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광지치: 두 판 사이의 차이

(새 문서: {{화향 타이틀}} '''국광지치'''({{llang|zh|國光之治}})는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중일전쟁(中日戰爭) 발발 직후, 중국 대륙에 대한 영토 확...)
 
편집 요약 없음
1번째 줄: 1번째 줄:
{{화향 타이틀}}
{{화향 타이틀}}
'''국광지치'''({{llang|zh|國光之治}})는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중일전쟁]](中日戰爭) 발발 직후, [[중국 대륙]]에 대한 영토 확장을 위하여 [[군인 내각]](軍人內角)이 주도하던 제국주의 정책이다. '국광(國光)'이라는 의미는, 국가의 영광을 드높이라는 뜻이다.
'''국광지치'''({{llang|zh|國光之治}})는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 패전 이후인 1945년부터 1960년대까지 비밀리에 [[민월 지방]](閩越地方)을 수복하려던 작전이다. '국광 작전(國光作戰)'이라고도 부르며, '국광(國光)'이라는 뜻은 국가의 영광을 되찾으라는 의미이다.


== 정책 진행 ==
== 작전 배경 ==
[[서광회 사건]](曙光會事件)으로 정당 정치의 몰락을 가져온 군부는 1932년 1월, [[만주사변]]의 영향을 받아 [[하이난 침략]](海南侵略)을 일으켜 [[광동성]](廣東省)과 [[광서성]](廣西省)의 군사적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당시 광동·광서 지역은 [[양광사변]](兩廣事變)으로 [[장제스]](蔣介石)가 주도하는 '[[난징 국민정부]]'(南京國民政府)에 대항하여 반장 세력이 주도하던 '[[광저우 국민정부]]'(廣州國民政府)가 성립해 대립하던 시점이었다.


최후의 '신민정 체제(新民政體制)'였던 [[진대영 내각]](陳大寧內角)은 중국과의 쓸데없는 마찰을 최소화하는데 주력했다. 그 이유는 불필요한 외부 분쟁을 늘리면 늘릴수록, 중국이 국난 타개와 통일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내부의 문제를 봉합한 뒤 공동으로 [[대화향국]](大花鄕國)에 대항할 구실을 내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군부는 이러한 '소극적' 외교책에 반발하여 [[4월 위기]](四月危機)를 일으켜 [[군인 내각]](軍人內角)을 수립시켰고, [[주하이 사건]](珠海事件)<ref>[[화향인]](花鄕人) 2명이 [[주하이]] 시내를 걷던 중, 괴한의 습격으로 인해 한 명은 중상을, 다른 한 명은 사망한 사건을 일컫는다.</ref>을 조작하여 [[중화민국 국민정부]](中華民國 國民政府)측에게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다. 끝내 주하이 시장이 굴복하여 화향의 요구를 수락했으나, 군인 내각은 요구의 수락 여부와 관계 없이 [[육전대]](陸戰隊)를 상륙시켜 [[광둥성]]·[[광서성]] 일대에 화향 국민들을 보호할 것이라는 주장을 제시했다.
=== 국민당 망명과 하이난 섬 항쟁 ===
[[민월 지방]]은 향후 50년 내에 [[국민투표]](國民投票)[[화향]](花鄕)에 편입할 것인지, [[특별 행정구]](特別行政區)로 둘 것인지, 일개 성(省)으로 놔둘 것인지 결정하는 [[향중공동선언]](鄕中共同宣言, 1947)이 발표됨으로서 앞으로의 존치가 결정되는 상황이었다. 허나 [[국공내전]](國共內戰)의 발발로 [[양쯔강]](揚子江) 이남까지 수세에 몰린 [[장제스]](蔣介石)[[중국 국민당]](中國國民黨)은, 화향의 전후 초대 총상이었던 [[엄경휘]](嚴經輝)의 배려로 [[대만성]](臺灣省)의 대략 50만 명에 달하는 인원을 데리고 망명하게 되었다.<ref>국민당 출신의 망명자들은 당시 [[대만성]] 성장이었던 [[견신우]](甄申佑)에게 막대한 뇌물을 주면서 [[외성인]](外省人)들의 토지·공장·사립 학교의 이권들을 침탈했고, 이는 곧 외성인들의 반발로 이어져 [[2.28 사건]](二·二八事件, 1947)이 촉발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ref>


얼터당토않은 요구에 진의 파악을 위해 접근하던 중국은 [[19로군]](十九路軍) 예하의 총 3만 명으로 구성된 78사단을 광둥성 주요 시내 일대에 배치하여 [[참호]](塹壕)[[토치카]](特火點, 특화점), 지뢰지대를 건설하는 등 방어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에 화향군은 방어 시설 확충을 빌미로 사태 확장을 꾀하고 있었으나, 반일 군사 세력이 많았기 때문에 화향 입장에서는 아직 광둥성 일대로 진출할 여력이 없는 상황이었다.
[[민월 지방]]에 남아있던 화향군은 파죽지세로 몰려오던 [[중국 공산당]](中國共産黨)에 맞서 [[무이산맥]](武夷山脈)에 진을 치고 [[삼명 전투]](三明戰鬪, 1949 12.)를 치루었다. 하지만 보급의 어려움과 공산당의 압박책에 버틸 수 없던 화향군은 [[진먼 섬]](金門島)으로 후퇴하였고, 끝내 [[중국 공산당]]은 대륙에서 [[중국 국민당|국민당]]과 [[화향]]을 모두 몰아내게 되었다.
 
그럼에도 절치부심(切齒腐心)하던 [[중국 국민당|국민당]]과 [[화향]]은 [[해남 방위총사령부]](海南防衛總司令部)를 세워 [[광저우]](廣州) 함락 이후 피신해 있던 [[쉐웨]](薛岳)를 하이난 방위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후퇴했던 [[바이충시]](白崇禧)의 병력과 자신의 잔존 병력이었던 5개 군을 규합하여 [[백릉방선]](伯陵防線)이라 불리는 진지를 구축했으며, 45대 규모의 4개 항공 대대와 제2함대 산하 40여 척의 함정을 배치했다. 하지만, 잇따른 패배로 전체적인 규율과 전투 사기는 엉망이었기에 [[화향]]에서 파병한 [[유회]](劉恢)의 2개 사단이 합류하여 혼란한 질서를 통제했다.
 
[[펑더화이]](彭德懷), [[덩화]](鄧華)가 이끄는 제4야전군 제12병단 제40군과 제15병단 제43군은 [[하이난 상륙작전]](海南島登陸作役, 1950)을 개시하여 소대, 중대 규모로의 해안가 상륙 및 하이난 내륙에서의 게릴라 전투를 진행하여 혼선을 빚게 만들었다. 이에 [[쉐웨]]와 [[유회]]는 잔존 군함과 항공기를 이용하여 광저우, [[레이저우]](雷州) 일대에 폭격을 시도했다. 한편으로 [[화향]]에서 기갑 전력의 증원 요청을 보내 [[M4 셔먼]]과 [[M5A1]] 20여 대를 지원받았다.
 
4월 16일부터 목선 400여 척을 이용해 도하를 시도한 공산당에 맞서 [[쉐웨]]는 제3 함대 사령관 [[왕언화]](王恩華)를 통해 해안 방위에 나설 것을 명령했다. 이에 [[린가오자오]](臨高角)로 상륙하려던 공산당군은 제3 함대의 포격에 맞서 [[대전차포]], [[박격포]]를 동원하여 항전에 나섰으나, 빈약한 방어력으로 무장했던지라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했으며, 해안 지대에서도 상륙하는 공산당군에 맞서 화력을 퍼붓고 공중에서는 기총 소사를 통해 철저한 방어 태세에 임했다.
 
[[유회]]는 국민당군 제64군 2개 연대와 자신의 2개 사단을 동원하여 교두보를 마련하려던 상륙군에 맞섰으며, 17일 [[메이타이]](美臺)에서 격퇴했다. 공산당 제43군 제127사단은 [[위바오 항]](玉包港)에 상륙하여 [[푸산]](福山)으로 진격코자했으나, 국민당군 제62군에게 전멸되었으며 [[쉐웨]]는 [[메이팅]](美亭)에서 제62군 주력 연대들과 교도사단들을 집합해 23일, [[하이커우 전투]](海口戰鬪)를 벌여 공산당 제40군을 괴멸시켜 대략 2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는 대승을 거두었다.
 
[[구닝터우 전투]](古寧頭之役, 1949 10.)에서 패배했던 [[중국 공산당]]은 하이난 섬 상륙 작전에서도 소기의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황급히 병력들을 철수시켜야 했으며, 기세를 몰아 [[국민당군]]은 [[레이저우 포전]](雷州砲戰, 1950 8.)을 벌여 [[광둥성]] 남부를 위협하게 되었다. 화향은 [[남방 해역]](南方海域)에 하이난 섬 일대까지 확대시켜 해상 방위를 위한 전비 증대 및 군사력 확장을 시도했고, [[6.25 전쟁]](韓國戰爭)으로 [[화향해]](花鄕海, 남중국해)에 진입한 미국의 [[제7함대]](第七艦隊)는 [[대만 해협]]까지 방위 범위를 늘려 중국을 위협하게 되었다.
 
=== 민월 수복 계획과 무산 ===


== 각주 ==
== 각주 ==

2019년 7월 13일 (토) 10:52 판

국광지치(중국어: 國光之治)는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 패전 이후인 1945년부터 1960년대까지 비밀리에 민월 지방(閩越地方)을 수복하려던 작전이다. '국광 작전(國光作戰)'이라고도 부르며, '국광(國光)'이라는 뜻은 국가의 영광을 되찾으라는 의미이다.

작전 배경

국민당 망명과 하이난 섬 항쟁

민월 지방은 향후 50년 내에 국민투표(國民投票)로 화향(花鄕)에 편입할 것인지, 특별 행정구(特別行政區)로 둘 것인지, 일개 성(省)으로 놔둘 것인지 결정하는 향중공동선언(鄕中共同宣言, 1947)이 발표됨으로서 앞으로의 존치가 결정되는 상황이었다. 허나 국공내전(國共內戰)의 발발로 양쯔강(揚子江) 이남까지 수세에 몰린 장제스(蔣介石)와 중국 국민당(中國國民黨)은, 화향의 전후 초대 총상이었던 엄경휘(嚴經輝)의 배려로 대만성(臺灣省)의 대략 50만 명에 달하는 인원을 데리고 망명하게 되었다.[1]

민월 지방에 남아있던 화향군은 파죽지세로 몰려오던 중국 공산당(中國共産黨)에 맞서 무이산맥(武夷山脈)에 진을 치고 삼명 전투(三明戰鬪, 1949 12.)를 치루었다. 하지만 보급의 어려움과 공산당의 압박책에 버틸 수 없던 화향군은 진먼 섬(金門島)으로 후퇴하였고, 끝내 중국 공산당은 대륙에서 국민당화향을 모두 몰아내게 되었다.

그럼에도 절치부심(切齒腐心)하던 국민당화향해남 방위총사령부(海南防衛總司令部)를 세워 광저우(廣州) 함락 이후 피신해 있던 쉐웨(薛岳)를 하이난 방위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후퇴했던 바이충시(白崇禧)의 병력과 자신의 잔존 병력이었던 5개 군을 규합하여 백릉방선(伯陵防線)이라 불리는 진지를 구축했으며, 45대 규모의 4개 항공 대대와 제2함대 산하 40여 척의 함정을 배치했다. 하지만, 잇따른 패배로 전체적인 규율과 전투 사기는 엉망이었기에 화향에서 파병한 유회(劉恢)의 2개 사단이 합류하여 혼란한 질서를 통제했다.

펑더화이(彭德懷), 덩화(鄧華)가 이끄는 제4야전군 제12병단 제40군과 제15병단 제43군은 하이난 상륙작전(海南島登陸作役, 1950)을 개시하여 소대, 중대 규모로의 해안가 상륙 및 하이난 내륙에서의 게릴라 전투를 진행하여 혼선을 빚게 만들었다. 이에 쉐웨유회는 잔존 군함과 항공기를 이용하여 광저우, 레이저우(雷州) 일대에 폭격을 시도했다. 한편으로 화향에서 기갑 전력의 증원 요청을 보내 M4 셔먼M5A1 20여 대를 지원받았다.

4월 16일부터 목선 400여 척을 이용해 도하를 시도한 공산당에 맞서 쉐웨는 제3 함대 사령관 왕언화(王恩華)를 통해 해안 방위에 나설 것을 명령했다. 이에 린가오자오(臨高角)로 상륙하려던 공산당군은 제3 함대의 포격에 맞서 대전차포, 박격포를 동원하여 항전에 나섰으나, 빈약한 방어력으로 무장했던지라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했으며, 해안 지대에서도 상륙하는 공산당군에 맞서 화력을 퍼붓고 공중에서는 기총 소사를 통해 철저한 방어 태세에 임했다.

유회는 국민당군 제64군 2개 연대와 자신의 2개 사단을 동원하여 교두보를 마련하려던 상륙군에 맞섰으며, 17일 메이타이(美臺)에서 격퇴했다. 공산당 제43군 제127사단은 위바오 항(玉包港)에 상륙하여 푸산(福山)으로 진격코자했으나, 국민당군 제62군에게 전멸되었으며 쉐웨메이팅(美亭)에서 제62군 주력 연대들과 교도사단들을 집합해 23일, 하이커우 전투(海口戰鬪)를 벌여 공산당 제40군을 괴멸시켜 대략 2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는 대승을 거두었다.

구닝터우 전투(古寧頭之役, 1949 10.)에서 패배했던 중국 공산당은 하이난 섬 상륙 작전에서도 소기의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황급히 병력들을 철수시켜야 했으며, 기세를 몰아 국민당군레이저우 포전(雷州砲戰, 1950 8.)을 벌여 광둥성 남부를 위협하게 되었다. 화향은 남방 해역(南方海域)에 하이난 섬 일대까지 확대시켜 해상 방위를 위한 전비 증대 및 군사력 확장을 시도했고, 6.25 전쟁(韓國戰爭)으로 화향해(花鄕海, 남중국해)에 진입한 미국의 제7함대(第七艦隊)는 대만 해협까지 방위 범위를 늘려 중국을 위협하게 되었다.

민월 수복 계획과 무산

각주

  1. 국민당 출신의 망명자들은 당시 대만성 성장이었던 견신우(甄申佑)에게 막대한 뇌물을 주면서 외성인(外省人)들의 토지·공장·사립 학교의 이권들을 침탈했고, 이는 곧 외성인들의 반발로 이어져 2.28 사건(二·二八事件, 1947)이 촉발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