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온국 국회 (은행목에서 피어난 꽃)

Bluepavels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8월 14일 (토) 13:3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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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최고입법회의

王國最高立法會議

로고
체제 삼부제
주소 대연국 입법의사당
남한경 영등포구 의사당대로 1(여의도동)
개회일 1851년 6월 1일(제1왕국)
1917년 8월 10일(제2왕국, 독립투쟁 시대)
1947년 6월 1일(제3왕국)
전신 제1왕국 국가의회, 제2왕국 국가의회, 해방후 임시의회
직책
최고의장 원문진양왕 엄희서
부의장 양성운(楊晟雲)
양원 사무총장 박형수(朴炯守)
귀족단 대표 (공석)
국교단 대표 (공석)
민의단 대표 (공석)
구성
정원 1,800[1]
임기 소집 시부터 폐막시까지
회의
회의 구성 국왕이 항시 소집 가능
주기 약 3회
회기 국왕이 결정
장소 입법의사당
의석

     박: 100 seats      안: 100 seats      김: 100 seats      전: 100 seats      양: 100 seats      임: 100 seats      불교: 600 seats      경기황해: 150 seats      강원경상: 150 seats      충청전라: 150 seats      평안함경: 150 seats


왕국최고입법회의(王國最高立法會議, Supreme Legislative Council), 약칭 삼부회대연국의 입법 기관이다.

의회 체제

대연국 의회의 공통적인 특징은 바로 양원제라는 점이다. 이는 1851년 의회의 문을 열었을 대부터 이어진 전통이며, 제2왕국 시절 일제에 대하여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단원제로 전환했지만 해방 이후 즉시 양원제로 다시 개회했다.

대연국 의회에서는 공통적인 특징이 하나 더 있는데, 미국과 같이 양당제 구도라는 것이다. 비록 대연국이 공식적으로 양당제를 표방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지만, 개화기 이래 창당된 정당들의 직계가 둘로 이어오고 있기에 가장 큰 2개 정당이 사실상의 양당으로 꼽힌다.

제1왕국 시대

대연국 국회는 1851년 당대의 개항으로 인하여 대연국 내부에서 점진적인 정치개혁이 촉진되었을 때 만들어졌다. 제1왕국 의회는 전형적인 영국 방식의 양원에서 그 모티브를 찾았으며, 양원은 다시 귀족원과 서민원으로 나누어졌다. 다만 전제군주제의 영향으로 초기 1왕국 국회는 제대로 가동되지 못했다. 영국은 이미 권리장전 같은 역사를 통해 자체적으로 입헌군주정이 자리잡았고 국왕을 처형한 적도 있고 폐위시킨 적도 여러번이었지만 대연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학을 통해 서유럽 입헌군주정을 머리와 몸에 익힌 서방파와, 유학을 가지 않고 본국에 남아 친국왕을 자처한 근왕파가 지속적으로 분쟁했고, 국왕이 근왕파를 지지하고 서방파를 적대하면서, 제1왕국 국회의 초반 20여년은 전제군주정과 다름 없었던 국가의 상황에서 제대로 된 입법부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이후 개혁이 활성화되고 효과가 나타나면서 제1왕국 국회의 입법 기능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정당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고 서방과의 외교적 교류가 활성화되어 일본과의 경제적 경쟁이 시작되던 시절에는 국회의 권한이 상당히 막강했다.

이런 상황에서 1878년 대연국 정부는 헌법의 개정을 통해 내국인에 한하여 21세 이상 성인 남성과 21세 이상 성인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했고, 35세 이상 남성에 대해 피선거권을 부여했다.[2] 국력이 커지면서 국회의 권한이 커졌고, 간선제로 유지되던 국회의원 선출 제도가 1878년에 이르러 직선제로 교체되었다.

1878년의 헌법개정으로 국회의원 (국민의회)을 선출하는 방법으로 직선제가 도입되자, 국민들은 4년마다 국민의회 의원을 뽑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귀족의회 의원은 여전히 국민의회 의원들이 선출하는 간선제였지만 이 시대에서 발생한 일련의 개혁은 국민들이 가진 국가에 대한 신뢰감을 개선하고 정치에 많은 관심을 쏟아부을 수 있도록 한 것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제2왕국 시대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전하여 일제강점기가 찾아왔을 때, 왕실과 독립운동가들은 영국과 프랑스 등 서방 열강들의 조계지가 위치해 있어 일제에 대한 독립투쟁을 진행하기에 더 없이 좋은 상하이에 제2왕국 정부를 수립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을 진행했고, 곧이어 제2왕국 의회가 개회했다. 제2왕국 의회에서 주목할 점은 바로 단원제라는 것이다. 단원제 의회가 도입되면서 새 체제에 찬동하는 자들과 반발하는 자가 나뉘어졌는데, 이 분쟁은 제3왕국 의회가 세워질 당시 체제를 정하기까지 이어졌고 마침내 양원을 찬성하는 양원파가 승리하면서 후계인 제3왕국 의회는 다시 양원이 된 것이다.

파일:임시정부 이동경로.jpg

한편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제2왕국의 임시정부는 여러번 옮겨지게 되었다. 먼저 1916년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전하여 제1왕국이 멸망하면서 1919년 제2왕국이 수립되어 상하이에 임시정부 청사를 세웠고, 1932년에 항저우로 위치를 옮겼으며 1937년 난징, 창사, 광저우, 류저우(1938년), 치장(1939년), 충칭(1940년) 순으로 옮겼다. 제2왕국 임시정부와 의회의 마지막 기착지는 바로 충칭이었으며, 1940년 이후로는 이곳에서 독립 전까지 투쟁을 전개했다.

현재, 제3왕국 시대

소속 정당 및 그 비율

역대 선거 결과

  1. 6대 개국공신 호국가 총합 600명, 국교인 불교 종단 총합 600명, 각 지역 민의 대표 총합 600명
  2. 여성은 당대에서 여전히 피선거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여성에게 마침내 피선거권이 주어진 것은 1946년 제3왕국 국회가 개회하면서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