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중 하나의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관리자. 문서를 고치려면 이메일 인증 절차가 필요합니다. 사용자 환경 설정에서 이메일 주소를 입력하고 이메일 주소 인증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대요의 군주}} '''대요 황제'''({{llang|kh|大遼皇帝 <small>모시르 키탄 홍디</small>}}, {{llang|ru|Император Катая}})는 [[대요|요나라]]의 [[군주]]로 [[요 황실]]의 대표이자 [[국가 원수]]이다. [[주권재민]]에 기하여 요국의 구심점이자 국민을 대표하는 역할을 맡는다. 군주의 호칭은 [[황제]](皇帝 <small>홍디</small>)로, [[옐뤼 바타그시르]]가 재위 중에 있다. [[요 열조]]가 유민들을 이끌고 [[쥬운 텡기스 아랄|동영도]](東瀛島)<ref>[[요어]]로 '주운텡기스 아랄'(Жуунтэнгис арал)</ref>에 정착해 나라를 세운 이후로 엄격한 [[전제군주정]]을 유지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오늘날까지 황제는 [[입헌군주정]] 체제 내에서도 정치·경제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ref>대표적으로 요 황제는 의회에서 통과한 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2016년, [[낙태죄]]를 폐지하는 법안을 거부했던 것이 대표적인 예시.</ref> == 역사 == [[동요]]를 건국한 [[야율유가]](耶律留哥)<ref>야율유가는 스스로 몽골에 복속되었으나 그의 동생 [[야율시불]](耶律厮不)은 [[대요수국]]을 세워 독자적인 왕조를 수립했다.</ref>의 손자였던 [[야율합리사]](耶律合利査)는 1282년, [[아이누족]]의 공격을 받은 [[니브흐족]]의 구원 요청에 따라 사할린으로 출정한 장수 [[타타에르다이]](塔塔兒帶), [[양울루다이]](楊兀魯帶) 아래에 거란계 병사를 통솔하는 지위를 맡았다. 사할린 최남단에 [[크릴론 곶]]까지 진격한 야율합리사는 [[거란인]]에 대한 차별적인 대우에 불만을 품던 병사, 유민들과 함께 배를 타고 이탈했으며 이윽고 [[소야 곶]]에서부터 홋카이도 북부 연안을 항해한 끝에 [[동영도]]에 정착하였다. 동영도에 도착한 야율합리사는 소와 양을 잡아 희생제를 거행한 뒤 섬 내에 소수 부족들을 규합해 나갔다. 이듬해에 그는 요 왕조의 재건을 천명해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탈타비흐 강]] 인근에 수도인 [[후츠테이주슬란]](хүчтэйжуслан)<ref>[[요어]]로 '강대한 야영지'란 뜻이며 오늘날에는 [[투브니스렐]](中京, Төвнийслэл)이라 부른다.</ref>을 건설했다. 야율합리사는 연호를 [[소평]](昭平 <small>토드 암가란</small>)이라 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정복 활동을 벌이며 왕조의 기반을 닦았다. 그의 뒤를 이은 황제들은 [[원나라]]의 침략에 대비해 여러 산성과 성채를 쌓았으며<ref>허나 [[원나라]]는 [[옷치긴 왕가]]의 [[나얀]](乃顔)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고 주기적으로 아무르 일대를 습격하던 [[아이누족]]의 공세를 격퇴하는데 급급했다.</ref> [[일본]]의 [[견왜사]](遣倭使)<ref>일본에서는 이를 '사은사'(謝恩使)라 하여 조공으로 받아들였다.</ref>를 보내 교역했다. 이들은 주로 [[모피]], [[매]], [[말]]과 같은 특산물을 수출했고 일본으로부터 [[쌀]], [[서적]], [[포목]] 등을 수입해 왔다. 이 과정에서 인적 교류 또한 활발해져 일본 출신 승려들이 방문했는데, 황제들은 [[불교]]를 왕권 강화 및 소수 민족의 문화를 거란식 문화<ref>사실상 [[요나라]] 건국 이후 형성된 한족 문화에 가까웠다.</ref>에 통합하는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하려 했다. 이 때문에 [[요 명종]] 시기에는 [[법초]](法超 <small>후올다바흐</small>)가 [[정토종]]을 개창하는 한편, [[첸헤르올 사원]](靑山寺), [[함갈라흐예르톤 대불]](保世大佛)을 포함한 여러 사찰이 건립되는 등 융성한 불교 문화를 이룩했다. 일본이 [[오닌의 난]]을 기점으로 [[센고쿠 시대]]에 돌입하자 [[요 무종]]은 군사를 이끌고 [[도호쿠]] 북부를 침략했다. 일본에서는 이를 [[덴쇼의 역]](天正の役)이라 하여 요나라 군사를 [[거란구]](契丹寇)라 불렀는데 요군은 오늘날의 [[이와테 현]]과 [[아오모리 현]] 일대를 주로 공략했다. 이 과정에서 [[하치노헤 마사요시]]<ref>八戸政栄, [[산노헤 난부씨]](三戸南部氏)의 가신이자 [[하치노헤씨]] 18대 당주였다. 네성 함락으로 포로로 사로잡혔으나, 몸값을 받고 풀려났으며 [[난부 노부나오]]를 도와 [[오다와라 정벌]]에서 활약했다.</ref>를 [[네성]](根城)에서 사로잡고 수천 필에 달하는 소와 말을 노획하기도 했으나 1590년, [[모리오카 번]]의 번주 [[난부 노부나오]]가 [[하치만타이 전투]](八幡平の戦い)에서 조총부대를 이끌고 요군을 격파하면서 결국 퇴각했다. 그 후 전국통일을 완수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명]]과 함께 [[일본의 대요 원정 계획|요 정벌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이를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무종의 뒤를 이은 [[요 평종]]은 [[에도 막부]]의 사절을 보내 화친을 청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에 응하면서 관계가 회복되었다. 이 시기에 일본에 머물던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 [[로마 가톨릭]]이 유입되었으며 [[바얄타이반 아랄]](樂安島)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상관이 세워져 서양과의 무역이 본격화되었다. 또한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등 외래 작물이 전래되면서 척박한 환경<ref>근대 이후 활발한 토지 개간 및 농업 기술의 발달로 오늘날에는 국내 [[식량자급률]]이 100% 이상을 웃돌고 있다.</ref>으로 인한 만성적인 식량 부족 문제를 해소했다. 이는 인구 증가로까지 이어져 18세기 말에는 수십만 명에 불과하던 인구가 100만 명을 넘기기도 했다. 19세기 중반, 유럽에서 일어난 [[크림전쟁]]은 [[태평양]] 일대까지 영향을 끼쳤으며 영불 연합군은 [[러시아 제국]] 극동에 위치한 요새,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를 공격코자 했다. 이 같은 시기에 [[요 세조]]는 서구 열강과의 대립 속에 중립을 선언하며 자국을 수호하기 위해 [[요영화친조약]]·[[요러화친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로인해 [[청나라|주변국이]] [[미일화친조약|불평등 조약]]에 몸살을 앓던 것과는 달리, 두 나라가 전시적 상황인 점을 이용했기에 비교적 온건한 형태로 개국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사절단을 파견해 구미의 신식 문물 시찰을 명했고 이를 바탕으로 한 일련의 사회 개혁을 추진했다. 최초의 대학인 [[텡게르 에흐렐 대학]](天緖大學)<ref>요 세조의 연호를 따서 지어졌으며, 1890년에는 교육 법령에 따라 [[투브둔드 황립대학]](中央皇立大學, 약칭 투브이흐)로 개칭되었다가 1948년에 국립대학으로 재편되었다.</ref>도 이때 설립되었다. 1868년, [[에도 막부]] 내 군인들이 [[홋카이도]]에 [[에조 공화국]]을 세웠고, 총재로 선출된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요나라로부터 지원을 얻고자 했다. 하지만 세조는 [[메이지 유신]]으로 성립된 천황의 조정을 일본 내 유일한 정권으로 인정했으며 이듬해에 [[요일수호조약]]을 맺어 그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홍인제]](弘仁帝)<ref>[[요어]]로는 '오고모르 부얀타이 홍디'(Огомор буянтай Хонг-ди)이며 [[요 세조]]가 [[일세일원제]]가 채택함에따라 이후 재위한 황제들은 연호로 부르는 경우가 잦다.</ref> == 각주 == {{각주}}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ISO 639 이름 (원본 보기) 틀:Lang (원본 보기) 틀:Llang (원본 보기) 틀:각주 (원본 보기) 틀:대요의 군주 (원본 보기) 틀:언어 이름 (원본 보기) 틀:일반 기타 (원본 보기) 모듈:Langname (원본 보기) 모듈:Langname/data (원본 보기) 대요의 군주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