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국 (近洋):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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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많은 만주인들은 대전 말기, 소련의 침공이 시작되자 많은 경우 실향민이 되었다. 이처럼 만주에서 조선으로 도피해오는 피난민과 실향민들은 한동안 자유당 행정부의 주요 지지층이 되었고, 만주에서 남하해오는 실향민 중에는 한족의 보복이 두려워 조선으로라도 도피하려는 만주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전후 점령 기간 동안 중국으로 송환될 예정이지만 중화민국이 일찍히 대만으로 천도하면서 국권회복 후 대한국은 이들 만주인의 송환 요구에 대해 송환할 국가의 주체가 모호하다는 명분으로 그대로 국내에 잔류, 정착시켰다.  
수 많은 만주인들은 대전 말기, 소련의 침공이 시작되자 많은 경우 실향민이 되었다. 이처럼 만주에서 조선으로 도피해오는 피난민과 실향민들은 한동안 자유당 행정부의 주요 지지층이 되었고, 만주에서 남하해오는 실향민 중에는 한족의 보복이 두려워 조선으로라도 도피하려는 만주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전후 점령 기간 동안 중국으로 송환될 예정이지만 중화민국이 일찍히 대만으로 천도하면서 국권회복 후 대한국은 이들 만주인의 송환 요구에 대해 송환할 국가의 주체가 모호하다는 명분으로 그대로 국내에 잔류, 정착시켰다.  


물론 모두가 한반도에 남은 것은 아니었다. 은여경을 비롯해 한반도로 망명해왔던 친한파들은 전쟁이 끝난 뒤 곧바로, 또는 약 1년의 시간 동안 한국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대개 중국으로 돌아가길 희망했다. 대한국은 이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1946년 대부분의 전쟁시기 한반도에 협력했던 중국인과 러시아인들을 중공과 소련으로 송환시켰다.
물론 모두가 한반도에 남은 것은 아니었다. 은여경을 비롯해 한반도로 망명해왔던 친한파 중국인들은 전쟁이 끝난 뒤 곧바로, 또는 약 1년의 시간 동안 한국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대개 중국으로 돌아가길 희망했다. 대한국은 이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1946년 대부분의 전쟁시기 한반도에 협력했던 중국인과 러시아인들을 중공과 소련으로 송환시켰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만주인은 한반도에 정착했고, 그 인구는 대한국 전 인구의 7%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다만 전후에도 지속적으로 중공을 탈출하여 대한국으로 오는 많은 만주인들이 있어 인구 자체는 오늘날에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반면, 대한국 인구 자체는 20세기 후반부터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이는 20세기 말의 경제 불황과 식량 부족으로 인한 기근 등을 겪은 뒤의 후유증이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만주인은 한반도에 정착했고, 그 인구는 대한국 전 인구의 7%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다만 전후에도 지속적으로 중공을 탈출하여 대한국으로 오는 많은 만주인들이 있어 인구 자체는 오늘날에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반면, 대한국 인구 자체는 20세기 후반부터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이는 20세기 말의 경제 불황과 식량 부족으로 인한 기근 등을 겪은 뒤의 후유증이었다.

2023년 11월 13일 (월) 19:49 판

대한국
大韓國
국기 국장
오족협화적 광명천지
五族協和的 光明天地
상징
국가 애국가
국조
참매
국수
무궁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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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오사화 1870년 4월 10일
  • 제국 선포 1877년 8월 25일
  • 대한제국 헌법 공포 1890년 10월 12일
  • 전쟁 1894년 7월 25일
  • 극동전쟁 1904년 2월 8일
  • 제1차 세계대전 1914년 8월 31일
  • 독립당 전권 위임 선포 1931년 11월 17일
  • 만주사변 1931년 9월 18일
  • 지나사변 1937년 11월 20일
  • 대미선전포고 1942년 1월 20일
  • 연합국의 점령 1945년 10월 15일
  • 미군정 수립 1945년 11월 9일
  • 대한국 헌법 제정 1948년 1월 4일
  • 대한국 제1공화국 출범 1948년 7월 17일
  • 국권회복 1952년 4월 28일
  • 한국 내전 1955년 5월 11일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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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경성
최대 도시
경성
면적
100,443.6 km2
접경국
중국, 러시아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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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총 인구
97,561,000명
밀도
349.06명/km2
인종
한민족 89.76%, 만주족 7.39%, 일본인 1.18%, 남인 0.64%, 태국인 0.56%, 화교 0.2%,
출산율
1.9명
기대 수명
83.6세
공용어
한국어, 한국 수어
공용 문자
한글, 한글 점자, 한자(보조)
종교
국교
없음 (정교분리)
분포
대종교 34.2%, 불교 3.9%, 기타 5%, 무종교 56.9%
군대
대한국 국방군
하위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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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역자치단체
1직할시, 13광역시, 13도
특별자치도
2특별자치도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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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민주집중제, 단일국가, 대통령제, 양원제, 다당제, 문민통제, 대륙법계
민주주의 지수
167개국 중 24위 (완전한 민주주의)
정부
요인
대통령
황교안
부통령
김종인
여당
민주자유당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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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GDP
(PPP)
전체 GDP
$$2.924조
1인당 GDP
$56,708
GDP
(명목)
전체 GDP
$1.709조
1인당 GDP
$33,147
무역
수입
$6,150.5억
수출
$6,445.4억
예산
세입
548.8조 환
세출
604.0조 환
외환 보유고
$4,209.8억
신용 등급
Fitch AA-
화폐
공식 화폐
대한국 환
ISO 4217
KRH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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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연호
단군기원
시간대
UTC+9
도량형
척관법, IS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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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가입
1959년 2월 17일
ccTLD
.kr
국가 코드
410, KOR, KR
전화 코드
+82

개요

대한국(공식적으로 大韓國, 또는 Korean)은 동아시아에 위치하고 있다. 한반도 전역을 구성하고 있으며 중국,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국경의 서쪽은 압록강과 황해로 이루워지며, 나머지 동쪽은 일본해로 이어진다. 한국은 한반도 전체와 인접한 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남만주의 안동, 길림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대한국의 전체 인구는 9천만여명으로 그 중 절반에 해당하는 인구가 경성에 거주하고 있다. 다른 주요 도시로는 평양, 인천, 개성, 부산 등이 있다.

대한국은 자유민주주의 하의 대통령 중심의 양원제 오권분립 국가로서의 특징이 존재한다. 이는 근대화 이후의 구태적 정치 체제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이웃한 중화민국의 영향을 받아 아시아에서는 대만과 함께 오권분립 체제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1877년 8월 25일 선포된 대한제국이 1945년 11월 9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반도 전체를 점령한 미군에 의해 미국령 행정부가 설치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대한제국의 왕정이 폐지되었으며, 새로운 공화정 설립을 위한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후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일본국과 함께 만주와 연해주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것을 조건으로 국권이 회복되었다. 국권회복 이후 한미안전보장조약이 발효되었다.

하지만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기 전, 후로 중공 및 소련의 지원을 받은 무장 조직에 의해 잦은 반란, 봉기가 1947년부터 지속되었다. 패전 직후의 혼란기를 틈타 1951년 9월 민족주의적 왕정복고 세력에서도 반란을 준비했다. 이유립은 전쟁 이후 폐위된 군주를 옹립하기 위한 쿠데타 시도가 발발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안보 상황은 계속해서 악화 되었고 1955년부터 한국 내전(또는 한국 분쟁)이 발발한다.

이러한 혼란 정국을 주도한 것은 공산주의자 박헌영으로 이전 대한제국 시기 독립당의 비밀경찰대와 준군사조직 출신들을 포섭하여 당시 국내 좌익 정당을 통합한 로동당 등의 세력을 구축하여 한국 내에서 다수의 반란과 폭동을 일으켰고, 위폐를 발행하거나 사회 엘리트층에 대한 납치 공작을 벌여 혼란을 가속화 하였다. 이러한 폭력적인 정치 갈등이 표면화 되어 직접적인 군사 분쟁인 한국 내전으로 확전되었다.

1955년 5월부터 시작되어 1956년 1월 9일에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내전 이후 대한국의 이승만 행정부는 전국적인 정치 숙청을 통하여 내전에 연루된 세력 대부분과 그 후신 세력들을 대거 일소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행정부는 그 뒤로도 위태로운 모습이 이어졌다. 1960년 4월에는 이승만 행정부가 연루된 부통령 부정선거에 대한 스캔들로 전국적인 시위가 이어졌으나 내무부장관 홍진기의 군을 동원한 강경 진압으로 사태는 일시적으로 진정되었다. 이듬해 5월, 이전 대한제국군 장교였던 박정희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이 또한 진압되었다.

1952년의 1차 개헌 헌법에 따라 대한국은 종래의 국민대회를 폐지한 뒤 양원제 입법원인 국회와 사법원, 5년의 임기와 한번의 연임이 가능한 대통령 중심의 행정원과 감찰원, 고시원을 두어 오권분립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대한국은 명목 GDP 기준으로 세계 14위 경제 규모를 갖춘 아시아 내의 지역 강국이다. 대한국은 2차 대전 이후 자체적인 군대의 보유가 금지되었지만 가장 강력한 군대 중 하나로 평가되는, 한국 내전 이후 창군된 국방군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헌법상에서 전쟁 선포 및 군사 활동에 대한 일체 권리를 포기했다.


상징

국호

대한국의 이전 국호는 대한제국(Empire of Dai Han)이었으나 전후의 연합군 군정 치하에서 1948년 1월 4일 제정된 대한국 헌법에서 왕정이 폐지됨과 동시에 공식적인 명칭을 대한국(Korea)으로 변경했다. 그 이전에는 조선(Joseon)이라는 국호를 사용했다. 현 명칭인 Korea는, 고대 왕국인 이름인 고구려, 또는 조선 이전의 왕국인 고려로부터 기원하였다. 고려에 방문하는 아랍과 페르시아 상인들은 그 이름을 "Korea"라고 발음했다. 16세기 동아시아와 교류하던 포르투갈에 의해 Corea 또는 Korea로 호칭되기 시작했다.

14세기 고려가 멸망하고 지역의 명칭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변하였지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1897년 조선왕조는 국호를 조선 에서 대한제국(Empire of Dai Han) 으로 바꾸었다. 대한이라는 이름은 과거 한반도의 3개 고왕국의 의미한다. 그러나 이후에도 조선이라는 명칭은 지역과 인종, 문화 등을 호칭하기 위해 동아시아 전반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1945년 10월, 대한제국이 항복한 후 오늘날에도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를 배제하기 위한 의도적인 국명의 변화로 1948년에 "대한국"을 새로운 국가의 공식적인 명칭으로 채택하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추축국으로서의 이미지를 최대한 지우고자 하는 한국에서 Korea가 아닌 Dai Han으로 되돌리자는 주장 또한 극소수나마 존재하나 정치권과 일반 민중에게 모두 환영받지 못하는 소수 주장에 그친다.

일부 한국인들은 20세기 초반 무렵부터 국호가 "Korea"가 된 것이 중국이 의도적으로 한국을 동급이 아닌 제후국으로 취급하기 위해 알파벳 순서에서 의도적으로 한국을 밀어내는 차원에서 "Corea" 명칭을 못쓰게 막고 "Korea"를 국제적인 표준으로 세우기 위해 공작을 벌였다는 음모론이 존재한다. 이 탓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영문명이 모두 "Corea"로 바뀌기도 했다.


국기

1882년~1945년 1945년~1948년 1948년~현재

현 대한국 국기는 이전 대한제국과 전후의 연합군 점령 시대에 쓰이던 태극기로부터 태극 문양과 사괘의 배치를 일부 변형한 도안을 사용하고 있다. 처음 태극기가 사용된 것은 1882년 무렵으로 첫 개항으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로 1882년 이전까지는 국기에 대한 필요성을 적게 인식하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괘와 태극 도안을 이용한 단순한 상징기만을 사용했다.

현 대한국 국기는 이전 대한제국과 전후의 연합군 점령 시대에 쓰이던 태극기로부터 태극 문양과 사괘의 배치를 일부 변형한 도안을 사용하고 있다. 처음 태극기가 사용된 것은 1882년 무렵으로 첫 개항으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로 1882년 이전까지는 국기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괘와 태극 도안을 이용한 단순한 상징기만을 사용했고 그런 이유로 정확히 국기를 정하기 전 까지는 같은 태극기임에도 상황에 따라 여러 제각각으로 전혀 표준화 되지 못했다.

처음 제정된 국기는 1882년부터 1945년 패전 까지 사용되었다. 패전 직후 연합군, 특히 미군에 의해 통치되는 한국에서는 모든 태극 문양의 사용이 금지되었다. 사회 곳곳의 다양한 태극 문양들은 미군정에 의해 교체되었다. 다만 태극 문양의 방향을 바꾼 임시 태극기가 전후 점령기간 동안 국기를 대신하기 위한 목적으로서 임의적인 국기로 사용되었다. 이 시기 임시적으로 사용된 국기이기 때문에 대한국 내에서는 연합군 점령 하 조선 시기에 대한 역사적인 상기 목적이 아니라면 현재엔 잘 사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태극 문양에 대한 금기시하는 분위기는 1948년 맥아더 사령관이 대한국 헌법 제정과 동시에 헌법에서 명시된 국기인 오늘날의 태극기에 대한 사용을 허락하면서 점차 풀리기 시작했다. 오늘날 제국 시대 태극기는 전후 국권회복 이후 사용이 불법화 되지는 않았음에도 여전히 사회적으로 터부시 되는데, 이는 극우적 진영의 폭력 집회에 자주 동원되기 때문에 이미지가 상당히 좋지 못해 특별한 이유 없이는 잘 사용되지 않는 것으로, 많은 경우 제국 시대의 태극기는 아직까지도 다소 금기시 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국장

대한국의 국장은 대한제국 시기인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표준화 되었다. 이전까지는 황실을 상징하는 다양한 이화 문장을 사용했으나 국제적인 통용을 위해 겹꽃잎 이화문으로 통일하여 사용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겹꽃잎 이화문은 계속해서 사용됬지만 전후 연합군에 의한 통치시기 동안 제정된 대한국 제1헌법에 따라 국장 또한 현재의 것으로 변경되었다.

겹꽃잎 이화문 또한 국기인 태극기와 같이 전후 연합군 점령 시기에 검열되면서 모든 전 분야에 있어 항상 왕실의 흔적으로 새겨져 있던 겹꽃잎 이화문을 비롯한 다양한 변형 이화문들도 연합군 점령기 동안 대부분 지워졌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대부분의 이화문은 종류 불문 찾아보기가 힘들며, 이전 대전기의 국장으로서 이미지도 좋지 않아 살아남은 이화문도 전후의 탈제국주의 기조에 따라 완전히 사라졌다.

이를 대체한 1948년 대한국 헌법과 함께 탄생한 현재의 대한국 국장은 국기를 전반적으로 단순화하여 태극을 사괘가 둘러싼 형태로 변형되었다. 예의 태극기에서 알 수 있듯, 이전 황실 문장은 현대에는 대체로 그 목적이 불순한 폭력집회에서 자주 사용되기 때문에 제국시대의 태극기와 함께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사용이 어느정도 터부시 되고 있다.


1919년~1945년 1948년~현재

표어

공식적인 대한국의 표어인 오족협화적 광명천지(五族協和的 光明天地)는 1931년, 대한제국이 일본과 함께 무력으로 중화민국을 침공하여 만주를 점령하고 이를 영토의 일부로 편입하는 만주사변이 발발한 뒤 채택되었다. 종래의 표어는 광명천지였으나, 앞의 오족협화를 덧붙였는데, 이는 당시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의 대동아공영권을 상징하는 표어였다. 동아의 오족이 화합한다는 의미에서의 표어로 채택되었으나, 일방적인 점령과 13년의 만주에 대한 통치는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전후 오족협화적 광명천지라는 표어는 일반 광명천지로 대체되거나 홍익인간으로 대체될 예정이었다. 국내외의 요구와 전후의 성의를 보일 것에 대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대한국의 정치권에선 결정을 미루었고 연합군 사령부 또한 별달리 관심을 두지 않은 탓에 국권회복 이후에도 그대로 남았으나, 1960년대부터 집요한 표어에 대한 교체를 요구받았고 그리하여 2024년 3월부터는 공식적으로 오족협화적 광명천지라는 기존의 표어가 광명천지로 변경될 예정이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에는 다수의 만주와 월남계 인구가 살고 있기 때문에 문화적 다양성을 상징한다는 나름의 명분으로서 여전히 오족협화라는 표현은 대한국 국내에서는 매우 자주 사용되곤 한다. 전후의 정치권에서는 탈제국적 기조에 따라서 광명천지 자체가 이전 제국 시대에 대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아예 홍익인간이라는 기존의 제국 시대의 색채를 완전히 거세하는 표어로 새로 교체하자는 입장이 있어 이 또한 고려되었으나 당대에는 지나친 패배주의적 역사관이란 이유로 기각되었다.



인문환경

인구

2023년 기준으로 대한국의 인구 총합은 97,561,000 명이다. 대한국 인구의 주 구성원은 한국어를 사용하는 동질적인 고립 민족 집단인 한국인이 절대다수로 이외에 대한국 내의 가장 대표적인 소수민족인 만주인의 경우, 20세기 초반부터 대한국으로 유입되기 시작하여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700만명이 넘는 만주인이 거주하는 관북 및 관서, 간도 등의 지역에서 특히 눈에 띄게 증가해왔다.

몰락작전에 참여한 미, 영은 한반도 전역을 점령하였고, 소련은 13년간 조선이 지배했던 만주 지역을 점령하였다. 중화민국이 내전 상태에 돌입하며 상황은 다시 대한국에게 호재로 돌아왔다. 장제스의 중화민국이 남만주의 조선 지역을 만주에서 완전히 분리시키길 원했으나 이는 전후 재판 과정에서 중화민국이 순식간에 공산군에게 패배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며 실패했다. 그리하여 간도와 안동, 길림, 간도 등을 패전을 이유로 중국, 정확히는 중공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수 많은 만주인들은 대전 말기, 소련의 침공이 시작되자 많은 경우 실향민이 되었다. 이처럼 만주에서 조선으로 도피해오는 피난민과 실향민들은 한동안 자유당 행정부의 주요 지지층이 되었고, 만주에서 남하해오는 실향민 중에는 한족의 보복이 두려워 조선으로라도 도피하려는 만주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전후 점령 기간 동안 중국으로 송환될 예정이지만 중화민국이 일찍히 대만으로 천도하면서 국권회복 후 대한국은 이들 만주인의 송환 요구에 대해 송환할 국가의 주체가 모호하다는 명분으로 그대로 국내에 잔류, 정착시켰다.

물론 모두가 한반도에 남은 것은 아니었다. 은여경을 비롯해 한반도로 망명해왔던 친한파 중국인들은 전쟁이 끝난 뒤 곧바로, 또는 약 1년의 시간 동안 한국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대개 중국으로 돌아가길 희망했다. 대한국은 이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1946년 대부분의 전쟁시기 한반도에 협력했던 중국인과 러시아인들을 중공과 소련으로 송환시켰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만주인은 한반도에 정착했고, 그 인구는 대한국 전 인구의 7%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다만 전후에도 지속적으로 중공을 탈출하여 대한국으로 오는 많은 만주인들이 있어 인구 자체는 오늘날에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반면, 대한국 인구 자체는 20세기 후반부터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이는 20세기 말의 경제 불황과 식량 부족으로 인한 기근 등을 겪은 뒤의 후유증이었다.


언어

한국어는 대한국의 공용어이며 세계적으로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최대 1억 명에 달한다. 대한국에서는 약 9천만이 사용하며, 이외 국외인 동남아, 남미와 중동 등지에서 약 1천만명 가량의 구사자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오늘날 한국어 구사자는 점진적으로 줄어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대한국의 자체적인 인구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면서 벌어지는 결과 중 하나다.

이외에 만주 지역에서 한반도로 도피해온 만주인들이 사용하는 만주어 또한, 자치 차원에서 사용하게끔 한다. 간혹 대한국에서 발견되는 만주인 디아스포라에서 만주어를 찾아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외에 20세기 내내 일본과 극도로 밀접한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대한국 각지의 일본인 거주 지역에서 자주 나타나는 편으로, 주로 전쟁 시대 건너온 일본인들과 그 후손들에 의해 사용된다.

몇가지 지역적인 방언들을 제외하면 눈에 띌 정도로 이타적인 언어는 존재하지 않으며, 가장 이질적인 언어는 제주 방언과 육진 방언에 국한된다. 다만 국가적 차원에서 여전히 만주 지역을 되찾고자 하는 분위기가 강하기 때문에 모국어와 방언 외에도 만주어를 꾸준히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현대 대한국에서 사용되는 만주어는 주로 한글로 표기된다.

다만 13년 동안 만주를 지배하는 과정에서 만주인 아이들을 납치, "문명화", 또는 "개화"를 한다는 명분 하에 만주 각지에 수용 시설로서도 기능할 수 있는 기숙학교를 설립하여 한국인과 만주인을 적극적으로 동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한 모든 시도는 전쟁이 끝나며 대개 이러한 류의 민족주의적 정책이 그러하듯 대부분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유명무실화 되어 사라졌다.


종교

대한국의 종교는 문화적으로 융화된 낡은 샤머니즘과 유교와 도교가 혼합된 종교 철학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부터 이웃한 일본의 국가신토에 영향을 받은 대한제국은 대종교를 공식 종교로 삼고 이외의 모든 종교 활동을 탄압했다. 특히 기독교와 개신교에 대한 공격은 매우 강력했고, 1909년부터 시작된 대종교는 1945년 까지 전 인구의 30% 가량을 합류시켰다.

대한국에서 공식적으로 집계되는 통계 자료로만 추합하자면 전국민의 56%가 종교가 없는 무교라고 주장한다. 대종교는 34.2%, 불교 3.9%를 차지한다. 이외에 나머지 크리스트교나 이슬람, 각종 샤머니즘 신앙 등이 대략 전 인구의 5% 정도가 존재한다. 20세기 이후부터 대한국 국내에서 심각해진 것은 바로 대한국과 일본을 통틀어 활동하는 신흥종교로 신흥종교에 귀의한 인구는 20세기 이후 꾸준히 상향되어왔다.

일반적으로 대한국인에게 내제된 종교적 신념은 많은 경우 자신이 갖고 있는 특정 종교와는 별개로 토착 샤머니즘 신앙에 심적으로 의존하는 경향이 큰데, 이런 샤머니즘은 과거 대전 시대만 하더라도 국가주의와 결합하여 전국민에 대한 통제와 감시, 억압의 수단으로 바뀌었었다. 현재에는 샤머니즘 또한 크게 쇠퇴하여 작은 신당 몇곳만이 대도시나 시골을 중심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외의 종교로는 한국에 체류중인 이란인, 아랍인들을 위한 모스크가 특정 국가의 대사관 인근에 주로 조성되기도 한다. 특히 이슬람은 대한국이 과거부터 이슬람권과 외교적으로 크게 친밀한 관계였기 때문에, 수십년 동안 수 많은 아랍인들이 국내로 유입되어왔다. 이러한 영향으로 경성과 평양 등지에는 상당히 거대한 규모의 모스크가 존재한다. 경성과 평양에 위치한 각각의 모스크는 수니파와 시아파를 구분지어 따로 건설된 것이다.


역사

행정구역

정치

경제

문화와 사회

외교

군사