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랑파트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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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4세 (Napoleon IV)'''
'''-나폴레옹 4세 (Napoleon 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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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1세 (RUdolf I)'''
'''-루돌프 1세 (Rudolf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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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26일 (일) 18:5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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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그랑파트리는 만약에 프랑스가 보불전쟁에서 승리했다면?이라는 상상에서 시작된 대체역사 세계관이다.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 제국이 결국 대전쟁으로 몰락하고, 유럽의 질서가 재건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언뜻 보면 프랑스를 찬양하는 세계관 같겠지만 사실은 바니타스[1]적인 세계관이다.

세계관 이름은 프랑스어 Grande Patrie에서 유래되었으며 해석하면 위대한 조국을 의미한다.

세계관 지도

세계관 역사

우리의 찬란했던 시절과 마찬가지로 지금 이 순간에도 그대들은 변함없이 용기와 충성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대들과 같은 용사들이 있으니 우리의 대의는 결코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없이 이어지고, 내란으로 치닫는다면 그것은 프랑스에 커다란 불행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 나폴레옹 1세

1866년, 7주 전쟁(보오전쟁)에서 프로이센군에 의해 오스트리아 제국이 참패하자 프랑스 제국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1867년, 전쟁장관이었던 아돌프 닐 원수는 군사 개혁을 위해 닐 법안을 의회에 발의하였고, 법안은 간신히 통과하며 프랑스군은 대대적인 군사개혁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870년, 엠스 전보 사건으로 프랑스가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하며 보불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로이센군은 이 전쟁을 미리 준비하였기에 프랑스 국경을 넘어 빠르게 진격하였다. 그러나 스당 전투에서 나폴레옹 3세가 직접 이끄는 군대가 프로이센군을 극적으로 격파하며 프로이센군의 공세를 멈추었고, 프랑스군은 반격을 시작하였다. 겨울이 되자, 프랑스군이 프로이센 국경을 넘기 시작했으며 1871년, 코블렌츠 전투에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왕태자(훗날 프리드리히 3세)를 포로로 잡으며 끝내 프로이센 왕국은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스트라스부르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전쟁은 끝났다. 프랑스는 약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받으며 이 돈으로 사회, 군사, 경제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발전과 개혁을 이끌어낼 수 있었고, 이는 공화주의자와의 갈등으로 혼란하던 정계 속에서 보나파르트파가 다시금 우위를 점하게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프로이센으로부터 라인란트 지방을 빼앗으며 이곳에 라인 왕국을 세웠고 과거 베스트팔렌 왕국의 국왕이었던 제롬 보나프르트의 아들인 나폴레옹 조제프 샤를 폴 보나파르트를 이곳의 국왕으로 즉위시켰다. 프랑스는 보불전쟁을 계기로 다시금 유럽 내에서 강력한 패권 국가로 성장하였고 이는 힘의 균형을 중요시하던 영국이 프랑스를 과거 나폴레옹 전쟁처럼 견제하게 되었다.

보불전쟁 이후, 북독일 연방은 해체되었으나 비스마르크는 연방의 구성국들을 프로이센으로 편입하면서 불행 중 다행으로 라인란트를 제외한 영토는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대한 배상금과 패전의 절망감은 프로이센 사회를 어둡게 만들기 충분했고 코 앞에서 통일을 놓쳤기에 프로이센은 상당히 혼란에 빠졌다. 비스마르크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고 이후의 총리들은 아무 것도 하지 못 하고 사퇴를 반복할 뿐이었다. 그러나 1888년, 빌헬름 1세가 사망하며 프리드리히 왕태자가 프리드리히 3세로 즉위하였고 그는 이러한 프로이센을 개혁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영국,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통해 외교관계를 재정립하였고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프로이센에 도입하면서 프로이센 왕국을 더욱 진보적인 국가로 만들었다.

한편 7주 전쟁으로 제국의 해체 위기까지 갔었던 오스트리아 제국은 헝가리 귀족들과의 대타협으로 새롭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성립되었고,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카이저 자리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1882년, 이탈리아 민족주의자인 굴리엘모 오베르단에 의해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암살 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다. 결국 그의 아들인 루돌프 황태자가 새 카이저로 즉위하였다. 그는 친프랑스적 성향과 자유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었기에 프로이센을 이겨낸 프랑스 제국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개선하기 시작하였다. 루돌프 1세는 의회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였고, 슬라브인들과의 지속적인 타협을 시도하며 제국의 안정화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1880년대가 되며 프랑스의 정치는 다시 불안정해지기 시작했고, 공화주의자들은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혼란은 프랑스 사회를 극단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조르주 불랑제(Georges Boulanger) 장군의 사상이었다. 일명 불랑제주의(Boulangisme)라 불리는 그의 사상은 전쟁을 통해 상황을 극복하자고 하는 매우 극단적이고 군국주의적인 사상으로 훗날 1930~40년대에 유행한 파시즘의 원류가 되기도 하였다. 불랑제 장군은 1889년,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하며 정계는 더욱 더 혼란에 빠졌다. 뿐만 아니라, 문민통제의 실패와 군의 정치 개입과 외교 실패로 인한 국제적인 고립은 프랑스 사회를 더욱 압박하였다. 1894년에는 드레퓌스 사건으로 공화주의자들이 다시 본격적으로 정계에서 힘을 쓰기 시작했고, 1899년에는 파쇼다 사건으로 영국과의 대립 구조가 확실해졌다.

그렇게 20세기가 시작되고 유럽에서는 평화 속에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던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를 방문한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암살당하는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유럽은 7월 위기가 시작되는데 프랑스 제국은 이러한 외교적 위기 속에서 전쟁을 피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불랑제주의 정당인 애국자연맹과 그것을 이끄는 모리스 바레스(Maurice Barrès)는 그러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결국 7월 17일, 노엘 에두아르(Noël Édouard)가 이끄는 청년근위대와 함께 파리를 점거하고 의회를 강제해산하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황제였던 나폴레옹 4세까지 협박하며 총리 자리에 오른 바레스는 대전쟁을 준비하게 되는데...

세계관 인물

-모리스 바레스 (Maurice Barrès)

-나폴레옹 4세 (Napoleon IV)

-루돌프 1세 (Rudolf I)
  1. 라틴어로 '공허'를 뜻하며 삶의 덧없음과 결국은 죽는다는 의미를 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