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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L|우리의 찬란했던 시절과 마찬가지로 지금 이 순간에도 그대들은 변함없이 용기와 충성의 본보기가 되었다.<br/>그대들과 같은 용사들이 있으니 우리의 대의는 결코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br/>하지만 전쟁이 끝없이 이어지고, 내란으로 치닫는다면 그것은 프랑스에 '''커다란 불행'''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br/><br/>- 나폴레옹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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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center|'''''" 프랑스가 보불전쟁에서 승리하다! "'''''}}</b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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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제국 사이의 '''7주 전쟁(보오전쟁)'''은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이 승리하며 오스트리아 제국의 참패로 끝났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패전 소식은 프랑스 제국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는데 이는 독일의 통합을 저지하던 프랑스의 전통적인 외교 정책이 무너질 위기가 코 앞에 왔기 때문이다. 1867년, 당시 프랑스의 전쟁장관이었던 아돌프 닐(Adolphe Niel) 원수는 군사개혁의 일환으로 '''닐 법안'''을 제출하였다. 국민위병의 확장, 교리의 현대화 등이 담긴 닐 법안은 의회에서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타협으로 간신히 통과하며 프랑스는 대대적으인 군사 개혁을 시작하였다.
1866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제국 사이의 '''7주 전쟁(보오전쟁)'''은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이 승리하며 오스트리아 제국의 참패로 끝났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패전 소식은 프랑스 제국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는데 이는 독일의 통합을 저지하던 프랑스의 전통적인 외교 정책이 무너질 위기가 코 앞에 왔기 때문이다. 1867년, 당시 프랑스의 전쟁장관이었던 아돌프 닐(Adolphe Niel) 원수는 군사개혁의 일환으로 '''닐 법안'''을 제출하였다. 국민위병의 확장, 교리의 현대화 등이 담긴 닐 법안은 의회에서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타협으로 간신히 통과하며 프랑스는 대대적으인 군사 개혁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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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 수상이 패전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고 외무장관이었던 헤르만 폰 틸이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는 1871년 2월 26일부터 종전 조약에 대해 논의하였고, 최종적으로 5월 10일, '''스트라스부르 조약'''이 체결되며 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종식되었다.
프로이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 수상이 패전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고 외무장관이었던 헤르만 폰 틸이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는 1871년 2월 26일부터 종전 조약에 대해 논의하였고, 최종적으로 5월 10일, '''스트라스부르 조약'''이 체결되며 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종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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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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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27일 (월) 22:2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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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임라인 ]
개요


그랑파트리는 만약에 프랑스가 보불전쟁에서 승리했다면?이라는 상상에서 시작된 대체역사 세계관이다.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 제국이 결국 대전쟁으로 몰락하고, 유럽의 질서가 재건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언뜻 보면 프랑스를 찬양하는 세계관 같겠지만 사실은 바니타스[1]적인 세계관이다.

세계관 이름은 프랑스어 Grande Patrie에서 유래되었으며 해석하면 위대한 조국을 의미한다.

세계관 지도

세계관 역사

우리의 찬란했던 시절과 마찬가지로 지금 이 순간에도 그대들은 변함없이 용기와 충성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대들과 같은 용사들이 있으니 우리의 대의는 결코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없이 이어지고, 내란으로 치닫는다면 그것은 프랑스에 커다란 불행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 나폴레옹 1세
역사의 분기점


" 프랑스가 보불전쟁에서 승리하다! "


1866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제국 사이의 7주 전쟁(보오전쟁)은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이 승리하며 오스트리아 제국의 참패로 끝났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패전 소식은 프랑스 제국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는데 이는 독일의 통합을 저지하던 프랑스의 전통적인 외교 정책이 무너질 위기가 코 앞에 왔기 때문이다. 1867년, 당시 프랑스의 전쟁장관이었던 아돌프 닐(Adolphe Niel) 원수는 군사개혁의 일환으로 닐 법안을 제출하였다. 국민위병의 확장, 교리의 현대화 등이 담긴 닐 법안은 의회에서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타협으로 간신히 통과하며 프랑스는 대대적으인 군사 개혁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870년, 엠스 전보 사건으로 프랑스 제국이 프로이센에 선전포고하며 보불전쟁이 발발하였다.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쳤던 프로이센군은 알자스-로렌 국경을 넘어 파죽지세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스당 전투에서 나폴레옹 3세가 직접 이끄는 군과 격돌하였고, 그 과정에서 국민위병이 프로이센군을 극적으로 포위하는데 성공하며 프로이센군은 이 전투에서 괴멸하였다. 스당에서의 승리 이후, 프랑스군은 반격을 시작하였고 겨울이 되자 라인 강을 넘어 프로이센 영토로 진격하였다. 결국 1871년, 코블렌츠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왕태자(훗날 프리드리히 3세)가 포로가 되면서 프로이센군의 사기는 바닥이 났고 프로이센은 프랑스 제국에 항복하였다.

프로이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 수상이 패전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고 외무장관이었던 헤르만 폰 틸이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는 1871년 2월 26일부터 종전 조약에 대해 논의하였고, 최종적으로 5월 10일, 스트라스부르 조약이 체결되며 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종식되었다.


스토리


-공사 중-

세계관 인물

-모리스 바레스 (Maurice Barrès)

-나폴레옹 4세 (Napoleon IV)

-루돌프 1세 (Rudolf I)
  1. 라틴어로 '공허'를 뜻하며 삶의 덧없음과 결국은 죽는다는 의미를 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