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싹이 돋아난 폐허 위로 타이가의 차갑지만 신선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한때 문명의 정신으로 번영했던 베르녜는 이제 재앙의 잿더미에서 다시 태어났습니다. 3세기 전에는 치솟는 도시와 단결된 꿈의 장소였고, 2세기 전에는 납과 플라즈마가 살과 땅을 찢는 전쟁터였으며, 1세기 전에는 검은 비와 방사능 폭풍에 가려진 채 침묵을 지키고 있던 부서진 세계였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회복력은 다시 한번 고요하게 돌아왔습니다. 금이 간 콘크리트 사이로 새싹이 돋아나고 타이가의 차가운 바람이 황폐한 대지 위에 신선함을 불어넣었습니다. 고층 빌딩의 폐허와 썩어가는 벙커 아래, 핵폭탄의 화염을 피해 자연의 품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다시 한 번 삶의 약속에 이끌려 긴 탈출을 마치고 모습을 드러냅니다. 산산이 부서진 유산의 그림자 속에서 새로운 생존의 기회가 꿈틀대고 있습니다.
폐허 아래에 흩어진 카르나로디아인들은 다시 한번 통일을 꿈꿉니다.
연방의 옛 영토에는 현재 수십 개의 세력이 존재하며, 한때 통합을 이루었던 세계의 잔재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그중에는 연방의 옛 수호대이자 충성심을 잃지 않은 군인들이 남아 있습니다. 잊혀진 대학의 학자와 예술가들은 지식의 정신을 붙잡고, 전쟁으로 단련된 사회주의자들은 불굴의 이상을 설파하며, 자칭 왕들은 새로운 제국을 꿈꾸고 있습니다. 민족주의자들은 조상의 자부심에 사로잡혀 철권 통치에 집착하고, 일부는 복수심에 불타 마지막 남은 우타미르까지 전멸시키려는 의도를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상반된 비전 이면에는 카르나로디아를 재건하고, 잿더미에서 다시 일어나 하나의 깃발, 하나의 인민, 하나의 희망 아래 단결하고자 하는 열망이라는 공통된 바람이 숨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백년의 원수들 또한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우타미르 또한 미로같은 거대한 벙커 네트워크의 깊숙한 곳에서 견뎌냈습니다. 전멸의 불길 속에 격리되어 있었던 이들은 목적의식을 되찾은 채 다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일부 우타미르는 대전쟁을 촉발한 증오와 적대감을 상기시키며 격렬하게 공격합니다. 흩어진 침략군의 잔당은 카르나로디아의 영토에도 여전히 자리를 잡고 있으며, 오래전에 사라진 정복의 이상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우타미르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패권을 고수하며,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카르나로디아인들을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선조들의 교만함의 쓰라림을 맛보고 이제 파멸의 유산을 속죄하고자 용서를 구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갈망하고 있지만, 자신들의 민족이나 카르나로디안들이 그러한 변화를 허용할지는 아직 미지수입니다.
시간이 모든 것을 치료해주었을까요?
한때 핵의 화염이 세상을 휩쓸며 지나간 모든 것을 집어삼켰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곪아 터진 증오와 탐욕처럼 생명은 지속됩니다. 하지만 불씨 속에서도 사랑과 연민은 그을린 땅을 뚫고 피어나는 연약한 야생화처럼 견뎌냅니다. 시간은 몸과 마음을 풍화시키고 상처를 부드럽게 만들었지만 지우지는 못했습니다. 베르녜의 침묵 속에서 누군가 질문합니다: 증오가 이 땅을 지배할 것인가, 자비가 이 땅을 지배할 것인가? 어떤 마음, 어떤 정신이 새롭게 떠오르는 이 행성을 품을 것인가? 그 답은 꿈틀대는 봄처럼 다가오는 새벽 너머에 있습니다.
베르녜는 43세기경 인류가 개척한 습윤형 냉대기후 행성이다. 은하 곳곳에 퍼져있는 류니카, 소볼류드와 같은 카르나로디아인들의 기원이다. 한때 열핵전쟁으로 인해 독성계(toxic world)로 분류되었으나, 1세기만에 해제되었다. 은하계 곳곳에 퍼져있는 카르나로디안으로 불리는 제노타입들의 모성(母星)이기도 하다.
특징
전형적인 베르녜의 자연을 그린 풍경화
베르녜는 K형 주계열성 궤도를 도는 차갑고 광물이 풍부한 행성이다. 베르녜는 태양계 거주 가능 영역의 바깥쪽 가장자리 근처에 위치하여 상대적으로 낮은 항성 복사를 받기 때문에 주로 아북극 기후를 띄고 있다. 행성의 대부분은 광활한 타이가 생물군으로 덮여 있으며, 일 년 내내 눈으로 덮인 침엽수림이 끝없이 뻗어 있다. 이 빽빽한 침엽수림에는 지구의 긴 겨울과 짧고 온화한 여름에 독특하게 적응한 탄력적인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타이가를 넘어가면, 베르녜의 지형 대부분은 툰드라로 바뀌는데, 거친 바람과 영구 동토층으로 인해 전통적인 농업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 척박한 지역에서는 지구의 초기 식민지 시대에 유목 목축 문화가 뿌리를 내렸고, 놀랍게도 이러한 전통 중 상당수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유목민들은 추위에 강하고 튼튼한 가축을 기르고 계절 주기에 따라 고대 경로를 따라 이동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대조적으로 베르녜의 온대 지역은 제한적이긴 하지만 매우 비옥하다. 이 지역은 숲이 아니라 체르노젬(검은 흙)이 풍부한 개방된 초원이 지배적이다. 이 토양의 높은 비옥도 덕분에 여러 곡물 벨트와 농업 허브가 발달할 수 있었고, 베르녜는 인간이 정착한 공간에서 몇 안 되는 저온성 기후의 곡창지대 중 하나가 되었다.
베르녜의 자연적 혜택은 토양에서 끝나지 않았다. 베르녜는 추위에 잘 견디는 블루베리와 클라우드베리 같은 베리류와 언덕과 덤불에서 자생하는 다양한 약초로 잘 알려져 있다. 침엽수림은 울창하고 느리게 자라며 건축과 조선 분야에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매우 튼튼하고 내구성이 뛰어난 목재를 생산한다.
베르녜의 지표면 아래는 자원의 보고이다. 특히 역청탄과 철광석으로 유명한데, 이는 역사적으로 가장 강력한 정치 국가였던 카르나로디아의 산업 부흥을 상징하는 자원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 자원은 여러 세대에 걸쳐 전쟁과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베르녜는 석유, 천연가스 및 기타 화석 연료의 막대한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지역 및 외부 산업의 주요 에너지원으로 계속 사용되고 있다.
베르녜의 야생동물은 지속적인 기후 스트레스를 받으며 진화해 왔다. 대부분의 토종 동물은 몸집이 크고 털이 많으며 열을 보존하도록 생물학적으로 설계되었다. 일부 종은 포식자일 뿐만 아니라 튼튼하고 끈질기며 영리한 지역 문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류니카와 소볼류드 등 베르녜에서 개발된 많은 유전자형은 이 토종 짐승의 개량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베르녜는 종종 혹독한 기후와 위험한 국경에도 불구하고 문명, 노동, 인내의 요람으로 주민들에게 존경받고 있다. 거친 아름다움, 정신적 광대함, 원초적 특성은 카르나로디아의 핵심적인 정신이며, 일부 전통에서는 토양, 숲, 광석이 신성한 것으로 여겨질 정도이다. 베르녜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베르녜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고, 베르녜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강인함, 슬픔, 연대를 이해하는 것이다.
설명
역사
개척기
카르나로디아인의 역사는 43세기경 7대의 식민선이 베르녜의 온대림에 위치한 강가(現 카르디나스크)에 착륙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흑색토가 광범위하게 퍼져있던 지역이였기 때문에 식량문제는 없었으며, 역청탄과 철광석을 위시로 한 풍부한 지하자원들 덕분에 이들은 빠른 속도로 산업계 문명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45세기경 대규모 마름병으로 인한 식량위기 때 일부 정착민들이 툰드라에 진출했고, 이들이 현재 베르녜 유목민들의 조상으로 여겨진다.
카르나로디아에선 47세기까지를 개척기라 부르며, 이 시대에는 조상들이 빈 땅을 개척해나가며 새로운 국가와 공동체를 설립했다. 48세기경 국가는 총 24개, 인구 100만명 이상의 대도시가 31개에 달하는 등 순조롭게 번영해나갔다. 다양한 산업체들이 성장했고, 이 때 생명공학 회사들 역시 성장하여 유전자 시술이 유행이 된 적이 있었다. 이 때 개발되어 카르나로디아인들에게 널리 퍼진 제노타입이 류니카와 소볼류드이며, 이 두 제노타입 유전자는 생식유전자였던지라 핵전쟁 후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연방의 탄생
49세기경 베르녜의 대륙 중 35%만을 개척했으나 국가만 해도 40개에 다다르고, 분쟁까지 일어나는 등 혼란이 생기기 시작하자, 가장 국력이 강했던 카르디나스크 공화국과 12개의 국가들이 협약을 통해 카르나로디아 인민연방의 이름으로 통합된 것이 연방의 시작이다. 모체인 카르디나스크 공화국이 그러했듯 연방은 민주주의를 국체로, 사회주의 요소가 다소 섞인 자본주의 계획경제를 경제체제로 삼았다. 인민연방의 안정적인 성장에 일부 국가들이 자발적으로 흡수되거나 제휴국으로 참여하였으며, 일부 적대적인 국가의 경우 무력으로 흡수하기도 하였다.
51세기가 되자 행성 내 국가들은 12개로 줄었고, 카르나로디아 연방을 제외한 다른 국가들은 연방의 제휴국이었다. 국가간 분쟁이 줄어들었고, 정부들은 군비를 아껴 사회발전요소에 투자할 수 있게 되었다.
악연의 시작
이전부터 탐험가들 사이에서 서쪽에 호전적인 인류 아종의 문명이 있다는 소문과 함께 우타미르들이 찍힌 사진이 인터넷에서 돌아다녔으나, 카르나로디아인이 우타미르와 공식적으로 조우하게 된 날은 48세기경이다. 현 우타미르 전세계패권국의 사절이 현 서카르나로디아 연방관구 서쪽에 위치했던 엔자리스탄 공화국에 '더 이상 국경을 확장하지 말 것'과 '자신들과 접촉하려 하지 말 것'이라는 서신을 보냈었으나, 엔자리스탄 공화국 정부는 이 문서를 무시하고 개척을 이어나갔고 공화국이 연방에 흡수된 뒤에도 연방은 이를 이어갔다. 그렇게 53세기쯤에 우타미르 패권국과 국경이 맞물리게 되며 기나긴 악연이 시작되었다.
패권국에선 사절을 다시 보냈는데, '자신들과 절대로 접촉하려 하지 말 것, 국경을 넘은 카르나로디아인들은 무조건 사살'이라는 내용이었다. 종종 카르나로디아의 유목민이나 일부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국경을 넘었다 사살당하기도 했으며, 이에 연방정부는 우타미르측과 연락하려 했으나 묵묵부답이었다. 우타미르측의 정찰기로 추정되는 항공기가 카르나로디아 상공을 돌아다니기도 했는데, 연방정부의 대응은 초기까진 무시나 전파를 통한 항의만 했으나 결국 격추로 변경했다. 이외에도 수역 문제로 해양경찰간 싸움이 벌어지거나 이들에게 매수되어 군사정보를 넘긴 스파이가 발각되는 등 우타미르의 도발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고, 카르나로디아 정부 역시 더 강경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55세기 초 정찰위성과 고고도 정찰기를 통해 패권국의 병력들이 국경 근처로 모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고, 연방정부 또한 국경 근처에 병력을 추가 배치하기 시작했으나, 배치되었어야 할 연방군의 사단 중 절반만이 배치되었을 때 우타미르측에서 선전포고를 하며 전쟁이 시작되었다.
대조국전쟁
전쟁 초기, 원래대로라면 국경에서 전선을 강화했어야 할 사단 중 절반만이 제시간에 도착했다. 제각각 전선에 간신히 도착한 부대는 고립되고 취약한 상황에서 우타미르군의 무자비한 공격을 받고 전멸하거나 후퇴했다. 2년차 말에는 서부 카르나로디안 연방지구가 함락되었고, 개전 4년차에는 북서연방관구와 반도 연방관구의 거의 모든 지역을 점령하며 카르나로디아의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방어선이 무너지자 카르나로디아인들은 자연 장벽인 크로블 산맥이 있는 크로블 연방관구에 다시 집결했다. 높고 험준한 지형 때문에 기갑부대를 위시로 한 우타미르군은 이전처럼 진격하지 못한 채 돈좌되었다. 일부 우타미르 사단은 전선 후방으로 침투해 후방을 교란하는 데 성공했지만, 대부분의 병력은 수렁에 빠졌다. 고저차가 심하고 엄폐물이 널린 지형에서 카르나로디아군은 잠복해 있다 기습해 공격하는 식으로 우타미르군에게 큰 피해를 줬고, 공세가 여기서 멈추게 된다.
개전 6년째, 우타미르의 공세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것을 감지한 카르나로디아 사령부는 대규모 반격을 준비했다. 카르나로디아의 산업력은 대부분 그대로 유지되었고, 대부분의 무기 공장들이 크로블 연방관구 너머에 안전하게 위치해 있었다. 후방에 침투한 우타미르 사단의 산발적인 공습과 폭격을 제외하면 생산 라인은 안정적으로 가동되었다. '낙엽 작전'이라고 불리는, 카르나로디아군의 공세는 우타미르의 전체된 공세선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이 기세를 이어 카르나로디아군은 파죽지세로 몰아붙여 개전 7년째에 카르나로디아는 북서 연방관구를 탈환했고, 8년째엔 반도 연방관구 전체와 서카르나로디아 연방관구의 일부를 탈환했다.
개전 9년째, 서카르나로디아 연방관구의 대부분이 카르나로디아의 통제하에 돌아왔다. 하지만 우타미르의 격렬한 반격으로 카르나로디아는 다시 밀려났고, 10년째엔 서카르나로디아의 대부분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에 굴하지 않고 카르나로디아는 11년째에 '번개 작전'이라 불리는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고, 8개월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마침내 우타미르 영토로 넘어갔다.
개전 12년째, 양측이 팽팽하게 맞서는 가운데 카르나로디아 정보국은 우타미르측의 대규모 핵 공격 징후를 포착했다. 발사 플랫폼에서 ICBM이 목격되었고 전략 폭격기 편대가 준비중인 것을 확인했다. 이에 대응하여 카르나로디아 역시 핵무기들을 준비시키고 있었다. 15일 후, 우타미르 사령부는 아무런 예고나 경고 없이 ICBM 탑재체를 모두 발사했다. 카르나로디아 역시 모든 핵무기를 동원해 똑같이 핵공격으로 대응했다.
그렇게 대조국전쟁은 공멸로 대재앙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한때 번성했던 베르녜는 방사능 불길에 휩싸였고, 두 나라는 황량한 황무지로 변했다.
기술
카르나로디아는 한때 지구 이후 시대에서 과학과 기술 진보의 등불로 여겨졌으며, 당시의 다른 세력들을 능가하거나 그에 필적하는 획기적인 기술 성과를 이룩한 국가였다. 대조국전쟁과 그에 뒤이은 핵전쟁이 일어나기 전, 인민연합은 토카막 기반의 핵융합 에너지 상용화에 성공하여, 안정적이고 청정한 에너지를 전 국토에 공급할 수 있었다.
유전자 공학 기술은 유전 질환의 대부분을 제거하는 데 활용되었으며, 표적 유전자 편집이 보편화되어 전 국민에게 의료 서비스로 제공되었다. 이러한 기술은 또한 류니카와 소볼류드와 같은 특수 제노타입의 창조에 기반이 되었으며, 이들은 베르녜의 혹독한 환경과 심지어 심우주 환경에 적응하도록 설계되었다.
디지털 기술 분야에서는 양자 컴퓨터가 인프라의 표준 요소로 자리잡았고, 이를 통해 복잡한 시스템의 실시간 모델링, 전략 시뮬레이션, 고정밀 인공지능 행정 시스템이 가능해졌다. 여기에 더해 상온 초전도체의 개발은 에너지 전송 효율, 산업 자동화, 우주선 기술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항성 간 식민 개척 기술의 눈부신 발전이었다. 아광속 수면선은 이미 류니카 계열 인구를 여러 항성계로 퍼뜨렸으며, 이론적으로만 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초광속 이동 기술(알큐비에레 드라이브)은 실현 직전까지 개발이 진행되었다. 비록 정식 배치되지는 않았지만, 전쟁 발발 이전에 극비리에 시험 비행이 있었을 것이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베르녜의 핵전쟁은 이러한 과학 기반의 대부분을 파괴하거나 방기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이전의 기술적 지식 상당수는 중앙연방관구에 위치한 네 개의 마지막 생존 대학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후계 국가인 카르나로디아 커먼웰스 내에서 보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대학들은 기술관료주의적 민병대에 의해 보호되고 유지되며, 현재는 연구 거점이자 베르녜의 잃어버린 지식의 수호자 역할을 하고 있다.
다수의 세력이 베르녜의 폐허에서 옛 세계의 기술 유물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재활용하는 데 그치는 반면, 커먼웰스는 여전히 그 기술을 연구하고, 재현하며, 심지어 진보시키고 있는 몇 안 되는 세력 중 하나로 여겨진다. 이에 따라, 베르녜 혹은 그 너머에서 제2의 과학 르네상스가 도래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카르나로디아의 학문적 유산의 생존 여부에 달려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문화
개요
한때 74억 명이 넘는 인구가 살았던 행성 베르녜는 핵전쟁이라는 재앙 이후 100년에 걸쳐 천천히 회복해 가고 있다. 비록 세계는 폐허가 되었지만, 고대 지구의 유라시아 문명에서 이어진 문화적 맥락은 놀라운 생명력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대의 베르녜는 붕괴된 폐허, 군벌 통치 구역, 탈사회주의 계승국들로 구성된 혼성 세계지만, 그 문화적 정체성만큼은 강고하게 남아 있다. 이 세계의 두 주요 문화 유산—카르나로디아의 사민주의 문명과 우타미르의 우월주의적 국가체계—는 예술, 정신세계, 사회 구조 전반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이념적으로는 극명하게 달랐지만, 두 문명 모두 혹독한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유라시아적 미감, 집단주의적 가치관, 실용적 사고방식을 공유하게 되었다.
예술
카르나로디아의 건축 양식은 전성기 동안 1940~50년대 소련식 미감과 아르데코 양식의 기념비적 장엄미를 융합하며 꽃을 피웠다. 관공서와 고층 건물들은 주로 스탈린카(스탈린풍 고전주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고, 일반 대중을 위한 주거 공간은 더 간결한 브루탈리즘 양식의 흐루숍카로 구성되었으며, 값싸고 견고하며 균질한 설계로 구성되어있었다. 우타미르는 이에 반해 북유럽풍의 미니멀 아르데코 양식을 채택했다. 날카로운 직선과 기하학적 질서를 중시하며, 기능성과 청결한 비례감각을 추구하는 무정하고 차가운 미감이 그들의 도시를 구성했다.
예술 면에서는, 카르나로디아가 구성주의, 추상표현주의, 정치적 의식을 담은 미래주의 등 다양한 실험 미술을 수용했던 데 반해, 우타미르는 미니멀리즘, 바우하우스, 간결한 기호화 등 순수성과 명확성을 추구하는 예술을 선호했다.
전쟁 이후로 예술의 대부분은 파괴되었지만, 그 일부는 벽화의 잔해, 깨진 조각상, 구겨진 캔버스로 남아 있다. 신세대 예술가들은 이 파편들을 재해석하여, 붕괴 이후 표현주의와 혼성 복원주의라는 새로운 조류를 만들어내고 있다.
기타를 연주하는 방랑악사
베르녜의 음악 문화는, 비록 핵전쟁으로 많은 기록과 전통이 소실되었지만,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새로운 양상으로 부활하고 있다. 카르나로디아와 우타미르 양측 모두, 상이한 사회구조와 철학에 기반한 독자적인 음악 문화를 발전시켰다.
카르나로디아에서는 군가가 매우 중요한 장르로 자리잡았으며, 국가적 단결과 희생, 혁명을 주제로 한 곡들이 수세기 동안 작곡되고 연주되었다. 이 군가들은 대체로 4/4박자, 장중한 합창 구조, 그리고 관현악적 반주를 특징으로 하며, 오늘날에도 여러 군벌이나 지역 공동체에서 의식곡으로 사용되고 있다. 민간에서는 관현악 음악의 성장세가 두드러졌다. 국영 음악원과 지역 문화 센터들이 중심이 되어 대편성 오케스트라와 실내악이 발전했으며, 이들 작품은 자연과 노동, 공동체적 이상을 주제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쟁 전 카르나로디아 작곡가들은 동유럽 민속 선율과 현대음악의 접목을 시도하는 경향이 강했다. 한편, 전통적 음악 체계와 별도로 지하 음악 씬에서도 독특한 흐름이 등장했다. 특히 포스트 펑크 계열의 록 음악이 발전하여, 냉소적이며 내면을 탐구하는 가사와 차가운 사운드를 특징으로 하는 음악들이 비밀 공연장과 지하 방송국을 통해 유통되었다. 이 음악들은 종종 체제 비판이나 존재론적 허무를 다루었으며, 살아남은 음악들은 핵전쟁 이후 세대들에게 깊은 정서적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우타미르의 음악 전통은 약간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들은 집단주의적 군가보다는 관현악과 형식미를 중시하는 절제된 음악을 선호했으며, 특히 대규모 관현악 작품과 신고전주의 스타일의 작곡이 번성하였다. 이들은 음향의 질서, 대칭성, ‘순수성’을 강조하는 작곡법을 지향했다. 흥미로운 점은, 우타미르 사회 내에서는 헤비메탈이 대중음악으로 유행했다는 사실이다. 이 음악은 초기에는 제도권 밖에 있었으나, 점차 광기의 해방, 불가피한 죽음, 초인성의 추구와 같은 우타미르적 주제들과 결합되며 사이비 종교적 분위기의 음악 문화로 자리잡았다. 일부 지역에서는 헤비메탈 콘서트가 일종의 집회나 의례처럼 기능하기도 했다.
전쟁 이후, 이 모든 전통은 분열되었지만, 그 조각들은 여전히 살아 있다. 어떤 이들은 사라진 도시의 잿더미 속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또 어떤 이들은 동굴 깊숙한 벙커에서 금속 리프를 다시 튕기며, 자신들의 기억과 정체성을 음악으로 이어가고 있다.
요리
베르녜의 요리는 고된 노동과 혹독한 기후에 적응한 생존 음식이자, 조상들의 유라시아 전통을 이어온 문화적 표식이다. 카르나로디아의 음식은 고열량, 단순한 재료, 단맛 위주로 구성되며, 긴 겨울과 고된 체력 노동에 적합하게 설계되어 있다.
잎채소나 연한 채소는 거의 재배되지 않기 때문에, 비트, 감자, 순무와 같은 뿌리채소가 식사의 핵심이 된다. 발효, 훈제, 절임은 필수적인 저장 방법이며, 고기는 대체로 기름지고 탄수화물 비중이 높다.
과일은 희귀하고 소중하게 여겨지며, 블루베리, 린곤베리, 클라우드베리 등 산림 자생 열매만이 주로 사용된다. 잼이나 설탕절임 형태로 가공되며, 진한 죽과 동물성 지방, 검은 빵과 함께 제공된다.
전후 사회에서 식사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서, 공동체의 기억과 저항을 담는 의식으로 여겨진다. 살아남은 자들이 공동으로 조리하고 나누는 음식은, 문화와 유대를 재건하는 행위 그 자체이다.
종교
베르녜의 종교는 지리만큼이나 분열적이고 다채롭다. 카르나로디아인들 중 다수는 카르나로디아 정교회를 믿고 있다. 이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발전한 형태로, 사회주의적 의례와 혁명 순교자들의 성인화가 특징이다. 예배는 전통 성가와 함께 시민 맹세나 집단 서약이 포함되기도 한다.
우타미르 생존자들은 대부분 고대 지구 북유럽 블록의 신화와 선민사상을 결합한 이교주의(Neo-Paganism)를 유지하고 있다. 그들의 의례는 피와 혈통, 신성한 운명에 대한 숭배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그들의 우월주의 이념에 영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또한, 양 진영을 막론하고 초월공학 숭배 컬트가 확산되고 있다. 이들은 초월공학의 유산들을 성물처럼 떠받든다. 어떤 집단은 인류의 재부흥은 과학기술의 부활에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사회구조
카르나로디아와 우타미르 모두, 역사적으로 성별에 따른 차별을 두지 않았다. 여성은 노동, 군사, 학계에 완전하게 통합되어 있었으며, 전쟁 이후에도 이러한 평등한 권한 구조는 대부분 유지되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지역에서 리더십은 성별과 무관하게 공유되고 있다.
카르나로디아 사회는 본래 보통선거, 언론의 자유, 강력한 공동체 시스템에 기반한 사회민주주의 체제였다. 전후 군벌 체제로 이행된 이후에도, 많은 지역 자치 평의회는 이러한 전통을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타미르 역시 일정한 수준의 정치적 비판과 내부 토론은 허용했으나, 그들의 핵심인 인종 중심 이념에 대한 도전은 절대 허용되지 않았다. 현재 우타미르의 잔존 지역에서는 철저하게 계층화된 위계적 위원회 체제가 유지되고 있다.
현 베르녜의 사회 구조는 지역마다 다르다. 어떤 곳은 기술관료주의적 민병대, 어떤 곳은 농업 공동체, 또 어떤 곳은 전통주의 종교 도시국가로 나뉘어 있으며, 그 다양성은 극심하다. 그러나 이 모든 체제의 밑바닥에는 집단주의적 유산과 생존에 대한 공동체 의지가 깊이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