그 업적을 인정받아 선경장군에 올랐다.
그래서 북경이 건흥제에게 함락 당한 뒤에도 둘은 사적인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선경장군이 북경에 입성한 뒤에는 둘의 사적인 대화도 끊어졌었다.
셍게린첸의 청에 대한 충성 때문인지, 젊은 옛부하에 대한 시기 질투인지는 모르지만
어쩄든 임치 전투로 선경장군의 위세가 만주를 넘어 중원까지 확대되어가자
셍게린첸은 선경장군을 통해 홍덕제를 알현하고 석량의 신하가 되기를 간청했다.
그의 모습에 감동한 홍덕제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니
이때가 홍덕 16년(1880) 8월이었다.

• 정국안정(政局安定)
염군이 섬서로 쫒겨나고 그 공백을 석량과 향용들이 채워나갔다.
임차 전투 이후 두 세력 간의 큰 분쟁은 없었다.
그 사이 오랜 전쟁으로 황폐해진 중원을 양측 모두 복구하기 시작했다.
두 세력 모두 복구 작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농지 복원과 아편 퇴치였다.
특히 아편 퇴치는 안 그래도 부족한 농지를 아편으로 낭비하는 것이며
동시에 외세의 악행이 만들어낸 중화에 혼란을 야기시킨 원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홍장이 상해에서 공식적으로 아편 퇴치를 다시 한번 선언하니
이때가 홍덕 17년(1881) 2월이었다

• 향공갈등(鄕公葛藤)
향신들과 공행은 청의 복위라는 공통점으로 함께 움직였다.
비록 뒤로는 수구적인 유학자라고, 천박한 상인이라고 욕하었지만 그럼에도 둘은 협력관계였다.
하지만 이홍장이 아편 퇴지를 재개하면서 두 세력 간의 갈등이 표면으로 들어나기 시작했다.
공행은 양광 일대를 초토화 시키고 있는 이 역병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약재로서 아편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향신들은 아편은 역병의 바른 약재라고 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두 세력의 갈등은 점차 격화되었으며 결국 양광의 한 아편밭을 호광군이 파괴하고
그 호광군을 광무군이 공격하는 일이 발생하니
이때가 홍덕 17년(1881) 6월이었다.

• 동선기금(同善基金)
향공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나선 세력은 다름 아닌 동회였다.
이들이 처음 결성될 때부터 역병의 퇴치와 서양 의술의 보급을 목표로 했던 만큼
아편의 유용성과 위험성 모두 이해하고 있던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홍콩(香港)에서 삼자 대면이 이루어지니
이떄 모인 이가 동선회의 록하트, 공행의 당경숭(唐景崧), 향신의 호설암이었다.
셋의 논의로 양광에서도 아편 경작을 축소하고 그 대신 역병 퇴치를 위한 동선기금을 결성하고
그 기금에 호설암이 부강전장(阜康錢莊) 은화 300만냥을 후원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으니
이때가 홍덕 17년(1881) 10월이었다.

홍강원정

• 통킹 점령
청의 붕괴 이후 프랑스의 안남에 대한 야망은 멈출 줄을 몰랐다.
홍강에서 흑기군과 프랑스군 간의 국소적인 분쟁이 계속되었다.
이들의 갈등은 앙리 리비에르(李威利)에 의해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리비에르의 프랑스 함대는 독단으로 통킹을 점령하고 프랑스 군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들의 군대는 고작 1천 정도의 규모였지만 사덕제의 군대는 그들을 막을 여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사덕제는 흑기군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유영복이 군을 이끄니
이때가 홍덕 18년(1882) 4월이었다.

• 홍강 포격전
유영복이 6천의 군을 이끌고 통킹에 도달하자 리비에르는 공격보단 수비에 집중하였다.
특히 통킹 함락에 큰 역할을 한 군함 한 척을 활용하여 강을 봉쇄하였다.
흑기군도 이에 질세라 광무군을 통해 공수해온 서방 화포 8문으로 포격전을 진행하였다.
오랜 포격전에도 리비에르의 군이 후퇴하지 않자 유영복을 공격을 멈췄다.
리비에르는 흑기군을 공격할 준비를 했으나 본국에서 철수를 명령하여 결국 통킹에서 철수하니
이때가 홍덕 18년(1882) 6월이었다.

• 이홍장과 부레
한편 상해에서는 리비에르의 독단을 두고 논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향신들은 청의 조공국인 안남을 침공한 행위를 두고 개입에 대해 논하였고
프랑스의 온건한 듀클레르 내각은 리비에르의 독단을 청에게 해명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우선 프랑스는 상해의 공사가 움직이기에 앞서 광주의 공사가 움직였으나
공행은 안남 문제에 대해 황제와 상의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프랑스 공사 프레데릭 부레와 이홍장이 프랑스 공사관에서 대면하니
이때가 홍덕 18년(1882) 11월이었다.

• 남딘(南定) 점령
이홍장과 부레의 담판으로 청과 프랑스 모두 홍강 유역에서 군을 철수 시키는 것으로 합의 하였다.
반전을 주장한 이홍장과 듀클레르 내각의 의견이 일치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듀클레르 내각이 홍강 장악에 소극적인 태도에 불만을 가진 리비에르는 다시 한 번 홍강으로 원정을 나섰다.
리비에르는 이전 원정과 달리 본격적으로 안남을 점령하기 위해 홍강 전역을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출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저번 처럼 하노이가 아닌 홍강 하류의 항구와 마을들부터 점령해나가기 시작했다.
이들의 공격에 사덕제는 다시 한 번 흑기군을 파견하여 이들을 제압하고자 하였다.
그 소식을 일찍이 라비에르는 홍강 하류에서 이들에 대항할 성을 함락시키고자 하였고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홍강 하류의 도시인 남딘(南定)이었다.
그리하여 리비에르의 군대가 남딘을 함락 시키고 더 나아가 통킹까지 함락 시키고 흑기군에 대항할 준비를 하니
이때가 홍덕 19년(1883) 2월이었다.

• 박닌(北寧) 전투
리비에르의 군에 대항하는 것은 흑기군만이 아니었다.
안남의 내각대학사인 호앙께비엠(黃繼炎)이 이끄는 안남군 5천도 나섰다.
리비에르는 흑기군이 가장 큰 위협이라고 생각하였으나 훨씬 큰 위협은 안남군이었다.
유영복이 리비에르의 군을 상대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프랑스의 막강한 포격에 안남군이 괴멸적인 피해를 입고 후퇴하니
이때가 홍덕 19년(1883) 3월이었다.

• 꺼우저이(郡梂) 전투
안남군이 패배하자 위기감을 느낀 것은 광주의 공행이었다.
이들은 상해에서의 논의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전혀 몰랐기에
안남의 패배에 더욱더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공행의 대표로서 당경숭이 안남을 방문하여 흑기군의 적극적인 프랑스 공세를 요구한다.
유영복은 안남과 양광에서 흑기군이 공식 군대로 인정받는 것을 조건으로 이에 응하게 된다.
그리하여 통킹 인근 꺼우저이(郡梂)에서 다시 한번 호앙께비엠의 안남군과 유영복의 흑기군이
리비에르의 군대와 전투를 벌여 리비에르를 전사 시키고 승리하니
이때가 홍덕19년(1883) 5월이었다.

• 투언안(順安) 전투
프랑스에 새롭게 구성된 쥘 페리 정권은 급진적인 식민정책을 지지하였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리비에르의 원정을 계승하여 추가적인 군을 파견했다.
아메데 쿠르베 제독의 지휘를 받는 군함 7척이었다.
이들은 홍강 유역 장악을 위해서는 결국 안남 조정을 공격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안남의 조정이 위치한 후에(舖化)를 점령하기 위해 출항하였다.
안남군은 후에의 해안가 투언안(順安)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전투를 준비하였으나
군함의 무차별 포격으로 투언안 방어선을 무너트리고 요새를 점령하니
이때가 홍덕19년(1883) 8월이었다.

• 주전파와 주화파
프랑스의 군세가 안남 전역에 미치기 시작하자 향신들은 크게 두 일파로 나뉘게 되었다.
염군을 진압하고 청의 위세가 다시 강력해졌으니 프랑스와 전쟁을 하자는 주전파와
아직 염군을 진압하기 위해 쓴 힘이 너무 많으니 아직은 전쟁을 미뤄야 한다는 주화파였다.
전자는 주로 좌종당, 유일곤처럼 호광 일대에서 활동하여 호광군에 참여한 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후자는 주로 이홍장처럼 민절 일대에서 활동하여 복건수사에 참여한 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의 논쟁이 심화되자 선덕제가 이를 진정 시키기 위해 이홍장의 손을 들어주면서 아직은 이홍장의 주화파가 득세하니
이때가 홍덕19년(1884) 1월이었다.

• 간명(簡明) 조약
이홍장은 선전포고 없이 진행된 홍강 유역에서의 갈등을 무력 분쟁으로 일단락 시키고자 하였다.
통일되지 않은 중화가 절대 승리할 수 없을 거라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홍장의 연락에 답을 보낸 이는 프랑스 내에서 온건파 중 한 명이었던 푸르니에였다. 그는 홍강 원정에도 잠시 참여한 함장이자 정치인이었는데 그 또한 공격적인 식민지 확장을 하기에는 프랑스의 힘이 아직 부족하다고 여겼다.
상해에서 만난 이홍장과 푸르니에는 3가지 정도의 합의점을 찾았다.

- 프랑스는 상해의 임시 정부를 청 조정으로 인정한다.
- 현재 홍강 유역의 프랑스 군을 철수 시킨다.
- 이후 안남과의 관계는 안남과 프랑스의 협의를 통해 독자적인 협약을 체결한다.

이러한 협의를 결국 프랑스 정부가 받아들이면서 프랑스 군은 홍강 유역에서 철수하였고
프랑스와 안남이 프랑스인의 홍강 일대 거주를 허가하는 협약을 추가로 맺으니
이때가 홍덕 20년(1884) 6월이었다.

청불전쟁

• 청불전쟁
철수가 합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정부는 철군하지 않았다.
게다가 프랑스와 안남의 독자적인 협약은 안남에 프랑스의 총독부를 건설하는 최악의 협약이었다.
그러자 양광과 민절 일대에서 상해 협의에 대한 회의론이 돌기 시작했고
주전파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결국 홍강 유역에 순시하던 양무군과 프랑스군이 충돌하면서
공행과 향신 그리고 프랑스가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발표하니
이때가 홍덕 20년(1884) 7월이었다.

• 마강해전(馬江海戰)
전쟁이 시작되자 먼저 움직인 것은 쿠르베의 함대였다.
이들은 안남과 마찬가지로 이홍장을 비롯한 청의 조정을 직접 압박하는 전략을 택하였다.
쿠르베의 함대는 즉시 복건으로 향하였고 그곳에서 이홍장의 함대와 맞붙게 되었다.
이홍장은 쿠르베의 함대가 이리 빨리 올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광주의 남양수사가 이들을 먼저 막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쿠르베의 함대에게 기습 당한 복건수사는 프랑스 함선 2척을 침몰 시켰지만
결국 복건수사가 괴멸적인 피해를 입고 후퇴하니
이때가 홍덕 20년(1884) 8월이었다.

• 홍콩-광주총파업
승전한 쿠르베의 함대는 영국령 홍콩에 정박하여 함선 정비를 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프랑스의 군함이 정박하자 조선소의 수리공들이 반불을 주창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수리공들의 파업은 홍콩 경찰들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파업이 항만 노동자로 확장되면서 군함 수리는 계속 지연되었다.
게다가 홍콩의 파업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남양 함대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커지면서
광주의 항만 노동자들 또한 파업에 참여하여 양광의 핵심 항만이 일시에 정지하니
이때가 홍덕 20년(1884) 10월이었다.

• 일본의 지원
혼란에 빠진 광주와 홍콩 항만의 대체제로 사용된 것은 대만의 항만이었다.
당시 일본은 서양과의 불평등조약 개정과 식산흥업 정책의 기조가 만연하였다.
하여 대만의 항만을 프랑스에게 대여해주는 대가로
일본은 1천만냥과 이후 불평등조약 개정에서의 긍정적인 입장을 얻어냈다.
쿠르베의 함대 또한 대만에서 일본 수리공들의 정비를 받으니
이때가 홍덕 20년(1884) 12월이었다.

• 석포만해전(石浦沉海戰)
전쟁에 소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던 공행은 광주의 총파업으로 결국 남양수사를 출동시킬 수밖에 없었다.
남양수사는 쿠르베의 함대를 공격하기에 앞서 복건에 정박하여 복건수사와 함께 출동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 정보를 홍콩을 통해 미리 입수한 쿠르베는 이들을 선제 타격하고자 한다.
쿠르베의 함대가 출동하자 남양수사는 전속력으로 도망쳤다.
다행히 남양수사는 복건의 석포만까지 도달하여 복건수사와 만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미 괴멸적인 피해를 입은 복건수사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고
남양수사 또한 쿠르베의 함대에게 큰 패배를 겪고 복건으로 후퇴하니
이때가 홍덕 21년(1885) 2월이었다.

• 1차 랑선(諒山) 공세
쿠르베의 계속되는 승전 소식에도 향신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해상을 장악한다 할지언정 결국 육상은 중화의 영토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프랑스 정부는 홍강 유역에 주둔 중인 프랑스군 중에서 1만을 진군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그 목표를 양광과 안남의 중간지대에 위치한 최대 도시 랑선(諒山)으로 하였다.
이들을 막아선 군대는 당경숭이 이끄는 경자군(景字軍) 7천과 풍자재(馮子材)가 이끄는 광무군 1만
반정신(潘鼎新)이 이끄는 회군 4천 그리고 왕덕방(王徳榜)이 이끄는 호광군 5천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프랑스군을 막지 못하였고 랑선을 비롯한 그 일대가 프랑스군이 점령하게 되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운남으로 이동했던 유영복의 흑기군이 랑선을 수복하기 위해 나섰다.
유영복은 랑선으로 진격하기에 앞서 뚜옌꽝(宣光)을 포위하였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고 후퇴하니
이때가 홍덕 21년(1885) 3월이었다.

• 2차 랑선 공세
프랑스군이 랑선을 점령하고 주둔하였지만 이들의 주둔은 계속되지 않았다.
흑기군, 경자군, 광무군, 회군, 호광군 그리고 저항군이 계속해서 랑선으로 공격해왔기 때문이다.
쥘 페리 총리는 랑선 점령을 확고히 하기 위해 프랑스군의 추가적인 진군을 요구하였고
결국 프랑스군은 양광의 국경요새인 진남관(鎭南關)까지 도달하였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이곳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공행과 향신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후퇴하는 프랑스군을 공격하고 랑선까지 탈환하였으니
이때가 홍덕 21년(1885) 4월이었다.

• 페리 정권 붕괴
랑선에서의 후퇴는 프랑스 정부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에 프랑스의 총리 쥘 페리는 즉각 반격을 명령하였고 언론에게는 정보를 은폐하였다.
하지만 정부내 반대파의 입까지는 막을 수 없었고 페리 정권에 반대하던 온건파들에의해 후퇴가 언론에 알려진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 내에서 반전 여론이 강화되었고 정권 퇴진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결국 홍강 철수 결의안이 찬성 274표 반대 269표로 가결되면서
프랑스의 식민지는 전쟁 이전으로 돌아갔으며 쥘 페리는 퇴임하니
이때가 홍덕 21년(1885) 5월이었다.

• 청불신약
전쟁은 양측 모두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현상 유지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때문에 호광군 일파는 여기서 더 나아가 안남 남부까지 수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쟁으로 10억 냥 이상을 지출했고 2억 냥 가량의 빚을 지게되어 전쟁을 지속할 수 없었다.
결국 각 조정 내에서 온건파였던 이홍장과 쥘 파트노트르가 만나 상해에서 평화협상을 논하였다.
그 결과 청불신약이 체결되었으니 이때가 홍덕 21년(1885) 6월이었다.

- 1884년 체결된 간명조약의 유효성을 인정한다.
- 안남의 독립을 인정하여 프랑스와 안남 간의 후에 조약을 재조정한다.
- 양국은 다시 공사관을 개설하여 외교 관계를 정상화한다.
- 프랑스와 청의 우호를 위해 관세를 완화하고 철도 부설의 협력을 받는다.
- 선전포고 이전의 분쟁을 비롯하여 현재 전쟁의 배상금은 누구도 일절 배상하지 않는다.

시간대 불확실

• 취옥백채(翠玉白菜) 유출 사건
선경장군이 팔아넘긴 자금성의 보물들은 처음에는 아주 사소한 것들이었다.
유럽 시장에 공개되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작품들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계속되니 선경장군의 욕심은 더욱더 커져갔고
언제부터인가 희귀한 자금성만의 보물들까지 팔아넘겼다.
이러한 선경장군의 욕심은 결국 밝혀지니
그것이 바로 취옥백채 유출 사건이다.

• 청천백일(青天白日)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끝내 국민정부가 승리하였다.
이제 청천백일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스스로 천자이기를 부정하였으며, 그들이 숭상하는 청천백일 조차 지키지 못하였으니
여전히 천하의 곳곳에 착취와 수탈이 만연하고 있다.
부패한 조정, 아니 정부는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다시 한 번 난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보장하리까
아마 그 난의 주인공은 공산당일 것이니 이제 천자의 시대는 저물 것이다.
그럼에도 나관중이 말했던 것처럼 천하대세 분구필합 합구필분일테니, 천자는 없어도 천하는 영원하리라.

세력

양(梁)

• 주요 인물 : 석달개(石達開), 석정충(石定忠), 이수성(李秀成)
• 태평군(太平軍)
• 익군(翼軍)

염군(捻軍)

• 주요 인물 : 장락행(張樂行), 임화방(任化邦), 뇌문광(頼文光), 장종우(張宗禹)
• 오기군(五旗軍)
• 하남군(河南軍)

상군(湘軍)

• 주요 인물 : 좌종당(左宗棠),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 호설암(胡雪巖)
• 상군(湘軍)
• 회군(淮軍)
• 초군(楚軍): 유곤일(劉坤一)

광주십삼행(廣州十三行)

• 주요 인물 : 오숭요(伍崇曜), 당경숭(唐景崧)

회민(回民)

• 주요 인물 : 백언호(白彦虎), 야쿱 벡(阿古柏)

동삼성(東三省)

• 선경장군(盛京將軍): 데힝가(都興阿)
• 길림장군(吉林將軍)
• 흑룡강장군 (黑龍江將軍)

• 홍호자(紅鬍子)

몽골(蒙古)

• 외몽골(外蒙古)
• 주요 인물 : 칼카 대칸(喀爾大可汗), 체렌돈두브(车林端多布)

• 내몽골(內蒙古)
• 주요 인물 : 보르지기트 셍게린첸(博爾濟吉特 僧格林沁)

기타 세력

• 평남국(平南國): 두문수(杜文秀), 마여룡(馬如龍)
• 초(楚): 장수미(張秀眉), 장개격(張開格)
• 천사도(天師道)
• 티베트(西藏)

조선

1863년 고종 즉위
-> 흥선대원군 섭정, 개혁 추진(양전, 삼정개혁, 서원 철폐)
-> 소중국론 강화, 국경 방위 강화
-> 연행사 중단

1866년 병인박해, 병인양요, 제너럴 셔먼호 사건
-> 독자적으로 문제 해결

1868년 오페르트 도굴 사건
-> 이를 계기로 연행사를 재개하여 석량과 교류했으나 양국의 지위 문제로 외교 관계는 수립하지 못함

1869년 서계 사건
-> 천하의 붕괴가 만천하에 들어나 왜 또한 천황을 자칭하니 조선이 움직이지 아니할 이유가 없다.
-> 조선은 관례대로 쓰시마를 통해 답변을 전달하고자 함
-> 쓰시마는 이를 통해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하였으나 중앙에서는 적극적이지 않음
-> 동래의 왜관을 대일본국공관으로 바꾸되 기존 쓰시마의 관수를 공사로 등용 반 누이노스케(番縫殿介)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해결에 대한 미국 내 갈등
주청공사 프레드릭 로우 -> 직접 군을 투입하여 개항을 해야 한다고 주장
주일공사 찰스 데롱 -> 일본 통해 조선과 외교 관계 수립 가능하다고 주장
-> 결국 절충안으로 군함을 이끌되 일본과 함께 가기로 함

하지만 일본은 쓰시마에게 조선 외교를 전담하고 있었기에
미국과 함께 가기 전에 일본 외무성이 이를 장악할 필요가 있었음
-> 하여 반 누이노스케를 대신하여 외무성 출신 아사미 로쿠로(深見六郞)를 공사로 임명
-> 1871년 폐번치현으로 공관의 인원을 구 쓰시마 무사들에서 외무성 인력으로 교체

1872년 일본이 미국에게 공문으로 보내 공식적으로 조선을 방문하고자 함
-> 일본이 조선에게도 공문을 보낸 뒤 동래 앞바다에 미국 함대 정박
-> 미국 함대에 주조일본공사 아사미 로쿠로(深見六郞)가 탑승
-> 그 후 강화도로 출항, 강화도에서 조선 대신들과 만남

조정 대신들의 근대 조약에 대한 이해도 부족과 일본 측의 완전히 양이화로 조약 체결에 부정적
-> 다만 세 국가가 향후에도 동래의 대일본국공관에서 만날 것을 약속함

1872년 삼국이 동래에서 만나고자하였으나 의례 절차 문제와 동래 화륜선 입항으로 갈등 심화
-> 공관은 일본령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갈등, 그리고 의례로 연향을 해야 하는지 갈등

1873년 최익현의 상소와 흥선대원군 축출
-> 흥선대원군에 대한 상소에 양이들과의 교류를 비판하는 내용이 추가됨
-> 고종은 친정 이후에도 타국과의 교류를 강화할 것을 요구
-> 또한 통신사를 수신사로 명칭을 바꾸고 일본 방문 재개

흥선대원군이 서계 사건에서 개항에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기에 척사파는 대원군의 지지세력이 아니게 됨

고종의 친정이 시작된 뒤로 고종의 지지 세력
1. 민씨 세도가
2. 반대원군 척사파
3. 개화파

처음에는 민씨 세도가의 위세가 강하였으나 1875년 민승호 암살사건 이후 그 위세가 약화됨

1874년 동래에서 조미일 삼국의 조약이 체결됨
-> 강화도 조약과 유사한 불평등 조약, 최혜국 조항도 있음
-> 다만 관세 조항이 있음
-> 동래의 일본 공사관을 한양으로 옮김

1875년 친정을 시작한 석량 또한 조선에게 연행사 재개를 요구
-> 석량과 조선이 동등한 국가라는 조건 하에 연행사 재개

1876년 아무르스키 백작이 선경장군을 통해 러시아와 외교 관계 수립

1877년 군국기무처를 설립하다
-> 현실에서는 통리기무아문이었지만 청나라의 총리각국사무아문이 없기 때문
-> 총리(總理)가 막강한 힘을 가지다
-> 이후로 개화파를 주축으로 내부의 개혁과 해외 문물 습득에 열을 올리다

1879년 보빙사 파견

1881년 별기군 설립, 고종의 친위대로 육성하다
-> 오군영 또한 2영으로 통폐합하고 국경 방비를 강화하다

1882년 수도 방위하는 군인들의 임금체불로 일어난 임오군란
->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는 계기가 됨
-> 성과를 세우고자 한 셍게린첸의 군대 5천이 혼란스러운 한양을 장악하고 흥선대원군의 집권을 지지하다
-> 그리고 흥선대원군에게 통상대신의 직을 하사하고 조선을 석량의 조공국으로 만들고자 한다
-> 양조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 이후 러시아와 석량의 고문들이 조선으로 파견됨
-> 한편 일본, 미국, 러시아와도 임오군란의 피해 보상으로 여러 조약을 체결

1883년 이홍장의 복건수사가 인천으로 진입
-> 조공국 문제를 두고 갈등을 빚음
-> 조선 조정은 청의 조공국이 아님을 공식적으로 알림

1884년 셍게린첸의 사망으로 군 일부가 석량으로 귀환
-> 이때를 기회로 삼은 급진 개화파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킴
-> 삼일천하로 진압됨
-> 민씨 척족과 흥선대원군 일파가 정계를 장악하다

1885년 한성 조약, 텐진 조약 체결

기타

• 청 총독령
• 직례(直隷) 직례성 (산동성, 하남성)
• 양강(兩江) 강소성, 강서성, 안휘성
• 민절(閩浙) 복건성, 절강성, 대만성
• 호광(湖廣) 호남성, 호북성
• 섬감(陝甘) 섬서성, 감숙성, 신강성
• 양광(兩廣) 광동성, 광서성
• 운귀(雲貴) 운남성, 귀주성
• 사천(四川) 사천성
• 동삼성(東三省) 봉천성, 길림성, 흑룡강성
-> 1907년 신설되었고 그전까지는 장군이 관리
-> 비공식적으로 18세기 초부터 동삼성이라 불림
-> 대청회전왈 옛수도 성경(盛京)의 북쪽 길림(吉林)의 북쪽 흑룡강(黑龍江)을 합쳐 동삼성

• 청 지방 행정
총독(태수) - 순무 - 포정사(번사) - 안찰사(얼사) - 도원 - 부 - 지부 - 현 - 지현 - 지방관

청대에 흥기한 민간 자선 조직인 선당(善堂), 선회(善會)
인사 방면의 회강제, 윤치제, 동사제와 자산 조달과 운영제도 및 재무관리 방면의 신용조회제도 등을 포함
정부가 선당·선회 제도를 추진하면서 많은 선당·선회가 관료화된 조직으로 변화
선당·선회의 규약과 《징신록》

참고링크

니콜라이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 백작

/ 선경장군

/ 선경장군 형제

/ 선경장군 형제

/ 흑기군

/ 혁현

/ 런던선교회

/ 상해 세관

청 관직

/ Miao_Rebellion

/ 伍崇曜

/ 车林端多布

/ 苗民起义

/ 张秀眉

/ 劉長佑

/ 岑毓英

/ 张之洞

/ 都兴阿

/ 临淄县

/ 캉유웨이

/ 완무초당

/ 唐景崧

/ 텐진협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