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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부천대 이후 중화민국은 헌법을 제정하여 헌정을 시작한다. 그러나 장제스는 세계 최장의 계엄령을 지켜낸 모든 영토에 발령하여 종신집권을 하고자 한다. 장제스 사후 아들 장징궈를 거쳐 민주화가 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민주화 이후 내적으로는 경제성장을 통해 상당히 부유한 국가로 성장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외교적으로 대륙의 공산중국에 밀리며 중화의 주인 칭호를 잃게 된다. 그나마 한국의 도움으로 공산중국이 중국의 대표 칭호를 가져가는 것을 막고 자유중국과 공산중국 양안체제를 이어갈 수 있었다. | 국부천대 이후 중화민국은 헌법을 제정하여 헌정을 시작한다. 그러나 장제스는 세계 최장의 계엄령을 지켜낸 모든 영토에 발령하여 종신집권을 하고자 한다. 장제스 사후 아들 장징궈를 거쳐 민주화가 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민주화 이후 내적으로는 경제성장을 통해 상당히 부유한 국가로 성장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외교적으로 대륙의 공산중국에 밀리며 중화의 주인 칭호를 잃게 된다. 그나마 한국의 도움으로 공산중국이 중국의 대표 칭호를 가져가는 것을 막고 자유중국과 공산중국 양안체제를 이어갈 수 있었다. | ||
홍콩과 마카오가 각각 1997년, 1999년, 중화민국에 반환된다. 원래 영국과 포르투갈은 공산중국을 최우선 반환 협상자로 지정하였으나, 아시아의 패권국인 한국이 자유중국을 반환국으로서 지원한다. 그렇게 한국의 회유와 압박 속에 홍콩과 마카오가 자유중국의 손에 떨어진다. 이에 대해 공산중국은 | 홍콩과 마카오가 각각 1997년, 1999년, 중화민국에 반환된다. 원래 영국과 포르투갈은 공산중국을 최우선 반환 협상자로 지정하였으나, 아시아의 패권국인 한국이 자유중국을 반환국으로서 지원한다. 그렇게 한국의 회유와 압박 속에 홍콩과 마카오가 자유중국의 손에 떨어진다. 이에 대해 공산중국은 '모든 중국 영토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것'이라고 반발하였다. 홍콩 국경에 군대를 집결하고 홍콩과 마카오를 해군으로 봉쇄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이 한중 국경에 군대를 집결하고 홍콩 앞바다에서 해군력 투사를 한다. 중화민국의 홍콩과 마카오 지배권을 인정하라는 무력시위인 것이다. 서로의 함포가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전쟁으로 이어질 듯한 긴장감이 고조되어 가는데, 공산중국이 함대를 물리기로 하면서 상황은 일단락된다. | ||
=== [[제2차 군벌 시대 (범민족 세계)|제2차 군벌 시대]] === | === [[제2차 군벌 시대 (범민족 세계)|제2차 군벌 시대]] === | ||
=== 제3공화국 === | === 제3공화국 === | ||
2차 대전 이후 시작된 2차 군벌 시대를 극복한 중화민국의 3번째 공화국이다. | 2차 대전 이후 시작된 2차 군벌 시대를 극복한 중화민국의 3번째 공화국이다. |
2025년 4월 30일 (수) 16:45 판
개요
중화민국은 1911년에 일어난 신해혁명을 바탕으로 청나라의 뒤를 이어 1912년 세워졌다.
중화민국을 칭하는 세력은 많았으나, 해외에서는 첫 중화민국인 임시정부와 북양정부가 아닌 중화민국 제1공화국을 수립한 국민정부와 그 후신을 정통정부로 인정하고 있다. 각 시기를 구분하는 기준은 중화민국 공식 역사를 따른 것이다.
역사
임시정부
북양정부
제1공화국 (국민정부)
1928년 12월 29일 국민당의 국민혁명, 북양정부를 향한 북벌이 실패한다. 당시 국민정부가 둘로 갈라지고 군벌이 날뛰는 등, 여러 사건으로 국민정부의 결속력이 약화하여 국민혁명군이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였다. 한봉전쟁으로 북양정부가 사실상 초토화되었음에도 패배한 것에 대한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와 중에 정부에서 배제된 공산당이 장강 이남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결국, 북양군의 저항과 공산당의 반란으로 황하를 넘지 못한 국민혁명군은 그대로 북양정부와 협상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공산당은 장강 이남에 소비에트 지구를 건설하며 중국 공산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그를 보다 못한 장제스가 공산당 토벌을 명령하며 제1차 국공내전이 발발한다. 하지만 북벌과 동시에 진행하다 보니 병력이 분산되어 국민당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 공산당 특유의 게릴라전으로 국민혁명군을 박살 내고 있었다. 그러나 곧 북양정부와의 협상으로 북벌을 종료한 국민당은 공산당으로 군대를 집중한다. 아무리 공산당이 게릴라전의 귀재였다지만 물량과 최신형 무기로 공격해오는 국민혁명군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공산당은 국민당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대부분 전멸한다. 일부만 지도부만이 살아남아 국민정부와 북양정부 사이, 섬서성으로 대장정을 시행한다. 국민당은 놓친 공산당 전부를 제거할 때까지 전투를 지속하기로 하면서 국공내전은 계속된다.
국공내전이 시작된 이후 소련은 국민당을 손절하고 북양정부를 지원하며 섬서성에 공산당을 정착시킬 것을 요구한다. 북양정부는 그 요구를 받아들여 공산당이 섬서성에 정착하는 것을 묵인한다. 이에 분노한 국민정부는 소련을 비난한다. 새로운 지원처가 필요해진 국민당은 한봉전쟁의 쓰라림을 뒤로하고 한국의 지원을 받기로 한다. 한국은 국민정부의 지원 요청을 받아들인다. 중화대륙에서의 동반자가 필요했던 한국이 국민당의 요청을 대환영한 것이다. 한국은 국민정부에 신형 총기를 지원하고 전차와 함선을 싸게 팔아 국민정부를 강화한다.
국민정부는 한국의 지원을 받아 다시 한 번 북벌을 시행하기로 하고, 1939년 9월 1일 2차 국민혁명을 일으킨다. 국민혁명군이 한국의 지원을 받아 강해졌다면 북양군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강해져 있었다. 이는 한국제 무기와 소련제 무기의 시험장으로서 사실상의 한소 대리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소련제 무기를 가진 북양군을 보고 북벌을 진행하기 이전 신형 무기만으로는 북벌의 역량이 부족함을 인지한 국민당은 여러 군벌을 회유하지만, 공산당과의 내전의 상처를 치유하기는 쉽지 않았다. 회유 된 군벌 중에서는 공산당이 차지한 섬서성 군벌인 옌시산도 있었다.
북벌과 국공내전을 동시에 진행 중이던 국민정부. 공산당의 근거지인 섬서성을 정벌하던 중, 시찰을 나간 장제스가 섬서성 담당 사령관인 옌시산에게 억류되는 시안 사건이 발생한다. 최근 장제스와 국민당에 충성을 맹세한 옌시산이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 몰랐던 장제스는 굉장히 당황한다. 옌시산은 장제스에게 공산당과의 화해를 종용했고, 장제스는 총칼의 협박 속에 어쩔 수 없이 공산당과 함께 북벌을 진행하고 평화를 유지하자는 협상을 진행한다. 그렇게 북벌이 진행되기 직전 정식으로 2차 국공합작을 성사시킨다.
2차 국공합작은 너무나도 불안했다. 표면적으로는 중국공농홍군이 국민혁명군에 합병된 모습이었으나, 독단적인 행동을 주로 하였다. 그로 인해 국민당 내부에서는 지금이라도 국공합작을 파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그랬다가는 옌시산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기에 실행하지는 못하였다. 실제로 홍군은 국민혁명군이 점령한 지역에 몰래 침투하여 빼앗는 등, 합작에 반하는 행동을 많이 행하였다. 그럼에도 북벌을 우선시하라는 장제스의 명령에 이를 묵인하게 된다. 이는 미래에 큰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결국 1945년 5월 8일 국민정부의 북벌이 성공한다. 국민혁명군이 베이징을 점령하며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북벌을 진행하던 도중 공산당은 북양정부의 영토를 갉아먹으며 국민당 몰래 힘을 키운다. 한국이 국민정부에 넘겨준 신형 무기를 노획하거나,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무기로 힘을 키운 공산당은 기존 북양정부 영토에서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킨다. 결국, 2차 국공합작은 깨지고 공산당은 군벌 시대가 펼쳐져 있는 국민당을 압도한다. 1949년 12월 7일 국민당 정부는 타이완과 . 결국, 도망가면서 2차 국공내전은 공산당의 승리로 끝난다. 이를 국민당이 타이완으로 수도를 옮겼다 하여 국부천대라고 부른다.
제2공화국 (국부천대)
국부천대로 인해 타이완과 하이난으로 쫓겨난 중화민국이 민주화 이후 구성된 2번째 공화국이다. 한국에서는 대륙의 공산중국과 대비된 자유중국이라고 칭한다.
국부천대 이후 중화민국은 헌법을 제정하여 헌정을 시작한다. 그러나 장제스는 세계 최장의 계엄령을 지켜낸 모든 영토에 발령하여 종신집권을 하고자 한다. 장제스 사후 아들 장징궈를 거쳐 민주화가 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민주화 이후 내적으로는 경제성장을 통해 상당히 부유한 국가로 성장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외교적으로 대륙의 공산중국에 밀리며 중화의 주인 칭호를 잃게 된다. 그나마 한국의 도움으로 공산중국이 중국의 대표 칭호를 가져가는 것을 막고 자유중국과 공산중국 양안체제를 이어갈 수 있었다.
홍콩과 마카오가 각각 1997년, 1999년, 중화민국에 반환된다. 원래 영국과 포르투갈은 공산중국을 최우선 반환 협상자로 지정하였으나, 아시아의 패권국인 한국이 자유중국을 반환국으로서 지원한다. 그렇게 한국의 회유와 압박 속에 홍콩과 마카오가 자유중국의 손에 떨어진다. 이에 대해 공산중국은 '모든 중국 영토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것'이라고 반발하였다. 홍콩 국경에 군대를 집결하고 홍콩과 마카오를 해군으로 봉쇄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이 한중 국경에 군대를 집결하고 홍콩 앞바다에서 해군력 투사를 한다. 중화민국의 홍콩과 마카오 지배권을 인정하라는 무력시위인 것이다. 서로의 함포가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전쟁으로 이어질 듯한 긴장감이 고조되어 가는데, 공산중국이 함대를 물리기로 하면서 상황은 일단락된다.
제2차 군벌 시대
제3공화국
2차 대전 이후 시작된 2차 군벌 시대를 극복한 중화민국의 3번째 공화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