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국 (近洋):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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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어===
===표어===


공식적인 대한국의 표어인 오족협화적 광명천지(五族協和的 光明天地)는 1931년, 대한제국이 일본과 함께 무력으로 중화민국을 침공하여 만주를 점령하고 이를 영토의 일부로 편입하는 만주사변이 발발한 뒤 채택되었다. 종래의 표어는 광명천지였으나, 앞의 오족협화를 덧붙였는데, 이는 당시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의 대동아공영권을 상징하는 표어였다. 동아의 오족이 화합한다는 의미에서의 표어로 채택되었으나, 일방적인 점령과 만주에 대한 통치는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공식적인 대한국의 표어인 오족협화적 광명천지(五族協和的 光明天地)는 1931년, 대한제국이 일본과 함께 무력으로 중화민국을 침공하여 만주를 점령하고 이를 영토의 일부로 편입하는 만주사변이 발발한 뒤 채택되었다. 종래의 표어는 광명천지였으나, 앞의 오족협화를 덧붙였는데, 이는 당시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의 대동아공영권을 상징하는 표어였다. 동아의 오족이 화합한다는 의미에서의 표어로 채택되었으나, 일방적인 점령과 13년의 만주에 대한 통치는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전후 오족협화적 광명천지라는 표어는 일반 광명천지로 대체되거나 홍익인간으로 대체될 예정이었다. 국내외의 요구와 전후의 성의를 보일 것에 대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대한국의 정치권에선 결정을 미루었고 연합군 사령부 또한 별달리 관심을 두지 않은 탓에 국권회복 이후에도 그대로 남았으나, 1960년대부터 집요한 표어에 대한 교체를 요구받았고 그리하여 2024년 3월부터는 공식적으로 오족협화적 광명천지라는 기존의 표어가 광명천지로 변경될 예정이다.
전후 오족협화적 광명천지라는 표어는 일반 광명천지로 대체되거나 홍익인간으로 대체될 예정이었다. 국내외의 요구와 전후의 성의를 보일 것에 대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대한국의 정치권에선 결정을 미루었고 연합군 사령부 또한 별달리 관심을 두지 않은 탓에 국권회복 이후에도 그대로 남았으나, 1960년대부터 집요한 표어에 대한 교체를 요구받았고 그리하여 2024년 3월부터는 공식적으로 오족협화적 광명천지라는 기존의 표어가 광명천지로 변경될 예정이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에는 다수의 만주와 월남 출신 인구가 살고 있기 때문에 문화적 다양성을 상징한다는 나름의 명분으로서 여전히 오족협화라는 캐치프라이스가 대한국 국내에서는 매우 자주 사용되곤 한다. 이외에 조금 더 급진적인 진영에서는 광명천지 자체가 이전 제국 시대를 상징한다며 아예 홍익인간이라는 중립적인 명칭으로 변경할 것을 주문하기도 하지만 현재로서는 광명천지만 존치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에는 다수의 만주와 월남 출신 인구가 살고 있기 때문에 문화적 다양성을 상징한다는 나름의 명분으로서 여전히 오족협화라는 캐치프라이스가 대한국 국내에서는 매우 자주 사용되곤 한다. 이외에 조금 더 급진적인 진영에서는 광명천지 자체가 이전 제국 시대를 상징한다며 아예 홍익인간이라는 중립적인 명칭으로 변경할 것을 주문하기도 하지만 현재로서는 광명천지만 존치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2023년 11월 4일 (토) 18:18 판

대한국
大韓國
국기 국장
오족협화적 광명천지
五族協和的 光明天地
상징
국가 애국가
국조
참매
국수
무궁화
역사
[ 펼치기 · 접기 ]
  • 경오사화 1870년 4월 10일
  • 제국 선포 1877년 8월 25일
  • 대한제국 헌법 공포 1890년 10월 12일
  • 전쟁 1894년 7월 25일
  • 극동전쟁 1904년 2월 8일
  • 제1차 세계대전 1914년 8월 31일
  • 독립당 전권 위임 선포 1931년 11월 17일
  • 만주사변 1931년 9월 18일
  • 지나사변 1937년 11월 20일
  • 대미선전포고 1942년 1월 20일
  • 연합국의 점령 1945년 10월 15일
  • 미군정 수립 1945년 11월 9일
  • 대한국 헌법 제정 1948년 1월 4일
  • 대한국 제1공화국 출범 1948년 7월 17일
  • 국권회복 1952년 4월 28일
  • 한국 내전 1955년 5월 11일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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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경성
최대 도시
경성
면적
100,443.6 km2
접경국
중국, 러시아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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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총 인구
97,561,000명
밀도
349.06명/㎢명/km2
인종
한민족 89.76%, 만주족 7.39%, 일본인 1.18%, 베트남인 0.64%, 태국인 0.56%, 화교 0.2%,
출산율
1.9명
기대 수명
83.6세
공용어
한국어, 한국 수어
공용 문자
한글, 한글 점자, 한자(보조)
종교
국교
없음 (정교분리)
분포
대종교 34.2%, 불교 3.9%, 기타 5%, 무종교 56.9%
군대
대한국 국방군
하위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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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역자치단체
1직할시, 13광역시, 13도
특별자치도
2특별자치도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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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민주집중제, 단일국가, 대통령제, 양원제, 다당제, 문민통제, 대륙법계
민주주의 지수
167개국 중 24위 (완전한 민주주의)
정부
요인
대통령
황교안
부통령
김종인
여당
민주자유당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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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GDP
(PPP)
전체 GDP
$$2.924조
1인당 GDP
$56,708
GDP
(명목)
전체 GDP
$1.709조
1인당 GDP
$33,147
무역
수입
$6,150.5억
수출
$6,445.4억
예산
세입
548.8조 환
세출
604.0조 환
외환 보유고
$4,209.8억
신용 등급
Fitch AA-
화폐
공식 화폐
대한국 환
ISO 4217
KRH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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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연호
단군기원
시간대
UTC+9
도량형
척관법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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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가입
1959년 2월 17일
ccTLD
.kr
국가 코드
410, KOR, KR
전화 코드
+82

개요

대한국(공식적으로 大韓國, 또는 Korean)은 동아시아에 위치하고 있다. 한반도 전역을 구성하고 있으며 중국,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국경의 서쪽은 압록강과 황해로 이루워지며, 나머지 동쪽은 일본해로 이어진다. 한국은 한반도 전체와 인접한 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남만주의 안동, 길림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대한국의 전체 인구는 9천만여명으로 그 중 반에 해당하는 인구가 경성에 거주하고 있다. 다른 주요 도시로는 평양, 인천, 개성, 부산 등이 있다.

대한국은 자유민주주의 하의 대통령 중심의 양원제 오권분립 국가로서의 특징이 존재한다. 이는 근대화 이후의 구태적 정치 체제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이웃한 중화민국의 영향을 받아 아시아에서는 대만과 함께 오권분립 체제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1877년 8월 25일 선포된 대한제국이 1945년 11월 9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반도 전체를 점령한 미군에 의해 미국령 행정부가 설치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대한제국의 왕정이 폐지되었으며, 새로운 공화정 설립을 위한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후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일본국과 함께 만주와 연해주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것을 조건으로 국권이 회복되었다. 국권회복 이후 한미안전보장조약이 발효되었다.

하지만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기 전, 후로 중공 및 소련의 지원을 받은 무장 조직에 의해 잦은 반란, 봉기가 1947년부터 지속되었다. 패전 직후의 혼란기를 틈타 1951년 9월 민족주의적 왕정복고 세력에서도 반란을 준비했다. 이유립은 전쟁 이후 폐위된 군주를 옹립하기 위한 쿠데타 시도가 발발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안보 상황은 계속해서 악화 되었고 1955년부터 한국 내전(또는 한국 분쟁)이 발발한다.

이러한 혼란 정국을 주도한 것은 공산주의자 박헌영으로 이전 대한제국 시기 독립당의 비밀경찰대와 준군사조직 출신들을 포섭하여 당시 국내 좌익 정당을 통합한 로동당 등의 세력을 구축하여 한국 내에서 다수의 반란과 폭동을 일으켰고, 위폐를 발행하거나 사회 엘리트층에 대한 납치 공작을 벌여 혼란을 가속화 하였다. 이러한 폭력적인 정치 갈등이 표면화 되어 직접적인 군사 분쟁인 한국 내전으로 확전되었다.

1955년 5월부터 시작되어 1956년 1월 9일에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내전 이후 대한국의 이승만 행정부는 전국적인 정치 숙청을 통하여 내전에 연루된 세력 대부분과 그 후신 세력들을 대거 일소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행정부는 그 뒤로도 위태로운 모습이 이어졌다. 1960년 4월에는 이승만 행정부가 연루된 부통령 부정선거에 대한 스캔들로 전국적인 시위가 이어졌으나 내무부장관 홍진기의 군을 동원한 강경 진압으로 사태는 일시적으로 진정되었다. 이듬해 5월, 이전 대한제국군 장교였던 박정희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이 또한 진압되었다.

1952년의 1차 개헌 헌법에 따라 대한국은 종래의 국민대회를 폐지한 뒤 양원제 입법원인 국회와 사법원, 5년의 임기와 한번의 연임이 가능한 대통령 중심의 행정원과 감찰원, 고시원을 두어 오권분립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대한국은 명목 GDP 기준으로 세계 14위 경제 규모를 갖춘 아시아 내의 지역 강국이다. 대한국은 2차 대전 이후 자체적인 군대의 보유가 금지되었지만 가장 강력한 군대 중 하나로 평가되는, 한국 내전 이후 창군된 국방군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헌법상에서 전쟁 선포 및 군사 활동에 대한 일체 권리를 포기했다.


상징

국호

대한국의 이전 국호는 대한제국(Empire of Dai Han)이었으나 전후의 연합군 군정 치하에서 1948년 1월 4일 제정된 대한국 헌법에서 왕정이 폐지됨과 동시에 공식적인 명칭을 대한국(Korea)으로 변경했다. 그 이전에는 조선(Joseon)이라는 국호를 사용했다. 현 명칭인 Korea는, 고대 왕국인 이름인 고구려, 또는 조선 이전의 왕국인 고려로부터 기원하였다. 고려에 방문하는 아랍과 페르시아 상인들은 그 이름을 "Korea"라고 발음했다. 16세기 동아시아와 교류하던 포르투갈에 의해 Corea 또는 Korea로 호칭되기 시작했다.

14세기 고려가 멸망하고 지역의 명칭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변하였지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1897년 조선왕조는 국호를 조선 에서 대한제국(Empire of Dai Han) 으로 바꾸었다. 대한이라는 이름은 과거 한반도의 3개 고왕국의 의미한다. 그러나 이후에도 조선이라는 명칭은 지역과 인종, 문화 등을 호칭하기 위해 동아시아 전반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1945년 10월, 대한제국이 항복한 후 오늘날에도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를 배제하기 위한 의도적인 국명의 변화로 1948년에 "대한국"을 새로운 국가의 공식적인 명칭으로 채택하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추축국으로서의 이미지를 최대한 지우고자 하는 한국에서 Korea가 아닌 Dai Han으로 되돌리자는 주장 또한 극소수나마 존재하나 정치권과 일반 민중에게 모두 환영받지 못하는 소수 주장에 그친다.

일부 한국인들은 20세기 초반 무렵부터 국호가 "Korea"가 된 것이 중국이 의도적으로 한국을 동급이 아닌 제후국으로 취급하기 위해 알파벳 순서에서 의도적으로 한국을 밀어내는 차원에서 "Corea" 명칭을 못쓰게 막고 "Korea"를 국제적인 표준으로 세우기 위해 공작을 벌였다는 음모론이 존재한다. 이 탓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영문명이 모두 "Corea"로 바뀌기도 했다.


국기

1882년~1945년
1945년~1948년
1948년~현재

현 대한국 국기는 이전 대한제국과 전후의 연합군 점령 시대에 쓰이던 태극기로부터 태극 문양과 사괘의 배치를 일부 변형한 도안을 사용하고 있다. 처음 태극기가 사용된 것은 1882년 무렵으로 첫 개항으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로 1882년 이전까지는 국기에 대한 필요성을 적게 인식하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괘와 태극 도안을 이용한 단순한 상징기만을 사용했다.

처음 제정된 국기는 1882년부터 1945년 패전 까지 사용되었다. 패전 직후 연합군, 특히 미군에 의해 통치되는 한국에서는 모든 태극 문양의 사용이 금지되었다. 사회 곳곳의 다양한 태극 문양들은 미군정에 의해 교체되었다. 다만 태극 문양의 방향을 바꾼 임시 태극기가 전후 점령기간 동안 국기를 대신하기 위한 목적으로서 임의적인 국기로 사용되었다. 이 시기 임시적으로 사용된 국기이기 때문에 대한국 내에서는 연합군 점령 하 조선 시기에 대한 역사적인 상기 목적이 아니라면 현재엔 잘 사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태극 문양에 대한 금기시하는 분위기는 1948년 맥아더 사령관이 대한국 헌법 제정과 동시에 헌법에서 명시된 국기인 오늘날의 태극기에 대한 사용을 허락하면서 점차 풀리기 시작했다. 오늘날 제국 시대 태극기는 전후 국권회복 이후 사용이 불법화 되지는 않았음에도 여전히 사회적으로 터부시 되는데, 이는 극우적 진영의 폭력 집회에 자주 동원되기 때문에 이미지가 상당히 좋지 못해 특별한 이유 없이는 잘 사용되지 않는 것으로, 많은 경우 제국 시대의 태극기는 아직까지도 다소 금기시 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국장

표어

공식적인 대한국의 표어인 오족협화적 광명천지(五族協和的 光明天地)는 1931년, 대한제국이 일본과 함께 무력으로 중화민국을 침공하여 만주를 점령하고 이를 영토의 일부로 편입하는 만주사변이 발발한 뒤 채택되었다. 종래의 표어는 광명천지였으나, 앞의 오족협화를 덧붙였는데, 이는 당시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의 대동아공영권을 상징하는 표어였다. 동아의 오족이 화합한다는 의미에서의 표어로 채택되었으나, 일방적인 점령과 13년의 만주에 대한 통치는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전후 오족협화적 광명천지라는 표어는 일반 광명천지로 대체되거나 홍익인간으로 대체될 예정이었다. 국내외의 요구와 전후의 성의를 보일 것에 대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대한국의 정치권에선 결정을 미루었고 연합군 사령부 또한 별달리 관심을 두지 않은 탓에 국권회복 이후에도 그대로 남았으나, 1960년대부터 집요한 표어에 대한 교체를 요구받았고 그리하여 2024년 3월부터는 공식적으로 오족협화적 광명천지라는 기존의 표어가 광명천지로 변경될 예정이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에는 다수의 만주와 월남 출신 인구가 살고 있기 때문에 문화적 다양성을 상징한다는 나름의 명분으로서 여전히 오족협화라는 캐치프라이스가 대한국 국내에서는 매우 자주 사용되곤 한다. 이외에 조금 더 급진적인 진영에서는 광명천지 자체가 이전 제국 시대를 상징한다며 아예 홍익인간이라는 중립적인 명칭으로 변경할 것을 주문하기도 하지만 현재로서는 광명천지만 존치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