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제국/이벤트

TLE팀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10월 1일 (토) 23:37 판 (새 문서: == 대아전쟁 이전 == === 기울어진 보름달 (1877) === 환의 어릴 적 추억은 그의 아버지 영이 없이, 어머니 조씨와 유모, 그리고 조부 공의 그것...)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대아전쟁 이전

기울어진 보름달 (1877)

환의 어릴 적 추억은 그의 아버지 영이 없이, 어머니 조씨와 유모, 그리고 조부 공의 그것만 남아있다. 이환의 아버지 영은 환이 세 살이 되었을 무렵에 짧은 생을 마감하여 저 자신이 아들이 장성해나가는 것을 보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영의 아비 공까지 수심에 잠겨 활력을 잃게 하였다. 유년기에도, 그리고 한참 후에도 환은 조부 공이 그러하였듯 항상 아버지 영을 그리워하였다. 조부 공은 환을 아끼었다. 공 또한 제 명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에, 남겨질 작은아이에게 추억이라도 남겨주자 하였다. 유년기의 환은 근심없이, 그저 아이가 되어 웃고 울었다. 용상에 오를 지존이 아닌, 한 아이로 유년지를 지샜던 것이다.

하지만 환에게는 그 유년기조차 빠르게 끝나게 되었다. 공이 죽어, 환이 무슨 생각할 겨를도 없이 찬 옥좌의 주인이 되었던 것이었다. 용상에 앉아 나라를 굽어살필 수 있었지만, 환은 어렸고, 주위에는 외척이라고 쓰고 도적떼라고 읽는 이들만 널려있었다. 도적떼들은 환이 조부 공에게서, 그리고 더욱 더 상대로 올라가 태조에게서 물려받은 나라를 마음대로 휘저었다. 환의 신민들은 고통받았고, 신음하였으며, 배곯고 굶주렸다. 무언가를 바꾸어보려던 이들은 전부 도적의 날에 요참 된지 오래였고, 의로운 선비들은 이 땅에 남아있지 않았었다.

환도 장성해가면서 자신의 신민이 요순의 치세가 아닌 걸주의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환에게는 이것이 가장 슬펐다. 자신은 이 나라의 큰 아버지인데, 아들 딸들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단 것이 말이다. 아버지 영이 하였던 것처럼 무언가를 해보려 하였으나, 시시건건 도적떼의 감언과 참언은 그를 멈춰세웠다. 그는 술을 마시고, 궁녀를 취하였다. 환의 어머니 조씨가 눈물로 환을 꾸짖어보고, 훈계하고, 빌어보았지만 환은 그리하지 않았다. 어짜피 무언가를 할 수도 없었으니, 이리 몸이라도 달래야하지 않아야겠는가. 도적떼들은 환의 모습에 마음을 놓고, 제들의 산채로 돌아가 연회를 즐기기 시작하였다. 환의 병세를 지래짐작하고, 그리하였다.

그러나, 환은 끝내지 않았다. 영의 총기를 물려받아 영민한 환은 도적떼들을 올가미에 묶어 잡는 것을 짜고 있었고, 제 힘을 키웠다. 외숙이 제게 찾아왔을 때, 환은 자신이 건재함을 도적들에게 알렸다. 불비불명. 환은 몸을 풀고, 다리를 움직여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도적떼들은, 저들의 목에 칼이 들어올까 끝내 일을 저질렀다. 환의 올가미에 걸린 것이다. 하나 둘, 도적들에게 지존이 누구인지 피로써 알려주었다. 환은 불비의 작새가 아닌, 등상의 소룡이었다.

모든 것을 하나 둘 되돌리기 시작하였다. 옛 옳은 풍습을 되돌려 도적떼가 찾아오지 못하게, 울타리를 쌓았다. 신민의 고통을 덜어주었고, 썩어 문드러진 나라의 중주를 새로 끼우기 시작하였다. 환은 밤낮 가리지 않고 일하였다. 저 자신의 생을 태워 이 나라에게, 그리고 자손 만대에게 번영을 물려줄 수 있다면 어찌 그리하지 않겠는가. 끊임없이 고통을 감수하면서 앞으로 달렸다. 돌이 굴러와도, 바람이 불어도, 그리고 때론 가시밭길을 지나가면서도 환은 웃었다. 적어도 자신의 선택으로 길을 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환은 멀리서 이방인이 왔어도, 북적이 다시 본성을 드러냈을 때도, 천명을 이어받았을 때도, 웃었다. 다리는 꼿꼿하게 펴 있었다.

침상에 누워 환은 조용히 제 어린시절을 가만히 앉아 떠올려보면, 그다지 좋지 못한 기억만 남아있다고 생각하였다. 아니, 더 나아가서 성년이 된 후 몇 년까지도, 어쩌면 생애 전부가 그다지 좋지 못한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환에게는 걱정도, 후회도 한 톨 없었다. 제가 이루고 싶던 것, 하고 싶던 것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가니, 어찌 흉금에 잔재가 남아있겠는가. 환은 웃으면서 제 앞에서 울고 있는 아들같은 동생, 천에게 말하였다.

'바른 것을 다시 세우고, 모든 것을 이루었으니 근심이 무슨 연유로 남아있겠는가. 천명을 다시 받아 비로소 하늘로 올라가니 상제께 청하여 한을 수호해주리라 하겠다. 슬피 마라, 전부 내 명이다.'

그리고 조용히, 그리고 아주 천천히, 눈꺼풀의 무게가 환을 짓눌렀다. 환은 눈을 감았다. 두 번 다시 앞을 볼 수 없을 것이겠지만, 입꼬리는 올라갔다. 환은 웃었다. 웃으면서 죽을 수 있었다.

을해년 제83회 중추원 회의 - 군 예산안 (1936)

"다들 그 입 다무시오! 지금 경친왕 전하의 어전에서 무슨 망발들이오? 누가 보면 당신네들이 패싸움이나 벌이는 시정잡배 천것들인 줄 알겠소! 그대들에게는 이 대한의 의원이라는 자각도 없소? 부끄러운줄 아시오!" "저저저! 그 무슨 궤변이란 말이오! 청빈의 가치를 잊은 그대들 대한당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소!"

시정잡배들이 싸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는 이곳. 금빛으로 빛나는 이화문이 벽에 걸려있고, 그 아래에 세 자의 한자가 멋들어지게 써 있는 곳, 중추원.

여러 당파의 의원들이 모여 국정을 의논하는 그 곳에서, 의원들은 입씨름에서 주먹다짐으로, 종국에는 마치 시골의 무지렁이 석전패 마냥 명패며 잡기며 하는 물건들을 집어 던지는 "토론"을 하고 있었다

"후...조용히들 하시오."

그 한심한 작태를 보다 못한 경친왕이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말하자. 패싸움을 벌이던 의원 무리는 그제야 경친왕의 어전임을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n잠시 후 좌중이 완전히 진정되었음을 확신한 경친왕은 참고인 석에 앉아있는 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강 대장, 이어서 말해도 좋소."

이강은 경친왕의 허가가 떨어지자, 가볍게 허리를 숙여 읍하곤 주위를 슥 둘러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다시금 말씀드리옵지만, 아국의 군은 온전한 제국의 방위를 위하여 추가적인 예산의 증액이 필요하옵니다. 작금의 부족한 예산으로는 군관들의 녹봉조차-"

이강의 말을 끊으며 정장을 말끔이 입은 남자가 소리쳤다.

"아니, 지금 군에 들어가는 예산이 얼마나 되는지 아시오? 탁지부 협판이 이르길 군이 타가는 예산이 청조의 서태후가 축재한 비자금에 비견된다 하였소! 대관절 그리 많은 예산을 받고도 더 받으려 함은 사사로운 목적이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소!"

"당장 그 더러운 입 다무시오! 당장 세속오계와 삼강오륜도 모르는 마씨잡변을 숭상하는 무리답게 사군이충의 뜻으로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황상폐하를 수행하며 보국안민하는 군을 되도 않는 망언으로 헐뜯는구려!" "뭐요? 지금 뭐라 하셨소! 마씨잡변!? 공자께서 이르길 민심이 천심이라 하였는데-"

불과 일각도 체 지나지 않았건만, 다시금 서로에게 삿대질을 해 가며 소란을 피우는 의원 무리들의 꼴을 보다 못한 경친왕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크게 소리쳤다.

"그만! 그만 좀 하시오! 더 이상 못 들어 주겠군, 회의를 하는 의미가 있기는 있는거요? 여는 개인의 자격이 아닌 대한국 황실의 일원으로서 이 자리에 임하였소. 헌데 나(孤)를 앞에 두고 망언만 늘어놓으니, 그대들은 그대들이 대한의 의원이라는 자각이 있기나 한 거요?"

경친왕의 노기에 맥을 못 추던 의원들은 경친왕이 중추원을 나가버리자, 아무런 의미도 없이 서로 바라만 보다 자진 해산했다.

비서가 모는 차를 타고 밖으로 나온 이강은 말 없이 차창의 밖을 바라보았다.

거리 한켠에선 새빨간 완장을 차고 붉은 깃발을 흔들며 '우리에게 쌀 한 홉이라도 보장하라!'고 쓰인 현수막을 내걸고 행진하는 노동자 무리를 검은 제복과 철모를 쓴 전투경찰이 호루라기를 불며 몽둥이로 두들겨 패고 있었고, 구석진 골목마다 노소를 따지지 않고 추례한 꼴의 노숙자와 고아들이 넝마를 걸치고 앉아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 위대하던, 빛나던 제국의 위상이 어찌 여기까지 추락했는가. 지금껏 내가 보아왔던 것은, 믿어왔던 것은 무엇인가.

그는 믿어오던 모든 것에, 환멸감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장군님, 도착했습니다." "음."

사저로 돌아가던 이강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항상 푸르던 하늘의 색이 누렇게 바래 있었다.

해 (1936)

달이 해를 대신하여 중천에 떴을 때, 한성 동대문 인근에서는 때 아닌 추격전이 일어나고 있었다.

"저놈 잡아!" "노인네가 뭐 이리 빠르데?"

간신히 몸을 피한 남자는 숨을 고르면서 기전에 있던 일을 회상하였다.

"...그리하여 불필요한 무력이 사용된다 한들...". 낮, 중추원에서 개혁을 선언한 이강의 연설에서 이런 말이 있었다. 제국의 황상폐하의 명을 받드는 대한당의 일원인 그 였지만 이 한마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때의 그는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군을 동원해서 이 제국을 장악했다 하여도 과연 이 모든 인원을 전부 그 잘난 '개혁' 시켜버릴 수 있을까. 그리 생각하며 그는 구 대한당 의원들이 모여있는 건물로 향하였다.

밤이 깊었다. 대략 아홉 시 정도 되었을까. 저 이강 무리가 통금령을 내렸으니 어쩔 수 없이 이 즈음에서 해어져야 했다. 뚜벅. 뚜벅. 뚜벅. 양장과 구두를 입은 장정 둘이 그에게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이상하였다. 주위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였다. 마치, 사람 두어명 쯤 죽어도 모를 것 마냥.. 그쯤에서 생각을 끝낸 그는 이제는 잘 움직이지도 않는 늙은 몸을 움직여 제빨리 뛰기 시작하였다. 이강 그놈이 정녕 대한에 의기있는 의원들까지 죽이려고 하는 것인가. 정녕 이 대한을 저 덕국처럼 전쟁에 미친 나라로 만들려는 것인가.

숨을 다 고른 그는 다시 움직이려 하였으나 뒤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금속 느낌이 그를 막아섰다. "괜히 따로 끌고와서 처리할 필요 없으니 우리야 좋군." "노인네. 마지막을 할 말 있어?"

최후를 직감한 그는 담담하게 말을 남겼다. "백성의 권리를 지키지 못하는 나라에는 충성할 필요가 없다. 대한의 신민들이여, 그대들을 탄압하는 이들에 끝까지 저.."

청소 (1937)

세상 힘들지 않은 일이 어디있겠냐마는, 오늘 청소는 평소보다 좀 더 까다롭다. 집안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벌레새끼들을 제거해야 해서 시간이 좀 많이 걸릴 것 같았다.

높은 곳과 낮은 곳을 가리지 않고 비충들이 여기저기 숨어들었으니, 어쩔 수 없이 극약처방을 할 필요가 있었다. 벌레를 청소하는데 소모될 물자가 아까웠지만, 내버려둔다면 금방 새끼를 쳐 큰 우한이 될 것이 분명했다.

마음같아서야 도시 전체를 불태워 버리고 싶었지만, 그래서야 공들여 점령한 까닭이 없어지기에, 포격으로 벌레먹은 건물들을 도려내기로 했다.

포격이 근처에 떨어지면, 숨어있던 비충들이 화들짝 놀라 이리 저리 밖으로 뛰쳐나오는 것을 중대원들이 깔끔하게 청소했다.

포격에도 비충들이 나오지 않으면, 대대에서 살충제를 받아와 의심스러운 곳을 청소했다. 주변에서 비충들이 털썩하고 쓰러져 컥컥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과연 벌레새끼들 다운 역겨운 소리였다.

듣기에 좋은 소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효과는 확실했는지 죽거나 다치는 장병은 없었다. 어떻게, 청소는 꽤나 잘 되고 있는것 같다.

직례 (1937)

대한으로 따지자면 경기도 즈음 되는 권역을 완벽하게 장악한 대한군은, 요새화된 북경지역을 넘어서 하루가 멀다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행군 중단. 이곳에서 오찬을 해결하고 간다"

김정오 참령이 이끌고 있는 제국군 제 11사단 2보병대대는 지난을 앞에 두고 고작 40리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거리까지 왔다. 가마솥을 깔고 모락모락 밥을 짓고 있을 무렵, 저 멀리서 희미하게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김 참령님. 저기, 남동쪽에 움직이는 무리 같은 것이 보입니다." "확실한가? 이 인근은 분명 아군이 확실하게 뙤놈들을 몰아냈다고 하였는데." "제 소견으로는, 뙤놈 피난민인 것 같습니다."

피난민. 아니 저것들을 피난민이라고 불러줘야 할까. 아무튼, 명칭이 어찌되었든간에 직예마저 대한군에게 점령당하자 북경에서 잠시 비충을 없앤 일에 찔린 것들이 제 발을 저린 것 같았다고 김정오는 생각하였다. 김 참령은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부하에게 말을 걸었다.

"상부에서 지침한 바에 따르면, 우리는 문명 개화로서의 짐을 진 것이라고 하였지?" 의아한 표정을 지은 부하, 안우생은 곧 대답을 하였다. "옙. 이강 총리께서 직접 명시한 바에 따르고, 또 제국군 헌장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그리고 안우생이 김정오 참령의 눈을 바라보자 안우생은 어딘가 서늘함을 느꼈다. 뒤이어, 김정오 참령이 조용히, 안우생이 들릴정도로 말을 꺼냈다.

"그럼 문명개화를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도태된, 쥐새끼같이 이 아주의 문명을 갉아먹는 것들을 처단하는 것도 우리 제국군의 짐이겠지."

안우생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있다 곧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김정오를 바라보았다. 무어라 말하고 싶은 얼굴이지만, 차마 하지 못하였다.

"...." "그래, 전 대대도 필요없겠지. 중대 하나만 호출해서 저 비충들을, 아니 비충만도 못한 것들을 청소해보지."

안우생은 잠시 고민하다가 곧 경레를 올리며 말하였다.

"..충성"

제남 (1937)

저 높으신 양반내들이나 고상한 취미로 가볼 수 있는 해외여행을, 나는 다른식으로 나올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이 꽤 유쾌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한반도에만 갇혀있던 때와는 다르게 신기한 경험이었다.

참령님이 말한대로 청도를 지나 동영, 직례를 거쳐갔다. 주위에 많은 고난도 있었고, 봉변에 처할 뻔 하였지만 대한 필승의 군대답게, 때마다 승리를 거머쥐기 일쑤였다. 이번에 아군이 들어온 곳은 그 유서도 깊다는 제남이었다. 어릴 적 할아버지께 들은 바로는 그 조조가 이 제남 땅의 상으로 임명되었다고 하였었다. 아무튼, 그런 제남 땅에 들어올 수 있었으니 얼마나 놀라웠겠는가. 내 짧은 생에 이런 경험을 하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유서가 깊다는 말을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주변을 파도 파도 보물들이 나온 것은 예사이오, 뜨신 온천물은 전장에서의 피로를 풀어주는 단물과도 같았다. 여자들은 말할 것이 뭐가 있을까, 물론 뙤놈들 답게 안면이 그리 잘나지는 않았지만 도시 사람들 그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주위 민가에 있는 뙤놈들에게 재물이 부족하여 조금 '빌렸'다. 물론 제 분수를 알지 못하고 약간의 '마찰'이 있었지만, 곧 원만한 합의가 있었다. 몇몇 반항을 하던 벌레들이 있었지만, 곧 우리의 손에 들린 먼지털이개로 바스러졌다. 그리 될 것 같았으면 그저 사리고나 있지, 쯧.

무엇이 되었든, 이 여행은 즐겁다. 이래서 높으신 양반내들이 여행을 다니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남경 (1937)

수 많은 주인들이 군림하여 천하를 바라보았던 곳, 남경은 이제 동방에서 찾아온 새 주인을 맞이하기 시작하였다. 새 주인들은 저들의 위세를 자랑하기 위해 위풍당당하게 행진을 시작했다. 그러나 장병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어두운 그늘만이 져 있었다. 이유는 당연히, 그들의 상부에서 지시한 이 잘난 도시, 남경 진입이라는 명령 때문이었다. 서양의 야소 탄생일 이전에는 집으로 잠시 보내주겠다 약조하였으면서 이런 명을 내려놓으니 어찌 울분이 차지 않으랴.

척. 척. 척.\n\n발 맞춰 행진하던 그때,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적이다!"

한 병졸이 소리를 듣자 마자 소리를 질렀다. 순간, 제국군의 눈빛이 달라졌다.

분노에 차오른 눈빛, 자신들의 원한을 풀 대상을 찾으려는 탐색의 눈까지. 자랑스런 대한어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의양군 각하, 제발 재고하여주십시오! 남경에서 고삐를 놓아버리면 제국의 위신이 말이 안된-" "그만하지. 그리고, 난징에 살고 있는 잠재적인 적들을 모조리 처리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의양군 이재각은 눈앞에 있던 남성의 말을 끊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고생한 제국군을 위해서, 그리고 저 뙤놈 수괴들에게 경고를 해주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일세." "그러나 저 청국노들을 죽인다 해도 달라지는 것이 없지 않사옵니까! 오히려 뙤놈들을 죽인다 할지어라도, 이 제국에 득이 되기는 커녕 실만 가져올 것입니다. 아직 제국과 협력하던 군벌들까지 저 가정부로 돌리게 될 것입니다!"

"..자네, 마음이 너무 약하군. 그리고 정신력도 부족한 것 같구려. 대한제국의 황군에게는 지켜야 할 최저한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겠나? 또 번벌들이 날뛴다 한들, 충용무쌍한 제국군이 격퇴시킬 수 있는 것들이 있겠는가? 저 뙤놈들에게 동정적인 자네의 마음은 알겠지만, 이 사람은 마음을 굳혔으니 이만 가보게."

의양군의 말이 끝나자 남자는 꾹 참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이내 경례를 올린 후 방을 벅찼다.

이후에 일어난 일은, 단지 몇 가지 간단한 말로 수식하기에는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의양군의 허가 아래, 분노와 울분에 찬 제국군에게 시내로 도망친 중국군 잔당을 수색한다는 명분이 주어졌고 이는 곧 수 많은 피가 흐르게 시작하였다.

어느 방앗간에서는

"살려주세요! 아이가, 아들이!"

탕.

"이 뙤놈새끼는 뭐라 씨부린거네?" "거 '내 좆이나 빨라'라고 했는데 기래?" "거 돌았나? 각설하고 다른 뙤놈이나 찾으러 가제"

어느 농가에서는

"꺄아아악! 살려주세요"\n"으흐흐, 거 가만히 있어. 좋은거 해준다니까 좋은거?"

어느 공터에서는

"으흐흑... 아퍼... 아빠..." "김 상졸, 이년 기가 막히니까 먹어봐라" "아, 괜찮습니다. 저는 어린 아이는 그리 좋아하지는 않아서." "새끼, 가리는거 봐라"

어느 의원에서는

"아아아아악!" "으, 이게 뭐시냐, 니미 씹할 것 같네" "아우 시발 핏덩이구만, 야 그거 저리 던저라. 아우, 뙤놈새끼를 왜 굳이 배 갈라가지고 본다냐."

"아직도 자료가 올라오지 않았는가." "송구하옵니다, 군 각하. 병사들이 '처리'에 열중하여서.." "하하하! 괜찮네. 오히려, 이는 제국 남아로서의 사명을 다 한다는 긍정적인 신호가 아닌가? 그래. 더 쉽게 이 남경을 처리하기 위해 군에 있는 모든 것을 지원해주도록 하게."

이재각은 웃으면서 명을 내렸다.

그는 제 조국이 강대하단 것이 행복하였다.

시합 (1937)

동방에서 악귀가 쳐들어온다는 말을 들었었다. 조카와 형수, 그리고 동생은 이곳 또한 위험하다며 피난길에 올랐다. 그들은 나 또한 따라오라고 뼈만 남은 앙상한 손으로 끌으려 했지만, 그래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뭍혀있는 이 땅을 떠날 수는 없었기에 나는 이곳에서 남아있기로 하였다.

설령 악귀라고 하여도, 가엾은 민초들에게 무슨 일을 하지는 않겠지.

이리 안일하고 멍청한 생각을 하면서.

...

조선군이 들어오자 난징은 지옥도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옆집 진아이링은 병졸들에게 끌려가 몹쓸 짓을 당하였다. 병졸들은 그녀의 여린 몸 구석구석을 유린하였고, 탐하였다. 그녀가 끌려가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이를 직감하였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앞집 천 아저씨는 이루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게 돌아가셨다. 딸이 보는 눈앞에서, 자신이 준 선물을 끌어안은 딸이 보는 눈앞에서, 그 무엇보다 사랑하던 딸이 보는 눈앞에서, 저 악귀들은 아저씨를 총검으로 찌르고, 개머리판으로 두개골을 으깨어 사람의 몰골을 찾아볼 수 없도록 만들었다.

천 아저씨의 딸 또한, 그리 좋은 꼴을 보지는 못하였다.

공포가 머리를 채웠다. 이성은 날라갔고, 오직 그 때, 같이 피란길에 오르자고 하던 가족들의 모습이 생각났다. 무서웠다. 당장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주위가 얼추 진정된 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조심스래 밖에 나올 수 있었다. 떠나기 전에 장강 하류에 배를 놔두겠다고 한 것이 생각났다. 그곳을 향해, 떨리는 두 다리를 움직였다.

나는 뛰고 또 뛰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이미 생각에서 밀려난지 오래였다. 능선에 올라 난징 시내를 보니 이곳 저곳에서 총소리와 비명소리, 그리고 불에 타는 건물들의 소리가 아우러져 귀를 찌르고 있었다. 이건, 지옥이었다. 난징은 지금 지옥이었다.\n이 지옥도 얼마 안남았다. 저 언덕만 넘으면, 저 가로수만 넘으면, 빠져나갈,

...

허벅지가 욱씬거리는 통증과 함께, 차가운 바람을 느끼며 눈이 떠졌다.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팔다리가 꼼짝도 할 수 없도록 단단히 묶여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와 같은 모습을 한 이들이 수두룩하였다. 어림잡아도 수백정도 될까.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하지" "-보! 내가 먼저구만 그래!"

군관으로 보였던 남자 둘이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난 후, 왼쪽에 있던 남자가 허리춤에 있던 칼을 꺼냈다.

"시, 작!"

그리고 호각이 불리자 남자, 군관이 저 앞에 있던 아이의 목을 칼로 베었다. 참수, 그 옛날에 하던 형벌을 지금 이렇게 하다니. 야만적이었다. 저 옆에 손을 흔들던 남자는 뭐라뭐라 말하면서 종이에 글을 적고 있었다. 환도를 들고 있는 남자는 내 이웃의 머리 째로 자르고 있었다. 순서가 다가오고 있었다.

비명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피, 눈물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다가오고 있다. 다가오고 있다.

눈앞이 흐려지며, 콧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군관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뭐든지 하겠습니다 살려주세요!" "뭐라는거야?" "장형필, 4분 지났다! 느림보 녀석아, 빨리 해!" "알겠다, 알겠어! 그래, 얼른 끝내주마!"

끝내 남자의 칼이 내 목을 향해 쇄도했다. 한번에 끝나지 않았다. 두번, 세번, 네번. 천천히 느껴지는 고통 속에서, 눈 앞에 여러 광경이 펼쳐졌다. 어머니, 아버지, 동생...

검은 어둠이 나를 덮쳤다.

...

"이런, 105 밖에 못채웠구만." "또 졌나? 한심하기는. 좀 잘 해봐라. 다른 놈들 더 잡아와주랴?" "우라질, 이번에는 반드시 이겨주마"

주먹밥 한 덩이 (1938)

조식으로 잡곡과 쌀겨가 대부분이고 쌀알이라곤 찾아보기도 어려운 흙투성이의 주먹밥 한 덩이를 간신히 건졌다. 어제는 분명 두 덩이였던 것 같았는데, 그것마저도 이제 반절로 줄었다. 날카로운 쌀겨가 목구멍을 긁었는지 목 안쪽이 아파왔다.

이 생활을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이제는 날짜마저 가물가물해져만 간다. 동이가 쳐들어온다고, 같이 피난을 가자고 하던 이웃들을 태어난 고향을 떠날수는 없다며 뿌리치던 내 모습이 아직도 눈에 어른거린다. 아들은, 아내는 무탈한지, 내가 잡혔을 때 잘 피신했는지가 궁금하지만, 이곳에선 바깥의 소식이라곤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험상궂은 간수들이 철통같이 지키는 이 곳은, 조금이라도 수상한 모습이 보이면 간수가 총으로 쏘거나 몽둥이로 사람들을 두들겨 팼다. 배를 곯아도 가족과 함께 있던 그 때가 행복했었다. 내 땅도 아니고 소작받은 땅에 불과했으나 이웃과 함께 논을 갈던 그때가 즐거웠다.

이제 겨울이 오는 것 같다. 한끼에 한 덩이만이 지급되는 것도 점점 그 양이 줄어가는 것이 보이고 있다. 작업반장이 어제 작업한 물건이 불량이라며 채찍질한 등이 아려왔다.

또 아침으로 겨가 잔뜩 섞인 잡곡 한덩이가 나왔다. 팔을 들어 입에 넣으려고 하지만, 그것도 쉽지가 않다. 몸이 무겁다. 흙바닥이 내 머리를 놓아주지 않겠노라 말하는 것 마냥 머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와중에, 옆에서 누가 무어라 말하는 것 같았지만 들리지가 않았다.

피곤하다. 잠이 억수같이 쏟아졌다. 눈이 내렸다. 어머니. 어머니께서 눈을 참 좋아하셨는데.


낙양 (1939)

한때 찬란하게 번영하던 중화의 도읍이었던 낙양은 저들이 그저 동이, 오랑캐라고 여긴 족속들에게 처참히 굴복된 채 한낱 잿가루만 날리고 있었다. 옛 황제가 머물렀던 궁궐은 그저 그런 것이 있었구나- 라고 추정되는 터만 남고 사라졌으며 수많은 이들이 어우러져 있던 거리는 어두운 낯빛만을 얼굴에 새긴 이들만이, 혹여나 저 마귀들에게 들킬까봐 심장을 졸이며 있을 뿐이었다. 하나 둘 장정들이 들어섰지만, 거리는 텅 비어있었다. 청야전술로 인해 그저 폐허가 되어버린 낙양은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는 곳이었다.

"아니 오 부위, 진짜 여기서 잘거라고?" "어쩔 수 없지 않나. 다른 곳은 여기보다 더 열악한 처지인데."

야영을 할 곳도 마땅치 않았고, 배도 채울 것이 그리 많지 않아 주먹밥 한 두 덩이만 배급되었다. 병졸들의 불만은 쌓여만 갔고, 가족을 보게 해달라는 요구가 스멀스멀 나오고 있었다. 사병들이 최근에는 장교가 하는 말을 더럿 듣지 않는 일도 있어 총을 뽑아들고서야 명이 이행되었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상부에서 떨어진 명은 없나? 낙양을 함락시켰으니 저들이 항복할 만도 한데." "우라질, 그런게 있으면 좋겠군."

똥 씹은 표정으로 동기인 오 부위의 말을 들은 정 부위는 대답하였다

"..좀 지치지 않나? 이 땅에서 얼마나 더 피를 손에 묻혀야 하는..." "쉿. 큰일날 소리를. 군기교육대에 끌려갈 수 있으니 조심하게나."

지친 나머지 위험한 소리를 하는 오 부위를 막으며, 정 부위는 조용히 제 막사로 돌아가며 생각했다.

'후, 얼마나 더 해야하는지. 안사람이 해주었던 밥을 언제 먹었더라.'

순간 든 생각을 지우려 머리를 털었다. 그리고 그는 다음 명령을 기다리며, 부족한 물자와 식량을 채우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개봉 (1939)

고 송대의 수도였던 개봉에 입성한 후, 이우는 아버지 이강의 말을 떠올렸다. "굳이 네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다. 그러나, 어떤 방식이는 저 오만에 빠진 중국인들에게 이 문명을, 우리 대한의 위엄을 알려주려무나."

평소 성실함과 애국심으로 아버지, 이강에게 큰 총애를 받던 이우는 이번 전쟁이 이 신성한 대한민족의 성전임을, 가엾고 열등하며 저열하게 짝이 없는 저 미개한 한족들에게 문명을 알려주는 성전임을 의심하지 않고 있다.

"충성! 정위님, 이 인근 정리가 완료되었습니다! 주위 한족들은 종적을 감추었으며 감춘 척 하였다 한들 아군의 가스 공격에 다 비명하였을 것입니다."

"좋군. 흠. 부위." "예, 정위님"

지금 황실의 후손으로, 대한 황실의 피를 조금이나마 이은 존재로서 이 대한을 위해 해야할 일이 무엇일까. 잠시 고민하던 이우는 뒤이어 부위에게 명을 내렸다.

"개봉에 있는 천명을 이은 이들의 유산을 이 청국노의 후손들에게 맡기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은가." "옙!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것들을 보호할 능력조차 없는 이들에게서 대신 보호를 맡는 것도 옳은 일이지 않겠는가. 가서 개봉시장을 불러오게나."

그 말을 들은 부위, 노복선은 눈을 빛내며 답을 하였다.

"존명!"

황혼의 앞 (1944)

요 며칠간 항상 맑았던 하늘에, 창천에 머물던 태양 아래로 저 멀리서 먹구름이 하나 둘 씩 모이더니 그들을 모두 감추어버렸다. 태양은 저 자신이 아직 이곳에 존재하노라, 모인 구름사이로 빛을 비추고 있었으나 이를 본 이들은 몇 되지 않았다. 주변 곳곳에서 포화와 함성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전화의 불길은, 저 대륙 뿐만 아니라 비로소 이 제국의 강역까지 다가왔다. 하늘에서, 이 끔찍한 전쟁의 불길이 이곳까지 왔다는 것을 안타까워하는지 눈물이 뚝뚝, 한두방울씩 떨어졌다.

곧 장대와 같은 비가 내릴 것이었다. 그러나 이 땅의 아들과 딸들은 설령 비가 내린다 하더라도, 포화가 몸을 찢는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이 땅과 함께할 것을 마음 속 깊이에 새겼다.

황혼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양 노을을 바라보며 (1945)

한차례 폭격기가 휩쓸고 지나간, 한때 동아 문명의 정수라 불리우던 한성은 무가치한 회색의 잿가루와 수 많은 돌무더기로 화해 있었다. 하루에도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던 거리는 상처입고 거지꼴을 한 장정들과 부모를 잃은 아이들만이 정처 없이 배회하고 있었고, 그 아름답던 기와집들은 한줌의 돌무덤으로 변해 그곳에 사람이 살았음을 알리고 있었다.

'대관절 무엇을 잘못했기에?'

멀찍이서 불타버린 시내를 바라보던 사내는 점차 희끗해져가는 노쇠한 머리로 대체 무어가 잘못되었는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그러나 아무리 되물어 보아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마땅히 대한의 건아라면 황상을 받들어 모시고 역천을 꿈꾸는 마씨 반역도당들을 때려잡아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문명인의 의무로서 실패민족을 계도하고, 예의범절을 알지 못하며 사람된 도리조차 알지 못하는 양이놈들을 아주에서 몰아내는 것은 마땅히 잘 교육받은 아주인이라면 기립해 박수를 보내 마땅한 선행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하잘것 없는 잿더미로 변한 한성이, 차디 찬 바닥에 누여진 수 많은 장정들이, 너희는 이미 전쟁에서 졌노라 쓰여진 적들이 뿌려대는 삐라가 말하는 사실은 그가 아는, 아니 믿는 '진실'과는 아주 큰 괴리가 있었다.

아니다. 이건, 내가 원한 것이 아니다.

멍청한 천것들이 시킨 일도 똑바로 하지 못한 탓이다. 꼴에 황실이라는 것들이 사사건건 훼방을 놓은 탓이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끝끝내 그의 진심을 알아주지 못한 탓이다.

그러나 잘잘못을 따지기엔 그는, 제국은 너무 멀리 와 있었다.

붉게 물든 하늘의 서쪽 끝짜락에서 노을을 흩뿌리던 태양이 천천히 가라앉았고, 붉게 물든 하늘 뒤로는 검푸른 하늘만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이강은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