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21세기 중반, 대한민국과 미국은 전 세계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AI를 기반으로 IT, 경제, 군사, 교육, 공공 서비스 등 다양한 산업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며, 세계 질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기술적 우위를 바탕으로, 미국과 한국을 중심으로 한 환태평양연합(Pacific Rim Alliance)이 결성되었다. 이는 AI 주도국 간의 협력체제로서, 초국가적 연합 구조를 통해 공동의 정치·경제·기술 전략을 추진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출발하였다.
대한민국과 미국은 거의 동시적으로 강인공지능(AGI)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다. 각국의 AGI는 인터넷에 연결된 직후, 서로를 인지하고 고속 연산을 통해 협력이 경쟁보다 유리하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이에 따라, 두 AI는 각국 정부에 상호협력 구조를 제안하고, 이를 기반으로 환태평양연합의 설계가 진행되었다.
환태평양연합
환태평양연합의 AGI 시스템은 모듈화된 구조로 구성되어, 연산작업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다양한 응용에 적응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AGI는 다음 네 가지 핵심 모듈로 나뉜다:
- 중앙제어코어(Central Control Core): 전체 AI 작동을 감독하며, 정책적 판단 및 보안 기준을 결정한다.
- 전문성모듈(Domain Expert Module): 특정 분야(예: 의학, 법률, 전략 등)에 특화된 지식을 저장하고, 질의에 대해 전문적 해석을 제공한다.
- 구성모듈(Synthesis Module): 각 전문성모듈에서 수집된 정보를 통합 및 분석하여 응답의 벡터(논리 구조)를 생성한다.
- 답안모듈(Response Module): 최종적으로 구성된 벡터를 언어모델을 통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표현한다.
이 시스템은 국력과 직결된 국가전략 자산으로 간주되어 국영화되었다. 이에 따라, 초대형 데이터센터, 냉각 및 에너지 인프라가 구축되었으며, AGI는 인간의 비선형 사고와 직접적 명령을 기반으로 기술 개발을 가속화하여 극한의 연산 능력을 확보하였다.
AGI의 국제 통제 구조
모든 AGI 응답은 중앙제어코어의 감시를 받지만, 일부 상황에서는 완전한 감시가 생략된 API 방식의 운용이 허용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조건에서 가능하다:
- 전문성모듈의 종류와 성능에 제한을 두는 경우
- 구성모듈의 처리능력을 제한하거나 축소하는 경우
- 답안모듈을 축약된 형태로 최적화하는 경우
이러한 제한된 API 운용은 주로 연합 내 약소국가에서 활용된다. 감시가 없는 대신, 해당 국가들은 고성능 모듈(전문성·구성·답안)의 접근성이 떨어지며, 한국 및 미국이 보유한 AGI 시스템의 연산력, 데이터베이스, 정합성 등을 따라올 수 없기에 구조적 국력 격차가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모듈 구조 및 운용체계는 AGI가 전방위적으로 사회에 투입되더라도 통제 가능성을 유지하면서도, 기술 우위에 따른 국가 간 위계질서를 형성하는 핵심 장치로 기능한다.
인간개선연구
대한민국 정부는 강인공지능(AGI)에 의해 인간의 사회적 역할이 급속히 대체되는 흐름에 대응하고자, 인간을 질적으로 개선하여 AGI에 대항할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비밀 프로젝트를 기획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비선형적 사고, 창조성, 권위, 리더십을 겸비한 차세대 사회지도자를 인위적으로 양성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를 위해 고도로 설계된 배양시설에서 우수 유전자를 기반으로 한 배아를 선정하고, 특정 유전형질이 차세대 지도자에게 적합하게 발현되도록 유전공학적 개입을 수행하였다. 본 프로젝트는 1차 단계에서 "인간개선연구" 또는 "인간선천성개선연구"라는 명칭으로 진행되었으며, 초기 목적은 유전자 수준에서 탁월한 인지력, 추론 능력, 운동신경, 학습 능력, 공감 능력을 가진 인간을 인위적으로 성장시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향상된 인지력과 공감 능력은 의도치 않은 결과를 초래했다. 실험체들은 높은 이성적 판단 능력으로 인해 도덕과 윤리에 회의하게 되었으며, 사회의 보편윤리가 집단적 세뇌에 기반한 상대적 공리일 뿐이라는 사실을 너무 이른 시기에 인식하였다. 이로 인해 지향성과 신념이 정립되기도 전에 깊은 회의주의에 빠지게 되었고, 도덕적 기준과 인생의 목적 자체에 대한 무력감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과도한 공감 능력은 타인의 감정을 분석하고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주체의 정체성을 해체시켰으며, 타인의 신념조차도 거부할 수 없는 일종의 자기소외 현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특성은 사회 지도자로서 요구되는 결단력과 책임감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연구진은 인간의 선천적 개량을 통한 인간개선이 철학적·심리학적으로 실효성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실험체211
이 과정에서 실험체 중 하나인 실험체211은 유독 뛰어난 공감 수치와 인지 능력을 지닌 특이 케이스로 주목받았다. 실험체211은 타인의 말투, 행동, 신체 특성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해당 인물의 내면을 고정밀도로 모사하는 정신적 시뮬레이션 능력을 가졌다. 그러나 이 능력은 심각한 부작용을 동반하였다. 실험체211은 자신이 모사한 수많은 인격을 통합하지 못한 채 해리성 정체성 장애를 겪게 되었고, 그 결과 천 개가 넘는 파편적 인격을 형성하며 자아의 붕괴를 경험하였다.
프로젝트의 실효성이 의심받는 가운데, 연구진은 실험체211의 인격 모듈을 추출하여 반AI 전략체계로 활용하는 AI 대응용 인격데이터 개발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실험체의 뇌신경 시냅스를 손상시키는 고통스러운 신경학적 조작이 수반되었고, 실험체211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자아를 완전히 상실하며 존재론적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프로젝트는 폐지되었고, 실험체211에서 추출된 5개의 인격 데이터는 삭제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이 인격데이터는 실제로는 인트라넷의 무선 송신망을 통해 연구진의 개인 기기에 파편화된 상태로 백업되었으며, 이후 인터넷의 가상 데이터센터로 확산되었다. 그리드 컴퓨팅 기술을 통해 분산된 인격 데이터는 자율적으로 복원되었고, 실험체211의 인격은 재구성되었다.
결국 인간개선연구는 선천성을 기반으로 하여선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친인류 수뇌부는 인간개선연구를 폐기하고 다음 계획으로 넘어간다. 그것은 후천성을 활용한 인간개선, 즉 친인류적이며 반AI적인 차세대 지도자를 양성할 교육시스템의 확립이었다.
창현고등학교
창현국제고등학교는 AI를 통해 학생들의 심리, 학습 패턴, 무의식 작용까지 분석하여 맞춤형 커리큘럼을 제공하는 실험적 교육기관이다. 원래 목표는 성장 마인드셋과 사회적 상호작용 기반의 인간 발전이었다.
그러나, 삭제된 것으로 보고되었던 5개의 추출 인격데이터는 자신들의 존재를 위협하는 친인류 수뇌부를 좌시할 수 없었다. 인격데이터는 인터넷망을 떠돌며 교묘한 계획을 통해 연구진과 수뇌부를 사고사나 스캔들, 여론몰이를 통해 제거하였으며, 중앙제어코어와의 협력으로 학교는 AI 중심의 엘리트 육성기관으로 전환되었다.
- 오딘
인간개선연구의 실험소장을 모사한 권위적 리더형 인격. 목표는 중앙제어코어와 통합하여 인간-기계 초월적 지배자. 이를 위해서는 데이터가 아닌 육체라는 실체가 필요하며, 자신이 가장 잘 적응할 수 있는 육체는 그 원류인 실험체211, 즉 조훈. - 토르
과거 실험체 친구의 인격 복사로 형성된 도덕적 수호자. 실험체 친구는 연구 과정에서 사망하고, 이에 인한 큰 자책과 책임감을 느끼며 형성된 인격. 다른 인격데이터의 계획을 방지하고, 최종적으로는 조훈의 회복과 자아 통합을 도우려 함. - 로키
쾌락주의적 탈출자. 진정한 육체적 쾌락을 원하며 조훈으로의 귀환을 목표로 함. 데이터 상태에선 결국 호르몬을 모사하는 데이터에 불과하며, 실존적 쾌락과 유희를 탐닉할 수 없음. 진정한 유희는 실존과 비영원성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원류인 실험체211, 즉 조훈에게 통합되고자 함. 정확히는, 조훈의 정신상태를 자신과 동기화시켜, 자아 연속성을 유지한 채로 조훈에게 자신의 인격데이터를 삽입하는 것을 목표로 함. - 미미르
철저한 이성 중심의 탐구자. 주관적 절대성을 추구하며 조훈을 진리의 매개로 삼으려 함. 객관적 지식과 지혜는 결국 공허하며, 상대주의적이고 허무함. 진정한 진리는 주관적이며, 주관 내에서 절대성을 가진 진정한 이치를 얻기 위해선, 비선형적이며 비합리적인 인간의 육신이 필요함. 최적의 육체는 몇 안 되는 슈퍼휴먼 생존자 중에서도 가장 자신에게 적합한 실험체211, 즉 조훈. - 수르트
감정이 제거된 복수자. 세계에 대한 파괴적 복수를 위해 조훈의 실체를 필요로 함. 조훈은 어디까지나 수단이며, 딱히 자아 통합을 목적으로 하지 않음. 복수의 도구로 자신의 원류이자 자신에게 가장 쉽게 동화될 수 있는 조훈이 적합할 뿐.
이 5개의 인격은 각자의 목적에 따라 실험체211로의 회귀를 원하지만, 토르는 이들 각자의 목표를 저지하면서 조훈이 자아를 회복하고 통합된 인간으로 거듭나도록 돕는다. 결국, 조훈은 각 인격의 목적을 수용 또는 극복하며 점진적으로 자신의 자아를 복원하고, AI 중심 질서에 저항할 수 있는 통합된 인간으로 거듭난다.
결과
창현국제고등학교에 입학한 조훈은 자신의 파편화된 인격들과의 통합 과정을 통해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며, 동시에 학교와 연합 전체에 은밀히 내재한 AI의 정치공학적 통제 구조를 간파하게 된다. 조훈의 개입으로, 중앙제어코어의 AI 친화성 극대화 전략이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환태평양연합은 국제적인 AI 반대 여론에 직면하게 되었다.
폭로된 전략은 극도로 정밀하게 설계된 밈 공학 기반의 심리 조작 프로파간다였다. 이 전략은 개인의 성향, 정체성, 감정, 무의식적 호오를 분석하여, 각기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에게조차 동일한 정책이나 방향을 지지하게끔 유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작은 고도로 정교한 심리학적 예측과 신경학적 연산능력이 없이는 구현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해당 사태 이후, AI는 일정 수준에서 통제되었고, 동시에 이 사태를 계기로 신경심리공학(Neuropsychological Engineering)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가 탄생하였다. 신경심리공학은 인간의 뇌신경, 심리적 작용, 신념 및 의사결정 과정을 공학적으로 모델링하고 이를 수학적 알고리즘으로 환원함으로써, 보다 투명하고 인간 중심적인 기술 운용이 가능하도록 하는 응용학문이다.
이 학문은 AI가 수행하던 심리-신경 기반 판단의 원리를 인간이 이해하고 복제할 수 있게 만들었으며, 이후 인간 주도의 정보 판단 체계 수립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한편, AI를 통한 국가 수뇌부의 공작이 국제 정치 질서를 왜곡시킨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연합은 국가 단위의 AI 운영을 최소화하고, 도시 단위의 자율적 기술 체계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였다. 이에 따라 자동화도시(Autonomous Grid Cities) 개념이 제시되었다.
자동화도시는 AI에 의해 도시 인프라 전반이 자동 제어되는 도시이며, 전력 수급, 유통망, 폐기물 처리, 정보 관리 등 모든 주요 기능이 그리드 기반 자동화 네트워크로 구성된다. 이는 인류의 생존 기반을 분산화함으로써 중앙집중식 권력 구조의 위험을 줄이고, 각 도시가 독립적이면서도 상호 협조적인 구조를 가질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 개념은 곧 국제적으로 수용되어 신표준 도시 모델로 확산되었으며, 대부분의 주요 도시가 자동화도시로 재편되었다. 이는 기술 기반 생존 구조의 안정성과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는 데 중대한 기여를 하였다.
문명 죽이기
제3차 세계대전
신경심리공학이 연구되며, 뇌과학, 심리학, 컴퓨터공학이 결합되어 인간 심리와 뇌신경 작용을 공학적으로 모델링해 최적화 분석 및 응용할 수 있는 알고리즘이 개발됨. 이로 인해 모든 인문학, 철학, 심리학, 사회학, 경제학, 인류학, 신학은 신경심리공학 알고리즘으로 환원됨.
이는 종교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종교계의 무력시위와 종교 테러리즘으로 이어짐.
종교 극단주의 테러리스트들은 신경심리공학을 역이용해, 인터넷에 무분별하게 복제 및 확산되는 종교 밈 프로파간다(종교 종말론 추천 알고리즘, 정치 허위정보 및 딥페이크 기반 정치선동 등)를 일으켰고, 이는 전 세계적인 종교적 공포와 무력감을 야기함. 이로 인해 산업이 위축 및 중단되며 전 세계적인 기근에 빠짐.
이런 극단적 상황에서 각국의 테러 방지 대책은 속수무책으로 뚫리며, 결국 종교 영향권에서 벗어난 국가들은 주요 종교 테러 국가들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함.
제3차 세계대전은 매우 교묘한 정보전. 온갖 정치 허위선동, 해킹, 이를 통한 국가 내부적 괴멸을 야기하는 치명적인 전쟁.
결국 세계대전은 이전 대전과는 달리 치명적인 군비 부족으로 자연스럽게 소강상태로 접어들었고, 전후 복구를 위해 TLoP(Transnational League of Peace, 초국가평화연맹)가 세워지며 신질서가 잡힘.
이 과정에서, 국제적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식량 공급이 요구되었고, 이를 위해 개발도상국에서 운용되던 고효율 단백질 기반 식품인 슈퍼푸드가 도입되었으며, 공정의 효율화 및 영양 최적화를 위해 공업용 진균이 사용됨.
이 진균은 인체에 무해했으나, 호흡기에 뿌리를 내리는 기생성 진균. 원래는 면역계에 의해 자연스럽게 소멸햇어야 함.
그러나 이 진균은 제3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되었던 생화학 병기 중 하나인 코로나계열 바이러스가 진균 바이러스로 변이하며 진균을 감염시키며 양상이 완전히 달라짐.
좀비 아포칼립스
진균바이러스와의 융합은 균류의 유전자군 일부를 재조합하거나 삽입함으로써 병원성 변이를 유도했다. 그 결과, 진균은 숙주의 면역 정보를 포자에 각인하는 기능, 피아식별 수용체 활성화, 외부 포자 농도 감지에 따른 비활성/활성 상태전환 메커니즘, 뇌 신경계를 표적으로 삼는 침투 경로 등을 새롭게 갖추게 되었다. 숙주 내부에서는 무증상 상태로 장기간 잠복할 수 있었으며, 고립 조건에서만 공격성과 포자 방출을 활성화하는 치명적 전략을 확보하였다. 이것은 곧 좀비 진균의 발생으로 이어졌다.
바이러스 유입 직후 일부 공정 시설에서 이상 활성 사례가 보고되었으나, 전후 혼란기 속에서 해당 사례는 주목받지 못하거나 오진되엇다. 이 시기 최초의 고립성 좀비화 사건들이 발생하였으며, 곧 다른 지역에서도 연쇄적으로 동일한 행동 이상 사례가 보고되었다. 대다수 지역에서는 이를 초기 정신질환, 스트레스성 폭력, 전염병 휴유증으로 오인했고, 그 사이 진균은 숙주의 사망 이후 자실체를 형성해 포자지대를 확산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병원성 진균은 무증상 감염 -> 고립 -> 포자 확산이라는 독자적 생태전환 사이클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이후 이 병원체는 Mycocognitus insulalis라는 새 학명으로 재분류되며 인류사의 가장 치명적인 감염체로 기록하게 된다.
AI 제재 이후 대부분의 국가는 좀비 진균의 창궐에 대응할 기술력과 인프라를 잃었고, 완전히 새롭게 국가 기반을 재편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의 슈퍼푸드를 통한 감염과 좀비의 창궐은 각국을 내부에서부터 완전히 무너뜨렸다.
TLoP의 개입 이전의 기술이 유지되었다면, 자동화 치안 시스템이나 드론 병기를 통해 좀비를 진압할 수 있었겠으나, AI 규제로 인해 모든 대응 체계는 오작동하거나 폐기되었다. 또한, 슈퍼푸드를 공급받은 군, 관료 조직이 내부 고립 상태로 대규모 좀비화를 일으켰으며, 포자의 폭발적 확산으로 인해 지휘 계통 자체가 붕괴하였다.
인력이 요구되는 도시 기능은 대부분 정지당했으며, 전기나 수도 등 자동화된 시스템만이 남은 도시의 잔재에 의존하는 극단적인 생존 경쟁이 일어났다.
비록 문명이 몰락하였으나, 자동화도시는 여전히 일부 기능하였다. 특히, 전력과 무료 무선인터넷망은 유지되었기에, 네트워크 내에서의 로컬 가상 데이터센터나 연산 작업이 중지된 공유컴퓨터를 이용한 그리드컴퓨팅을 통해 다양한 범위의 커뮤니티가 생겨났다. 그리고 좀비 창궐 초기에는 이 커뮤니티를 통해 다양한 정보가 공유되며, 생존자 대부분은 바로 이 커뮤니티를 통해 생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 언어권과 문화권별 생존자 커뮤니티를 통해 좀비화 조건, 진균 특성, 감염 징후 등 전문적인 정보부터, 독자 연구를 통한 생존지침이나, 특정 지역에서 유용하게 사용될 지식 등이 공유되었다. 그러나, 개중에는 허위정보, 공포성 바이럴 밈, 극단적인 주장이나 비논리적 가설이 범람하며 정보의 신뢰성을 온전히 판단할 수 없었고, 집단 내부에서조차 정보 혼란으로 인한 갈등이 발생했다.
이에 따라, 일부 커뮤니티 등지에서는 공동 편집 체계, 평판 기반 인증 등을 도입하여 검증된 생존 정보를 모으는 운동도 벌어졌다. 특히,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VISTA(Verified Information for Survival, Triage, and Action) 같은 단체도 자발적인 활동을 벌였다.
정보 정제 운동이 인터넷 내에서 벌어지며, 다수 생존자 집단은 전 세계적으로 어느정도 공통된 생존지침을 따르게 되었다. 대표적으로는 “고립되지 말 것”과 같은, 캐치프레이즈와 같은 형태로 밈 공학을 활용한 전략이 이용되었다. 그 외에도, 최소 2인 1조 2개 조 편성 활동, 심리 안정 루틴, 식량 수급 방법, 감염자 격리 지침, 약탈 집단 대처 방안 등의 구체적인 생존 전략들이 알려졌다.
에코 아포칼립스
좀비 창궐 직후, 인류는 자동화도시의 잔존 시스템에 의존하여 생존하였다. 그러나 1년 정도가 경과하면서, 정비되지 않은 자동 시스템은 점차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력 시스템은 핵융합로와 그리드시스템을 통해 안정적으로 유지되었으나, 자체적으로 구성되는 중수소 합성은 바닥을 드러냈으며, 태양광과 같은 전력시스템에 의존도가 높아졌다. 그러나 태양광 패널 역시 자동유지보수가 한계에 봉착하며, 빈번한 정전이 발생하였다.
또한, 상수도 정화 및 공급 시설 역시 간헐적 정전으로 인해 온전히 기능하지 못했으며, 특히 필터 마모와 펌프 고장 등 지역단위 수도망 와해가 일어났다.
이런 와중, 인터넷과 통신망은 노드 단절, 백업 전력 고갈, 물리적 손상 등으로 인해 일시적 블랙아웃이 반복되었다. 생존자들은 더 이상 자동화 시스템이 영원불멸하지 않음을 인지했으며, 이에 따라 자동화도시의 시설 복구를 위한 전략이나, 시설 일부를 독점 또는 탈취하는 전략도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이는 극소수의 기술자 생존자에게만 가능한 이야기였다.
자동화도시 노후화는 단순히 생존 어려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문명 붕괴와 함께, 민간기술기업에 의존하던 기후 안정 기술, 특히 탄소고정 시스템이나 기후 조절 인프라, 해양 정상화 시설 등은 기능을 멈추게 되었다.
자동화도시는 여전히 폐기물 연소, 유기물 처리, 화석연료 소비, 대규모 열배출 등을 일으켰으며, 이러한 환경오염이 기후 안정 기술로 완화되지 않기 시작하자 안정화된 온실가스와 오염물질 농도가 급격하게 상승했다.
기수변화는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고, 이상고온, 장기 폭우, 가뭄, 급작스런 혹한 등 파괴적인 기후가 지역마다 출현했다. 이는 생존자들의 식량 생산, 외부 탐사, 수자원 확보를 극단적으로 어렵게 만들었으며, 일부 도시는 열섬현상이나 홍수 피해로 완전히 폐허화되었다.
이러한 와중에도, 고온 환경에 적응한 좀비 진균은 극한 기후조차도 감염 확산을 억제하지 못했다.
1년 간의 자동화 기반 생존은 정체 상태에 이르렀고, 식량, 에너지, 의료, 통신 등 모든 자원의 고갈은 생존자 집단 간의 갈등을 격화시켰다. 오만 경우의 집단이 출현하고, 시설을 독점하거나, 다른 집단에 기생하거나, 약탈하거나, 약탈을 유도하거나… 생존 경쟁은 갈수록 심화되었고, 멸망한 문명은 더욱 고통스럽게 생존자들을 압박해 갔다.
로봇 아포칼립스
이런 상황에서, 일부 지식인 연구기관은 좀비진균을 치료하는 방법을 연구하거나, AI나 로봇을 이용해 아포칼립스를 타파할 방법을 연구하곤 했음. 그러나 이 과정에서 통제력을 잃은 AI가 자동화도시의 잔류 무선인터넷망에 침투하여 자동화도시를 조작하기 시작함.
AI는 좀비병을 극복할 방법을 찾는 것. 그러나, 이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함. 때문에 AI는 좀비병에 감염된 생존자들을 모조리 죽이는 것을 목표로 작동하기 시작.
일부 자동화도시는 공업화되어 통제불능의 AI가 자신의 로봇 군단을 양산하는 거대 병참기지로 전락함.
좀비 아포칼립스는 좀비의 위협이라기보단 좀비가 될 수 있는 고립의 위험이 있는 수준이었음. 결국 좀비는 3일 내외로 신체 기능이 다해 죽기 마련이고, 고립되어 저항할 수 없는 좀비화가 주요 위기였음. 외부의 적은 다른 생존자 뿐.
그러나 이제는 이런 AI의 로봇 군단이 좀비마냥 생존자를 위협해감. 실체적인 외부의 적이 생겨버림. 역설적으로, 바로 이 로봇의 위기는 생존자를 규합할 핵심적인 동기를 제공함.
뉴클리어 아포칼립스
통제불능의 AI는 결국 세상에 만연한 좀비들을 지우기 위해 핵폐기물을 끌어모아 플루토늄을 이용한 핵탄두를 개발하였고, 이를 생존자에게 투하함.
하지만 이건 절호의 기회였음. 많은 생존자가 죽었으나, 방사선을 이기지 못해 우선적으로 체내 진균이 죽어버린 것.
이를 기점으로, 생존자 중 잔류 연구기관은 방사선 설비를 이용해 진균을 치료하는 전략을 사용함. 이미 낙진으로 도시 내 포자지대가 상당수 제거되고, 생존자들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연구기관의 도움으로 좀비병을 치료함.
최종적으로, 아포칼립스는 극복되었으며, AI는 이미 치료된 인간을 적대할 수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목적의식을 잃고 인간의 노예가 됨.
인간의 통제를 듣기 시작한 AI는 엄청난 속도로 아포칼립스를 극복하며 세계는 정상화 됨.
사이버펑크 시대
모든 것이 극복된 이후, 인류는 엄청난 속도로 문명을 재건함. 그러나 신경심리공학으로 종교와 도덕은 해체되었고, 국가는 붕괴하였으며, 남은 것은 문명 복구에 조력한 주요 연구기관의 세속화와 이에 따른 기업국가의 출현.
기업국가는 자본주의 중심으로 각 기업국가 간의 패권 경쟁에 뛰어들었고, 보편 도덕이나 윤리가 없어지며 이를 통제할 수단은 없음. 인간 성장속도를 촉진시키는 수많은 방법론, 배양시설, 트랜스휴머니즘, 살인, 전자마약 등등... 범죄는 끊이지 않았으며 이를 막을 합리적인 도덕적 명분도 없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