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본제국 (기계들의 유산)

Tmxkffls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월 20일 (토) 11:35 판

대일본제국
大日本帝国


천황의 재가
우리 일본은 서양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나고
아시아 민족들이 단합한 대동아 공영권을 완성 시켰습니다.
적어도 일본인들이 보기에는 말이죠.

군부가 물러나고 자유가 꽃피기 시작한 지금, 이제는 외부를 둘러봐야 할땝니다.
고통속에 신음하는 이들을 해방시키고

천황의 재가 속에서 번영을 도모해야 할땝니다

사람은 성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 성실이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친절한 것이다. - 이토 히로부미

개요

아시아 일대에 위치한 제국주의 국가다. 아시아 국가연합인 대동아 공영권의 수장국이며 독일,이탈리아,미국과 함께 세계를 나누고 있는 초강대국중 하나다. 1950년대 초반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시민 혁명의 영향으로 군국주의가 사그라들고 자유주의가 복원되는 중이다.

미국의 록히드 마틴, 독일의 벤츠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메가코프중 하나인 아라사카를 보유하고 있으며 도쿄를 팔면 미국을 살수있다는 말이 나올정도로 방대한 경제규모를 자랑한다. 하지만 기업독재와 본토와 식민지의 갈등등 불안요소는 남아있다.

주요도시

도쿄
東京
일본의 뉴욕이라 불리는 도쿄는 아마도 일본의 상징일겁니다.
미국 월스트리트에 버금가는 거대한 기업거리와
끝도없이 이어지는 기업 플라자는
영원히 제국의 심장으로 남을것입니다.


역사



메이지 유신

1850년대 미국 페리 제독의 압박으로 도쿄를 비롯한 일본의 항구들이 강제로 개항 당하고 급진 개혁을 주장하는 유신파들이 큰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1859년 미일 수호통상조약영일 수호통상조약을 채결하며 서양 문화가 유입되기 시작하고 이는 유신 세력들의 힘을 더 키워주었다. 1860년 영국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6.16 사건으로 막부의 주요 관직을 유신파가 독점하기 시작했고 1864년 일명 메이지 유신이라 불리는 1월 쿠데타를 일으키며 현실과 달리 보신전쟁 없이 쿠데타로 막부 세력을 몰살시키고 메이지 덴노를 천황으로 추대한다. 메이지 천황은 일본제국을 선포하고 영일 동맹을 채결하며 근대화를 추진하기 시작한다. 영국을 따라 그레이트 게임에 참가하며 러시아를 같이 견제하기 시작했고 근대화 정책이 성공을 거두며 경제도 빠르게 성장하며 청나라에 버금가는 국력을 보유하게 된다. 이후 일본 내부에서 식민지를 개척하자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고 조선과 타아완을 대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1880년 광저우에서 일본인이 피살된것을 계기로한 광저우 일본인 피살사건으로 중국 이권을 차지하기 시작했고 1881년 제주도 점령으로 그 기세를 키워나간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김홍집을 비롯한 친일 세력을 지원하고 있었고 중국에서도 영국의 편을 들고 있었다. 1894년 경복궁 점령으로 고종을 꼭두각시로 만들고 김홍집 내각을 설립하며 한반도를 괴뢰국으로 만든다. 이에 반발한 청나라가 평양에 군대를 주둔시키며 청일전쟁이 발발, 광저우와 칭다오를 비롯한 주요 항구가 포격 당하고 남만주가 일본군한테 장악당하며 청나라는 항복하게 된다. 시모노세키 조약이 채결되며 대만과 다롄을 얻게되고 1895년 한성 조약을 채결하고 한국을 합병하게 된다. 하지만 만주에서 영향력을 키우던 러시아가 프랑스를 끓여들어 한반도를 뱉어내라 압박하지만 일본은 이를 거부하게 되고 1904년 러시아가 일본을 침공하며 러일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군국시대

1905년 쓰시마 해전선양 전투로 러시아군을 박살내자 더이상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없던 러시악가 먼저 항복하며 블라디보스토크 조약이 채결된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강탈하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뜯어내지만 청일전쟁과 달리 일본군의 피해도 상당했다. 이로인하여 군부의 힘이 강력해지고 청나라에서 일어난 민중 혁명의 영향으로 중국이 혼란에 빠지자 중국에서 대부분의 이득을 취하던 일본도 침체에 빠지게 된다. 1914년 일어난 1차 기업전쟁에서 영일동맹을 근거하여 협상국 측으로 참전하고 무기를 수출하며 불황에서 벗어나지만 이는 모두 군부에 의해 주도된 것이기 때문에 결국 이득은 모두 군부가 봐야했다. 아사히 신문등도 군부의 편을 들며 민간정부의 지지는 떨어지게 되고 1920년 영국발 대공황을 기점으로 일본 경제가 다시 직격탄을 맞자 국민들의 민정 지지는 땅에 떨어지게 되고 무솔리니의 파시즘 영향을 받은 군부가 군국주의에 물들어 급진적인 정책들을 내세우며 일본 정치계에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고 있었고 1929년 미국발 대공황으로 2중고를 맞게 되자 대정익찬회를 창당하고 3.23 사건을 일으키며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군인 출신의 야마나시 한조가 집권하며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아 일본은 팽창주의적 정책을 촉구하게 된다. 1930년 환남사변으로 남만주에 관동군을 주둔 시켰고 1933년 만주사변으로 만주 전역과 내몽골을 장악하며 중국에 집적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다. 중국은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자기 살기도 바빴던 유럽 국가들은 이를 무시하고 있었고 오히려 일본의 중국 침략을 가속화 시킨다. 1935년 상하이 사변으로 양쯔강 일대까지 일본군이 들어오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