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국 대체역사 스레드
개요
“
天下大勢 分久必合 合久必分 ” — 삼국지 연의
• 석달개가 천경사변에서 권력을 잡다.
-> 모든 경쟁자(왕)을 제거하고 유일한 왕이 되다.
-> 종교적 색채보다 반청에 중심을 두다.
-> 정상국가화 태평천국, 다만 지도층이 석달개의 측근들 즉 군벌이었다.
-> 태평천국은 점령지에서 징집령을 통해 대규모 군대를 만들다.
-> 북경을 정복하고 자금성을 장악하니, 양(梁)의 개국이었다.
-> 양이 개국된 뒤에도 석달개의 군대는 여전히 징집을 멈추지 않았다. (반란 진압 명목)
• 청나라의 명을 받은 향용(鄕勇), 향신(郷紳)
-> 상군(湘軍), 회군(淮軍), 초군(楚軍/楚勇)
-> 증국번, 이홍장, 좌종단
-> 상승군(Frederick Townsend Ward/Charles George Gordon)
-> 상첩군(Auguste Léopold Protet)
-> 부강전장(阜康錢莊), 호설암(胡雪巖), 자금 지원
• 염군(捻軍) 장락행(張樂行)
• 회민(回民) 백언호, 야쿱 벡 1862년부터 본격화
• 오병감(伍秉鑑)의 아들 오숭요(伍崇曜)
• 홍문
-> 가로회(哥老會), 사천성(四川省)
-> 천지회(天地會), 복건 연해지구 = 화교, 삼합회
• 사대구 우열(尢列), 손문(孫文). 양학령(楊鶴齡). 진소백(陳少白) 넷 다 60년대 중반에 출생
• 공친왕 북수(北狩) 당하다.
• 8대 젭춘담바 후툭투(복드 칸), 할하(喀爾), 가한(可汗)
• 혁현(순현왕)-> 황제
• 해방새방-> 육군 vs 해군 -> 상계군벌 vs 직례군벌
타임라인
석량의 건국
• 석달개(石達開)가 왕위에 오르다.
북경 공방전에서 너무 쉽게 팔기군과 녹영을 무너트리고 자금성을 장악하다.
조정은 함풍제(咸豊帝)의 사망으로 붕괴하였다.
상대적으로 온전한 자금성에서 석달개가 황제로 즉위하여 석량(石梁)을 건국하였다.
이때가 1861년 10월이었다.
• 만백성에게 평화와 변혁을 약속하다.
건흥 원년(1862) 1월 말 석달개는 건흥국시(建興國是)를 석량 전역에 공표했다.
- 천경사변 이후 미루고 있던 천조전무(天朝田畝)를 재개할 것
- 천조전무가 정착하기 시작하면 징병제를 끝내고 군을 개편할 것
- 청의 조공국과 속국을 비롯한 청의 영역을 석량의 영역으로 간주할 것
- 청과 맺어진 조약들은 석량이 아닌 청과 맺은 조약이므로 새롭게 조율할 것
• 염군(捻軍)의 난
본래 염군의 태평천국의 협력자들이었다.
석달개가 북벌을 할 때도 이들을 지원하였다.
1855년 대한명왕(大漢明王)으로 등극한 장락행(張樂行) 산하로 염군은 오기군제로 개편했다.
1860년 석달개의 승리가 가까워지자 중원에 정착하였다.
건흥국시를 기반으로 천조전무가 재개되자 전통적인 향촌 체계를 인정하는 염군과 갈등하였고
결국 건흥 원년(1862) 10월 수확한 곡식의 분배로 석량과 염군이 갈등, 유혈사태 발생했다.
건흥 2년(1863) 3월 겨울이 끝나자 염군이 석량에 전격 대항하고 염군의 난 시작됐다.
다만 염군의 지지층 중 하나였던 빈민층은 여전히 석량을 지지하였다.
• 공행(公行)의 난
공행은 남경조약 이전까지 본디 중화와 서방을 잇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남경조약 이후 그 기세가 수그러들었지만, 오병감(伍秉鑑)의 위세는 멈출 줄 몰랐다.
그의 위세는 아들 오숭요(伍崇曜)의 대에도 여전하였다.
오숭요는 태평천국이 일어나자 자신의 부와 정치력을 적극 활용하여 광주를 수호하였다.
2차 아편전쟁에서는 태수의 명으로 영국영사와 협상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을 기반으로 본격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였다.
석달개가 석량을 건국한 뒤 대세를 따라 광주는 석량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건흥국시가 공표되고 천조전무가 재개되자 즉각 저항을 시작했다.
이들은 염군의 난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공행을 중심으로 석량으로부터 독립을 선하였다.
그리고 정치기구로서 광주십삼행(廣州十三行)을 구성하고 의장으로 오숭요를 선출하였다.
다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광주의 자치기구로서 천자가 돌아오면 해산할 것을 명시했다.
• 향용(鄕勇)의 부활
태평천국이 일어나자 청은 지방 향신(郷紳)들에게 향용을 조직해 난을 진압하라고 명했다.
이러한 부름에 가장 먼저 대답한 이들이 화중의 향신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증국번(曾國藩)의 상군(湘軍)은 호설암(胡雪巖)의 후원을 받아 대규모 군대로 성장하였다.
이들의 공세에도 태평천국은 굴하지 않았고 끝내 석달개는 북경을 점령하고 석량을 건국한다.
이후 향용은 화중 일대를 유량하며 석량에 대항하였다.
이후 염군의 난과 공행의 난이 발생하자, 상군은 다시 한 번 모습을 들어냈다.
이들은 이홍장이 구출한 순현왕(醇賢王)을 선덕제(宣德帝)로 즉위시키니
이때가 건흥 2년(1863) 7월이었다.
• 민심이 동요하다.
건흥제는 급진적인 천조전무 재개가 난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하여 건흥제는 다시 한 번 조서를 공표하여 천조전무를 미루고 난을 진압하기 위한 징집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건흥제의 조치는 석량의 찬성파에게도, 석량의 반대파에게도 지지를 받지 못한다.
천조전무로 토지의 균등한 분배를 바랬던 석량의 찬성파는 천조전무의 연기에 불만을 품었고
석량의 반대파는 천조전무를 연기했다는 이유만으로 청 조정을 무너트린 대역죄인에게 충성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로인해 난의 영향을 받지 않은 지역들에서도 동란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 개봉(開封) 전투
직예에서 모은 징집병과 북경의 정예병을 이끌게된 장수는 건흥제 본인이었다.
그는 건흥제의 명에 따라 10만의 군을 이끌고 염군을 진압하기 위해 나섰다.
태평군이 가장 먼저 도착한 염군의 도시는 개봉이었다.
개봉은 중화의 8대 고도이자 대운하의 중심에 있던 도시로서 크게 번영하는 도시였다.
그만큼 막대한 부가 모이는 곳이었고 천조전무를 강력히 반대하는 곳이기도 했다.
특히 개봉의 유대인들은 개봉의 방위를 위해 적극적으로 부를 사용했다.
하지만 이수성의 10만 대군이 개봉을 봉쇄하니 개봉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다.
이때 등장한 것이 대한명왕 장락행의 8만 대군이었다.
건흥제의 군과 장락행의 군이 싸워 장락행이 이겨 건흥제를 죽이고 개봉을 해방하니
이때가 건흥 3년(1864) 2월이었다.
군웅할거
• 군웅할거(群雄割據)
건흥제가 사망하자 석량은 북경과 그 일대인 직예와 섬감을 제외한 지역의 통제력을 잃게 된다.
회민(回民)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국교로 삼은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봉기했고
동삼성(東三省)의 성경장군(盛京將軍)은 청 왕실의 후신을 찾아나섰다.
보르지기트 셍게린첸(博爾濟吉特 僧格林沁)은 흠차대신의 특권을 악용하여 칸(汗)을 자칭하는 등
무수히 많은 군웅이 천하를 할거하였다.
• 홍덕제(洪德帝)의 즉위
건흥제가 사망하고 석량의 조정은 혼란에 빠졌다.
이들의 혼란은 몇달 간 계속되었다.
그러다 옛 태평천국의 장수 중 한 명이었던 이수성(李秀成)이 익왕(翼王)에 올라 사태를 수습하였다.
그리고 이수성의 추천으로 석정충(石定忠)이 6살의 나이에 황제가 되니
이때가 건흥 3년(1864) 5월이었다.
• 호붕위수(呼朋爲獸)
익왕에 오른 이수성은 본격적으로 군벌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개봉 전투에서 탈영한 정예병들을 자신의 친위대인 익군(翼軍) 구성원으로 포섭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군대는 반군을 토벌하기보다 자신의 권력을 탐하기에 급급했고
석량의 권위가 아직 남아있던 직예와 섬감을 수탈하였다.
어느날 건흥제의 동료이자 이수성의 친우가 그의 악행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니
이수성은 그를 짐승보다 못한 자라고 욕하며 참형에 쳐하였다.
이러한 이수성의 포악함을 사람들은 호붕위수(呼朋爲獸)이라 욕하였다.
• 연해주(沿海州) 분쟁
석달개의 군대가 북경을 향해 진격하고 있던 1860년 10월
북경에서는 이미 외세의 군대가 자금성에 입성하였다.
이들은 무너져가는 청 조정에게 더욱더 많은 이권을 요구하였다.
하여 청 조정은 그들의 이권을 인정하는 조약을 맺으니, 이것이 북경 조약이다.
본디 북경 조약은 청 조정과 영프 간의 조약이었다.
하지만 이 조약에 러시아가 중재에 나섰다.
그리고 그 대가로 흑룡강(黑龍江)과 오소리강(烏蘇里江) 넘어의 땅을 할양 받으니 그 땅을 연해주(沿海州)라 하였다.
해삼위(海蔘威)에는 해군기지가 설치되어 그들 말로 블라디보스토크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연해주 북쪽에서는 러시아의 카자크 부대가 연해주로 밀고 들어왔다.
하지만 흑룡강의 흑룡강장군과 오소리강의 길림장군은 러시아의 남하를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이들은 러시아 군이 남하하고 있음에도 연해주에서 철수하지 않았다.
결국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러시아 군과 옛 청의 장군들이 전투를 벌였으니
이때가 건흥 3년(1864) 8월이었다.
• 익왕이 외교관의 목을 베다.
연해주에서 전투가 심화되자 북경 조약의 참여자인 영국과 프랑스는 북경 조약의 효력을 의심했다.
하여 영국과 프랑스는 북경에 외교관을 파견해 북경 조약의 효력을 재확인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미 호붕위수로 그 포악함이 극에 달한 익왕은 이들에게 북경 조약의 파기를 선언했다.
외교관들은 이에 반발하였으나 본국에 돌아간 것은 그들의 목 뿐이었다.
결국 북경을 점거하는 것만으로는 중원에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외세는
군대를 보내기를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때가 건흥 3년(1864) 9월이었다.
• 상승군(常勝軍)과 상첩군(常捷軍)
영국과 프랑스의 새로운 교섭 상대로 나선 이들은 민절(閩浙)과 양광(兩江)의 상인들이었다.
광주의 오숭요는 영국과 프랑스와 체결한 조약을 받아들이되, 경제적 협력을 받았고
상해의 호설암(胡雪巖)은 영국과 프랑스에게 군사적 지원을 받는 대가로 조약을 인정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호설암에게 무기와 장수를 보내었고, 호설암은 그 무기와 장수를 증국번과 좌종당에게 보냈다.
그리하여 증국번의 상군 산하에 영국의 지원을 받은 상승군과
좌종당의 초군 산하에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상첩군이 결성되었다.
이때가 홍덕 원년(1865) 1월이었다.
• 강릉(江陵) 전투
외인부대의 첫 번째 전장은 호광(湖廣)의 강릉(江陵)이었다.
성도(成都)에서 거병한 천사도(天師道)의 군대가 사천(四川)을 벗어나 호광에 당도했기 때문이다.
이 군대는 호광의 대도시 중 하나인 무창(武昌)을 점령하기 위해 진격하고 있었다.
좌종당의 초군과 상첩군은 형주성(荊州城)이 위치한 강릉에서 천사도의 군세를 막기로 하였고
이곳에서 처음으로 서방식 화포를 동원해 전투를 벌였다.
특히 성 밖에서 주둔하고 있던 상첩군의 포병대의 포격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고정된 포대가 아닌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육상의 포병대 자체가 당시 중원의 상식과 전혀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좌종당의 초군은 천사도의 군대를 패퇴시켰다.
이때가 홍덕 원년(1865) 5월이었다.
양무운동
• 양무운동(洋務運動)
상첩군의 승전은 곧 중원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누구는 청을 붕괴시킨 외세를 끌어들인 역적이라고 욕했고
누구는 중원의 통일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힘이라고 기대했다.
민절, 호광, 양광이 주로 전자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이 지역들은 서방의 정치 세력과 직접 교류를 했고 이 업무를 담당하는 이들을 양무라고 하였다.
영국과 프랑스 또한 북경 조약을 준수하기로 한 세 지역에 조금씩 투자하기 시작했다.
• 윤륭하(尹隆河) 전투
서방의 위세가 민절과 양광을 넘어 호광까지 진격하자 염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락행은 반청반외의 뜻을 세워 군을 소집했다.
이렇게 소집된 군대가 뇌문광(頼文光)을 지휘관으로 한 4만의 하남군(河南軍)이었다.
이렇게 소집된 하남군은 천사도의 군세와 동일하게 무창을 점령하기 위해 진군했다.
이들의 군세는 안륙(安陆)에 이르러 막히게 되니
유명전(劉銘傳)을 지휘관으로 한 2만의 회군(淮軍)과 5천의 상승군이 하남군을 막아섰다.
둘의 전투는 강릉 전투와 마찬가지로 회군의 승리로 끝이났으니 청이 다시 부활하기 시작했다.
이때가 홍덕 3년(1867) 7월이었다.
• 청의 복위를 선언하다.
청의 왕족들은 크게 북경에 잔류한 자들과 함풍제와 함께 열하(熱河)로 도주한 자들로 나뉘어 있었다.
이중에 전자는 북경 공방전에서 석달개의 명으로 전부 사망하였다.
열하에 남은 왕족들도 함풍제의 사망으로 청 조정이 붕괴하면서 대부분 흩어졌다.
그러다가 강릉 전투와 윤륭하 전투로 청의 복위를 주장하는 이들이 위세를 얻으니
청의 왕족들도 성경장군(盛京將軍)의 지원을 받아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아이신기오로 이힌(愛新覺羅 奕訢)을 황제로 즉위 시키고 청의 복위를 선언하였다.
이때가 홍덕 3년(1867) 9월이었다.
• 외세의 수탈이 심화되다.
외세를 상업의 경쟁자로 여기며 부분적으로 서방을 수용한 양광과 달리
민절과 호광은 청의 복위를 위해 서방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받아드렸다.
하여 홍덕 4년(1868) 2월에는 중원 최초의 철도인 오송철도(吴淞铁路)가 개통하였다.
하지만 서방에게 무기를 구매하고 외인부대를 고용한 향신들은 서방에게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고
거기에 서방의 상인들이 대량의 공산품으로 민절과 호광의 시장을 어지러피기 시작했다.
그러자 반외를 외치는 탄원들이 하나 둘 향신들에게 도착하기 시작했다.
이때가 홍덕 4년(1868) 5월이었다.
• 상해교안(上海敎案)
상해는 서방의 조계지로 성장한 도시였다.
당연하게도 외세의 영향력이 큰 도시로서 번영과 수탈이 공존하는 도시였다.
교회 또한 관용조관(寛容条款)의 특권을 기반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덕 5년(1869) 9월 상해에는 아이들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상해의 주민들 사이에서는 이 사건이 교회가 유아를 살해하고 약재로 사용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러다가 같은 해 11월 납치범이 체포되었는데 그는 공범으로 신자 한 명을 지목했다.
물론 그와 교회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하지만 주민들의 분노에 불을 붙이기에는 충분했다.
거기에 교회 보호를 위해 파견된 공사관의 군이 발포까지 하면서
상해에서는 반교반외 성향의 폭동이 일어났다.
교회나 영사관에 방화가 일어나고 외국인 20여 명과 중국인 40여 명이 살해되었으며
수녀 10명이 강간당한 뒤 신체가 절단당했다.
이때가 홍덕 6년(1870) 1월이었다.
• 향신이 외세를 견제하기 시작하다.
홍덕 6년(1870) 1월, 상해에 조계지가 있던 7개국의 함대가 상해에 도착하였다.
해당 사건이 프랑스인 교회에서 발생했기에 프랑스가 중심에 있었다.
이때 외국 대사들과 협상을 한 자는 증국번이었다.
그는 배상금으로 사태를 종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이러한 증국번의 노력은 외세와 교회에대한 반감을 오히려 증폭시켰다.
뿐만 아니라 그의 위상에도 흠집을 남겼다.
이를 계기로 향신들은 외세와의 적극적인 협력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때가 홍덕 6년(1870) 2월이었다.
• 홍호자(紅鬍子)의 난
홍덕 2년(1866) 연해주의 흑룡강장군과 길림장군은 결국 철군을 선택했다.
하지만 연해주에는 홍호자(紅鬍子)라고 불리는 마적단이 세를 키워나가고 있었다.
이들은 본래 삶이 어려워진 지역 주민들이 모여든 마적단이었는데
흑룡강장군과 길림장군의 후원을 받아 준군사조직으로 성장하였다.
옛 청의 군을 몰아낸 러시아는 처음에는 마적단 수준의 홍호자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러시아 이주민들이 연해주로 유입되면서 지역 주민과 분쟁이 커지자
보호비를 받던 홍호자가 정교회 교회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가 또 한 번 연해주로 군을 파견하니
홍호자와 러시아가 전면으로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때가 홍덕 6년(1870) 8월이었다.
• 열하의 변(熱河之變)
홍덕 5년(1869) 11월 7대 젭춘담바 후툭투가 사망하고
8대 젭춘담바 후툭투가 홍덕 6년(1870) 4월에 칼카 대칸(喀爾大可汗)으로 즉위하였다.
2대 칼카 대칸은 태어나자마자 칸이 되었기에
보르지긴 씨족이자 자사그투칸(札薩克圖汗)인 체렌돈두브(車林端多布)가 섭정이 되었다.
섭정으로 등극한 체렌돈두브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열하를 침공한 것이다.
그는 청 황제의 존재가 반드시 몽골에 위협이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의 첨병에 내몽골의 셍게린첸이 열하를 지키기 위해 기병대를 이끄고 달렸지만
기병대가 열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열하가 폐허가 된 뒤였다.
아이신기오로 이힌은 이미 북수(北狩)한 뒤였다.
이때가 홍덕 6년(1870) 10월이었다.
회민의 난
• 보계(寶鷄) 전투
본디 백언호(白彦虎)의 회군(回軍)은 섬서(陝西)에 그 거점을 두었다.
하지만 섬서를 염군이 점령하고 섬서군(陝西軍)이 결성되면서 거점을 감숙(甘肅)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야쿱 벡(阿古柏)과 함께 회민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고 그 기반을 다졌다.
그러던 홍덕 7년(1871) 4월, 백언호는 섬서 수복을 위해 20만 대군을 거병하였다.
그러자 염군에서는 장종우(張宗禹)가 이끄는 섬서군을 주축으로 보계에서 방어전에 나섰다.
하지만 장종우의 섬서군은 상군과의 전투로 바쁜 양강의 염군에게 지원을 받지 못해 패전하게 된다.
이때가 홍덕 7년(1871) 12월이었다.
• 양양(襄陽) 전투
백언호의 회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진군하였다.
이들은 섬서군의 공백 덕에 손쉽게 림분(臨汾)을 점령하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군세는 무창에도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으니
유명전의 회군 6만과 백언호의 회군 12만이 양양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유명전은 백언호의 회군에게 막심한 피해를 주었으나 끝내 패전하였다.
이후 무창은 백언호의 회군에게 봉쇄되었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때가 홍덕 8년(1872) 8월이었다.
• 계림입관(桂林入關)
귀주(貴州)에서 봉기한 묘족(苗族)은 염군과 함께 태평천국의 협력자들이었다.
이들은 천경사변 이후 태평천국에서 벗어나 장수미(張秀眉)를 왕으로 내세워 초(楚)를 건국하였다.
초는 독립 이후에도 태평천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건흥제가 석량을 건국한 뒤에도 초는 석량의 봉신국으로서 귀주왕(貴州王)에 봉해졌다.
하지만 건흥제 사망하고 이수성이 익왕이 되자 장수미는 귀주왕을 포기하고 다시 한 번 독립하였다.
혼란스러운 천하에서 초는 초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장개격(張開格)을 지휘관으로 하는 초군 6만이 계림으로 향하였다.
계림을 방어하고 있던 것은 헨리 버제빈(白齊文)이 지휘하는 신식 공행군(公行軍) 6천이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초군은 전투도 하지 않고 버제빈의 항복을 받아냈다.
하지만 상승군과 공행군에서의 배신 경력에 장개격은 항복한 버제빈을 익사시켰다.
이때가 홍덕 9년(1873) 4월이었다.
• 삼선부제독(三宣副提督)
유영복(劉永福)은 본래 태평천국과 협력한 청의 장수였다.
하지만 천경사변이 일어나고 지도부와 연락망이 끊어지면서
독자적으로 군을 결성하게 되고 그 이름을 흑기군(黑旗軍)이라 하였다.
이들은 양광의 청 관군과 전투에 밀려 대남(大南)으로 남하하여
대남의 사덕제(嗣德帝)에게 삼선부제독(三宣副提督)직을 수여받았다.
이후 유영복은 홍강(紅江) 하류에 정착하여 프랑스의 유입을 저지하였다.
특히 통킹(東京)을 점령하려는 가르니에(安鄴)의 군대를 저지시켰다.
그리고 그 공을 인정받아 유영복은 일등의용남작(一等義勇男爵)을 수여 받으니
이때가 홍덕 12년(1873) 5월이었다.
• 양광역병(兩廣疫病)
묘족이 공행군을 물리쳤다는 소식에 평남(平南)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평남은 마여룡(馬如龍)을 지휘관으로 하는 15만 대군을 출병시켰다.
이들의 군대는 남녕(南寧)을 목표로 진군하였고 그 길목의 백색(百色)을 점령하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 뒤로 백색에서는 백성들이 병에 걸려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운남에서 55년부터 돌기 시작한 역병이 아직 양광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때문에 마여룡의 군은 백색에서 발목이 잡혔고 양광에는 역병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때가 홍덕 9년(1873) 6월이었다.
• 형양학살(衡陽虐殺)
계림에 무혈입성한 장개격은 역병 소식을 듣고 4만의 초군을 이끌고 호남으로 향했다.
이들은 영주(永州)의 상군을 손쉽게 격파하고 형양(衡陽)으로 진군했다.
형양은 좌종당과 별개로 초군을 조직한 유곤일(劉坤一)이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개격은 형양의 깃발에 적힌 초 한자를 보고 이미 투항한 도시인 줄 알았다.
유일곤은 이를 기회로 여겨 장개격을 형양 안으로 들였고 그들에게 군대에게 잔치를 해주었다.
잔치가 끝난 늦은 밤 유곤일은 장개격의 초군을 학살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곤일은 피하식별을 위해 군의 이름을 초용(楚勇)으로 바꿀 것을 명했다.
이때가 홍덕 9년(1873) 10월이었다.
• 동선회(同善會)의 결성
양광에 역병이 퍼지자 광주는 혼란에 빠졌다.
신식 기술이 적극적으로 유입되면서 혼란 속의 번영조차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서방의 상인들이 역병을 해외로 전파하여 양광역병은 천하에 기리 남을 공포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양한 집단들이 역병을 막기 위해 노력했는데
특히 상해에 거점을 두고 있는 런던선교회(倫敦宣敎會)는 윌리엄 록하트(諾魏林)를 파견하였다.
그는 본래 외과의이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중원에서 의사로 활동한 경력이 있어 다른 의술에도 능하였다.
록하트는 양광의 지방 통치 기구인 공행과 자치 기구인 선당(善堂), 선회(善會)의 지원을 받아
역병 퇴치와 서양 의술 전파를 목표로 하는 동선회(同善會)를 결성하게 된다.
이때가 홍덕 10년(1874) 2월이었다.
• 모란사(牡丹社) 사건
대만(臺灣)에는 종종 유구(琉球)의 표류민들이 조난되곤 했다.
하지만 홍덕 7년(1871) 12월에 조난된 유구인들은 이전과는 다른 결과를 맞이했다.
이때 조난된 66명 중 54명이 학살 당하고 12명만이 간신히 유구로 돌아갔다.
일본은 이 사건을 명분으로 대만 남부 모란향(牡丹社)에 3천의 신식군을 상륙시켰다.
청이 해체된 지금 일본의 진군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으니
이때가 홍덕 10년(1874) 5월이었다.
홍덕친정
• 홍덕친정(洪德親政)
백언호의 회군이 다시 감숙으로 철군하고 향신의 군대가 초의 군과 전투를 벌이니 염군은 다시 섬서를 장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섬서군을 복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 이를 간파한 이수성의 7만 익군이 산동을 점령하여 직례를 통합하기 위해 홍덕 10년(1874) 5월에 거병하였다.
익군이 산동 점령을 위해 북경을 비우자 홍덕제는 반익왕 장군들을 소집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북경에 남아있는 잔여 익군을 전부 처리하고 친정(親政)을 선언하였다.
북경의 백성들은 홍덕제의 친정에 환호했다.
이때가 홍덕 10년(1874) 7월이었다.
• 선경장군의 입궐
선경장군은 본래 청 조정의 부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목적은 청의 부활이 아닌 새로운 조정의 높은 관직이었다.
체렌돈두브가 열하를 공격하여 초토화 시킨 뒤에도 그의 야망은 멈출 줄 몰랐다.
한편 홍덕친정이 시작되고 홍덕제는 익왕을 처단할 새로운 힘이 필요했다.
그는 비록 표면적이라 할지라도 청이 아닌 자신에게 충성할 장수를 찾고 있었다.
그리하여 홍덕제가 선경장군에게 밀서를 보내고
그 밀서를 받은 선경장군이 12만의 군을 이끌고 자금성에 입궐하니
이때가 홍덕 10년(1874) 10월이었다.
• 창주(滄州) 전투
선경장군의 군대는 당시 중원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규모 있는 군대였다.
익왕 이수성 또한 그 사실을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직 선경장군의 군이 제대로 석량에 편입되기 이전에 홍덕친정을 무너트리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산동에서 회군하는 이수성의 익군은 즉시 북경으로 향했다.
그런 익군을 막아선 것은 선경장군이 파견해놓은 15만의 군이었다.
2배가 넘는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익군은 결국 패하여 다시 산동으로 돌아가니
이때가 홍덕 11년(1875) 3월이었다.
• 장가구(張家口) 전투
북경의 권력 공백을 기회로 여긴 자는 선경장군만이 아니었다.
청의 복위를 목표로 하던 외몽골의 셍게린첸 또한 석량을 멸망시킬 기회가 왔다고 여겼다.
그의 18만 군대는 자금성 정복을 위해 달렸으나
북경의 북쪽 문, 만리상정의 몽골 관문이었던 장가구에서 막히게 된다.
이때가 홍덕 11년(1875) 9월이었다.
• 배임수뢰(背任受賂)
선경장군은 홍덕제의 충실한 신하로서 직례총독직을 수여 받고 북경과 직례 일대를 안정시켰다.
하여 직례의 백성 중에 선경장군을 칭송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시간이 흘러 선경장군이 황제의 신임까지 받게된 어느날
선경장군은 남몰래 임무를 저버리고 부정한 돈을 벌고 있었다.
그는 러시아와 연락책을 두고 자금성의 막대한 보물들을 팔아넘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러시아는 연해주를 안정시키고 중원으로 진출할 부를 축적하고
성경장군은 자신의 배를 채우고 군에게 신식 무기를 공급하니
이때가 홍덕 11년(1875) 10월이었다.
• 이구통상대신(二口通商大臣)
홍덕제는 선경장군에게 더욱더 많은 권력을 위임하였다.
우선 동삼성에 총독직을 창설하여 선경장군에게 그 직을 수여하였다.
또한 서양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자 하였던 선경장군의 강력한 의지 표명에
홍덕제는 천진과 영구(營口)의 항구를 개항하여 양인들이 유입하도록 하였고
두 항구를 관리하고 서양과의 통상을 담당하는 이구통상대신직을 창설하고 수여하였다.
이때가 홍덕 12년(1876) 1월이었다.
• 아무르스키 백작과 삼구통상대신
니콜라이 아무르스키(阿穆尔斯基) 백작은 러시아의 극동 진출에 무척이나 큰 관심을 가졌다.
그런 그에게 청의 혼란은 그의 야망을 마음껏 발현 시킬 아주 좋은 기회가 되어주었다.
석량이 건국되던 1861년에는 아무르스키 백작이 청했던 총독직의 신설은 받아드려졌다.
그리하여 아무르스키 백작은 프리모리예 군관구장이되었다.
그는 카자크 군대를 지원 받아 연해주에서 저항하는 길림장군과 흑룡강장군을 처단했다.
그러나 이후 홍호자의 난이 일어나자 연해주 관리에 애를 먹고 정부에 지원을 청했다.
하지만 정부는 곡물 자급이 불가능하다면 이 이상의 지원은 불가능하다고 선을 그었다.
아무르스키 백작은 그런 정부를 무시하고 독단으로 선경장군에게 접근하였다.
그는 선경장군에게 동삼성의 이권을 판매하도록 유도하였다.
선경장군은 그 제안을 받아드렸고 러시아인들이 동삼성에 유입되었다.
홍덕제도 러시아와의 협력을 긍정적으로 받아드려 합이빈(哈尔滨) 구역을 창설하였다.
그리하여 선경장군의 이구통상대신은 세개의 구역을 관리하는 삼구통상대신이 되었다.
이때가 홍덕 12년(1876) 5월이었다.
해방새방
• 해방새방지쟁(海防與塞防之爭)
바다에서는 일본이 대만을 점령하고 프랑스가 대남을 침략하고 육상에는 회민이 난을 일으키고 러시아가 남하하니
상해의 향신들을 중심으로 군비 증축에 관해 논쟁을 시작했다.
증국번 사후 회군과 함께 상군 또한 이끌게 된 이홍장을 중심으로 해상의 방비를 강화해야 한다는 해방론과
호북에서 초군을 이끌며 회민을 제압한 좌종당을 중심으로 육상의 난을 진압해야 한다는 새방론이었다.
상해에서 시작된 이 논쟁은 양광과 민절 그리고 호북의 향신과 공행에게 퍼져나갔다.
이들의 논쟁이 한 세력의 승리로 끝나는 일은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군비 증축에대한 여론이 심화되니
향신과 공행을 시작으로 염군, 회민, 석량도 군비를 증축하였다.
이때가 홍덕 12년(1876) 8월이었다.
• 호광군(湖廣軍)과 복건수사(福建水師)
새방론을 주장한 좌종당은 초군 체제를 개편하여 호광군(湖廣軍)을 결성하였다.
호광군은 기존의 지역 단위의 민병대 체계였던 초군과 달리 서방식 지휘체계를 따랐으며
무기 또한 호북에서 생산한 신식 소총과 영국에게서 수입한 신식 화포를 사용하였다.
한편 해방론을 주장한 이홍장은 상군과 회군을 개편하기보단 복건에 항구를 건설하였다.
그는 신식 군함을 구매하고 복건수사(福建水師)를 결성하였다.
좌종당은 염군과 회민을 제압하고 다시 천자의 질서를 복구하고자 하였고
이홍장은 중원 넘어의 새로운 위협을 경계하고 대만을 수복하고자 하였으니
이때가 홍덕 13년(1877) 4월이었다.
• 광무군(廣務軍)
장자동(張之洞)이 만든 광무국(廣務局)은 광주십삼행 산하의 기구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한 기구였다.
광무국은 양광에 신식 공장과 철도를 건설하는 등 다양한 일을 하였다.
하지만 신식군을 양성하는 것은 공행의 허가를 받지 못하여 딱히 진척을 보이지 못하였다.
호광군의 창설을 계기로 결국 공행은 신식군의 창설을 허가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잠육영(岑毓英)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광무군(廣務軍)의 창설이었다.
이때가 홍덕 13년(1877) 6월이었다.
• 정주(鄭州) 전투
한편 산동에서 위세를 키운 익왕은 다시 염군 정벌을 재개하였다.
그는 염군의 세력을 자신의 군세로 통합하여 다시 북경으로 진군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벌써 곧 일흔을 앞둔 장락행의 별장이 위치한 정주를 침공하였다.
그의 군대는 산동에서 위세를 키우면서 신식 무기로 무장하였으니
정주 인근의 개봉을 손쉽게 점령하고 정주마저 봉쇄시켰다.
염군은 대한명왕이 휴식을 취하던 정주가 봉쇄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 16만 대군을 꾸려 정주를 봉쇄한 8만 익군을 공격했다.
하지만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익군을 끝내 물리치지 못하였고 정주는 익군에게 점령되었다.
포악한 이수성은 노년의 장락행을 성벽 위에서 떨어트리니
이때가 홍덕 13년(1877) 10월이었다.
• 향용의 북상
장락행의 사망 소식은 향신들에게 큰 기회로 다가왔다.
향신들은 염군의 땅을 얻으면 청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며
동시에 새로이 조직된 신식 군대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리하여 좌종당의 호광군은 신양(信陽)으로 진군하여 서양 화포의 위력을 보였고
이홍장의 복건수사는 남통(南通)으로 진군하여 함포 사격으로 상군의 진군을 지원하였다.
그리하여 향용이 두 도시를 점령하고 계속해서 북상하니
이때가 홍덕 14년(1878) 8월이었다.
• 염군의 붕괴
향용이 북상하고 익군이 남하하니 염군은 최후의 결전을 시작하였다.
염군은 크게 군을 셋으로 나누어 세 곳에서 진군하는 군을 막아섰다.
우선 장락행을 구출하기 위해 집결한 오기군 7만이 장락행 사후에도 여전히 익왕을 막아섰다.
그리고 좌종당의 호광군을 막기 위해 뇌문광의 하남군 6만이 집결하였고
이홍장의 상군을 막기 위해 임화방(任化邦)의 염군 8만이 집결하니
양군을 다 합치면 거의 50만이 넘는 대군이 중원 각지에서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염군의 세 군세는 어떤 적도 막아내지 못했고
염군의 남은 잔당은 장종우의 섬서군 뿐이니
이때가 홍덕 15년(1879) 2월이었다.
• 연대상륙(煙台上陸)
연대(煙台)는 본래 등주(登州)라고 불리는 항구 도시였다.
2차 아편전쟁 당시 프랑스에 의해 점령되었고 이후로도 프랑스의 관리를 받는 도시가 되었다.
석량 건국 이후에는 천진을 대신하여 서양 조계지가 번성한 도시였다.
염군이 이 일대를 장악한 뒤에도 프랑스의 보호를 받았으나 익왕의 원정으로 결국 도시가 함락되었다.
프랑스는 도시를 수복하기 위해 즉각 함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프랑스의 화포를 노획한 익군에게 패배하고 만다.
그러다가 염군을 무너트린 상군이 산동으로 진군하자
프랑스는 즉각 공사관을 통해 이홍장에게 접근하여 연대 공략을 제안하였다.
이홍장은 그 제안을 받아드렸고 프랑스의 함대와 복건수사가 연대에 포격을 가하고 회군을 상륙시키니
이때가 홍덕 15년(1879) 11월이었다.
시간대 불확실
• 취옥백채(翠玉白菜) 유출 사건
선경장군이 팔아넘긴 자금성의 보물들은 처음에는 아주 사소한 것들이었다.
유럽 시장에 공개되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작품들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계속되니 선경장군의 욕심은 더욱더 커져갔고
언제부터인가 희귀한 자금성만의 보물들까지 팔아넘겼다.
이러한 선경장군의 욕심은 결국 밝혀지니
그것이 바로 취옥백채 유출 사건이다.
• 청천백일(青天白日)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끝내 국민정부가 승리하였다.
이제 청천백일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스스로 천자이기를 부정하였으며, 그들이 숭상하는 청천백일 조차 지키지 못하였으니
여전히 천하의 곳곳에 착취와 수탈이 만연하고 있다.
부패한 조정, 아니 정부는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다시 한 번 난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보장하리까
아마 그 난의 주인공은 공산당일 것이니 이제 천자의 시대는 저물 것이다.
그럼에도 나관중이 말했던 것처럼 천하대세 분구필합 합구필분일테니, 천자는 없어도 천하는 영원하리라.
세력
양(梁)
• 주요 인물 : 석달개(石達開), 석정충(石定忠), 이수성(李秀成)
• 태평군(太平軍)
• 익군(翼軍)
염군(捻軍)
• 주요 인물 : 장락행(張樂行), 임화방(任化邦), 뇌문광(頼文光), 장종우(張宗禹)
• 오기군(五旗軍)
• 하남군(河南軍)
상군(湘軍)
• 주요 인물 : 좌종당(左宗棠),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 호설암(胡雪巖)
• 상군(湘軍)
• 회군(淮軍)
• 초군(楚軍): 유곤일(劉坤一)
광주십삼행(廣州十三行)
• 주요 인물 : 오숭요(伍崇曜)
회민(回民)
• 주요 인물 : 백언호(白彦虎), 야쿱 벡(阿古柏)
동삼성(東三省)
• 성경장군(盛京將軍)
• 길림장군(吉林將軍)
• 흑룡강장군 (黑龍江將軍)
• 홍호자(紅鬍子)
몽골(蒙古)
• 외몽골(外蒙古)
• 주요 인물 : 칼카 대칸(喀爾大可汗), 체렌돈두브(车林端多布)
• 내몽골(內蒙古)
• 주요 인물 : 보르지기트 셍게린첸(博爾濟吉特 僧格林沁)
기타 세력
• 평남국(平南國): 두문수(杜文秀), 마여룡(馬如龍)
• 초(楚): 장수미(張秀眉), 장개격(張開格)
• 천사도(天師道)
• 티베트(西藏)
기타
• 청 총독령
• 직례(直隷) 직례성 (산동성, 하남성)
• 양강(兩江) 강소성, 강서성, 안휘성
• 민절(閩浙) 복건성, 절강성, 대만성
• 호광(湖廣) 호남성, 호북성
• 섬감(陝甘) 섬서성, 감숙성, 신강성
• 양광(兩廣) 광동성, 광서성
• 운귀(雲貴) 운남성, 귀주성
• 사천(四川) 사천성
• 동삼성(東三省) 봉천성, 길림성, 흑룡강성
-> 1907년 신설되었고 그전까지는 장군이 관리
-> 비공식적으로 18세기 초부터 동삼성이라 불림
-> 대청회전왈 옛수도 성경(盛京)의 북쪽 길림(吉林)의 북쪽 흑룡강(黑龍江)을 합쳐 동삼성
• 청 지방 행정
총독(태수) - 순무 - 포정사(번사) - 안찰사(얼사) - 도원 - 부 - 지부 - 현 - 지현 - 지방관
청대에 흥기한 민간 자선 조직인 선당(善堂), 선회(善會)
인사 방면의 회강제, 윤치제, 동사제와 자산 조달과 운영제도 및 재무관리 방면의 신용조회제도 등을 포함
정부가 선당·선회 제도를 추진하면서 많은 선당·선회가 관료화된 조직으로 변화
선당·선회의 규약과 《징신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