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중 하나의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관리자. 문서를 고치려면 이메일 인증 절차가 필요합니다. 사용자 환경 설정에서 이메일 주소를 입력하고 이메일 주소 인증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해동천자}} {{전쟁 정보 |분쟁 = 고려-몽골 전쟁 |전체 = [[몽골의 정복전쟁]] |그림 = 처인성전투.jpg |그림크기 = |설명 = [[처인성 전투]]를 묘사한 그림 |날짜 = [[1231년]] ~ [[1273년]] |장소 = 한반도 전역 |결과 = 고려의 항복<br>고려, [[몽골 제국]]의 부마국으로 전락 |교전국1 = [[파일:대고려국 국기.png|26px]] [[고려]] |교전국2 = [[파일:몽골제국.png|26px]] [[몽골 제국]] |지휘관1 = [[파일:대고려국 국기.png|26px]] [[고려 고종]]<br/>[[파일:대고려국 국기.png|26px]][[고려 원종]]<br/>[[파일:대고려국 국기.png|26px]] [[최우]]<br/>[[파일:대고려국 국기.png|26px]] [[최의]]<br/>[[파일:대고려국 국기.png|26px]] [[최항 (승려)|최향]]<br/>[[파일:대고려국 국기.png|26px]] [[김윤후]]<br/>[[파일:대고려국 국기.png|26px]] [[박서]]<br/>[[파일:대고려국 국기.png|26px]] [[왕온 (승화후)|왕온]][[작전 중 사망|†]]<br/>[[파일:대고려국 국기.png|26px]] [[이용상]]<br/>[[파일:대고려국 국기.png|26px]] [[김준 (고려 후기)]]<br/>[[파일:대고려국 국기.png|26px]] [[임연]][[작전 중 사망|†]]<br/>[[파일:대고려국 국기.png|26px]][[임유무]]<br/> |지휘관2 =[[파일:몽골제국.png|26px]][[오고타이 칸]]<br/>[[파일:몽골제국.png|26px]][[귀위크 칸]]<br/>[[파일:몽골제국.png|26px]][[몽케 칸]]<br/>[[파일:몽골제국.png|26px]][[쿠빌라이 칸]]<br/>[[파일:몽골제국.png|26px]][[살리타]][[작전 중 사망|†]]<br/>[[파일:몽골제국.png|26px]][[아모간]]<br/>[[파일:몽골제국.png|26px]][[예케]]<br/>[[파일:몽골제국.png|26px]][[자랄타이]]<br/>[[파일:몽골제국.png|26px]][[홍다구]]<br/>[[파일:몽골제국.png|26px]][[홍복원]]<br/>[[파일:몽골제국.png|26px]][[흔도]] |병력1 = 병력 규모 불명 |병력2 = 병력 규모 불명 |사상자1 = 2만명 |사상자2 = 피해 규모 불명 |지도 = |지도설명 = |기타 = }} [[고려]]가 [[무신정권]](武臣政治) 하에 있는 동안 중앙아시아 대륙에서는 테무친이 등장하여 [[몽골족]]을 통일하고, [[1206년]]([[고려 희종|희종]] 2년)에는 [[칭기즈 칸]]이라 칭하고 강대한 제국(帝國)으로 군림하였다. 그는 세계를 정복할 목적으로 동·서양의 각국을 공격하여,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한 다음 남하하여 금나라를 공격하였고 금은 대내적인 분열을 일으켰다. 요나라 유민의 일부분은 [[후요|대요국]](大遼國)을 세우고 여진족과 화합하여, 재기의 기회를 노렸으나 다시 몽골에 쫓기어 [[1216년]]([[고려 고종|고종]] 4년)에는 마침내 고려의 국경을 넘어서게 되었다. 이에 몽골은 여진족의 [[동진국]](東眞國)과 동맹을 맺고, 거란족을 소탕하기 위하여 고려에 들어오자 고려도 군사를 동원하여 그들과 협력하여 강동성에서 거란을 무찔렀다(→[[강동성 전투]]). 몽골은 이를 계기로 고려에 큰 은혜라도 베푼 듯이 고려와 협약을 맺고 해마다 과중한 세공을 요구하는 한편 몽골 사신은 고려에 들어와 오만한 행동을 자행하여, 고려는 차츰 그들을 적대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침 [[1225년]](고종 12년) 음력 1월 몽골 사신 [[저고여]](箸告與)가 국경지대에서 살해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몽골은 이를 고려의 소행이라 하고, 고려는 국경을 넘어서 금나라 사람에게 피살된 것이라 주장하여, 양국 간의 관계는 점차 험악해지고 마침내는 국교단절에까지 이르러 몽골은 고려에 대한 침략을 계획하였다. == 전쟁의 경과 == === 초기 === {{본문|제1차 고려-몽골 전쟁}} 1231년 [[오고타이 칸]]은 1225년 몽골 사신 [[저고여]] 살해 사건에 대해 힐책하는 내용과 함께 고려에게 항복하라는 국서를 보낸다.<ref>『元史』卷2・太宗本紀「(太宗三年秋八月)是月、以高麗殺使者、命撤禮塔率師討之、取四十餘城。」</ref> <ref>『元史』卷208・高麗傳「(太祖十九年)十二月、又使焉、盜殺之于途、自是連七歳絶信使矣。 太宗三年八月、命撒禮塔征其國、國人洪福源迎降于軍、得福源所率編民千五百戸、旁近州郡亦有來師者。」</ref> 이로써 [[고려]]와 [[몽골 제국]]간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오[[오고타이 칸|고타이 칸]]은 [[몽골 제국]] 잘라이르부 출신의 장수 [[살리타]]로 하여금 [[고려]]를 정복하도록 하였다. [[살리타]]가 이끄는 몽골군은 [[압록강]]을 넘어 [[고려]]의 [[의주]]를 함락시켰다. 몽골군은 이때 투항한 고려의 장수 [[홍복원]]과 그의 군사들과 함께 [[귀주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귀주성]]을 지키고 있던 [[고려]]의 장수 [[박서]]와 [[김경손]], 그리고 그들 휘하에 고려군은 몽골군에 저항하였다. [[귀주성]]을 함락하기 위해 포차와 누차 등 무수한 대형 병기를 이용하는 등 맹공하였으나 귀주성이 함락되지 않자 포기하고 [[고려]]의 수도 [[개경]]에 진격하여 포위하였다. 고려 조정은 몽골군이 [[개경]]을 포위하자 별다른 대책이 없음을 알고 [[몽골 제국]]에게 강화를 요청, 몽골 사신들과 [[살리타]]에게 막대한 공물을 바쳤다. 고려 조정이 강화를 맺자 [[귀주성]]의 [[박서]]도 항복하여 전투가 중단되었다. 이후 몽골군은 강화의 감시와 이후 고려에의 간섭을 위해 [[개경]]과 [[평안도]] 일대에 감독관인 [[다루가치]]를 72명 배치하고 철수하였다.{{본문|제2차 고려-몽골 전쟁}} 고려는 비록 몽골과 강화를 하였으나 이는 고려의 본의가 아니었고 또 앞으로 몽골의 태도 여하를 몰라 당시의 집권자인 [[최우]]는 재추회의(宰樞會議)를 열어 강화 천도를 결정하고, [[1232년]](고종 19년) 음력 6월에 수도를 강도(江都 : [[강화도]])로 옮기고 장기 항전의 각오를 굳게 다졌다. 이는 몽골에 대하여 적의를 보인 것이므로 살리타는 7개월 만에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여, 서경의 [[홍복원]]을 앞세워 개경을 함락하고 남경(南京 : [[서울시|한양]])을 공격한 다음 한강을 넘어 남쪽을 공략하였다. 그러나 해전에 약한 몽골은 강화도를 치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권고하였으나 응하지 않으므로 다시 남하하여 처인성(處仁城 : [[용인시|용인]])을 공격하다가 살리타는 고려의 [[김윤후]]에게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 대장을 잃은 몽골은 사기를 잃고 철수하였는데, 이때 부인사(符仁寺) 소장의 《[[고려대장경]]》 초조판(初彫板)이 불타 없어졌다. 한편 몽골의 철수에 기세를 올린 최우는 북계병마사 민희(閔曦)에게 가병(家兵) 3천을 주어 앞서 반역한 홍복원을 토벌하고, 가족을 사로잡고 북부 여러 주현(州縣)의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본문|제3차 고려-몽골 전쟁}} [[1235년]](고종 22년) 몽골은 [[남송]]을 공격하는 길에 따로 [[탕구타이|당올태]](唐兀臺)에게 대군을 주어 다시 고려를 치게 하였다. 몽골은 개주(介州 : [[개천시|개천]])·온수(溫水 : [[아산시|온양]])·죽주(竹州 : [[안성시|죽산]])·대흥(大興 : [[예산군|예산]]) 등지에서 큰 타격을 받으면서도 4년간에 걸쳐 전국 각지를 휩쓸었다. 유명한 《[[황룡사]] 9층 목탑》도 이때에 파괴되었다. 이같이 몽골은 육지에 화를 입혔으나 강화도만은 침공치 못하니 조정은 강화도에 웅거하여 방위에 힘쓰는 한편 부처의 힘을 빌려 난을 피하고자 《팔만대장경》의 재조(再彫)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강화도에서는 백성에게 미치는 피해를 우려하여 [[1238년]](고종 25년) 겨울 김보정(金寶鼎) 등을 적진에 보내어 강화를 제의하였고, 몽골은 왕의 입조를 조건으로 이듬해 봄에 철수를 시작하였다. 철수 후 고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다가 몽골의 독촉으로 입조의 불가능함을 말하고 왕족 신안공 전(新安公 佺)을 왕제(王弟 : 왕의 아우)라 칭하여 대신 몽골에 보내고 [[1241년]](고종 28년)에는 신안공의 종형(從兄 : 사촌형) 영녕공 준(永寧公 綧)을 왕자로 가장시켜 몽골에 인질로 보냈다. == 각주 ==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본문 (원본 보기) 틀:전쟁 정보 (원본 보기) 틀:해동천자 (원본 보기) 모듈:Arguments (원본 보기) 모듈:InfoboxImage (원본 보기) 모듈:Infobox military conflict (원본 보기) 모듈:No globals (원본 보기) 모듈:WPMILHIST Infobox style (원본 보기) 고려 - 몽골 전쟁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