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 쿠데타 (우리들의 제국): 두 판 사이의 차이

6번째 줄: 6번째 줄:


= 배경 =
= 배경 =
== 저우언라이의 사회주의 정책 ==
== 저우언라이의 사회주의 정책에 대한 염증==
저우는 자신이 추진할 사회주의 정책에 큰 반발이 있을 것을 알고 있었고 이에 국민당 중도파를 설득하여 어느정도 적정한 민생안정의 선에서 소극적인 사회주의 정책을 펼치기로 합의했다. 다만 쑨커등 일부 중도파들도 집단농장이나 성장 없는 분배정책에 대해서는 반대를 표하기는 했다.<br>
저우언라이는 유사시 공산당을 방어할 수 있도록 이른바 ‘명예 사업’을 내세운 숙군 작업을 실시해 중일전쟁때 활약한 원로 장성들을 제대시켜 국민당이나 공산당에 입당시켜 민간 정치로 나오게 만들거나 은퇴시키고 그자리를 젊은 좌파 장교로 채웠다. 또한 비밀리에 군을 장악하기 위한 좌파 장교들의 비밀모임 ‘적군회’를 결성했는데, 이들은 다른 장교들에게 공산주의 사상을 보급하는 소련의 정치장교 역할을 수행했다. 이 조직은 ‘명예 사업’으로 인해 장성들이 은퇴한 후에 결성되었고 군에 밝은 인사들 마저 축출당한 뒤였기에 국민당은 물론 일부 공산당 인사들도 알 수 없게 활동했다. <br>
 
그러나 일부 젊은 장교들은 물론 일반 지식인 계층과 시민들마저 계급투쟁, 노동쟁의, 사회주의 이론에 대해 염증을 느꼈고 하나 둘 적군회나 공산당의 활동을 비판하거나 외면했다. 또한 반적군회 장교들은 국민당 우파와 중도파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 국민당 우파의 입지 불안 ==
== 국민당 우파의 입지 불안 ==
국민당 좌파는 저우언라이의 정책과 그의 국공합작체제를 찬성하였고 그의 집권을 물심양면 도왔다. 중도파 또한 저우의 정책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쑨원의 유훈이 국공갈등의 소멸이었고, 또한 저우가 자신들 또한 등용할 것을 기대하며 그의 집권에 어느정도 찬성표를 던졌다. <br>
반면에 국민당 우파는 저우의 정책은 물론 그의 사상, 집권등을 모두 비판했으나 이로 인해 1950년 당대회에서 15인의 중앙위원중 단 2명만을 배출하며 몰락하고 말았다. 이에 위기를 느낀 후한민등 국민당 우파 세력은 외유를 떠나있던 장제스와 비밀리에 접촉했고 그에게 중국으로 돌아와 당권을 장악하도록 설득했다. <br>
게다가 상기한 군권장악 시도로 인해 중도파들 마저 저우언라이에게 의심을 품게되었고 국민당 우파의 주장에 어느정도 찬동했다.
=전개=
==저우언라이의 실각과 쑹자오런 대행 체제==
이러한 배경으로 1953년 1월 21일, 국민당 우파와 중도파는 저우언라이를 몰아내고 원로인 쑹자오런 대행 체제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저우언라이는 국민당 좌파를 이용해 다시 정권을 잡기 위해 노력했고 적군회와 친공산당 정치인, 국민당 좌파와 일부 중도파들을 설득해 자신이 다시 정권을 잡은 뒤 입법원을 해산시키고 다시 선거를 치룰 계획을 짰다. 그러나 이것이 저우의 헛된 바람이라는 것이 밝혀지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3월 쿠데타==
1953년 2월 장제스는 중국으로 돌아왔고 즉시 군인사와 우파 정치인들과 상의해 정권 장악 시도를 모의했다.

2019년 8월 4일 (일) 12:40 판

주의. 이 문서는 우리들의 제국 프로젝트 문서입니다.
주의. 문서를 동의없이 함부로 수정할 경우 반달 사용자로 지목되어 불이익을 수 있습니다.
수정할 것이 있으다면 문서 작성자의 동의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 문서는 공식 설정입니다.

이 문서는 공식 설정이므로 무단 수정은 반달 행위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단, 단순 오류 및 오타의 교정은 반달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이 문서는 현재 공사 중입니다.

이 문서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본문에 다소 난잡하거나 생략된 부분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개요

1952년 3월 장제스국민당 우파와 군부를 등에 업고 일으킨 군사 반란. 이로인해 저우언라이, 왕징웨이, 쑹칭링등 공산당국민당 좌파 유력 정치인들이 몰락했으며 장제스의 1인 독재체제가 출범하게 된다.

배경

저우언라이의 사회주의 정책에 대한 염증

저우는 자신이 추진할 사회주의 정책에 큰 반발이 있을 것을 알고 있었고 이에 국민당 중도파를 설득하여 어느정도 적정한 민생안정의 선에서 소극적인 사회주의 정책을 펼치기로 합의했다. 다만 쑨커등 일부 중도파들도 집단농장이나 성장 없는 분배정책에 대해서는 반대를 표하기는 했다.
저우언라이는 유사시 공산당을 방어할 수 있도록 이른바 ‘명예 사업’을 내세운 숙군 작업을 실시해 중일전쟁때 활약한 원로 장성들을 제대시켜 국민당이나 공산당에 입당시켜 민간 정치로 나오게 만들거나 은퇴시키고 그자리를 젊은 좌파 장교로 채웠다. 또한 비밀리에 군을 장악하기 위한 좌파 장교들의 비밀모임 ‘적군회’를 결성했는데, 이들은 다른 장교들에게 공산주의 사상을 보급하는 소련의 정치장교 역할을 수행했다. 이 조직은 ‘명예 사업’으로 인해 장성들이 은퇴한 후에 결성되었고 군에 밝은 인사들 마저 축출당한 뒤였기에 국민당은 물론 일부 공산당 인사들도 알 수 없게 활동했다.

그러나 일부 젊은 장교들은 물론 일반 지식인 계층과 시민들마저 계급투쟁, 노동쟁의, 사회주의 이론에 대해 염증을 느꼈고 하나 둘 적군회나 공산당의 활동을 비판하거나 외면했다. 또한 반적군회 장교들은 국민당 우파와 중도파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국민당 우파의 입지 불안

국민당 좌파는 저우언라이의 정책과 그의 국공합작체제를 찬성하였고 그의 집권을 물심양면 도왔다. 중도파 또한 저우의 정책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쑨원의 유훈이 국공갈등의 소멸이었고, 또한 저우가 자신들 또한 등용할 것을 기대하며 그의 집권에 어느정도 찬성표를 던졌다.
반면에 국민당 우파는 저우의 정책은 물론 그의 사상, 집권등을 모두 비판했으나 이로 인해 1950년 당대회에서 15인의 중앙위원중 단 2명만을 배출하며 몰락하고 말았다. 이에 위기를 느낀 후한민등 국민당 우파 세력은 외유를 떠나있던 장제스와 비밀리에 접촉했고 그에게 중국으로 돌아와 당권을 장악하도록 설득했다.
게다가 상기한 군권장악 시도로 인해 중도파들 마저 저우언라이에게 의심을 품게되었고 국민당 우파의 주장에 어느정도 찬동했다.

전개

저우언라이의 실각과 쑹자오런 대행 체제

이러한 배경으로 1953년 1월 21일, 국민당 우파와 중도파는 저우언라이를 몰아내고 원로인 쑹자오런 대행 체제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저우언라이는 국민당 좌파를 이용해 다시 정권을 잡기 위해 노력했고 적군회와 친공산당 정치인, 국민당 좌파와 일부 중도파들을 설득해 자신이 다시 정권을 잡은 뒤 입법원을 해산시키고 다시 선거를 치룰 계획을 짰다. 그러나 이것이 저우의 헛된 바람이라는 것이 밝혀지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3월 쿠데타

1953년 2월 장제스는 중국으로 돌아왔고 즉시 군인사와 우파 정치인들과 상의해 정권 장악 시도를 모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